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27)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27화
막간–도주 (4)
“방법?”
오진과 하은, 이사벨라의 시선이 카시아에게 집중됐다.
성소 입구가 망가지고 퇴로가 완전히 차단당한 마당에 대체 무슨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예전에 제 ‘그림자’를 통해서 마경에 가신 거 기억하시나요?”
“아.”
기억하고 있다마다.
실종된 탐랑성을 찾기 위해 ‘뱀’의 흔적을 찾던 도중 검은 그림자에 휩쓸려 마경에 간 적 있었지.
그게 오진으로서는 처음 경험해보는 마경이었다.
“그럼 마경으로 통하는 균열을 열 수 있다는 거야?”
성소만큼은 아니지만 마경 또한 일단 ‘다른 세계’이니 이 도시 안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안전할 것이다.
“예. ‘그림자’를 저쪽 세계와 연결해서 넘어갈 수 있는 균열을 만들 수 있어요. 다만… 시간이 좀 필요해요.”
“얼마나 필요한데?”
“30분 정도요.”
“…….”
30분이라.
한 세계와 세계를 잇는 균열을 만드는 시간 치고 얼마 긴 시간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한시가 급박한 상황에서는 영겁처럼 느껴지는 아득한 시간이었다.
* * *
* * *
“알았어. 그때까지 버텨볼게.”
하지만 성소로 통하는 입구가 망가진 이상 카시아의 그림자 외에 다른 탈출구가 없었다.
오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창을 움켜쥐었다.
사막처럼 메마른 마력 회로에 억지로 쥐어 짜낸 성흔의 마력을 흘려보내며 비틀비틀 몸을 돌렸다.
“크으… 씁. 후우.”
고작 전신에 마력을 퍼트리는 것만으로도 혈관 안에 날카로운 쇳조각을 흘려 넣는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파직, 파지지직!
밀려오는 고통을 억누르며 푸른 뇌전을 피워올렸다.
마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기 때문일까.
평소 굶주린 맹수처럼 사납게 타오르던 뇌전은 이빨이 빠지기라도 한 듯 그 기세가 꺾여 있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야지.’
창을 휘둘러 몰려드는 검은 먹구름을 쳐냈다.
“저도 도울게요.”
“좋아쓰. 그럼 30분만 버티면 되는 거지?”
이사벨라가 하은이 앞으로 나서려고 할 때.
그녀들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뱀’ 한 마리가 기어 나와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언니?”
“으음?”
뫼비우스는 이미 죽었으니 지금 그림자 속에서 기어 나온 ‘뱀’은 카시아의 것일 터.
이사벨라와 하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시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힐끗 시선을 마주친 카시아는 말없이 몸을 돌려 ‘균열’을 열기 위한 영창을 이어갔다.
“갑자기 뭐야 언….”
눈을 찌푸리며 따지려던 이사벨라의 말이 뚝 끊어졌다.
다리를 타고 올라온 뱀이 그녀의 귓가 근처에 무언가 속삭였다.
“흥, 알고 있어.”
무슨 말을 들었던 걸까.
이사벨라는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홱 고개를 돌렸다.
“하아.”
하은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품속에서 담뱃갑을 꺼낸 후 연초를 하나 꺼내 들었다.
“진짜 지긋지긋하네.”
몰려드는 검은 먹구름을 노려보며 연초를 들어 올렸다.
화르르륵!
연초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가며 사나운 불길이 도깨비불처럼 허공을 부유했다.
세상을 불태울 것처럼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신창이가 된 오진보다는 상태가 좀 나았다.
“타올라라.”
나지막한 영창과 함께 허공을 부유하던 불꽃이 검은 먹구름을 향해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쿠르르륵!
불길에 그을린 검은 먹구름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원래라면 한 번 몰아냈다고 해도 곧바로 다시 사납게 덮쳐들었을 흑천의 구름이 하은 앞에서는 온순한 양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지키고 싶다 이거지?”
하은은 이 검은 먹구름의 주인을 떠올리며 복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오진과는 다른, 또 한 명의 오진.
엇갈린 운명으로 인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 천마를 생각하자 짓씹은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지금 이런 말을 한다고 너한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하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낮게 숙였다.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운명은 바뀌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미안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는 걸 알고 있지만.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고통과 절망을, 고독과 공허를 견뎌왔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한테는… 지금 오지니가 더 소중해.”
콰앙!
숙였던 몸을 튕기듯 피며 발을 박찼다.
오진을 향해 밀려들고 있는 흑천을 향해 몸을 던지듯 점프했다.
쿠르르르륵!
양떼 사이에 늑대 한 마리가 들어간 것처럼 흑천의 구름이 우르르 뒤로 밀려났다.
“하아, 하아! 나보다는 카시아 쪽을 부탁해!”
“알고 있어!”
오진의 안전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은 ‘균열’을 만들고 있는 카시아를 보호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하은은 일단 망가진 성소 입구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며 밀려드는 검은 먹구름을 최대한 뒤로 몰아냈다.
하지만 아무리 흑천의 구름이 그녀를 피해간다고 해도 하은 혼자서 막을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었다.
쿠르르르륵!
하은이 없는 자리를 노리고 흑천의 구름이 밀려들어왔다.
균열을 만들고 있는 카시아의 옆에 하은이 바짝 붙어 있었기에 흑천의 구름의 어그로가 자연스럽게 오진 쪽으로 쏠렸다.
“크읏!”
오진은 사방에서 몰아치는 검은 먹구름을 가까스로 튕겨내며 눈을 찌푸렸다.
지금은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었지만.
‘이대로는….’
30분은커녕 5분조차 버티기 어려우리라.
“오진 씨, 잠시 실례할게요.”
그때.
이사벨라가 오진에게 바짝 몸을 붙이며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실례하겠다니 그게 무슨….”
“하음.”
이사벨라의 송곳니가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과 함께 벼락 같은 쾌감이 등골을 타고 퍼졌다.
“읏…!”
“하아, 하아.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이사벨라는 달뜬 숨을 내쉬며 오진의 피를 쭈욱 들이켰다.
“하아.”
검은 별의 성좌와의 교전으로 지쳐있던 그녀의 몸에 활력이 솟구쳐 올랐다.
눈가에 드리워졌던 짙은 다크써클이 사라지고, 푸석푸석 메마른 피부가 매끈매끈한 윤기를 되찾았다.
“허억, 허억, 허억! 이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물론 안 그래도 성역을 전개한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던 오진의 몸은 이사벨라에게 피까지 빨려 더욱 처참한 상태가 되었지만.
“걱정 마세요.”
이사벨라의 상태는 별들의 전쟁이 치러지기 전… 아니, 그 이상으로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제가 오진 씨를 지킬 테니깐.”
뾰족한 손톱 끝을 손목에 가져다 댄 후 길게 내려그었다.
살점이 갈라지며 흘러내리는 핏물.
설원처럼 새하얀 피부 위에 흐르는 붉은 핏물이 손끝에 방울져 바닥으로 뚝뚝 한 방울씩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핏물이 물감이 퍼지듯 바닥에 펼쳐져 작은 피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피어라.”
피 웅덩이에서 자라난 혈화가 봄에 핀 들꽃처럼 만개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핏빛 꽃잎이 검은 먹구름을 난자했다.
쿠르르르륵!
핏빛 꽃잎에 난도질당해 흩어지는 검은 먹구름.
오진의 피로 활력을 되찾은 이사벨라는 거침없이 흑천의 구름을 몰아붙였다.
“하아, 하아.”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몸속 가득 차올랐던 활력이 어느새 다시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쿠구구구궁!
거친 굉음과 함께 검은 불기등이 솟구쳐 올랐다.
“저긴….”
천마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장소.
수인족과 용인족의 전사들이 목숨을 걸고 천마의 발을 묶어두고 있는 전장이었다.
“…끝났나 보네요.”
직감적으로 천마의 발을 붙들어두고 있던 수인족과 용인족의 전사들이 모두 쓰러졌음을 알 수 있었다.
발을 붙들고 있던 귀찮은 방해꾼들이 사라졌으니 다음으로 천마가 향할 곳은 하나뿐일 터.
“언니, 아직 멀었어?!”
“조금만 더!”
카시아는 이마에 맺힌 땀을 털어내며 답했다.
이사벨라는 초조한 표정으로 검은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던 장소를 바라봤다.
저벅, 저벅.
저 멀리서 들려오는 느긋한 발걸음 소리.
거리를 뒤덮고 있던 검은 먹구름이 홍해가 갈라지듯 쫙 갈라지며 천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 아직도 버티고 있던 거야?”
천마는 망가진 성소 입구 앞에 모여 있는 오진 일행을 바라보며 피식 실소를 흘렸다.
“솔직히 금방 다 쓸어버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늑대 자식이 좀 끈질기더라고.”
그는 질질 끌고 오고 있던 리아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오진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리아크!”
“아아, 안심해.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천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바닥에 쓰러진 리아크를 내려다봤다.
“이건 나중에 ‘쓸 곳’이 있으니까.”
“너… 대체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말했잖아, 계획을 바꾸겠다고.”
천마의 시선이 하은을 향했다.
순간, 하은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한동안 지그시 하은을 바라보던 천마가 쓸쓸히 고개를 돌렸다.
“네 말대로, 너와 내가 다르다면.”
푸른 귀화가 섬뜩한 빛을 뿜으며 타올랐다.
“내가 직접 똑같게 만들어줄 수밖에.”
오진의 등골을 타고 오싹한 전율이 퍼졌다.
“똑같게 만들어주다니… 그게 무슨.”
“그건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천마는 사납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오진을 향해 뚜벅, 뚜벅 걸어왔다.
점차 천마와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을 때.
“됐어요!”
쩌저저적!
허공에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길 수 있을 법한 작은 균열이 만들어졌다.
“…음?”
균열을 발견한 천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들 먼저 도망쳐! 마지막에 따라갈 테니까!”
콰르르르릉!
오진은 손에 쥔 창을 천마를 향해 던지며 이사벨라와 카시아, 하은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
“오진 씨,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단… 웁?!”
이사벨라가 갑작스럽게 오진과 입술을 겹쳤다.
오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떴을 때.
“흣차!”
하은이 오진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오진과 함께 균열 쪽으로 몸을 던졌다.
“자, 잠깐…!”
오진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균열 입구를 붙잡으려 했지만, 하은의 팔에 단단히 구속된 그의 팔은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진과 하은의 몸이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훗.”
점차 어두워지는 오진의 시야 속에 방긋 미소짓고 있는 이사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오진을 향해 윙크하며 빼죽 혀를 내밀었다.
“그때의 복수랍니다?”
이사벨라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오진의 몸이 완전히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흐응, 자매 아니랄까 봐 결국 우리 둘만 남게 됐네?”
균열이 닫힌 후.
카시아는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아내며 이사벨라에게 다가갔다.
이사벨라는 가늘게 눈을 뜨며 카시아를 흘겨봤다.
“…언니도 같이 갈 수 있었던 거 아냐?”
“말했잖니? 30분으로는 두 명밖에 옮길 수 없다고.”
“그러니까. 하은 언니 대신 언니가 갈 수 있었잖아.”
사실 제삼자인 하은보다는 균열을 만들어 낸 당사자가 함께 이동하는 편이 더 안전했기에 카시아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 대신 하은을 남겨둘 수 있었으리라.
“어머, 그럼 사랑하는 우리 벨라와 떨어지게 되잖니?”
“흥. 인제 와서 언니인 척이야?”
“난 언제나 네 언니였단다?”
카시아는 입가를 가린 채 쿡쿡 웃으며 이사벨라 옆에 섰다.
“이런다고 오진 씨랑 사이는 인정 안 해줄 거야.”
“흐음, 그건 좀 너무하지 않니? 그래도 나름 오진 님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는데.”
“그건….”
말끝을 흘리던 이사벨라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기어들어 가듯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은 언니가 괜찮다고 하면 생각해 볼게.”
“어머머, 우리 벨라 귀여워서 어째?”
카시아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손뼉을 쳤다.
“자, 그럼 그 전에….”
그녀의 시선이 천마를 향했다.
천마는 팔짱을 낀 채 허탈한 실소를 흘리며 두 자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시아는 천마를 향해 방긋 미소지으며 한 걸음 내디뎠다.
“저 가짜 오진 님부터 혼내주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