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9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99화
배부른 위선(僞善)과 배고픈 선(善) (3)
“당신은… 데미안 살바토르 님이시군요.”
이사벨라는 파울로의 뒤편에서 걸어 나온 데미안을 바라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마음이 동요를 억누른 채, 무슨 일이 있냐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정의의 검에 대한 영웅담들은 익히 들었습니다.”
원피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고귀한 기품이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움직임.
‘마녀’라는 흉악한 멸칭을 사용하기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
데미안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삼키며 이사벨라를 노려봤다.
“이제까지 그렇게 뻔뻔한 태도로 사람들을 속여오셨습니까?”
“뭔가 오해가 있으셨던 모양이네요.”
“오해? 오해라고요?”
사납게 일그러지는 데미안의 표정.
“과연 당신을 낳아준 아버지 앞에서도 계속 오해라는 말을 지껄일 수 있으십니까?”
그는 옆에 선 파울로를 슬며시 돌아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파울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이미 증거는 모두 확보해뒀단다.”
“증거라뇨?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되네요.”
이사벨라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 이걸 보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니?”
파울로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품속에서 리모컨을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빔프로젝터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벽면에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카르르르륵!
-키에엑!
영상에서는 핏빛 기운에 휘감긴 이사벨라가 몰려드는 수천, 수만의 괴수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녹화되어 있었다.
“…….”
영상을 바라보는 이사벨라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이제야 산 프루투오소에서 일어났던 괴수 사태의 주범이 누군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
이사벨라는 파르르 주먹을 쥐며 파울로를 쏘아봤다.
“…아버지 짓이었나요?”
“으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파울로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능청스러운 표정이 꼭 이사벨라와 닮아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로마의 성녀’라고 불렸던 우리 공주님이 양자리의 각성자가 아닌, 사람의 피를 빨아 마시는 거머리자리의 각성자라는 것뿐이란다.”
“…….”
이사벨라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영상 속에서 흘러나오는 자기 모습은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양자리의 성흔을 지닌 각성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데미안 님에게 붙여둔 꼬리도 붙잡았지.”
파울로가 데미안에게 눈짓을 건네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를 질질 끌고 왔다.
“으읍! 읍!”
피에 젖은 집사복을 입고 있는 회색 머리칼의 노인.
로베르토가 데미안의 손에 들려 몸을 비틀고 있었다.
찢어진 집사복 사이로 거머리자리의 성흔이 빛나는 게 보였다.
데미안이 로베르토의 입을 막고 있는 재갈을 풀었다.
“푸하!”
“저 여자를 알고 있습니까?”
“…처음 보는 여자네만.”
로베르토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요?”
데미안이 차갑게 빛나는 눈으로 허리춤에 찬 검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맞아요. 전 양자리의 각성자가 아닌 거머리자리의 각성자예요.”
“이, 이사벨라 님!”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로베르토가 경악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파울로의 눈빛에 승리의 빛이 떠올랐을 때.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죠?”
“…어쨌다니?”
“영상을 보세요. 제가 양자리의 각성자가 아닌 거랑 마녀인 것과 무슨 연관이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괴수를 죽인 게 잘못이라 말씀하시고 싶은 건가요?”
이사벨라는 곧게 등을 편 채 당당한 태도로 물었다.
파울로가 눈을 찌푸렸다.
“거머리자리의 성흔을 지닌 각성자는 주기적으로 사람의 피를 빨아 마셔야 할 텐데. 그게 마녀가 아니면 뭐라는 거니?”
“하, 저희가 무슨 영화에 나오는 흡혈귀인 줄 아시나요? 방금 아버지가 바닥에 쏟아버리신 혈액팩만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답니다.”
실제로 그녀는 이제까지 흡혈을 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다.
흡혈 충동을 제어하지 못했을 시절에도 마찬가지.
사람을 덮쳐 피를 빤 적은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피를 빨지는 않았다.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의 피가 필요한 게 마녀라면 백혈병 환자도 마녀겠네요.”
사실 깊게 파고들면 거머리자리 각성자의 경우 성흔 자체에 흡혈 충동이 있기 때문에 상황이 달랐지만.
그녀는 교묘하게 흡혈 충동에 관한 얘기는 쏙 빼고 반론을 이어갔다.
“…….”
파울로는 미간을 좁히며 이사벨라를 노려봤다.
당당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태도에 순간 자신마저 ‘그런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재판이 아닌, 심판의 장.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해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증거는 이 영상 하나만이 아니란다.”
파울로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고급 명품을 몸에 두른 사람들이 우르르 걸어 나왔다.
이사벨라가 가문의 실권을 쥐고 난 후, 직접 굴복시켰던 방계 가문의 가주들이었다.
“이건 저 마녀가 운영하는 보호 센터에서 매달 일정량의 혈액이 사라진다는 보고서입니다!”
“보호 센터를 운영하는 이유도 다 피를 빼돌리기 위해서라고요!”
“혹시 압니까? 저년이 사람들을 붙잡아 강제로 피를 뽑게 만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그럴 겁니다!”
“한국이랑 일본에서 흑성회가 무슨 짓을 했는지 들으셨다면 저년이 할 짓도 뻔하지 않습니까?”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는 가주들.
그중 대부분은 증거조차 아닌 악의적인 추측에 불과했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일까.
그들에게 중요한 건 어떻게든 이사벨라를 사악한 마녀로 몰아가는 것뿐이었다.
“…하.”
자신을 둘러싸고 쏟아지는 증오에 가득 찬 비난을 들으며 이사벨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제 말 따위는 들을 생각도 안 하셨던 거군요.’
애초에 논리가 통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이사벨라님은 그런 짓 한 적 없…!”
“조용.”
빠악!
데미안이 거칠게 주먹을 휘둘러 로베르토를 기절시켰다.
“이래도 당신이 마녀가 아니라는 소리를 하실 수 있습니까?”
“…….”
이사벨라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 말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당했어.’
파울로에게 자신이 거머리자리의 각성자라는 사실이 들킨 순간부터 이미 그녀의 패배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나도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큰 충격에 빠졌단다. 내 사랑하는 딸이 설마 사람을 죽여 피를 빨아 마시는 흡혈귀였다니….”
파울로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떻게 아빠한테 그럴 수 있니? 어떻게 이 아빠를 속일 수 있어?”
서서히 격정에 차오르는 목소리.
파울로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흐른다.
“뭐라 말이라도 해보거라!”
“…말을 해보라고요?”
이사벨라는 힘없이 웃었다.
“들을 생각은 있으시고요?”
“아아. 정말… 믿을 수 없구나. 그 착했던 아이가 왜….”
파울로는 괴롭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이 모든 게 내 책임이겠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데미안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데미안님. 부디… 부디 악에 물든 제 딸을 구원해 주십시오.”
“예.”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짤랑-
십자 형태로 된 가드 양옆에 방울처럼 매달린 천칭이 맑은소리를 흘렸다.
“…….”
이사벨라는 서글픈 눈으로 파울로를 올려다봤다.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
‘난 그저… 다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서랍장 안에 남몰래 보관하고 있던 사진을 떠올렸다.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가 함께 웃고 있는 사진.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 그녀에게 있어 가장 행복했던 추억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었을까.
“저 마녀를 죽여라!”
검을 빼 드는 데미안을 보며 승리를 확신한 걸까.
기세등등해진 방계 가문의 가주들이 이사벨라에게 삿대질하며 외쳤다.
“죽여! 저런 사악한 마녀는 죽어야 한다!”
“이 더러운 년!”
무너진 저택 안에 울려 퍼지는 비난.
이사벨라가 콜그란데 가문의 실권을 장악한 후 모든 이권과 권력을 빼앗긴 채 설설 기며 살아오고 있던 가주들은 억눌러 왔던 증오를 토해냈다.
“저 마녀를 죽여주세요!”“정의의 검이 네년을 처단할 거다!”“흡혈귀 년!”“이 사악한 마녀
!”“네년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다 네년 탓이다!”“악마 같은 년!”“피도 눈물도 없어!”“다 네년의 업보다!”“저 마녀가 죗값을 치르게 해주세요!”“퉤엣! 끔찍한 년!”“죽어!”“네년만 없었어도!”“마녀를 죽여라!”
선의라는 우산 아래 모인 질척한 악의가 이사벨라를 향한다.
죄를 단죄하는 심판자처럼.
그들은 마녀의 죽음을 울부짖었다.
“…….”
이사벨라는 힘이 빠진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슴을 부여잡은 채, 둥그렇게 몸을 웅크렸다.
‘아파.’
저주의 영향 때문일까.
아니면 그토록 바라왔던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일까.
‘아파, 아파, 아파.’
날카로운 칼로 후벼 파는 듯이 가슴이 욱신거렸다.
‘오진 씨.’
문득.
지금 그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제 하은과 로마 시내를 구경했다고 했는데, 오늘도 일찍 구경하러 나간 걸까.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중에도 오지 않은 걸 보면 저택 안에 없을 가능성이 컸다.
‘다행이네요.’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자신이 사람의 피를 빨아 살아가는 흡혈귀라는 걸, 더럽고 사악한 마녀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반론을 하실 생각도 없는 것 같군요.”
저벅, 저벅.
데미안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이사벨라와는 아직 거리가 꽤 떨어져 있지만, ‘빛’을 다루는 천칭자리의 성흔을 지닌 그에겐 이 정도 거리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높게 들어 올린 검이 찬란한 빛으로 빛났다.
“이사벨라 당신이 갈 곳 없고 굶주린 많은 이들을 보살펴줬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이사벨라가 운영하는 보호 센터만 수십 개였다.
아마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이 그녀로 인해 구원받았겠지.
“하지만.”
그 마음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순수한 선의(善意)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남몰래 그들의 피를 갈취하기 위함이었다면.
“당신은 그저 더러운 위선자일 뿐입니다.”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듯.
높게 들어 올린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날에서 뿜어져 나온 찬란한 빛이 웅크린 이사벨라를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귀청을 뒤흔드는 굉음.
무시무시한 충격과 함께 저택 바닥이 쩌적- 하고 갈라졌다.
“…어?”
분명 엄청난 굉음이 들렸건만.
그녀의 몸에는 아무런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저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이사벨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파직, 파지직!
눈앞에 보이는 것은 푸른 뇌전에 휩싸인 칠흑의 창.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창이었다.
“아주 염병을 떤다 염병을 떨어.”
탁.
무너진 잔해 위에서 한 청년이 내려왔다.
그는 이사벨라를 지키듯 그녀 앞에 섰다.
“위선도 선이야 짜식아. 남을 위해 10원 한 푼 줘본 적도 없는 놈이 생색은 존나게 내네.”
카악, 퉤.
오진은 걸쭉한 가래침을 뱉으며 데미안을 향해 중지를 추켜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