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77
77화
다음 날, 오후 세 시 이후의 레이드를 레기온에서 예약했기에 집에서 적당히 쉬고 나온 리디안은 시간 맞춰 아지트로 향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났으니 분위기가 좀 나아졌을까 싶었는데, 어째서인지 아지트의 분위기가 또 우중충했다. 리디안은 사람들의 일그러진 표정을 살피며 어리둥절했다.
“리디, 왔어?”
리디안은 자신을 반겨 주는 이노센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평소와는 달리 몹시 퀭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조심스레 주변을 흘끔거리니 구석구석에 노숙자처럼 처박혀 자는 마제스티와 백검이 보였다.
도도와 일반인은 사이좋게 소파에 앉아 고개를 젖힌 채 숙면 중이었고, 크라이그는 테이블 위에 죽은 듯 엎드려 있었다.
“말도 마. 태양 이 미친 병X들이…….”
잔뜩 얼굴을 찌푸린 이노센트가 잠시 헛기침을 하며 어휘를 교정했다.
“이 멍청한 새끼들이 레이드 타임 한 시간이나 딜레이시켰어.”
리디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건 그들이 한 시간이나 보스를 붙들고 삽질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레기온 경험상, 평균 30분, 짧으면 20분대 컷이었기에 리디안은 한참을 갸웃했다.
태양 측이 딜러가 모자란 것도 아닌 데다, 하이 랭커가 다섯이나 되는 무법자도 합세한 마당에 뭐가 부족해서 한 시간이나 걸리지? 그 궁금증을 해결해 준 건 테세우스였다.
한숨 쉰 이노센트가 답하기도 전에 테세우스는 기다렸다는 쌩 달려와 리디안 옆에 찰싹 붙어 떠들었다.
“따거요! 따거, 그 병X 때문에 그래요. 그 새X가 저번처럼 또 트롤 짓 해서 한 번에 잡지도 못하고 생지X 떨다가 리젠 시간 다 틀어 놨어요. 그래서 레온도 빡쳤잖아요. 안 그래도 바쁜 양반들인데, 하루 스케줄 다 틀어졌으니.”
유명인의 이름이 나오자 리디안의 의문이 해소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있었지. 그래, 그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리디안은 떨떠름하게 안면을 찌푸렸다.
“그래 놓고 꽃도 못 처먹어서 자기들끼리 대기실에서 겁나 싸웠대요. 소소 님이 그러는데, 무법자에서도 따거 하는 짓 보고 개충격받았다고… 악!”
이노센트는 신나게 떠들던 테세우스의 귀를 잡아 당겼다. 그리곤 가늘게 뜬 눈으로 테세우스를 추궁했다.
“야. 솔직히 말해. 이도훈 이 새X. 네가 첩자지. 네가 소소한테 다 일러바치고 있는 거지? 그치?”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테세우스가 펄쩍 뛰었다. 그는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울상 진 채 항변했다.
“누님! 저 진짜 소소 님한테 우리 길드 얘기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오히려 소소 님이 제 정보원이에요! 여태까지 태양 애들 얘기 물어다 준 게 누군데요! 저예요, 저! 저 진짜 결백해요! 맹세해요! 부모님 걸 수도 있어요!”
진실성은 느껴지지만, 참 철딱서니 없는 발언이었다. 걸 게 따로 있지. 어디 부모를 걸어? 황당하다며 이노센트가 테세우스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겼다.
에라, 이 미친놈아. 한심하다는 쓴소리에 억울하다며 꽥꽥 우는 테세우스를 발로 멀리 치운 이노센트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거 때문에 다들 빡쳐서 씩씩거리다가 밤새웠지. 핑푸 평소 하는 짓 보면 우리 엿 먹이려고 일부러 딜레이시킨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우리도 리젠 타임은 정확히 알아야 하니까 지켜본다고……. 그래도 새벽 여섯 시 타임은 40분 걸려서 잡더라? 그리고 열한 시 넘어서 ONE 차례에 시비 한 번 걸렸어.”
“시비요?”
“응. ONE 하는 거 구경할 겸 대기실에 가 있었거든? 근데 오디오스 새X가 우리 보고 꼼수 쓰는 거 아니냐고 개지X하더라고. 너희 길드 두 개 돌려서 예약 잡고 동맹 파티로 섞어서 클리어하는 거 아니냐고, 자기들도 태양, 무법자로 예약 돌리겠다고 생난리 피우길래, 의심스러우면 대놓고 지켜보라고 했지. 단독 길드로는 못 도니까 괜히 트집 잡아서 꼼수 부리려는 게 누군데.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럼 이따 저희 타임에 태양 사람들 와서 구경하겠네요?”
“응. 그래서 다들 기분이 별로야. 뭐, 우리도 당연히 걔네 타임에 가서 구경할 거야. 가서 얼마나 또 병X 짓 하는지 봐주려고.”
리디안은 저도 모르게 인상 썼다. 그다지 달갑지 않은 태양 길드원들이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상당히 거북했다.
“어, 윤재 일어났네. 귀신 같은 놈, 타이밍은 잘 맞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이노센트는 자연스럽게 리디안의 등을 떠밀었다.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비켜 물러난 덕분에 리디안도 반사적으로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거의 죽은 듯 테이블에 달라붙어 있던 크라이그는 두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그러다 다가오던 리디안을 발견하곤 희미하게 웃었다.
“왔어요?”
그 나름대로의 반가운 인사에 리디안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교적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온 자신과는 다르게, 크라이그는 몹시 퀭한 얼굴이었다.
“이노 언니한테 들었어요. 거의 밤새웠다면서요.”
“금방 가서 자려고 했는데. 따거가 사고 치는 바람에요.”
신경 쓰여서 잠이 안 왔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깟 시간 좀 딜레이됐다고 그리 화낼 일은 아니지만, 그다음 타임이 또 태양, 무법자였던 만큼 시간 체크는 필수였기에 다들 마음 편히 잘 수 없던 것이다.
“그 얘기는 어떻게 됐어요……?”
리디안은 조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묻고 싶어 하는 주제는 스파이 건이었다. 다행히 크라이그는 한 번에 알아듣곤 씁쓸히 웃었다. 원래는 말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리디안이야 신용 확실하기에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장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확증도 없고, 일단 좀 더 지켜봐야죠.”
그 말은 짐작 가는 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정말 우리 길드였구나. 조금은 충격적이라 리디안은 별다른 대꾸도 못 하고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레기온에는 그런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배신자가 숨어 있다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착잡해져 왔다.
“신경 쓰지 말아요. 그 정도 사람이면 어차피 길드에도 애착 없는 사람이니까.”
자신보다 더 오래 길드에 있어 씁쓸할 텐데, 오히려 자신을 위로해 주는 크라이그의 모습에 리디안은 미안한 웃음을 머금었다.
* * *
오후 네 시가 넘어 레기온은 예약된 레이드를 위해 ‘썩고목’으로 이동했다.
예상대로 대기실에서부터 달갑지 않은 인물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리디안은 거리를 두고 따라 오는 태양, 무법자 길드원들을 곁눈질하며 찝찝한 한숨을 삼켰다.
비단 리디안뿐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레이드 쟁탈전에 길드 사냥 파티는 초토화되었고, 다들 억지로 시간을 맞추느라 몹시 예민해져 있었다.
특히 피로도와 공복도 관리에 미숙한 중저레벨들은 힘들다는 이유로 불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레이드 딜량에 크게 영향은 없었다. 오히려 감소한 인원수는 주변 클리어 반응에 더 큰 효과를 부여하니 나쁠 건 없었다.
그저 레이드 딜 자랑, 레이드 보스 쟁탈전 정도로 조용히 지나가다 싶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어리네. 애기잖아, 애기.”
“…니플헤임에서 하도 …길래 나는…….”
“…좀 별론데.”
“쟤도 은근히…….”
네 시 레기온의 레이드 타임이 다 끝나갈 무렵이었다. 적당한 거리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감시하듯 구경하던 태양 길드 측에서 흘러나온 묘한 웃음이 시작이었다.
그냥 자기들끼리 하는 잡담 정도로 지나칠 수 있었지만 은연중에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눈을 흘기는 행동에 일부 길드원들이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제법 거리가 있고 보스 구역 쪽도 시끄러운 편이라 그들이 하는 대화가 자세히 들리진 않았으나, 귀 밝은 사람들에게 종종 단어 몇 개가 귀에 들리곤 했다.
가령, 프리피케 출신의 이름들이거나 ‘스카디’를 비롯한 특정인의 아이템 등. 지적하자니 예민해 보이고, 그냥 흘려듣자니 찝찝한, 그런 사소한 것들 말이다.
한참 힐을 하던 리디안은 문득 고개 돌렸다가 눈이 마주친 ‘외이리’의 표정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태양 길드의 일반 랭커 세인트로, 요정의 미로 때 제게 꽤나 아니꼬운 태도를 보였던 사람이었다.
등 뒤에서 ‘스카디’에 대한 얘기가 일부 흘러나온 터라, 리디안도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외이리가 대강 무슨 얘길 하고 있을지 짐작됐다. 분명 자신에 대한 험담일 거라고.
물론, 못 본 새에 스카디에 프레이야 지혜 세트까지 차고 있으니 퍽 질투가 날 법도 했다. 저보다 대여섯 살 많아 보이는 남자가 속 좁게 왜 저러나 싶기도 하면서도, 리디안은 애써 모른 척 귀를 막았다.
다른 길드원들도 리디안과 같은 심정이었다. 간부들도 귀는 멀쩡히 열려 있었기에. 점차 인상을 쓰고 있었다.
게임 시절에는 길드 간 불필요한 싸움을 방지한다고, 미묘한 분위기에서는 일반 채팅을 금지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PK가 한창일 시절에는 마을에서조차 상대방을 향해 일반 채팅으로 ‘ㅎㅎ’ 나 ‘ㅋㅋ’조차 띄울 수 없었다. 그냥 서로가 알아서 주의하자는 의도였다.
그래서 대부분 될 수 있는 대로 길드별 보이스 채팅을 진행했으며, 음성 채팅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은 무조건 길드 채팅창으로만 소통했다.
그러나 지금은 플레이어 간의 의사소통이 대부분 실제 목소리로 이루어지니, 사실상 지켜지기 힘든 룰이었다. 그러려니 모른 척 무시하고 넘어가도 됐을 일이지만, 신세계 길드의 쿠렉 사건에서부터 예약 싸움, 쁘락지까지 일련의 사건들로 분노 게이지가 차오른 마제스티의 인내심이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마제스티는 보스를 패다 말고 갑작스레 돌아서, 구경꾼들이 있는 곳으로 척척 다가갔다. 예상 못 한 레기온 길드 마스터의 등장과 더불어, 딱 봐도 성난 표정에 모두가 주춤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레이드를 진행하던 레기온 길드원들도 어리둥절해 마제스티를 바라봤다. 몇 명은 그 의도를 알아챈 듯했다.
잠시 굳어진 분위기 속에서 마제스티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레기온에 불만 있으면 나와서 저한테 직접 말하세요. 뒷담이면 아예 안 들리게 하시던지요.”
조금 전만 해도 작게 웃으며 웅성거리던 무리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일반 길드원들뿐인 태양 측은 누구 하나 대꾸하지 못한 채 벌게진 얼굴을 숨겼다. 속으로는 잔뜩 욕을 하고 있겠지만, 직접 나와 마제스티에게 태클을 걸 강심장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위축된 그들의 분위기가 안쓰러웠는지, 그들과 동맹인 무법자의 길드 마스터, 아퀴나스가 보다 못해 한 발자국 나섰다.
40대, 지긋한 나이로 어딜 가나 항상 중재자의 콘셉트를 즐기는, 다소 꼰대 기질을 가진 플레이어였다.
플레이어 정보
이름 : 아퀴나스 / 길드 : 무법자(M)
레벨 : 79 / 직업 : 가디언 / 보조 직업 : 세공사
HP : 7540 / MP : 1000
“너무 그러지 마세요. 욕설이 나온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들끼리 하는 사담일 수도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마제스티 님이 너무 과하게 반응하시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언제나 그렇듯 표정도 그렇고 나름 정중한 말투였다. 그러나 마제스티의 얼굴은 휴지 조각처럼 구겨졌다.
“그래요? 그럼 욕만 안 하면 우리도 다음 타임 때 뒤에서 은근하게 씹어도 되는 겁니까?”
마제스티의 날카로운 발언에 주변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