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71
171. 그는 그를 아꼈다(2)
그때, 공작은 비웃었다.
감정에 기대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건만,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정을 기대하려 하다니.
장담한다. 분명 나는 계약 기간이 끝나면 필요에 따라 그들을 죽일 것이다. 살린다 해도 그건 정 때문에 살려두는 것이 아닌 이용가치가 있거나 죽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겠지.
[아무튼 10년입니다. 그때까지는 조카들이라 생각하고 잘 돌봐주세요.] [전하, 다른 자제분들은 그렇다 쳐도, 9왕자 전하와 제 나이 차이는 고작 5년입니다. 조카라니요.] [그럼 친동생?] [……조카라 생각하겠습니다.]그 이후 10년하고도 몇 년이 더 흘렀다.
1왕자가 알고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10년이라는 기간을 둔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공작은 마왕으로부터 마력을 넘겨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이 마력으로 계약을 무효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정해진 기간이 있었기에 마력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그냥 둔 것이지, 만약 정해진 기간이 없었다면 마력을 소모해 계약으로 인한 제약을 없앴을 것이다. 그럼 1왕자가 지키고자 했던 ‘아이들’의 목숨이 위험해졌겠지.
‘어려울 것 없는 계약이라 생각했던 것이 생각보다 더 복잡해지긴 했지만, 그것 역시 기간의 끝만 보고 참았고.’
본래 공작은 1왕자가 죽고 다른 허수아비 후보를 뽑아 밀어줄 생각이었다. 왕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그 힘으로 1왕자의 ‘아이들’을 지킬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보호 대상인 9왕자 에도아르도 데세르트가 다른 이들을 죽이고 즉위해버렸다. 공작으로서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한 권력이 필요하다. 그 권력의 정점은 당연하게도 나라의 주인 자리일 테고.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자리에 보호 대상이 앉아버렸다. 끌어내리기엔 ‘자유의지’를 존중하기로 계약 해버린 상황.
공작은 판단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넘겨받자. 적당히 압박해서 넘기고 싶게 만들면 되겠지.’
이 정도까지는 괜찮으리라.
에도아르도 데세르트의 이해할 수 없는 지독한 책임감을 미처 깨닫지 못했기에 나온 판단이었다. 안다 해도 그 이상의 다른 방법은 없었겠지만.
어쨌든 공작은 1왕자와의 계약대로 10년의 시간을 두고 세 사람을 지켜봤다.
그래서, 지금 공작은 아이들에게─ 에도아르도 데세르트에게 정이 들었는가?
‘…….’
10년의 기간이 지나 계약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황제가 황제로 남아있다.
10년의 기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황태자가 황태자로, 황녀가 황녀로 남아있다.
‘어차피 지금은 시기가 안 좋으니 건들 수도 없어.’
제국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기에도 바쁠 시기다.
공작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껄끄러운 주제에서 눈을 돌려 다시 현재를 보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된 지금, 그는 무리한 짓 대신 구원교에 집중하며 여론전으로 인간계 내부의 결속을 돕고 있었다.
그 과정조차 순탄하지 않고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보이니 가히 최악이라 봐도 되겠지.
‘데몬교에 혁명군에… 이전이었다면 고개도 들지 못했을 것들이 기어 나와서는.’
특히 혁명군은 이번을 기회로 이미지가 급부상하는 중이었다. 아예 인류를 위하는 단체로 낙인 찍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짜증이 치밀었으나, 그와 별개로 저들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공작은 사적인 감정은 치워둬야 했다. 지금은 더 거슬리는 단체가 있었으니까.
‘데몬교.’
누가 봐도 명백히 마족이 배후에 있을 것 같은 종교인데, 어째서 인기가 많은 것인지.
빈민가 곳곳에 나직이 ‘데-세’라 중얼거리는 이들이 늘었다는 보고를 받은 공작은 끝내 치솟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참담한 심정을 담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
‘데온 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일단 뭐든 해둬서 나쁠 게 없으니 인간계로 진출하라고.’
인간계에 진출한 데몬교에 관련된 서류를 처리하며 11군단장 리리넬이 과거를 회상했다.
[필요할 때 닥쳐서 시간 부족으로 못하는 것보다는 헛수고가 될지라도 미리미리 해두는 게 좋지 않겠니.] [그, 그렇죠.] [그렇지? 데몬교는 여론전에도 사용할 수 있고, 별 수확은 없을 것 같지만 일단 마족 소환에도 이용이 가능할 테니까.]황홀한 독대였다.
수려한 턱선을 만지작거리며 싱긋 웃는 눈앞의 인간 남자는 지독하게도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눈 밑에 생긴 그늘조차도 그의 미를 가릴 수는 없었기에, 리리넬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데온 님의 말이 다 맞아요! 마왕님께 허락을 맡고 바로 인간계에 진출을…!] [아니. 굳이 마왕님께 허락을 구해야 할까?] [네? 그야, 인간계와 연관이 있는 것이니까….] [응?]데온 하르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생긋 눈꼬리를 접는다. 책상을 툭툭 두드릴 듯 올라간 손가락이 리리넬의 손등 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덜컹. 심장이 멈췄다.
‘안 돼, 지금 죽으면 안 돼!’
데온 님을 눈앞에 두고는 절대 못 죽는다.
빠져나가려는 넋을 붙잡고 벌떡 일어섰다. 언제부턴가 피가 줄줄 흐르고 있던 코를 부여잡고 리리넬은 의욕을 가득 담아 외쳤다.
[당연히 되죠! 당장 진행하겠습니다!]데온 하르트는 그저 웃었다.
몰래 진출한다 해도 마왕이 이를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건 그저 시험이었다.
마족들은 어버이인 마왕을 따르니, 그것은 절대적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종족의 명운을 책임지는 존재에 대한 존중이자 부모에 대한 유대감으로 인한 것일까.
후자라면 ‘반항’ 또한 가능할 테지. 마왕에게 반기를 드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데몬교의 이름을 굳이 바꿀 필요는 없어. 그대로 진출하도록 해.] [네!]그리고 지금 군단장이 마왕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했다.
부드럽게 웃음짓는 눈꺼풀 사이로 살짝 드러난 붉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
생명을 줍는다는 것은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최근 두 마족은 이 사실을 절절히 실감하고 있었다.
“데르니반, 아기가 계속 울어. 어떡하지?”
“…….”
아니, 한 마족만 실감하고 있었다.
데르니반은 멀뚱멀뚱 저를 쳐다보는 상관을 가만히 마주보다 아기에게 손을 뻗었다.
***
르웨체 국왕의 동생의 머리를 받았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파라스령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을까. 언제부턴가 데온 하르트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상당히 질이 나쁜 꿈이었다.
아주, 맨정신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아주 끔찍한 꼴을 한 원혼들이 나오는 꿈.
[우리를 죽여놓고, 편히 잠이 와?]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죽어! 뻔뻔하게 살아있지 말고 제발 죽어!]아, 양심이 있다면 저들의 꼴을 보고 끔찍하다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렇게 만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데온은 꿈속 한 가운데에 서서 온갖 기괴한 꼴로 저를 압박해오는 원혼들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시선을 돌리거나 눈을 감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자리를 지키고 서서 그들과 눈을 마주하다가 꿈에서 깨곤 했다.
이것이 반복되자 한때는 데온 하르트 본인도 외면했던 죽을 당시의 꼴을 하던 원혼들도 효과가 미미하다는 것을 눈치챈 듯 그가 아는 이들로 변해 죽으라 외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지만.’
오늘도 다양한 이들로 변해 저주를 퍼붓는 원혼들을 지켜보던 데온이 무언가 느낀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죽어… 죽어!]늘상 듣는 저주는 무시했다.
시커멓게 일그러진 검은 안개가 누군가의 모습을 모방하려는 듯 꾸물거리며 형체를 갖춘다.
익숙한 체형과 익숙한 키. 어쩐지 누구인지 알 것 같아 데온은 희미하게 웃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등장할지, 언제 그의 모습을 모방하려 들지.
내 머릿속에 기생하는 원혼 주제에 무엇이 가장 내게 타격이 클지 알아차리는 게 이리도 늦을 줄이야. 정말이지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점차 형체가 완성되어가며 익숙한 검은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침내 얼굴이 완성되려던 순간.
화아악!
시야 한구석에서, 모든 것을 뒤덮듯 강한 빛이 터져 나왔다.
“……!”
데온은 눈을 떴다.
시끄럽게 악쓰던 한 서린 목소리가 거짓말인 것처럼 고요한 방 풍경이 그를 반긴다. 잠시 눈을 깜빡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하니 있길 잠시, 조금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식은땀에 젖은 몸을 말려주고 나서야 데온은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하.”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하, 허무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설마하니 쫓겨날 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꿈에서 쫓겨났다.
……아니, ‘쫓겨’났을 리가. 꿈의 주인은 나다. 그러니 내가 원해서 꿈에서 깬 것이겠지.
이게 바로 모든 생명체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는 생존 본능이라는 것일까. 역겨움이 치솟아 고개를 들었다. 펄럭이는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덩달아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는 창가가 시야에 들어오며, 그곳에 놓인 꽃 한 송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은은한 달빛 아래 활짝 피어있는 모습이 제법 이질적이라 홀린 듯이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히엔이 인간계에서 꺾어온 꽃이라고 그랬지, 아마.’
느리게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이불을 벗어나자 식은땀에 젖은 몸이 찬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삽시간에 몸이 식었으나, 개의치 않고 창가에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꽃은 생각보다 더 멀쩡했다.
“해도 없는데… 아직까지도 생생하네.”
마계라 마력의 영향이라도 받은 건가? 누가 보면 갓 꺾은 꽃인 줄 알겠어.
시들한 기색 하나 없는 꽃을 물끄러미 보다가 창틀에 상체를 기대며 삐딱하게 턱을 괬다. 그 상태로 데온은 고개를 기울여 꽃을 살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이 고요한 공간에 조곤조곤 퍼졌다.
“형이 내게 죽으라 말했다면 기쁘게 죽어줬을 텐데.”
마지막에, 원혼의 형체가 변하는 순간 그는 곧바로 눈치챘다.
저건 크루엘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형이다. 형이 살린 목숨이기에 죽지 못하고 살아가던 인간에게 원혼은 크루엘의 모습으로 죽으라 말하려 하고 있었다.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휘젓고 지나간다. 덩달아 바람을 이기지 못한 꽃이 흔들린다. 그 모습이 마치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것 같아 데온은 나직이 웃었다.
“뭐, 좋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으니.”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찾아와줘, 형.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이후로 악몽을 꾸는 일은 없었다.
세상이 침묵에 잠긴 어느 고요한 새벽녘의 일이었다.
***
“……뭐하니?”
“벨트 매어 드립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내 허벅지에 매고 있는 것인지 묻고 있는 거란다.”
전투도 아닌 회의가 있는 날이다. 그런데 왜 단검집을 맬 때 사용하는 벨트를 매고 있느냐 이 말이다. 그것도 단검집도 없이 오직 벨트만.
황당하단 시선이 따끔하게 와 닿건 말건 벤은 착실히 데온의 허벅지에 질긴 가죽 벨트를 매며 말했다.
“자꾸 허벅지에 지져 끄시니 이거라도 매어 드려야지요.”
“…….”
주어도 없는 말이었으나 파악은 어렵지 않았다.
침묵하는 데온을 슬쩍 고개 들어 본 벤이 못 박듯 덧붙였다.
“앞으로 담뱃불은 이 벨트에 지지십시오.”
“……이러다 회의에 늦겠구나. 끝난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일어나렴.”
명백한 대답 회피에 벤의 눈매가 가늘어졌으나, 데온은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검집을 자주 착용해왔으니 익숙해야 할 텐데 오늘따라 허벅지를 조이는 감각이 거슬려서, 그는 잠시 벨트에 시선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복도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뭐라고 말해야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지난번 자신은 공작의 영지를 통하는 경로를 짚었다. 그러면 돌아서 가게 된다며 말을 얹는 이델리아를 압박하기까지 했지.
그 말을 다시 엎게 되는 것이다. 고작 이런 일에 마왕이 나서서 도와주지도 않을 테니 타당한 이유가 필요했으나….
“0군단장님 도착하셨습니다.”
……미처 생각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회의실 문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