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1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12화
빛바랜 약속 (4)
“뭐, 뭔데. 왜들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이 영 부담스러운지 당황한 표정을 짓는 하은.
용인족들은 경외감에 찬 눈빛으로 하은의 왼쪽 눈가에 자리 잡은 용안을 바라봤다.
“아아.”
“요, 용의 처녀시여.”
사슬에 붙잡힌 용인족들은 눈앞에서 예수의 강림을 목도한 종교인들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 나 처녀 아니라니깐 아까부터 뭔 소리….”
“누나, 잠깐 조용히 해봐.”
오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재잘거리는 하은의 입을 손으로 덮었다.
“예언이라는 건 무슨 말이지?”
“…그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는 용인족들.
“그건 이 늙은이가 설명해 주도록 하겠네.”
대답이 들려온 곳은 붙잡힌 용인족들이 모여 있는 곳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그르릉!”
사납게 이빨를 드러내며 전투 자세를 취하는 뽀삐.
무너진 암벽 위에서는 수백에 달하는 용인족 무리가 오진 일행을 포위한 채 마력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 중심에 있는 늙은 용인족 한 명이 지팡이를 짚은 채 오진 일행에게 다가왔다.
“내 이름은 켈리온이라고 하네. 부족한 몸이지만 용인족들을 이끌고 있지.”
잿빛 머리칼을 지닌 용인족은 점잖은 말투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쳤다.
“권오진이라고 합니다.”
“들었네. 자네가 장막 너머의 세계에서 온 영웅이었구만.”
“…들었다뇨?”
누구에게 자기 얘기를 들었단 말인가?
“백무강과는 꽤 막역한 사이라서 말일세.”
“아.”
설마 용인족을 이끄는 존재와 백무강이 연이 닿아 있을 줄이야.
“우선 자리를 좀 옮기도록 하지. 소란을 듣고 마인족의 추격조가 따라붙을 수도 있네.”
“예.”
오진 일행은 켈리온의 안내를 따라 협곡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우웅.
일정 구역을 지나자 마치 게이트를 넘은 것처럼 몸이 붕 뜨는 감각과 함께 눈앞의 지형이 뒤바뀌었다.
순식간에 좁은 협곡에서 탁 트인 공터로 이동한 오진.
초목이 드문드문 자라 있는 넓은 공터에는 급하게 설치한 것처럼 보이는 막사들이 수십 개 줄지어 있었다.
‘이곳을 임시 피난처로 쓰고 있던 건가.’
막사 주변 흔적을 보아하니 만들어진 지 기껏해야 2~3일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자네들은 마인족들의 추격조가 따라붙지 않았는지 협곡 주변을 감시하게.”
“예!”
“추격조를 발견해도 바로 공격하지 말고 일단 보고부터 하게나.”
“알겠습니다, 장로님!”
이사벨라의 사슬에 붙잡혔던 용인족 부대는 다시 몸을 돌려 협곡으로 향했다.
“이쪽으로 들어오게나.”
중앙에 있는 막사로 안내한 켈리온이 먼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중앙에는 조잡하게 만든 티가 나는 목제 테이블이 위치해 있었다.
“예언의 귀인이 오셨는데 융숭한 대접은 드리지 못할망정 이런 허름한 막사로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은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이는 켈리온.
오진과 얘기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극진한 태도였다.
“어… 응. 괘, 괜찮아. 근데 아까부터 용의 처녀니 귀인이니 뭔 소리야?”
하은은 켈리온의 극진한 태도가 오히려 부담스럽다는 듯 살짝 오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설명이 길어질 것 같군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하은을 보며 켈리온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용인족에게는 과거 ‘용신’이라 불렸던 수호신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이러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마인족들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됐을 무렵에 칸 왕국이 그랬듯 드래고니안 왕국도 마인족의 습격을 받았다.
용인족에게 가해진 습격은 칸 왕국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고, 치밀했다.
당시 마인족의 군세에 맞서 싸운 것이 바로 용인족들의 수호신이었던 ‘용신 칼레이오스’.
그는 단독 생활을 즐겨 하는 일반적인 용들과는 달리 드래고니안 왕국에 직접 레어를 만들며 수호신을 자처했다.
“그리고 백 년 전 전쟁 당시 칼레이오스 님과 함께 마인족의 군대에 맞서 싸워준 영웅이 바로 ‘카일루스 베네딕토’님이십니다.”
카일루스 베네딕토.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용인족이었나요?”
“아뇨.”
켈리온은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카일루스 님은… 인간이었습니다.”
“예?”
오진의 눈이 찌푸렸다.
100년 전 용신 칼레이오스를 도와 마인족의 군대와 맞서 싸운 게 인간이었다고?
‘말이 안 되잖아.’
지구와 마경 안에 시간의 흐름이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00년 전 마경에는 지구로 통하는 ‘최초의 균열’ 자체가 열리지 않았을 시기였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존재도 아닌 ‘인간’이 용인족을 도와 마인족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카일루스 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계에 ‘흘러 들어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흘러 들어왔다, 라.
그렇다면 최초의 균열이 열리기 전에도 지구와 마경 사이에 통로가 존재했다는 뜻일까.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지금처럼 직경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균열이었다면 발견이 되지 않았을 리 없지만, 처음 오진이 마경에 빨려들어 갔을 때처럼 고작 수 미터에 불과한 균열이었다면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인류는 지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착각하곤 하지만.
사실 단순한 면적만 놓고 보면 인류의 손길이 닿아 있는 지역보다 없는 지역이 압도적으로 넓었으니까.
“카일루스 님은 용인족의 실질적인 지도자이자, 구세주였습니다.”
켈리온은 경외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죠?”
다른 세계에서 흘러들어 온 인간이 무슨 수로 용인족들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구세주고 나발이고를 떠나 대체 어떻게 각성자도 아닌 인간이 마경에서 살 수 있었단 말인가.
“그분께서는 ‘성흔’을 지니고 계셨거든요.”
“…성흔이요?”
오진의 입에서 짧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각성자도 아닌 인간이 마경에서 살아남았을 리 없다.
그 당연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헛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단순했다.
‘각성자가 100년 전부터 존재했었다고?’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이 모두 헝클어지는 듯한 기분.
“예. 그분께서는 ‘용자리의 성흔’을 지닌 각성자였습니다.”
하은과 같은 성흔이었다.
“카일루스 님께서는 성좌에게 부여받은 용자리의 성흔을 용인족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나눠줬다고요?”
각성자 중에 성흔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는 없었다.
‘아니지.’
검은 별의 성좌.
흑성회의 각성자들에게는 자신이 지닌 성흔을 다른 존재에게 넘겨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용자리는 검은 별이 아닐 텐데.’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머릿속이 복잡해졌을 무렵.
“예, 그분께서는 저희에게 별의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켈리온이 입고 있던 낡은 로브를 슬쩍 들춰 왼쪽 가슴을 보여줬다.
왼쪽 가슴 위에는 하은의 것과 같은 선명한 ‘용자리의 성흔’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 용인족들은 핏속에 담긴 강력한 마력을 제대로 다루는 방법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용들이 전해준 마법들이 시대를 거듭하며 유실된 탓이죠.”
아득한 과거 용인족과 용족은 같은 뿌리에서 탄생했다.
비유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과거 용인족과 용족의 관계는 일개미와 여왕개미와 비슷한 관계였다고 한다.
즉, 그들은 ‘용’을 받들어 모시기 위해서 탄생한 종족이었다 것.
하지만 용들은 용인족들의 도움을 필요치 않았다.
하나하나의 객체가 지나치게 강력하고, 주관이 뚜렷했던 탓에 단체 생활을 기피했던 것이다.
용들은 용인족들을 버리고 저 멀리 뿔뿔이 흩어졌다.
그전까지는 용들을 받들어 모시며 그들이 다루는 마법을 조금씩 배워왔지만, 용신 칼레이오스를 제외한 모든 용들이 왕국을 떠난 이후 점차 마법은 유실되기 시작했다.
칼레이오스의 마법 하나만으로는 각양각색의 특성을 지닌 마력들을 모두 소화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러던 중 카일루스 님께서 저희 왕국에 나타나셨던 거죠.”
카일루스는 용자리의 성흔을 통해 용인족의 육체에 잔류해 있는 강력한 마력을 다루는 방법을 전수했다.
“당시 육체 안에 깃든 마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열병으로 죽어가고 있던 저희에게 그분은 말 그대로 구세주였습니다.”
켈리온은 굳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불이 타오르듯 뜨거운 눈동자와 그 안에 짓든 경외심이 그들에게 있어 카일루스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잘 알려줬다.
‘그래서 우리들을 처음 봤을 때도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던 건가.’
멸망해가던 종족을 구원한 구세주가 다름 아닌 인간이었으니 수인족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돌아왔던 것도 당연하리라.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예언이라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카일루스라는 인간이 용인족의 구세주가 된 이유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과 하은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마인족과의 전쟁 이후 용신님께서는 깊은 잠에 빠져 드셨습니다. 그리고 카일루스 님께서는….”
켈리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큰 상처를 입어 돌아가시고 말았죠.”
카일루스를 떠올리고 있는 걸까.
굳게 움켜쥔 주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카일루스 베네딕토… 용인족들의 구세주이자, 용신님의 둘도 없던 친우였던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예언을 하나 남겼습니다.”
기나긴 이야기 끝이 예언에 도달했다.
“왕국에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용안을 지닌 여인이 오리라.”
주변의 시선이 하은에게 집중됐다.
“용의 눈동자는 용신의 영혼을 그 육체에 이끌어, 잠든 용신을 깨우리라… 그게 카일루스 님께서 남기신 마지막 예언이었습니다.”
용신 칼레이오스.
노예에 불과했던 용인족들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남았던 최후의 용.
상처를 입고 깊은 잠에 빠진 그를 깨우기 위한 열쇠가 바로 하은이 지닌 ‘용안’이라는 건가.
“어… 내, 내 눈깔이 그렇게 대단한 거였어?”
하은조차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뜩 그녀가 지닌 ‘용안’을 차지하기 위해 추악한 탐욕을 드러냈던 한 노인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용안의 힘은 그냥 용의 마력을 좀 더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눈에 깃든 힘은 오진의 생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던 모양.
“마인족 군대의 습격에 왕국이 잿더미가 되고, 수많은 동족이 목숨을 잃었을 때… 저는 예언의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켈리온이 하은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앞에 무릎 꿇은 그는 마치 신을 향해 기도하는 성직자처럼 낮게 머리를 조아렸다.
“용의 처녀여… 부디 용신의 영혼을 그 육신에 이끌어 저희들의 신을 기나긴 잠에서 깨워주소서.”
낮게 머리를 조아린 켈리온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