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1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19화
막간–재회 (1)
“오진 씨를 구하러… 간다고요?”
이사벨라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균열을 향해 난폭하게 돌진하던 어미 마수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뒤늦게 그를 구하러 간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진 씨는, 오진 씨는… 이미….”
“안 죽었어, 오지니.”
“그, 그걸 언니가 어떻게 아시죠?!”
이사벨라가 벌떡 침대에 일어서며 외쳤다.
“그냥.”
“그냥, 이라고요?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시나요?”
거칠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가… 제가 남았어야 했다고요. 오진 씨가 아니라 제가!”
만약 자신이 그 자리에 남았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자신만 해도 그런데 오진은 어떻겠는가.
“…….”
하은은 굳게 입을 다문 채 뚝뚝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고 있는 이사벨라를 바라봤다.
“그래도 가야지.”
살아있을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하다고 해도.
일말의 희망이 존재하는 이상 그를 구하러 가야 했다.
“만약… 가서 아무것도 못 찾는다면요? 아니, 오진 씨가 죽어 있는 모습이라도 발견하게 된다면요? 그러면… 그러면 어쩌실 건데요!”
울부짖듯 외쳤다.
지금에야 혹시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실낱처럼 이어져 있던 희망의 끈도 모조리 사라지게 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어쩌긴 뭘 어째.”
하은이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따라 뒤져야지.”
그런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한 너무나 태평한 말투.
“…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은 하은을 바라보며 이사벨라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오진이 죽어 있는 걸 발견한다면, 따라 죽겠다고?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의 의민데? 나 이제 걔 없이는 못 살 거덩.”
오진이 존재하지 않는 삶 따위.
살아도 아무런 가치가 없지 않은가.
“뭐, 아마 오지니 그 자식도 마찬가지일 거야.”
하은은 자신에 찬 표정으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조금의 의심조차 하지 않는 그 당당한 모습에 이사벨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오진과 하은 사이에 감히 자신이 넘볼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세워져 있는 듯한 감각.
“…치사해요.”
분했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히 ‘죽음’을 입에 담을 수 있는 하은의 모습이.
오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확신하는 그 자신감이.
너무나 비겁하고 치사하다고 느껴졌다.
“언니, 저 오진 씨 좋아해요.”
“알아.”
“…두 분이 사귀는 거 아니었나요?”
“그렇지? 뭐, 본격적으로 사귄 지는 얼마 안 되긴 했지만.”
이사벨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은을 바라봤다.
보통 이런 경우 도둑고양이니 뭐니 화를 내야 할 타이밍 아닌가?
“괜찮으신가요?”
“응? 뭐가?”
“제가 오진 씨를 좋아해도.”
“뭐,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데.”
하은은 팔짱을 낀 채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중요한 건 네가 오지니를 어떻게 생각하냐가 아니라, 오지니가 널 어떻게 생각하냐잖아?”
“…절대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건가요?”
“뺏길 것 같으면 나 죽을 거라고 땡깡부리지 뭐.”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말했잖아? 오지니 나 없이는 못 살 거라고.”
“…….”
이사벨라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하은을 노려봤다.
“두고 보세요.”
두 번째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랑의 일부만이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 후회하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
생각이 바뀌었다.
두 번째가 있다면 자신이 아닌, 하은이 되어야 한다.
“그래, 그래. 어디 한 번 열심히 해봐.”
하은이 낄낄 웃으며 이사벨라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머, 머리 만지지 마세요!”
“와 냄새 봐라. 코가 문드러질 것 같네.”
“거, 거짓말!”
“근데 너 와서 한 번도 안 씻었잖아?”
“그건…!”
이사벨라는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샤워실로 달려 들어갔다.
하은은 다급히 샤워실 안으로 들어가는 이사벨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햐, 고년 참 신기하단 말이야.”
이사벨라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바닥을 코에 가져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분명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씻지도 않았을 텐데 은은한 장미 향이 감미롭게 코를 파고들었다.
“…치사한 게 누군지 정말.”
한숨을 내쉬며 굳게 닫힌 샤워실 문을 바라봤다.
“…….”
짙게 내려앉은 침묵.
하은은 팔짱을 풀었다.
팔짱을 푼 손이 꼴사납게 바들바들 떨렸다.
‘오지나.’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목을 짓누르는 아득한 공포에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살아… 있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볼살을 씹었다.
“누나가 구하러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짜식아.”
하은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몸을 돌렸다.
* * *
이사벨라가 샤워를 마친 후.
하은과 이사벨라가 향한 곳은 성소였다.
은은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웅장한 신전.
황량할 정도로 텅 빈 신전 내부에는 은발의 여신이 고고히 서 있었다.
[왔구나.]눈을 감은 채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있던 베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경외감이 들 정도의 성스러운 기운.
신화의 한 장면을 마주하는 것처럼 압도되는 느낌에 이사벨라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분이… 베가 님이라고요?”
이제까지 작은 버전의 베가만 봐오던 그녀는 베가의 본 모습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하느니라.]“아….”
이사벨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찬란한 은발에 반짝이는 황안.
눈꽃처럼 새하얀 피부와 우아하고 고귀한 분위기.
이제까지 외모에 있어서는 어딜 가더라도 꿀리지 않는다 자신했던 그녀였지만, 베가의 본 모습을 보고 나니 견고했던 자신감이 깎여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베가 님도 오진 씨를 각별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
매번 지구에 현신했을 때마다 오진의 머리 위에 걸터앉아 찰싹 달라붙어 있고는 했다.
물론, ‘나의 아이’라고 그를 부르는 것을 보니 모성애에 가까운 애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첫 번째를 차지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이사벨라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 오지니가 어디 있는지는 베가 너도 모른다고 했지?”
베가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와 각성자의 관계란 간단하게 비유하면 나무와 씨앗의 관계.
성흔이라는 씨앗을 내려줘 그 안에서 별의 힘이 무럭무럭 자라나도록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결국 각성자의 몸 안에서 자라난 성흔은 ‘다른 나무’였다.
성흔을 내려준 각성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에 있고 뭘 하는지 실시간으로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작은 몸으로 현신하는 건?”
[전에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한동안 현신하는 건 힘들겠구나.]“끄응.”
하은이 침음을 삼켰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그녀의 제약이 풀리기를 기다리기는 어려웠다.
“…그럼 일단 마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건가.”
[어찌 갈 생각이느냐?]“뭐, 속초에 있는 균열이 닫혔으니 갈 방법은 하나뿐이지.”
하은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최초의 균열로 갈 거야.”
북극에 위치한 직경 50km에 달하는 초대형 게이트.
마경에서 흘러나온 강력한 마수들 때문에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 불리는 게이트를 통해 마경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알고 있어. 위험한 거.”
하은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가야 해.”
[…고맙구나.]“헹, 딱히 베가 널 위해서 구하러 가는 건 아니거덩요?”
[후훗. 알고 있느니라.]베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사벨라와 하은을 돌아봤다.
“…그러면?”
[따라오거라. 도움을 청할 성좌가 있느니라.]베가가 신전 밖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별빛으로 이뤄진 기다란 길을 걸어 그녀가 도착한 곳은.
“와… 뭐야 여긴?”
각종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 채워진 신전.
삭막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던 베가의 신전과는 달리, 온 세상의 재화를 한곳에 모아둔 듯 온갖 귀중품들이 가득 채워져 있는 신전이었다.
[데네브.]신전 안으로 들어온 베가는 나지막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우우우웅!
눈부신 빛무리가 신전을 가득 채웠다.
화려한 빛 사이를 뚫고 나온 것은 검푸른 머리칼을 지닌 소년.
작은 몸 위에 주렁주렁 걸치고 있는 보석이 반짝반짝 빛을 뿜었다.
무식할 정도로 많이 걸친 보석 때문에 일견 꼴사납게까지 보였지만, 소년이 지닌 완벽한 외모는 그 꼴사나움조차 고귀하게 만들 정도로 경이롭기 그지없었다.
“…뭐야?”
데네브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왔느니라.]“뭐? 도움?”
데네브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너… 내가 지난번 대리전 이후로 어땠는지 알고나 있어?”
지난번 대리전에서 대패를 한 이후.
안 그래도 그의 ‘북극성’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던 성좌들이 더 늘어났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유명하고 인지도 있는 존재가 뭐 하나만 실수하면 득달처럼 달려들어 물어뜯는 건 성좌들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나만 모욕당했다면 괜찮아!”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건 익숙하다.
기나긴 세월을 베가와 폴라리스와 비교당하며 살아와야 했으니까.
하지만.
“내… 내 아이들은!”
훌쩍이는 데네브.
못난 성좌를 만나 받지 않아도 될 조롱을 함께 받고 있는 그의 아이들을 생각하자 가슴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대리전을 먼저 요구한 건 그대지 않으냐.]“그, 그건.”
[뭐, 그때 내 아이가 너무 과했던 건 본녀도 동의하느니라. 미안하구나.]“…….”
데네브가 굳게 입을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베가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상심하지 말거라. 예전에도 말하지 않았더냐? 그 누가 뭐라 한들 그대는 북극성의 일원이니라.]“…흥. 그런다고 내가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아?”
데네브는 팔짱을 낀 채 홱 고개를 돌렸다.
베가는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녀의 아이가 마경에 갇혔느니라.]“뭐?”
데네브의 두 눈이 커졌다.
마경은 성좌에게 있어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
그곳에 갇히게 됐다면 이미….
[본녀의 아이를 구해주거라.]베가가 데네브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드레스를 고이 접더니 천천히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릎 꿇어 부탁하….]베가의 무릎이 땅에 닿기 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데네브가 펄쩍 뛰며 앞으로 달려 나와 무릎을 꿇으려던 베가를 일으켜 세웠다.
“성좌가 함부로 남한테 무릎 꿇는 거 아냐! 네 아이가 나중에 이 얘기를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데네브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마경으로 간다고 했지?”
검푸른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콧방귀를 끼었다.
“기다리고 있어. 내 아이들을 불러 모을 테니까.”
베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헹! 널 위해서 그런 거 아니거든! 뇌랑이 허무하게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걔한테 진 내 아이들의 위신이 깎이게 된단 말이야!”
발끈한 표정으로 땍땍거리는 데네브.
[…….]베가는 상냥한 눈으로 데네브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