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63
63
* * * *
해가 붉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었다.
지이익. 가방의 지퍼를 잠근 강석이 등을 돌렸다. 조동범은 그 일련의 과정을 어딘가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뭔가 아직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진짜 뭐였지.
강석의 나비 그림을 떠올린 조동범이 다시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보지 못하던 세계를 보는 느낌.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잊히지가 않았다.
개안.
마치 신세계를 몰래 엿보는 것과 같은 감각.
경험해본다면 다들 같은 아쉬움을 느끼겠지. 인간의 평범한 구조로는 닿지 못하던 세계에 닿아보는 감각은, 쉽게 헤어나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여운이 길게 남았다.
조동범의 눈이 아쉽다는 듯 강석의 가방을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저 가방 안에 있을 그림을 바라봄이었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 그러고 보니까 이 나비를 그리러 온 이유가 있었지 않나?
– ‘이번에 용신랜드 대수선을 맡았잖아요.’
– ‘사실 대수선보단 중요한 게 대수선 이후라서요.’
– ‘그 폐건물을 꾸며볼 생각이거든요.’
확실하게 말한 적은 없지만, 말하고 있는 바는 하나였다.
“스승님.”
“예?”
“혹시 그 나비 그림을 이용해 폐건물을 꾸며볼 생각이신가요?”
“음. 그림은···, 뭐. 나비를 이용하는 건 맞아요. 그건 맞는데······”
강석이 그렇게 말하면서 미간을 좁혔다. 평소 강석의 표정 변화가 분명한 편은 아니었기에 그만큼 확실하게 기분이 드러났다.
저건 싫어하고 있는 거다.
왜 싫어하지. 혹시 그리기 싫은 건가. 그림을 싫어할 리가. 그러면 나비를 그리기 싫어하는 건가? 예를 들어 나비 그림을 폐건물을 꾸미는 데 사용할 예정이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나비가 너무 징그러워서 싫어지셨다거나? 그래서 나비 그림을 그리는 게 싫어서 저렇게 인상을 찌푸리는 건가.
그건 안돼!
“왜 그러세요?”
나 나비 봐야 해. 내 나비. 내 나비! 조동범이 마음속의 외침을 삼키며 간절한 눈빛으로 강석을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강석의 입이 한숨을 쉬듯 움직였다.
“이번에 천장을 볼 일이 많을 것 같아서요. 옛날보다야 환경이 나아졌다지만, 그래도 싫은 건 어쩔 수 없네요.”
···네?
옛날이 언젠데요.
조동범이 이제 겨우 열아홉의 문턱을 넘은 강석을 바라봤다.
“그래도 세상 참 좋아졌지. 나 때는 허리 압박대도 없었는데. 아, 그것만 없었나. 인공눈물도 없지. 고글이 뭐야. 그냥 눈에 물감 떨어지면 그대로 다 맞아가면서······”
허리압박대? 고글? 눈에 물감이 떨어져? 조동범이 기상천외한 강석의 일대기를 들으면서 멍한 얼굴을 했다.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나비 그림은 초저녁에 사라진 뒤였다.
“···그때는 막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구경을 해대지, 그 영감은 언제 끝나느냐고 지팡이를 휘둘러대지.”
대체 어떤 중학생 시절을 보내신 거야. 스승님의 피와 땀으로 젖은 눈물 나는 옛이야기를 들으며 조동범이 걸음을 맞췄다.
붉은 하늘 아래.
생태공원답게 흙과 나무가 살아숨쉬는 공간. 짙은 고동빛 땅 위로 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럼 이제 공방으로 가십니까?”
조동범보다 작았던 강석의 그림자가 오래된 나무와 맞닿아 길게 늘어졌다.
“아뇨. 약속이 있어요.”
“무슨 약속이요?”
강석의 그림자가 머리를 긁적이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가장 알맞은 단어를 입 밖에 내어놓았다.
“···회식?”
.
.
.
완전히 해가 지고 난 저녁.
파란색과 남색이 섞인 물감 같은 밤하늘.
강석이 번화가를 걸었다. 서울 한복판이었다. 조동범과 헤어진 강석이 혼자서 거리를 거닐며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약속장소를 찾기 위함이었다.
“커다란 게를 찾으면 된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 게가 어디 있는 거야. 강석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반대편을 돌아봤다. 붉은색 노란색 검은색 하얀색 화려한 색깔들로 뒤덮인 거리에서 게 찾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골목길 코너를 돌자 새파란 색 페인트칠을 한 가게 위로, 붉은 다홍빛 게가 커다랗게 간판 대신 박혀있는 킹크랩 전문점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의 약속장소였다.
– ‘꼭 와라. 어?’
며칠 전. 소묘시간에 시비를 걸듯 툭툭 이젤 주변을 돌며 몇 번이나 약속장소를 강조했던 고두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인체소묘집이 서점에 디피되는 날에 맞춰 저번 2월에 졸업한 선배들과 회식을 하기로 했다더니. 그게 오늘이었다. 갑작스럽게 회식을 진행하게 된 강석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큰 작업들도 끝냈겠다, 아직 폐건물은 대수선 공사도 안 끝났겠다, 오늘만큼은 편하게 놀고먹을 작정이었다.
그나저나 대학생이라···강석이 졸업한 선배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물 이거 가져가면 되죠?”
“네네. 저희가 가져다 드리면 되는데···아휴, 갑자기 가게가 말도 안 되게 바빠져서.”
“괜찮아요. 제가 편해서 가지러 온 거예요. 가져갈게요. 감사합니다.”
들어가자마자 강석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쁘게 사라지는 종업원과 화려한 금발이었다.
한껏 힘을 준 테니스 치마에 대학교 로고가 박힌 과잠바. 뭘 뿌렸는지 과하게 반짝거리는 눈. 술이라도 마신 건지 붉어진 볼.
낯선 차림새인데 뭔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의 미인이었다.
왜 자꾸 어디서 본 것 같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금발과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금발의 눈동자가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활짝 만개했다.
“석아!”
금발이 완전히 자신을 향해 몸을 돌렸다. 드러나는 정면의 얼굴. 환한 웃음. 인식하는 동시에 수많은 기억을 뚫고 그와 일치되는 얼굴을 찾아낸 강석이 입을 살짝 벌렸다.
아.
유미지 선배다.
– ‘첫 번째, 유미지.’
– ‘네!’
– ‘채도가 너무 밝고 명암 차이가 미미해서 자칫하면 묘사가 덜 된 것처럼 밋밋해 보일 수 있지만, 워낙 여성적인 선이나 가녀린 느낌을 잘 내어서 뽑았다. 형태력이나 분위기만으로 뽑힌 거니 자만하지 말고 정진하도록.’
인체소묘집을 출판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던 3인 중의 한 명이었다.
“오랜만이다. 진짜.”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편하게 누나라고 부르라니까. 미지누나, 해봐. 미지누나. 아, 이쪽이야. 선생님이 따로 예약해놓으셨더라고.”
“···아.”
부담스럽게 반짝거리는 눈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문 앞이었다. 유미지는 이야기를 화수분처럼 계속해서 쏟아냈다.
분명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었었는데 대학에 들어가니 사람의 성질이 아예 뒤바뀌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요즘 고두한 선생님네 작업실에 가끔 몇 번 들리는데 네가 안 보이더라고. 이제 작업실엔 따로 안 나오는 거야?”
어딘가 섭섭해 보이는 눈동자가 반짝였다. 자세히 보니까 이 사람 컬러렌즈도 꼈구나. 새로운 이미지를 입력해가며 강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작업실에 갔던 것도 소묘 작업하는 동안만 잠깐이어서요.”
“그래에? 아쉽네. 자주 보게 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고두한 사단에 들어가는 게 목표라더니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강석은 나중에 따로 또 이렇게 만나면 되지 않느냐고 대충 둘러대며 유미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주인공, 강석! 등장입니다!”
“왔냐.”
“석아···!”
“오랜만이야!”
유미지의 과한 리액션에 어느새 익숙해진 선배들이 환하게 강석을 반겼다. 박수까지 쳐대는 게 누가 보면 진짜로 강석이 주인공인 줄 알 터였다.
애초에 뽑힌 게 3명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찾는데 누군가가 차분하게 인사하며 손짓했다.
“여기 자리 있어.”
고개를 돌리자 안경을 낀 차분한 생머리에 남학생이 그곳에 있었다.
– ‘두 번째, 최영태.’
– ‘네.’
– ‘워낙 여백이나 반사광을 이용한 공간감 연출이 훌륭해서 뽑긴 했다만. 너무 날카로워. 네가 그린 그림은 워낙 다 칼 같으니 인체의 피부조차 칼날같잖냐. 주의하고.’
– ‘네. 알겠습니다.’
최영태였다.
인체소묘집을 내기로 한 삼인방 중에 마지막 한 명.
그래도 이 선배는 유미지 선배랑 달리 똑같네. 묘한 친밀감을 느끼며 강석이 안내받은 자리에 대충 앉았다.
“괜찮냐?”
“예?”
“학교에서 요즘 불상제작 동아리가 귀찮게 할 거 아니야. 괜찮냐고.”
콜라를 따라주던 최영태가 은테 안경을 슬쩍 밀었다. 콧등에서 살짝 내려오던 안경이 제자리를 찾았다. 렌즈 너머에 날카로운 눈동자가 보였다.
그나저나 불상제작동아리라니.
“딱히 걔네들이 귀찮게 한 적은 없는데요···?”
“그래?”
묘한 얼굴을 한, 최영태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몇몇 칸 옆에 앉아있는 고두한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가 산 거라니까. 니들도 아니꼬우면 사던가. 왜 남의 것을 탐내고 난리야. 어?!”
“아, 선생님은 서점 디피 전부터 사는 게 반칙이죠.”
“오늘 디피 된다니까.”
“아, 서점을 언제 가요. 야작하느라 진짜 힘들어 죽겠다니까요. 오늘도 여기 와서 새벽까지 그림만 그리다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아침 수업 들어가게 생겼어요. 좀 봐줘요오, 네? 아, 쌔애애앰. 저 이제 크로키랑 드로잉 숙제 넘쳐나서 석이 인체소묘집 진짜 필요하단 말이에요······!”
“네가 사라니까.”
“아, 쌔애앰! 쌤 여유분으로 10권 넘게 산 거 다 들었어요. 한 권만 팔아달라니까요···!”
“이게 어딜.”
고두한이 제 품에 있는 인체 소묘집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절대로 뺏기지 않겠다는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모자를 꾹 눌러쓴 고두한이 저보다 곱절은 어린 여성과 책 하나 가지고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최영태가 웃음을 지었다.
“네 책 때문에 아까부터 난리도 아냐. 다들 실물 구경하더니 미쳤다고, 사야 한다고, 나랑 유미 책은 완전 찬밥신세라니까.”
최영태와 유미지가 서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
“아.”
강석이 최영태를 돌아봤다.
“아? 오해는 하지 말아라. 나도 네 팬이니까.”
동시에 최영태가 책을 꺼내 들었다. 강석의 인체소묘집이었다.
“오늘 서점에 디피 된다길래 오는 길에 사왔지.”
자랑스럽게 소장용과 공부용 두 권을 사왔다며 자랑하는 최영태를 보고 있으니 묘했다. 인제 보니 회식 자리에 모인 선배들 자리 사이사이에 서점 쇼핑백이 놓여있었다. 대다수가 강석의 책을 한두 권씩 구매한 모양이었다.
“이번에 책 대박 날 것 같던데?”
“맞아. 그래서 지금 다들 동나기 전에 미리 한두 권씩 사놔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난리야.”
“맞아. 지금 서점 간 녀석도 있어. 첫날에 품절되버릴지 모른다고.”
“예? 하하하.”
강석은 그러냐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광고도 안 했고, 조각상 가 발표되기 전에 실물이 나온 책이었기 때문에 조각가 강석이 낸 책이라는 문구 하나 박혀있지 않았다.
세간의 무관심 속에서 시작하면 아무리 좋은 책이어도 처음부터 대박을 치긴 어려웠다. 물론, 강석이 제 책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첫날에 품절이라니.
그건 좀 무리 아닌가.
강석이 회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아주 살살 녹았다.
* * * *
강석이 킹크랩 전문점에서 생애 첫 킹크랩을 맛보는 동안. 조소 학원 [땅]의 원장 최율묵은 서교동 원장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할까요?”
곧 있을 학원연합평가에 대한 일정조율이었다.
보통은 각 프랜차이즈 학원별로 모여서 한 번에 같이 전국연합평가를 치르는 게 보통이지만, 이번에는 서교동 학원끼리도 한번 연합평가를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와 이주일 전부터 몇 번의 회의를 거쳐 조율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합시다.”
“저도 동의합니다.”
대충 일정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 원장들 모두가 완벽하게 만족스럽진 않지만, 이 정도면 적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최율묵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다음 회의에서 나머지는 얘기 나눠보도록 하고, 오늘은 이걸로 마무리하죠.”
“좋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원장들이 교묘한 신경싸움을 하며 인사를 나누는 그때. 최율묵은 재빨리 회의 내용을 담은 수첩과 볼펜들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보통은 누가 늦게 일어나느냐 눈치싸움이 일어나곤 하는 법인데 갑작스럽게 최율묵이 일어나버리니 다들 놀란 눈치였다.
[땅]이 먼저 일어나다니. 예전에야 동네구멍가게 같은 학원이었다지만, 이제는 서교동의 어엿한 조소 학원 강자 아니던가?“어디 갈 데 있어요?”
못참고 서교동 초록섬 원장이 최율묵을 붙잡았다. 뭐가 그렇게 급하냐는 물음이었다. 급하게 문을 열고 나가려던 최율묵이 초록섬 원장을 돌아봤다.
최율묵의 눈에는 기대와 조급함 그리고 짜증이 공존하고 있었다.
“아···그게···”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잠시 고민하던 최율묵이 이내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제자가 이번에 책을 내서요.”
“아, 그래요?”
“으응? 제자 누구?”
“누구지?”
원장들이 저마다 아는 척을 해왔다. 상대적으로 학원생을 수백 명 거느리고 있는 학원 원장들의 머릿속엔 조소 학원 [땅]의 강사 중에 제자라 부를만한 학원생이 있었는지부터 떠올렸다.
‘부원장 말하는 건가?’
‘근데 그 양반은 제자 소리 듣기엔 최율묵 원장이랑 연배 차이가 얼마 안 나지 않나?’
‘원래 학원을 합병하면서 부원장으로 들어간 거라 들었는데. 그 인천 학원이 원래 그 부원장 학원이었잖아.’
원장들이 아닌 척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은 최율묵이 손사래를 쳤다.
“그, 이번에 학원 그만둔 제자 녀석 말하는 겁니다.”
“···어어?”
“학원을 그만둬?”
학원을 그만둔 제자라니. 그럼 시간강사였다는 거야, 아니면 학원생이었단 소리야? 들으면 들을수록 원장들 입장에선 알쏭달쏭한 소리였다.
“하하. 하.”
최율묵이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고 웃었다. 당장에라도 석이 녀석이 출판한 인체소묘집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대화가 끊어질 생각을 안 하니, 원.
고민하던 최율묵이 가죽으로 된 수첩을 사정없이 움켜쥐고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물었다.
“그, 궁금하시면 같이 보러 가실래요?”
싫든 좋든 일단 날 보내줘. 최율묵이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
.
.
그리하여 지금.
서교동 미술학원 거리 한복판에 있는 대형서점에 원장들이 다 함께 나들이를 온 꼴이 된 것이었다. 한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원생들이 인사를 해오니 거의 거리의 깡패집단이 따로 없었다.
불타는 금요일, 불금을 맞아 청대 거리로 나온 젊은이들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내밀며 중년 아저씨들을 바라봤다.
“뭐야. 저 아저씨들 뭔데 학생들이 인사를 해대?”
“몰라. 학교 선생님인가?”
“교복이 다 다른데 무슨 학교 선생님. 뭐야, 다들 험상궂게 생겼는데? 깡팬가?”
최율묵은 낯을 붉힌 채, 서점 한 귀퉁이로 걸어갔다. 자신은 이렇게 부끄러운데 다른 사람들은 관심을 받을 때마다 피어나는 꽃처럼 활짝 만개한 상태로 최율묵을 뒤따라 오고 있었다.
“이거. 오랜만에 나오니 맑은 공기도 맡고 좋네. 매일 연필 냄새만 맡다가 이런 디퓨저? 양초 냄새도 맡고.”
“좋네요, 이거. 이번 연합평가 계기로 학원 원장들끼리 친해지면 좋겠어요.”
“이참에 제가 곱창집 맛있는데 아는데 연합평가 끝나고 우리끼리 소주 한번 땡기러, 꺽? 어떠십니까?”
“아. 좋지, 좋지.”
소풍이라도 나온 중년 모임 꼴이었다.
최율묵은 뒤에서 지켜보는 중년들을 외면하고, 조용히 책을 집어들었다.
[강석의 인체소묘집]강석. 언제 보아도 뭉클한 이름이었다.
그림책 대부분이 그렇듯 비닐로 꼼꼼하게 포장되어있어서 안을 펼쳐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표지만으로도 설득력이 있었다. 항상 인체가 삑사리 나는 것마냥 틀리던 강석이 인체소묘집이라니.
제가 한 것도 없는데 뿌듯했다.
졸업하기도 전에 성공을 해버리다니. 몇 년 뒤에 오라고 했던 말이 무색하네. 책을 비닐 위로 소중히 쓴 최율묵이 열아홉 권 정도를 들고서 카운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내용은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최율묵은 강석이 그만둔 뒤로 나름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정보들로 강석의 발자취를 좇고 있었다.
그게 좀 쌓여서 이제는 입시 요강들을 스크랩하던 책장 한쪽에 강석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스크랩북 몇 권을 따로 꽂아놓을 정도였다.
강석은 진짜였다.
진짜 예술가.
그리고 최율묵은 자신이 강석이 진짜라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팬이라 자부했다.
오늘도 강석의 인체소묘집을 확인하기 위해서 왔다기보다 작은 보탬이라도 되기 위해 책을 사러 온 상황이었다.
나름 팬이 아이돌 앨범을 사듯 앨범을 여러 장 사는 거랑 비슷한 마음이랄까.
최율묵은 꼬깃꼬깃 챙겨온 지폐들을 떠올렸다. 비상금이었다. 저번에 들켜서 압수당한 이후로 또 몰래몰래 모아온 것이었다.
비상금을 다 투자해도 겨우 열아홉 권밖에 사지 못함이 원통했지만, 이거로라도 판매 부수가 올라 강석이 좀 더 유명해졌으면 했다.
‘마나님한테 안 들키려면 당분간 학원 창고에라도 숨겨놔야 하려나.’
나름 목숨을 건 행위라 할 수 있었다. 최율묵이 전쟁에 나가는 심정으로 비장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저 책인가 본데?”
“최원장. 제자 책이 그거야?”
“소묘네?”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던 원장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묘라니.
“제자가 소묘책을 낸 모양인데?”
“인체소묘인 것 같은데. 인체소묘집? 그렇게 쓰여 있네.”
“으음. 이거 뭐 샘플 없나. 이봐요!”
최율묵이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 동안. 직원분의 안내 하에 확인용으로 비닐을 벗긴 인체소묘집을 영접하게 된 원장들이 소묘집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강석의 인체소묘집]병아리처럼 옹기종기 원을 두르고 모여 인체소묘집을 펼쳤다.
“커버는 좋은데···?”
“이게 고등학생이 그린 거야? 재수생인가? 재수하다가 안 되어서 대충 대학 들어간 다음에 그냥 학원 선생 하는 녀석들도 있잖아.”
“책까지 냈으면 학원을 차린 거 아니여?”
“음. 한 번 보자고.”
원장들이 낄낄거리며 인체소묘집을 몇 페이지 넘겼을 때였다. 오랜만에 동창을 만난 사람마냥 쉼 없이 이어지던 대화가 고작 4페이지를 열어젖히는 순간, 끝이 났다.
종이 한 번 조심히 넘기던 손은 한 번, 두 번, 세 번 정도에서 멈춰졌다. 팔락팔락, 4페이지에서 처음 커버로 되돌아간 이가 표지를 다시 읽어내렸다.
“강석의 인체소묘집······”
“이거 뭐야?”
이게 서교동 바닥에 나타나면 그야말로 소묘신이었다.
학원생들이 수십 명씩 딸깍딸깍 사라지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좋은 자료였다.
그것도 지나치게.
“허어·········이리 좀 내놔봐요.”
창조의저녁 원장이 책을 뺏어 들었다. 요즈음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밀다 보니 회화나 소묘 쪽에서 약한 편이라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는데···, 어지간한 강사들 연구작보다 더 좋아 보였다.
이걸 교재로 사용해도 될 수준인데?
창조의저녁 원장이 책을 팔락팔락 넘겼다. 한 명의 모델을 두고 다양한 방향에서 네 번 정도 반복해서 그린 그림은 정면, 측면, 후면, 전체적으로 다양한 시점에서 인체를 다루고 있었다.
아름답다.
아름다웠다.
‘진짜 교재로 사용해봐···?’
창조의 저녁 원장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자신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어느새 뿔뿔이 흩어진 원장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직접 움직여 책을 움켜쥐고 있었다.
한 권, 두 권, 세 권, 개중에는 아예 통째로 집어들고 무겁게 카운터로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이럴때가 아니지.
“나도···!”
책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서교동 학원 원장들이 다 온 참이다 보니 책들도 빠르게 사라졌다. 저들 밑에서 근무하는 직원 수가 몇이고, 학원생이 몇 명이던가. 한 명씩한테만 교재비 받고 팔아도 남는 장사일 터였다.
이런, 젠장.
창조의저녁 원장의 마음이 급해졌다. 아까 몰래 추궁하여 듣기로는 무슨 출판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어 나온 책이라고 들었으니 아마, 이 책을 다시 구하기 어려워질지도 몰랐다.
마음이 급해진 창조의저녁 원장이 결국엔 카운터로 달려갔다. 이제 막 계산을 끝마치고 등을 돌리던 최율묵이 당황하여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비켜비켜.”
이건 마치 타임세일을 맞닥트린 자의 심리와 같았다. 압박감이 엄청난 것이었다. 카운터로 힘차게 달려간 창조의저녁 원장이 외쳤다.
“배, 배배배백궈어어언!”
백권을 달라는 소리였다.
64. 입시 정보의 최전선, 그곳에 그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