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23
123. 불편한 일상(4)
신발 앞코가 어딘가에 잘못 걸리는 소리. 내가 넘어진다는 신호.
균형을 잡기 위해 반사적으로 팔을 휘적였다. 뒤늦게 이 모습이 꼴 사납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의식적으로 제지한 채 바닥이든 벽이든 무언가라도 짚으려 팔을 뻗는데.
“……에드?”
“네… 데몬 님. 죄송합니다.”
에드가 내 한쪽 팔을 잡아 올렸다. 가공할 힘에 내 몸이 힘없이 딸려 올라간 탓에 넘어지지는 않았는데…….
에드가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내가 죽기 싫으면 내놓으라고…….”
나직이 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잘 안 들린다. 넘어질 뻔한 내가 못마땅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지, 내게 사과한 것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불안한 마음에 조용히 눈만 굴리다가 조금 전까지 에드의 협박을 듣고 있던 마족과 눈이 마주쳤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패닉에 가까울 정도로 공포에 질린 녀석의 시선을 따라 슬쩍 시선을 들었다. 에드가 잡아 올린 팔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그 손에 쥐어진 뾰족하게 깎인 나무 꼬치가.
‘……아.’
넘어지면서 찌를 뻔했구나. 큰일 날 뻔했네. 저 마족이 하얗게 질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보다, 나 지금 인생 종친 건가?
누군가의 실수에 의해 제 목숨이 위험했을 때의 감정 변화는 대개 놀람, 공포, 분노 순이다. 아무래도 눈앞의 마족은 지금 공포 단계까지 밟은 것 같은데.
사과를 해도 과연 순순히 받아 줄까?
목숨이 걸린 고민에 빠질 때, 내 기색을 살피던 에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데몬 님의 앞을 감히 막아선 것,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지금 마왕성의 마족을 죽이기엔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
“마…왕님께서도 탐탁치 않아 하실 겁니다.”
마지막 말에는 과연 이것을 말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애초에 나 마족 죽이려 한 적 없는데. 그리고 제아무리 뾰족하다지만 내 손에 들린 것은 결국 가느다란 나무 꼬치에 불과하다. 마족이 고작 그딴 걸로 죽을 리가 없잖아.
‘……여기서는 뭐라 답해야 하지?’
내가 적절한 답을 내놓는 것보다 에드가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실례했다며 잡고 있던 팔을 놓고 물러선다. 쓰레기를 대신 치워 드리겠다는 명목으로 내 손에 들린 나무 꼬치를 가져가고, 다시 한번 불안한 눈으로 나를 훑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돌려 마족을 보았… 아니, 멱살을 잡았다.
‘……?!’
***
역시나, 애꿎은 마족 하나가 죽을 뻔했다.
손에 무기가 들려 있지 않아 조금 마음을 놓았더니만, 설마 나무 꼬치를 사용할 줄이야.
손에 쥐고 조금만 힘을 줘도 툭 부러지는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그 끝의 뾰족한 정도는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위험의 여지가 크다.
데몬 님은 그것을 이 마족의 눈에 꽂아 버리려 하셨다.
‘이유는 아마… 너무 기다리게 만들어서.’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하셨는데, 이런 쓸데없는 실랑이로 귀한 시간까지 깎아 먹으니 짜증이 나실만도 하다.
에드 본인도 데몬 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답지 않게도 죽기 싫으면 어서 내놓는 게 좋을 거라는 설명까지 친절히 덧붙였다. 눈앞의 마족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데몬 님이 이 녀석을 죽이고 전투 때의 데몬 아루트로 돌입하시는 것을 막기 위해서.
‘술을 드셨을 때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위험한 상태가 되실 테니….’
그러나 친절한 설명이 채 먹혀들기도 전에, 데몬 님이 움직였다.
인내심이 다 닳아 버렸다는 듯, 다 먹고 남아 버린 나무 꼬치를 쥐고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족의 눈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체중을 실은 휘두름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막아야 하나?’
그 잠깐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심기 불편한 데몬 님의 기분을 거스르는 짓을 할 것인가, 그냥 두고 볼 것인가.
데몬 님을 막아서는 것은 이 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수준이지만, 저 녀석을 죽여 각성한 데몬 님은 수많은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에 비해 본인이 살 가능성이 높다는 이점이 있음에도 마왕성 소속의 충직한 에드는 전자를 택했다.
뒤늦게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을 자각한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 한심한 꼴을 보고 있자니 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게 내가 죽기 싫으면 내놓으라고…….”
……경고했는데.
슬쩍 시선을 옮겨 데몬 님의 기색을 살폈다. 기분이 많이 상하셨을까. 분노하신 건 아니겠지.
어쨌든 이젠 그를 설득해야 할 차례다. 에드는 마른침을 넘기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말이 먹히긴 한 것일까. 나름의 성의를 다한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나마 이 이상 무엇을 할 생각은 없어보여 에드는 눈치를 살피다가 서둘러 그의 손에 들린 나무 꼬치부터 빼 왔다. 다행히도 순순히 넘겨주신 덕분에 걱정을 덜었다.
……저러다 갑자기 움직이시진 않겠지.
심기 불편한 상태의 데몬 님 손에 피를 묻게 할 바엔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편이 낫다. 불안한 눈으로 그를 살피다가 몸을 틀어 실랑이를 벌이던 마족의 멱살을 잡았다.
***
“봤지? 데몬 님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똑똑히 새겼으면 좋겠는데.”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응, 그래… 날 이유로 내세우는 것엔 이미 익숙해졌어…….
나는 조용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봤다.
마족의 행동은 빨랐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에드는 녀석에게서 웬 막대기 두 개를 받을 수 있었다.
……막대기?
‘단순하게 생겼는데? 지금 저걸 받겠다고 그 난리를 친 거야?‘
진짜 막대기다. 그 단어 외에는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한 외형.
황당함에 할 말을 잃은 사이, 내게 다가온 그가 막대기 하나를 건네며 무언가 설명하려는 듯 입을 열더니 이내 급히 입을 다물었다.
“데몬 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마왕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종류여서…….”
“……?”
잠깐. 마왕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라고? 그 정도로 신경 써 줄 필요는 없…는데…….
의미 없이 손을 뻗어 보았으나 이미 늦었다. 신속한 부관은 내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통신석을 꺼내 들고 곧장 마왕과 연결했다.
– 에드? 무슨 일이지?
하하… 행동 한번 재빠르네…….
……빌어먹을.
“데몬 님의 심기가 좋지 않은 탓에 눈꽃 스틱을 사용해 보려 하는데, 사용 가능 여부를 여쭙고 싶습니다.”
눈꽃 스틱? 뭐야, 그 애들 장난감 같은 이름은.
– 기분이 안 좋다고? 어느 정도인데?
“그…….”
무언가 말하려던 에드가 눈치를 살피듯 힐긋 나를 곁눈질한다.
그 망설임에서 무엇을 읽은 건지, 마왕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 아니, 아니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적당선의 해결책을 찾아본 거겠지. 어지간히 심각한 것 같은데, 얼마든지 사용하도록 해.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러지 마. 허락하지 않아도 돼.
내 기분이 나쁘다는 게 어째서 이유가 되는 건데. 내가 애냐. 그리고 왜 고작 이런 일에 마왕이 뒤까지 봐주는 거야?
걸고넘어지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보니 도리어 입을 다물게 된다. 해탈하여 영혼이 빠져나간 눈으로 에드를 보자 그가 움찔하더니 제 손에 든 막대기 하나를 들어 보이며 급히 설명을 시작했다.
“가위로 이 끝을 자르고 하늘을 향하게 하시면 됩니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는….”
내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 마왕성 전체에 알린다. 0군단장 데몬 아루트가 이전에 개발한 눈꽃 스틱을 시험해 볼 예정이다. 마왕성의 사용인들은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에 당황하지 말고 각자 할 일을 계속하도록.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
의문은 잠시였다. 마족들은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일상에서 마법 물품을 만들어 사용한다. 현재는 마법 사용이 금지되었다지만… 이전에 개발한 물건이랬으니 아무래도 마법 물품 같은데.
이름이 눈꽃 스틱이랬으니 뭐, 눈이라도 내리게 하는 건가?
당연하게도 마왕이 직접 알린 방송은 마족들의 주의를 강하게 끌었다.
“시험? 그런 건 이미 다 끝내지 않았어?”
“쉿, 딱 봐도 핑계인 거 모르냐. 데몬 님 심기가 불편해서 어떻게든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 보려는 거잖아.”
“데몬 님께 이게 통할까….”
“인간계 출신이시니까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통하길 빌자.”
“뒷정리하려면 또 한바탕 고생하겠네.”
또렷하게 들리진 않지만, 내 이름이 언급된다는 것은 알겠다.
마왕이 기껏 포장한 말을 쫙쫙 뜯어 파헤치고 있는 모양인데, 쪽팔려서 얼굴을 못 들겠다.
‘안 그래도 된다니까… 집 가고 싶다…….’
백작저로 가면 다시 이곳에 오고 싶어지겠지. 정녕 내가 맘 편히 있을 곳은 없단 말인가.
화끈해지는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심호흡에 집중했다.
그사이, 다른 마족에게서 가위를 받아 온 에드가 막대기의 끝을 자르더니 하늘을 향해 가리킨다. 잘린 부분에서 무언가가 솟구치더니 공중에서 펑 하고 터졌다.
‘폭탄이었어? 뭐… 딱히 놀랍진 않네.’
폭탄 정도는 예상 범위 내였다. 에드가 내 신체에 해가 갈 일을 저지르지도 않을 테니 두려워할 것도 없고. 문제는 다른 마족들의 반응인데…….
뻔하지. 그렇게 대놓고 방송까지 했는데, 피해를 입는다면 당연히 날 원망하지 않겠어? 내 수명이 또 줄어들었네. 하하.
이런 방면으로는 해탈해 버린 지 오래였기에 반쯤 죽은 눈으로 폭탄이 터진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꽃잎처럼 떨어지는 하얗고, 차가운, 솜털 같은 결정.
“……눈?”
“네. 마음에 드십니까? 기후 변화가 없는 마계와 달리 인간계는 눈도 내릴 때도 있으니 데몬 님의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확실히 나쁘진 않은데…….”
이렇게 평화로운 방법이라니. 마족들도 이런 방법을 쓸 줄 알았구나. 그런데 그동안 왜 그랬냐.
손을 내밀어 눈송이를 받았다. 차갑다. 진짜 눈이네. 신기하긴 한데, 어째서 고작 이런 걸로 방송까지 한 거지?
의문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하늘에서… 폐기물이 내린다…….”
“이걸 우리가 치워야 한단 말이지…….”
“어쩌겠어… 데몬 님께서 행하시는 건데……. 그분의 손에 죽는 것 보단 낫잖아……. 닥치고 치우자…….”
“하하, 하하하. 다 좋으니 제발 많이 사용하지만 않으셨으면 좋겠다…….”
“빨간 것도 사용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그건 안 되겠지?”
아하…….
이해해 버렸다.
쟤네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은데 어떡하냐. 미안해서 눈치를 살피는데, 에드가 눈치 없게도 내 손에 가위를 쥐여 주며 데몬 님도 자르라며 종용한다. 아니, 이건 눈치 없는게 아니라 그냥 눈치를 보지 않는건가.
매정한 놈 같으니라고.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눈이 반갑기도 하고, 나도 직접 해 보고 싶었던 탓에 모른 척 가위를 받아 들었다.
붕대를 감은 손목을 본 에드가 흠칫 놀라 말했다.
“아, 데몬 님 손이… 제가 잘라 드리겠습니다.”
“됐습니다.”
조금 전부터 계속 애 취급 당하는 기분이라 별로다.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 이상 그딴 취급을 당할 생각은 없었기에 한 손에 막대기를 쥐고 골절된 손으로 가위를 쥐고 표시선에 조준했다.
‘……손이 떨리네.’
다친 손이 자꾸 덜덜 떨려서 가늠이 제대로 안 된다.
안되겠다. 막대기 끄트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옮겨 표시선 가까이를 잡고 다시 가위를 대었다.
서걱.
“……아.”
“데몬 님, 손이……!”
일단 자르긴 잘랐다. 나는 곧바로 자른 곳이 하늘을 향하게 손을 옮겨 들었다.
퍼엉! 조금 전과 같은 굉음이 들리며 흰 눈 사이로 붉은 눈송이가 섞여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안타까운 마족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손바닥 위에서 사르르 녹아 버린 붉은 액체를 가만히 보다가 설명을 요하듯 에드를 보았다.
“에드?”
“네, 데몬 님.”
“왜…….”
붉은 액체에서 익숙한 냄새가 난다.
어디서 맡던 냄새인지 깨달은 순간, 제법 예뻐 보이던 하늘의 눈송이가 섬뜩하게 비쳤다.
머리 위에 소복히 내려앉는 그것에 진저리를 치지 않기 위해 애쓰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눈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겁니까. 이거 설마.”
진짜 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