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51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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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초.
피가 심장에서 출발해서, 혈관을 따라 온몸을 돌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
온 몸에 있는 혈관의 길이는 약 100,000km에서 120,000Km로, 죽 빼어 연결하면 지구 두 바퀴 반에서 세 바퀴에 달하는 길이다.
그 사실을 떠올려 보면 이는 정말 경이로운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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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어둠이 내려앉은 불이 꺼진 연구실.
컴퓨터에서 재생되는 붉은 영상에 정신이 팔린 박지엽이 황홀한 표정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가 움직인 마우스가 어느 한 지점을 클릭하자, 화면이 회색빛으로 변해갔다.
강석이 인체 모형을 만드는 걸 촬영한 영상의 한 장면이었다.
영상 속 강석은, 세로로 선 철봉에 부목을 연결해 거치할 수 있게 만들어놓고 시뻘건 무언가를 걸더니 두 손으로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가운데를 뚫고 옆으로 돌리며 늘려나가는 게 마치 꿀타래 만드는 방법을 연상케 하는 동작이었다.
그때였다.
빠른 동작으로 큰 원을 만들듯 돌리기 시작한 강석의 발 아래에 조동범이라 불렸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마는 불이 들어간 채였고, 열은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조동범이 강석의 주변으로 열풍기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강석의 다리 근처에서 움직이던 조동범이 영상 밖으로 조동범이 물러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어느새 강석의 이마에선 이미 땀이 흐르고 있었다.
강석은 천천히 늘려가던 붉은 것의 반대쪽을 두 손으로 잡고 두 팔을 양껏 벌린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열풍기의 크기를 감안했을 때. 철봉과 강석의 사이가 1.6m 정도로 벌어진 것 같은 시점. 강석이 잡고 있던 것을 그물을 던지듯 던졌다.
하나의 원을 그리던 모형이 두 개의 원을 만들었다. 두 개의 원은 다시 한 번 던지는 강석의 손길에 의해 4개의 원, 8개의 원, 16개의 원, 32개의 원, 64개의 원.
가닥이 늘어갈수록 거의 몸을 빙빙 돌리듯 하는 모습이 꼭 춤을 추는 것도 같았다.
‘경이롭군.’
이미 머리카락보다 얇아진 선들이 2,048개의 원, 4,096개의 원, 8,192개의 원, 16,384개의 원을 그렸다.
강석이 되감은 횟수는 단, 14번이었다.
원의 반절이 최소 1.6m이니 두 개면서 한 개인 가닥을 합쳐 길이가 320cm. 그 안에서 꼬아진 원들을 통째로 이으면 그 길이가 어마 무시할 게 분명했다.
‘혈관을 이렇게 만들다니.’
저 원료의 성질이 무엇이건대 저렇게 늘어지는 걸까. 폴리에틸렌? 실리콘? 레진? 합성고무? 수지? 대형 꿀타래를 만드는 것 같은 과정이었다.
박지엽이 눈을 감았다. 불투명한 붉은 혈관을 바라보며 메스를 손대는 것으로 영상이 중간에 한 번 잘릴 테니. 더 이상은 지켜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오늘 저녁.
마크툽 1호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강석이 떠올랐다. 표정을 쉽게 읽을 수 있는 타입은 아니어서 지켜보고 있자니 강석이 다가왔다.
– ‘저렇게 얇게 만들었는데도 몸에는 40,000km 정도밖에 못 넣었어요. 키도 평균보다 크게 만들고 일부러 면적이 넓은 남성의 몸으로 만들어 최대한 욱여넣었는데도 그러네요.’
– ‘혈관 안에 피를 구현하느라 그렇게 된 겁니까?’
– ‘아뇨. 원래 기획서대로라면 물을 넣고 전체적으로 몸을 돌려야 하는데 이게 너무 얇은 배관인데다. 만드는 과정을 보셔서 알겠지만, 혈관을 호스로 짜내려면 과정이 더 복잡해져서 결국 중간에 혈액을 닮은 용액을 주사로 중간 중간 주입하고 레진으로 구멍을 막는 방식으로 진행했죠, 뭐.’
– ‘······어쨌든 전체적으로 장기에도 그렇고 혈관에도 그렇고 피가 들어있단 뜻이잖습니까? 그렇게만 해도 수술할 때 충분히 실감이 날 텐데요.’
– ‘그건 그렇지만. 실제 인간과는 차이가 있잖아요.’
아쉽다는 듯 말하는 강석에게서 벽이 느껴졌다. 그 감각이 다시 떠올라 박지엽이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커피를 들이켰다.
뜨거운 것이 목울대를 넘어가자 그제야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 ‘그래서 혈관 전체에 온수를 까는 대신 피부 아래 깔린 근육에다가 좀 더 두꺼운 혈관을 연결해서 물을 넣고, 압력을 위해 온수로 덥히는 방식을 썼긴 한데.’
거기까지만 해도 기존하고는 남다른 차별성을 가진 인체모형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강석은 아쉽다는 듯 마크툽 1호를 쿡, 찔렀다.
– ‘실패에요. 몸 전체에서 좀 더 현실적인 온기를 느끼게 하려 했는데 일반인 체온보다 살짝 뜨겁게 돼버리더라고요.’
– ‘············?’
일반인 체온과 살짝 높은 정도까지는 구현했단 소리였다. 이 정도도 충분히 놀라운데 강석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은 더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단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 ‘그래도 심장부터 타고 오는 맥박은 꽤 괜찮죠? 일반적인 수술용 더미에서 하는 것처럼 심장에다가 펌프를 넣어 놓고, 동맥 역할을 하는 혈관이랑 이어놓아 진동을 따라서 움직이게 한 건데 꽤 율동감이 실제와 같게 잘 나왔어요.’
책상 위에 있는 심장 모형과 혈관을 이어붙이는 시늉을 하면서 강석이 설명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평소의 강석보다 세 배는 더 많이 말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지엽이 할 수 있는 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일밖에 없었다.
일단 애초에 펌프를 넣은 심장과 혈관을 연결했다고 그 진동이 어떻게 따라오는 것이며. 그 진동이 정확하게 맥박이 느껴져야 하는 위치마다 느껴지게 한 기술은 뭐고, 애초에 진동을 혈관 전체에 전달하고 있는 건데 하필 맥박의 위치만 뛸 수 있는 이유는 뭔가.
박지엽은 강석에게 묻지 못한 질문을 속으로 다시 되뇌었다.
인체 모형의 몰드까지는 만들어주겠노라 했지만, 몰드로 강석이 만든 것처럼 현실감이 넘치게 구현하기란 어려울 거였다. 그렇다고 강석이 이 일에만 매달릴 것도 같지 않았다.
강석은 제가 보기에 작품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것 같았으니까.
‘그럼 특허 비용을 지불하고 우리 쪽에서 만들어봐야 하나?’
풀영상에 방법까지 제공해준다면 우리 역시 시도는 해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 역시도 쉽지 않아 보이긴 했다. 박지엽이 피곤하다는 듯 눈을 꾹 눌렀다. 지금까지 홀린 듯 반복해서 본 영상 하나하나가 기이한 신기술을 보는 것 같았고, 속도 역시 남달랐다.
속도야 따라가 볼 생각도 없지만, 실질적으로 제공해준 몰드를 가지고 만들어도 저것만큼 닮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시도할 가치는 있지.’
오늘 저녁,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
강석에게 하나만 만들어도 충분할 것 같은 마크툽을 왜 일곱이나 만드느냐고 물어보았지. 완성도를 높이고 싶은 거라면 굳이 각각 다른 질환을 만드는 이유가 있느냐고. 괜히 만들 몰드만 늘어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듯 슬쩍 떠보았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자 강석은 콧잔등을 긁더니 툭, 한마디를 내놓았다.
– ‘자기만족이죠, 뭐.’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가는 게 재밌어서 견딜 수가 없단 듯. 강석은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리고는 마저 작업하러 가야겠다며 잘 가라고 배웅을 마무리했다.
박지엽이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재차 들어 올렸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좋은 대답이었다.
박지엽은 기지개를 한 번 켜는가 싶더니 영상을 껐다. 그리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컴퓨터 속 하얀 화면에 처음으로 쓰인 문장은, [보급형 마크툽 개발제안서]였다.
* * * *
파란 하늘.
새하얀 태양이 땅을 비추는 아침.
강석이 자전거를 끌고 교문을 넘어가는 순간. 도로로 청록색 람보르기니와 붉은색 페라리가 미끄러지듯 주행했다. 차는 저 멀리서 멈추고 교복 마이 위에 저지나 과패딩을 입은 아이들이 차례대로 내렸다.
‘아, 진짜 개학했구나.’
방학내내 보이지 않던 풍경이 보인지도 벌써 며칠째 보이기 시작하니, 이제야 개학을 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강석을 차들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자전거 핸들을 꺾었다. 자전거를 묶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자신만 이용하는 자전거 정거장에 제 것을 꼼꼼히 묶어놓고 본관으로 몸을 돌렸다.
작년과 별다를 것 없는 풍경.
강석이 교문을 넘어섰다.
그 순간, 겨울방학이 있기 전까지의 기억과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교차하듯 스쳐 지나갔다.
계단에 올라서려던 학생 몇 명이 뒤를 돌아 강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선배야?”
“어. 저 사람이······미술과·········고두한···”
“···르네상스············8층에·········아담의···”
“진짜?”
돌아보는 아이들은 대부분이 미술과였다. 아니면, 미술과 친구를 둔 사람이거나. 속닥거리는 눈빛에서 감출 수 없는 흥미가 떠올라 있었다.
강석이 일주일째 반복되는 묘한 상황을 온몸으로 느끼며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꺼냈다.
몇몇 선생님들이 1층 교무실을 나와 계단으로 올라가려다 말고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신는 강석을 힐긋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상황에 피할 순 없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선생님들이 출석부를 흔들어 화답했다. 실내화를 신은 채 다가오는 강석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그들이 강석의 보폭에 맞춰 계단을 올랐다.
“이번 전시회 준비는 잘하고 있고?”
졸업전시회가 열리려면 아직 석 달은 족히 남았음을 모르고 물어보는 경우는 교과목 선생님이거나 다른 학과 선생님이었다. 지금 운동장에 있는 저 대리석이 제 전시회 준비물이라고 말할 순 없어서 강석은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예.”
그렇게 계단을 올라가고 있으려니까 뒤에서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렸다. 이제 스쿨버스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소란스러워졌다.
동시에 밀려올 학생들을 피해 선생님들의 보폭이 빨라졌다. 다음에 보자는 인사와 함께 사라지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아이들이 얘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강석 선배다.”
“강석?”
“몰라? 이번에 르네상스 쇼핑몰에 그린 선배잖아.”
“? 그 ? 저걸 저 사람 혼자 그렸어?”
쑥스럽게도 제 얘기였다. 뒤에 있던 아이들이 마침 미술과 학생들인 모양이었다.
“···? 진짜 모르네? 그거 선배 혼자서 그린 거라서 학원에서 다른 선배들 완전히 뒤집어졌었잖아. 강석 완전 미쳤어어, 걔 회화 오면 어떻게해애에에에, 그 난리 기억 안 나?”
“어어. 어어어. 어어. 기억난다. 기억나.”
“듣기로는 고두한 선생님한테 픽업도 받았나 봐. 고두한 선생님네 작업실에서 나오는 거 본 사람이 있대.”
서양화 전공인가 보군. 강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그들이 쫓아오기 전에 계단을 마저 올랐다.
강석은, 여전히 귀족파와 실력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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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었다. 대부분이 방학 내내 같이 시간을 보냈을 터인데 뭐가 그리 반가운지 꼭 달라붙어 있었다.
강석의 자리는 이번에도 뒷문 바로 앞. 벽에 붙은 마지막 분단에 맨 끝자리였다. 가방 걸이에 화구가방을 걸고, 자리에 앉았다. 개학을 한 이래 내내 받았던 시선이 강석에게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 그건, 소묘 D반 반장인 오혜정이 속한 곳도 마찬가지였다. 오혜저은 계속 강석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홀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번에 실기, 강석이 먹을 것 같지 않아?”
“………..음?”
“······흐음.”
갑작스러운 오혜정의 말에 권소희와 진세현이 고개를 돌렸다.
실기를 먹는다.
청화예고 실기 과목 1등을 다 접수하는 경우엔 그걸 먹었다고 표현하고 하는데 오혜정이 그걸 강석이 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권소희와 진세현이 힐긋 강석을 바라봤다. 약간은 펑퍼짐한 교복에 세탁을 잘해서인지 새하얀 교복. 단정한 차림새와 실내화. 모범생 차림을 한 강석이 연필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아니라는 듯 다시 종이를 넘겼다.
강석이 실기를 먹는다?
“근거 없는 말은 아니지.”
“맞아.”
권소희와 진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3학년 1학기에 듣는 미술 과목은 총 4과목이었다. 미술이론, 소묘, 전공수업, 매체미술.
그리고 입학식 행사가 있었던 개학식을 제외하고 금요일부터 오늘 화요일까지. 총 4과목 중의 3과목이 수업시간표에 들어있었다.
저번주 금요일 1교시부터 4교시에 전공수업.
이번주 월요일 1교시부터 3교시에 매체미술.
이번주 월요일 4교시에 미술이론.
강석은 조소 전공 아이들의 입과 같은 반 학급 친구로서의 의견을 종합하면 이미 세 과목은 접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생님마다 강석에게 하트뿅뿅 눈알을 장착하거나,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둥. 엄청난 인기를 차지하며 3학년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었다.
성적 자체도 원래부터 나쁘지 않으니 이대로면 내신은 물론이고, 실기까지 강석이 먹을 판이었다.
“대단하다, 진짜.”
대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길래 이렇게 달라지지?
강석이 그렸던 비너스 석고소묘를 떠올린 오혜정이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더니 제 얼굴을 그 위에 올렸다. 탄성과 한숨을 뒤섞여 오혜정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1학년 때부터 지방 국립대를 지원할 생각이었던 오혜정은 질투심도 안 난다는 표정으로 강석을 바라봤다.
그러나 모두가 오혜정 같을 순 없는 법. 인 서울이나 한예종, 한국대를 준비 중이던 아이들은 새로운 맹수가 등장하기라도 한 것처럼 긴장된다는 눈빛으로 강석을 힐긋대었다.
오혜정은 그게 이해가 되면서도 괜히 우스웠다. 아이들의 일방적인 대치를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강석이 앉은 자리 바로 뒤편에 뒷문이 열리더니 오늘 5교시에나 볼 예정이었던 고두한 선생님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찾는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더니 바로 앞에 앉아있던 학생, 강석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석아.”
“·········선생님?”
“어어. 잠깐 나와봐라.”
강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혜정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권소희와 진세현이 눈이 휘둥그레져 쳐다봤다. 고두한이 사적으로 누군가를 찾으러 교실까지 온 모습을 처음 봐서였다.
진세현이 중얼거렸다.
“···진짜로 실기 다 먹어버릴지도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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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로 나온 강석이 고두한을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고두한의 손에 들린 종이를 향해서였다. 어찌 되었든 고두한이 여기까지 왔다면, 보통 일은 아닐 거였다.
“다른 건 아니고 이번에 인체소묘집 디자인이 나와서 말이다. 너한테 통과 받으려고 찾아왔다.”
같이 통과했던 유미지랑 최영태에게는 통과 받았다며 고두한이 종이를 내밀었다.
“인체소묘집은 조금 단가가 높아져도 B4 크기로 진행할 생각이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게 인체소묘의 디테일을 살리기 쉬울 테니. 넌 어떻게 생각하냐?”
“좋네요.”
B4 사이즈.
A4보다 큰 사이즈이길 바랬는데 B4면 적절했다.
강석의 시선이 종이로 내려갔다.
자신이 그린 커다란 인체 소묘 하나가 오른쪽 가를 기준으로 박혀있고, 그 아래의 세개의 인체소묘 일부분이 작은 네모 모양으로 잘려 있었다. 총 네 개의 그림 옆, 왼쪽 상단에 깔끔하게 강석의 인체소묘집이라 써 붙인 글씨가 세로로 박혀있었다.
뒤를 넘겨보니 비슷한 콘셉트의 사진이 두 개 더 있었다. 사진을 보기만 해도 알 것 같았다. 같이 출판하는 유미지 선배와 최영태 선배의 소묘집 커버 디자인이었다.
“이대로 만들어도 괜찮겠어?”
“예. 좋은데요?”
“그럼 다행이고. 어찌되었뜬 그러면 이 디자인으로 출판 디자인 넘겨서 바로 인쇄 시작할 거다. 아무리 늦어도 미술과 3학년 1학기 졸전보단 빨리 완성할 테니까 걱정 말고.”
“그렇게 하세요.”
강석이 상관없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시생들한테 보여주려고 고두한이 최대한 일정을 앞당기는 것 같았는데 강석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팔릴 작품은 언제 내놓아도 팔리는 거 아니겠나. 강석이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 있을 소묘 수업이 어쩐지 기대되었다. 그리고 기대만큼이나 수업은 빠르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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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교시가 끝난 점심시간.
5교시에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 나온 운동장.
새파란 하늘을 만끽하던 강석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모두가 운동장 트랙을 돌거나, 그 안에 있는 경기장에서 땀을 빼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강석의 시선은 눈앞을 차지한 대리석에 박혀있었다.
가까이서 보고 있으려니 더욱 커다란 것 같았다. 온통 하얀색이었다.
‘이걸 언제까지고 운동장에 둘 순 없지.’
하지만 가구점 뒷마당에 놓자니 트럭 오가거나 짐 나르기가 너무 불편할 것 같고. 이걸 어디다 놓는담.
강석이 대리석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그나저나. 이탈리아 카라라 산에서 이렇게 질 좋은 대리석을 한국의 수도까지 옮겨왔다니. 새삼 대단했다.
과거의 저는 이걸 옮기느라 죽을 고생을 했었는데 말이지.
그 커다란 위용을 보기 위해 강석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한 걸음씩, 한걸음 씩 뒤로 물러섰다.
이 커다란 대리석 안에 뭐가 잠들어있을까. 아직은 보이지 않는 생명을 향해서 마음속으로 말도 걸어보면서 움직였다.
‘졸업전시회라·········’
강석이 뒤로 걸어갔다. 얼마나 물러섰을까. 온통 하얀색과 그림자만 있던 시선에 녹음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어디선가 향이 난다고 생각했다. 초록의 내음이라고 해야 하나. 봄의 냄새였다.
싱그러운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는 순간, 저 멀리 나무들이 보였다.
청화예고 이사회가 조성한 산책로였다. 인공 잔디가 깔린 운동장 너머. 푸른 숲이 있었다. 바람을 타고 냄새가 날아왔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강석이 한걸음 더 물러섰다. 이제 보니 숲 입구에 커다란 하얀 돌 하나가 놓여 있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뭔가 보일 것 같은데···’
대리석을 바라보던 강석의 눈매가 좁아졌다.
이제 저 안에서 조각을 꺼내야 했다.
사람들은 흔히 조각을 ‘깎아서’만드는 것이라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새하얀 대리석은 알과 같아서 뭐가 나올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다만 아직 보지 못했을 뿐.’
강석이 아쉬운 마음에 한 걸음 더 물러서는 찰나, 바람이 불어왔다.
‘…….!’
강석의 머리카락이 들불처럼 휘날렸다. 눈을 가렸던 검은 머리칼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바람이 멈춤과 동시에 시야가 다시 환해졌다.
거대한 대리석을 담은 강석의 적갈색 눈은 마치 하얀색으로 물든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대리석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혼자만 조용한 운동장에서, 강석이 읊조렸다.
아.
그렇게 생겼었구나.
52. 푸르른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