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62
162. 소란(1)
‘크루엘의 시신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눌러삼켰던 것인데, 결국 이렇게 터지다니.’
그나마 방 안에 아무도 없을 때 터졌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일정선 이상 드러난 감정은 꼴사납다. 분노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감정에 휘둘려 언성을 높이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추하고 천박한 꼴이라니. 자칫 누군가에게 들켜 그간 쌓아온 이미지를 와르르 무너뜨릴 뻔했다.
[후배님, 굳이 언성을 높이지 않고도 분노를 표출할 방법은 많단다. 그러니 목 아프게 소리를 질러 네 품위를 깎아먹지 마렴.]흥분하지 말자. 감정은 정제된 것들만 보여야 한다. 속이 들끓더라도 머리만큼은 차갑게. 그 어느 순간에도 이성만큼은 반드시 챙겨서.
신호가 왔다며 급히 뛰어들어온 벤을 물리고, 차분히 입가를 훔친 손수건을 접어 품에 넣은 데온이 제 앞에 선 드벨라니아를 쳐다봤다.
“크루엘에 관해 누락된 정보가 있는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
조금, 화가 났다.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적어도 만인의 앞에서 당황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왜 그랬니?”
“죄송해요…….”
“난 그걸 묻는 게 아니야.”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뚜벅. 뚜벅. 느릿한 걸음이 조금 움직이는가 싶더니 드벨라니아의 앞에 멈춰선다. 데온은 그대로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눈을 맞췄다.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새빨간 눈동자는 섬뜩한 광기를 담고 번들거리고 있었다.
“왜, 내가 큰 충격을 받기라도 할 줄 알았니? 아니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날뛸 거라 생각했어?”
“……!”
“후자구나.”
그래, 전자였으면 우스울 뻔했다. 눈앞에서 형이 죽는 것을 보고, 뒤늦게 그 시신이라도 수습하려 했다가 시신은커녕 누군가 머리를 잘라갔다는 소식까지 들은 인간이 이제 와 충격을 받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날 얼마나 감정 조절 못하는 인간으로 본 건지….”
“그, 그게 아니라…!”
“고작 그 이유로 정보까지 누락시킨 것을 보면 어지간히도 내가 만만했던 모양이야.”
“아… 아니에…!”
콱.
단순한 부정뿐인 말, 더 듣고 싶지 않아 드벨라니아의 목을 잡았다. 손에 힘을 주지는 않았다. 힘을 줘봤자 타격은 고사하고 빈약한 악력만 들통날 뿐이니까.
대신.
“봐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분위기로 찍어누른다.
웃음기를 빼고 눈앞의 마족을 보았다. 다소 굳은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나직이 입술을 달싹였다.
“적당히, 하렴.”
“…….”
정적이 내려앉았다.
……분노는 여기까지. 천천히 드벨라니아의 목에서 손을 뗀 데온이 흐린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순히 사과한 상대다. 여기서 더 화내며 눌러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날 터.
“……부디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데온은 채 식지 못한 감정을 삼켰다.
***
회의 때, 데온 하르트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무서운 총지휘관의 명령이다. 5군단장 오엘은 착실히 따랐다.
사실상 보모 역할에 가까운 부관 데르니반을 데리고 태혼국을 휘젓던 그녀는 오늘도 어느 한 마을을 쓸어버리고 흥미로운 물건을 찾아 집을 뒤지고 있었다.
“데르니반, 이거 봐봐. 웬 말라비틀어진 풀 뭉치가 있어. 이걸 왜 집안에 두고 있는 걸까?”
“인간들이 사용하는 약초인 것 같습니다.”
“약초? 요정족의 약초랑 같은 거야?”
“평민의 집에 있는 것이니 요정족의 약초에 비하면 효과는 미미할 겁니다.”
“평민들은 효과가 좋은 약초를 얻지 못하는 걸까?”
흥미가 떨어진 듯 약초 뭉치를 휙 내던진 오엘이 다른 집을 뒤져보기 위해 걸음을 돌리다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멈칫했다.
“우응-.”
“……?”
분명, 살아있는 것의 목소리였다.
데르니반도 들은 듯 무심하던 눈빛에 살기가 돈다. 착각이 아니구나. 오엘은 소리의 근원을 찾아 느릿하게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이잉-.”
“…….”
소리는 옷장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간 여자의 시신이 이 앞에 있었지. 우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가.
발로 여자의 시신을 죽 밀고 슬쩍 데르니반을 돌아본 그녀가 보일 듯 말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옷장을 확 열었다. 곧장 데르니반이 그것의 숨통을 끊기 위해 팔을 뻗었으나─
“……잠깐.”
제지의 뜻을 담은 명령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날카롭게 드러난 손톱을 감추지 않은 채 데르니반이 눈만 굴려 오엘을 살핀다. 그녀의 두 눈은 처음 보는 물건을 발견했을 때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설마.
“나 책으로 봤어! 이거 ‘아기’지? ‘축복’이라던 바로 그 ‘아기’ 말이야! 세상에, 살아있는 아기라니!”
“……오엘 님.”
아. 결국.
갈 곳 잃은 손톱이 주먹 속에 감추어진다. 데르니반은 그의 상관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데르니반! 우리 이거 키우자!”
“인간입니다.”
“하지만 ‘아기’잖아?”
“죽여야 합니다.”
“싫어! 나도 ‘축복’을 갖고 싶단 말이야!”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마족은 ‘마왕의 힘’으로부터 탄생하는 종족. 노력한다 한들 아기를 가질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폭주하는 연인이자 상관을 멈춰야 한다. 데르니반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히 거짓을 입에 올렸다.
“오엘 님께서 원하는 것을 가지실 수 있도록….”
“난 지금 이 아기를 원해.”
“…….”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기를 가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찾아보니까 아기를 뱃속에서 만들 수 없는 인간들도 있다더라고. 그런 인간들은 ‘입양’이라는 방법으로 아기를 갖는대.”
“마왕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몰래 키우면 되지!”
“하지만.”
“도와줄 거지, 데르니반?”
“…….”
응?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물끄러미 보던 데르니반이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당장이라도 ‘아기’의 목숨을 앗아갈 것처럼 흉흉하게 서 있던 그의 손톱은 온데간데도 없이 감춰진 뒤였다.
“……명령이시라면.”
***
“폐하, 한 가지 들어온 소식이….”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르웨체에서 급히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긴급 회의 소집을 명한 황제는 무언가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이 역력한 기사를 지나쳐 회의장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전쟁과 연관된 급한 문제였으면 미리 내려두었던 명령에 따라 즉시 보고를 올렸을 테니, 당장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 테지.
그렇게 보고를 열한 번째 거절당해 축 쳐진 기사는 말끔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황제가 회의장 문 앞에 섰다.
“황제 폐하께서….”
“그럴 필요 없다.”
이러고 있을 시간도 아깝다. 언젠가 그랬듯 몸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고 없는 황제의 등장에 황급히 몸을 일으키는 귀족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황제는 손을 저어 인사조차 생략하고 성큼성큼 걸어 옥좌에 앉았다.
“인사는 됐으니 모두 앉도록.”
귀족들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는 그 잠깐의 시간조차 기다려줄 수 없다는 듯 황제의 말은 즉시 이어졌다.
“동맹국인 르웨체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마족들이 왕국의 성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더군. 현재 파라스령에 가장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왕국인만큼 도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짧은 정적이 스치고, 귀족들이 일제히 반응했다.
“언제부터 국가 간의 움직임에 ‘이득’이 아닌 ‘도의’가 들어갔습니까. 지금의 제국은 마족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거절해야 합니다.”
“동맹이 흔들리게 될 거요. 르웨체 뿐만 아니라 산국도 제국을 좋지 않은 눈으로 보게 되겠지. 그렇지 않아도 여론이 좋지 않은 판에 적을 늘리는 행동은 자제해야 하지 않겠소? 하니 폐하,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돕는 것이 옳습니다.”
“그 전에.”
소란이 불거지는가 싶던 그때 누군가의 손이 올라왔다.
“무슨 상황인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감히 청해도 되겠습니까? 워낙 큰일이라 모르는 이들이 없을 거라지만, 진행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직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이들이 혹시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라색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꺼풀 아래로 숨어든다. 황제는 가만히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나머지 그걸 간과했군. 마왕군 중에서도 5군단이 태혼국을 휩쓸었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겠지. 태혼국은 르웨체가 보호를 약속한 속국이다. 르웨체로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원을 보냈고….”
그 뒤는 현재와 같았다.
무려 5군단을 상대하기 위한 병력이다. 어설픈 병력을 보내봤자 쓸데없는 낭비만 될뿐이니 제대로 된 병력을 상당량 보냈을 테고, 이로 인해 르웨체의 전력은 대폭 깎여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마족들이 르웨체의 성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
“결국 르웨체가 자초한 일 아닙니까. 거절해야 합니다.”
“르웨체는 동맹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무리한 겁니다. 만약 르웨체가 태혼국을 외면했다면 우리는 르웨체와의 동맹을 다시 생각했겠지요. 결국 르웨체가 저리 된 것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니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합니다.”
“마족과의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금은 전력을 아껴야 합니다. 하지만 동맹이 깨지는 원인이 될 수는 없으니… 명목상의 지원을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잃어도 아쉬울 것 없는 이들로 말이지요.”
“그런 이들이 있습니까?”
“빈민과 평민으로 이루어진 병력이 있지 않습니까. 모자라면 더 징집하면 되는 것이고요.”
이미 귀족들은 제 사병 일부와 함께 가문의 사내 중 한 명 이상이 참전하는 것으로 제국의 전력에 한 손 보탰다. 그러니 이후의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제국민의 징집을 말한다 해도 황제가 분노할 일은 없을 터.
때문에 당당히 말을 꺼냈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해도 역시 그대들이 ‘징집’을 입에 올리는 것은 달갑지 않군.”
황제의 얼굴은 불쾌함을 가득 담고 일그러졌다.
“제국민들의 징집은 병력의 부족으로 행한 것이었다. 그들을 버리는 패로써 타국에 보내버리면, 그 빈자리는 어떻게 메울 것이지?”
“그것 역시 빈민과 평민을 더 징집함으로써….”
“그대들은 제국민들이 무슨 계속해서 솟아나는 마법의 샘물인줄 아는 모양인데, 틀렸다. 그보다 더 급이 좋은 병력이 있지 않은가.”
옥좌 팔걸이를 잡은 손끝에 질척한 피의 감촉이 느껴진다.
악몽, 환각의 단계를 거쳐 촉각까지 실현된 끔찍한 상황에서 황제는 내색 않고 담담히 손을 들어 귀족들을 가리켰다.
“그대들의 사병이, 아직 남아있지 않나.”
“그건 영지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그대들에겐 영지가 제국보다 우선인 모양이지? 제국이 무너지면 그대들이 그리 소중히 여기는 영지 또한 주인 없는 땅이 될 터인데, 실로 어리석군.”
“그것이 아니오라…!”
용기 있게 나섰던 귀족이 황제의 언변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들자 다른 귀족이 입을 열었다.
“폐하, 소신들은 이미 가문의 사내를 전쟁터에 보냄으로써 제국을 향한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한데 어찌 이러시는 겁니까.”
가만히 듣던 황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정녕 그것이 충성심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그리 당당하게 굴어서는 안 될 텐데.”
“무슨 말씀이신지….”
“입양한 고아, 사생아, 먼 방계.”
“……!”
언제부턴가─ 정확하겐 황제가 병력이 부족하면 귀족들부터 차출할 것이라 발언한 이후부터, 귀족가에 입적되는 이들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이유야 뻔했다.
“본인이 참전하기도 싫고, 소중한 자식도 보내고 싶지 않으며, 심지어 돈을 쏟아부워 키운 사병조차 아까우니 손해를 최소화하고자 남의 집 자식을 데려다 참전시킨 것을, 짐이 모를 줄 알았더냐.”
“사생아는 남의 집 자식이….”
“그래, 남의 집 자식만도 못하게 대우했겠지. 그게 이야기의 요지는 아닐 텐데.”
“…….”
“그런 행동을 해놓고 감히 충성심을 운운하다니 어이가 없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단 한 명의 사내만 남기고 모조리 참전하라 명할 걸 그랬어. 그렇지 않나?”
“……일의 근원을 생각해주시길, 감히 간언하나이다.”
너무 몰아붙였던 모양이다. 궁지에 몰린 쥐가 기어이 고양이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