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52
52
* * * *
푸르른 하늘.
강석의 팔이 빠르게 움직였다.
자신이 보았던 대리석 속의 그것을 스케치로 남기기 위함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드로잉북에 회색 선이 그려졌다. 강석은 한 번 그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드로잉북의 페이지가 계속 넘어갔다.
한장, 두 장, 석 장, 넉 장, 그리고 이제 다섯 장이 되려는 순간.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예비 종이 울렸다.
10분 뒤에는 5교시가 시작함을 알리는 종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상당수가 운동장에서 사라진 뒤였다. 와글와글 본관 현관으로 몰리기 시작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강석 또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본인도 수업을 들으러 갈 때였다.
화요일 5교시.
3학년 1학기의 첫 소묘수업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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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뒷편.
매점이 있는 뒷마당에 배치된 계단을 올라서 조금 걷다 보면, 실기관이 나온다.
청화예고의 실기관은 한 건물이 아니라 본관 뒤편에 있는 크고 작은 건물 여러 채를 뭉뚱그린 말이고, 사실 각 실기관은 푸른 꽃의 이름에서 따온 정식 명칭이 따로 있다.
강석이 실기관들 중에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건물로 걸어갔다. 그의 손에는 연필이 들어간 반투명한 플라스틱 필통이 들려있었다. 이미 상당수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지 입구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건물의 입구를 통과하자 델피니움이 그려진 소묘가 보였다.
델피니움.
소묘실이 있는 건물의 이름이었다.
강석이 그림을 보는가 싶더니 계단을 올랐다. 소묘실기실은 실기관, 정식명칭 델피니움관 3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이들은 각 반별로 흩어져 이젤을 설치하는 중이었다. 익숙한 풍경.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강석을 힐긋대었다. 강석을 바라보던 몇몇 학생들의 시선은 고두한에게로 향하기도 했다.
‘고두한 선생님한테 제안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던데···’
‘진짜일걸? 오늘 1교시 시작하기 전에 고두한쌤이 강석 보러 교실까지 찾아왔대.’
‘뭐?’
그리고 고두한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강석을 보더니 모자를 슬쩍 들며 아는 척을 했다.
“왔냐.”
“예.”
“앉아라.”
“예.”
짧은 대화였지만, 아이들은 신기하다는 듯 입을 오자로 말고 감탄사를 흘렸다.
예체능계에 재학하는 학생들은 항상 눈치가 기민한 법이었다. 일반적인 학생을 대하는 것 이상의 친근함을 보인 것 같은 고두한을 학생들이 힐긋대는 사이.
강석은 오랜 시간 보아왔던 D반 담당 임우현에게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렸다.
소묘실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운데 거실 같은 널따란 공간을 기준으로 두 개의 방이 벽을 허물고 마주 보고 있는 형태이다.오른쪽은 항상 A반과 B반, 왼쪽은 늘 C반과 D반이었다.
그리고 강석은 몸이 저절로 향하려는 왼쪽 대신,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 * * *
“혹시 정샘. 석이가 일이 학년 때 전시회에 출품했던 작품이요, 그거 팔렸었는지 기억나요?”
수채화 붓을 비녀처럼 꽂은 주사랑이 옆을 돌아봤다. 주사랑과 함께 복도를 걷고 있는 건, 정병권이었다.
보통 실기관 가장 왼쪽 끝 구석에 위치한 조소 실기실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편인 정병권은 복도가 어색하다는 듯 작업복 차림으로 걷고 있었다.
교장실로 미술과 전공 교사 모두 전시회 회의를 위해 출석하라는 호출만 아니었어도 오늘도 실기실에 틀어박혀 숨어있었을 텐데.
“정샘?”
“·········음. 제가 기억하기에는 팔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주사랑의 안광 없는 눈동자가 정병권을 향했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항상 주사랑의 검은 눈동자는 빛이 없었다. 이제는 슬슬 이 눈동자가 익숙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정병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매년 전시회 때마다 석이네 부모님께서 오셔서 작품을 가져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폐기하지 않고 보관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병권이 상념에 빠진 눈으로 뒷말을 이어붙였다.
“석이네 부모님께서 가구점을 하셔서 그런지 보관할 장소는 충분하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주사랑이 그 말에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깝네. 실제로 작품이 조소실 구석에 썩어가고 있거나 한 거였으면 냉큼 사버릴까 싶었던 주사랑이 아쉬움의 휘파람을 불었다.
유명한 작가의 초기 작품은 완성도나 작품성에 상관없이 프리미엄이 붙는 법이거늘. 부모님께서 보관하시고 있다 하니 손쓸 도리가 없었다. 가만두면 이득이 될 걸 부모님을 찾아가 싼값에 넘기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때.
“둘이 같이 오시네요?”
둘 사이로 누군가 끼어들었다. 소묘 수업 시간 강사 손동욱이었다. 손동욱과 친분이 있던 정병권이 네가 왜 여기있냐는 눈빛으로 손동욱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게. 교장실로 불린 사람들은 미술과 전공수업 선생님들뿐이었다. 원래라면 손동욱이 아니라 고두한이 이 자리에 있어야 했다.
주사랑도 그게 놀라운지 손동욱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에요? 고두한 선생님이 보내신 거예요?”
“네. 진주 알을 놓칠지도 모른다고 수업 중에 빠지는 건 결사반대라면서, 저한테 대신 듣고 오라고 했습니다.”
손동욱이 허허롭게 웃었다.
그리고 정병권과 주사랑은 고두한 선생님이 말할법한 불참사유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사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교장실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을 열자, 그늘이 져 어두웠던 복도로 환한 불빛이 쏟아졌다. 교장실의 모든 조명을 켜놓았던 건지 하얗고 노랗고 하여튼 눈이 순간 시릴 정도였다.
“정선생님, 주선생님.”
“오셨어요?”
“오랜만이에용.”
교장실 안으로 들어서는 둘을 반긴 건, 먼저 도착해있던 나머지 전공 선생님들이었다.
뒤로 들어오는 손동욱에게 디자인 담당 교사가 고두한은 어딨냐는 질문과 함께 인사를 던지는 사이.
순서대로 디자인, 동양화, 애니 전공 선생님에게 인사를 한 정병권이 빈자리로 걸어갔다. 어느새 주사랑은 애니 전공 선생님 근처로 이동한 상황이었다.
“교장선생님.”
정병권이 소파에 앉아있는 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일어서는데 교장의 옆에 한 명의 인영이 붙어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누구지? 더 올 사람이 없다는 걸 떠올린 정병권이 그림자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하얀색에 옥빛이 물든 비단.
신선처럼 길게 늘어진 하얀 머리카락과 수염.
“서···선생님!”
정병권의 은사이자 조각계의 대부.
산강 그룹을 등에 업고 한국의 조각을 세계에 널리 알린 1세대 조각가.
거장 양선구였다.
청화예술고등학교 창립 때 후학양성을 위해 작품을 준비할 시기에도 교직을 잡는 것을 마다치 않았고, 모두가 헝그리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비판할 때 묵묵히 자신의 돈을 청화예술고등학교에 기부하여 제 배보다 다른 예술가들의 배가 불기를 소원했던 이.
“어쩐 일이세요?”
양선구를 향해서 정병권이 첫 마디로 내뱉은 질문은 그것이었다.
“뭐긴 뭔감. 대리석 옮기라 해서 옮기려고 왔지.”
아직도 조각을 위해 톱을 직접 든다더니 그의 곧은 허리와 쫙 펴진 어깨가 그게 사실이라는 걸 대변하고 있었다.
“대리석이요?”
“그 운동장에 있는 작은 대리석 있잖냐. 그게 계속 거기에 있으면 민폐니까 옮기려고 그러지.”
“작은 대리석이 아니고 높이가 19피트에 너비가 12피트, 깊이가 11피트인 대리석이요.”
약 5.79미터의 높이와 3.65미터의 너비, 그리고 깊이가 3.35미터. 누가 봐도 고등학생 운동장에 떡하니 있어서는 안 될 크기였다. 교장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래. 높이가 19피트에 너비가 12피트에, 깊이가 11피트 정도 되는 대리석을 4월이 오기 전에 치우러 왔다.”
“···4월이요?”
“4월엔 체육대회가 있으니. 그전에는 치워야 하지 않겠어.”
수염을 손으로 쓴 양선구가 물었다.
“어디에 놓고 작업할지는 정했고?”
“아, 그게.”
정병권이 입을 다물었다. 아직 강석이 어디에서 작업할지 정하지를 못해서였다. 자신도 마땅한 작업실이 없어서 학교에 가져왔는데 강석은 오죽하겠나.
하지만 또 저 대리석을 강석에게 넘겼다고 했다간 무슨 소문이 돌지 몰라 정병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정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
“애초에 양선구 선생님께서 저렇게 무식하게 큰 대리석을 떠넘겨서 그렇지요. 정병권 선생님도 곤란해하지 않습니까. 우선 앉아요, 정선생.”
교장은 양선구를 말로써 신나게 두들겨 패더니 한결 나아졌단 기분으로 옆자리의 팔걸이를 툭툭 두들겼다. 앉으란 뜻이었다. 정병권의 시선이 돌아갔다. 이제 보니 같이 들어온 주사랑과 손동욱은 어느새 자리에 앉은 채였다.
정병권도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모두의 시선이 다시 양선구에게로 돌아갔다. 교장 선생님을 보건대 이 안건이 끝나야만 전시회 회의를 시작할 기세였다.
양선구는 모두가 바라보건 말건. 생각을 하기 위해 수염을 손으로 몇 번 빗자루를 쓸듯 만지더니 눈을 감았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그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장소가 없다면 그것 역시 마련해주면 될 일이지.”
양선구가 정병권을 바라봤다.
“그 남산에 있는 블룸bloom은 어떤가?”
블룸?
정병권에 눈이 뜨였다.
블룸이라면 용산구 한남동, 남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사설 미술관을 말함이었다. 산강문화재단이 도시와 자연, 그리고 건축을 조화롭게 담아낸 대형 미술관의 이름이기도 했다.
다른 전공 선생님들도 블룸을 모를 수가 없었기에 놀란 표정으로 양선구를 바라봤다. 산강그룹의 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이었다. 그곳에 대리석을 작업할 공간을 내어주겠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소리인가.
거장, 거장, 이름 높여 불렀지만 이런 걸 자기 입맛대로 추진할 수 있다니. 양선구의 입김이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거기 정도면 마음에 드나?”
블룸이라는 말에 정병권이 입을 다물었다. 마땅한 작업실이 있다면 소개해달라고 했던 강석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블룸이라니. 정병권이 당장 수락할 뻔한 입술을 깨물듯 다문 채, 위치를 계산해봤다.
강석이 자전거로 오간다고 했을 때. 그리 먼 곳은 아닐 터였다. 야작을 한다고 하더라도 집이든 학교든 오가는 동선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강석도 작업할 공간이 없어서 곤란해하던 차인데 이 정도면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아니. 애초에 블룸이 나쁠 수가 없었다.
강석에게 물어볼 수는 없으니 일단 허락이라도 하고 보자, 라는 마음으로 정병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뭘 감사까지야.”
애초에 양선구가 반강제로 떠넘겨버린 대리석 아니던가. 오히려 정병권의 작업실이 그렇게 적을 줄 몰랐던 양선구의 실수였다.
“그럼 대충 정해진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해볼까요.”
교장도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양선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동식 타워 크레인은 물론, 츄레라와 대형 화물 전용 로우베드 트레일러에 광산용 특수덤프트럭이라는 특수화물차까지도 매달고 학교에 들어온 참이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짹짹거리는 교장의 전화를 받지 않으려면 서둘러 대리석을 옮겨야 했다.
“오늘 옮겨놓을 테니 방과 후에 보러오든가 하거라.”
“네. 감사합니다.”
막내 제자를 포근하게 바라본 양선구가 설렁설렁 교장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따스로운 햇빛이 창문을 뚫고 양선구의 한복에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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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페로의 푸른 수염을 닮은 밤.
이질적인 하얀색 초승달이 하늘에 떠올랐다.
강석은 아버지가 고쳐주신 헤드라이트를 끄고 자전거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블룸 미술관은 언뜻 보면 밤이 아니라 낮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환한 야경을 품고 있었다. 꼭 밤에 핀 보름달 같은 노란빛이었다.
‘여기에 내가 작업할 대리석을 옮겨놓았다고?’
인터넷이나 수업 때 미디어로 접한 게 다였던 터라, 강석은 그 광경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가끔 이렇게 현대의 과학 발전이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실감이 날 때면 뱃속에 똬리를 튼 노인의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새삼스러운 감정이랄까.
미래에는 또 어떻게 세상이 발전할지. 불현듯 밀려 들어오는 감성적인 생각을 하며 강석이 나아갔다.
정확하게는 나아가려고 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핸드폰에 맵을 검색해놓은 상태라는 것도 까먹고 강석이 주변을 돌아볼 때였다.
“길을 잃었남?”
뒤에서 지켜보던 이가 강석에게 말을 걸었다. 영락없이 길을 잃어버린 어린아이 꼴이라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는 투였다. 강석이 저를 지칭하는 말에 뒤를 돌았다.
산신령 같은 차림새의 노인이 강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선구였다.
이것이 현시대의 거장 양선구와 강석의 첫 만남이었다.
53. 1501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