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8
28. 새로운 영웅(3)
벤이 내 잔에 담긴 것만 조사했고, 독이 있다는 확언을 받기가 무섭게 난리 났기에 술병은 미처 조사하지 못했으니 약간의 희망은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안 들었을 것 같다.
내가 막 이 막사에 들어왔을 때, 에드는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잔에는 독이 없었다는 뜻이고, 그 말인즉 침입자는 나와 에드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 둘의 잔에 독을 탔다는 것이 된다.
에드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수준의 은신이라니,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위험했잖아?
……아무튼.
‘기억상 나와 에드의 시야에서 테이블이 동시에 벗어난 적은 딱 한 번이었지.’
딱 소리가 났을 때.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찾아 동시에 고개를 돌렸었다.
다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암살자가 직접 다가와 독을 타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을 탔을까.
‘던져 넣었겠지.’
암살자는 에드의 기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다시 말해 독을 ‘던져’ 넣을 만한 실력이 충분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 해도 주둥이가 좁은 병에까지 던져 넣기에는 시간도 부족하고 위험 부담이 크다.
암살자는 모험을 자제하는 성향이 강하니,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병에 독을 탈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럼 확인을 해 볼까.’
슬쩍 술병을 집어 들었다.
주인이 없는데 혼자 마시려 한다는 것이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어차피 내게 권하려던 것이 아닌가.
그런 뻔뻔한 생각으로 꿋꿋이 냄새를 맡았다.
역시, 없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름대로 무색무취라 불리는 약을 준비한 것 같다만.’
휴대하기 간편한 고체 상태의 약은 액체를 정제해 만들든 가루를 뭉쳐 만들든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재료가 들어간다.
보통은 이마저도 무색무취라 하지만, 글쎄.
‘약을 많이 접해 봤거나, 후각이 말도 안 되게 뛰어난 사람이라면 눈치채겠지.’
그것이 바로 약 특유의 냄새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 술에서는 약 특유의 미묘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나는 씩 웃었다.
‘이 술은 이제 내 겁니다.’
잔이 없긴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안 된다.
혹여 누가 와서 방해할까, 나는 하관을 가린 천을 살짝 내리고 망설임 없이 술병을 기울였다.
***
“그는 위험합니다.”
“흐음…….”
암살자가 열변을 토했다.
크루엘은 별다른 표정 없이 묵묵히 암살자의 말을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그의 손가락은 복잡한 속내를 드러내듯 책상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설명을 전부 들은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알겠으니 나가 보도록.”
“예.”
암살자가 나가고, 생각에 잠긴 크루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결국 0군단장의 실력은 아무리 못해도 저 암살자를 능가할 정도라는 것 아닌가.
그가 보낸 암살자는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직업 특성상 정면 싸움에는 약할지언정, 은신과 암살은 크루엘 자신조차도 긴장해야 할 정도인데.
‘골치 아프군.’
0군단장은 실존하며, 그의 실력도 거짓이 아니다. 이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어디 있을까.
천천히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판단은…….’
이미 내려졌다. 다만 조금 아까울 따름이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젖히고 있던 그가 눈을 뜨고 느릿하게 몸을 세웠다.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낀 수하가 조심스레 그의 결정을 물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내게 내려진 명령은 ‘제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크루엘은 밀리던 전선에 참전했고, 결과적으로 영토를 수호하는 것을 넘어 마계의 영역까지 밀고 들어왔다.
윗선들은 좋아하는 것 같다만, 명령이 ‘마계까지 영토를 넓혀라’ 따위가 아닌 이상, 무리해서 맞부딪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다시 마족이 공격해 올 때를 대비해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영역을 넓혀 놓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지.”
그 ‘할 수 있을 때’는 끝났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 크루엘은 욕심에 휘둘리기엔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이쪽의 사기라도 높았다면 어떻게 붙어 볼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저쪽의 사기가 최상인 만큼 이쪽의 사기는 바닥이다.
“0군단장이 뭐길래.”
차라리 그의 전투 능력만이 문제였다면 고민은 덜했을 텐데.
이쪽이 운이 없는 건지, 0군단장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지금 이 상태 이 분위기로 저들과 맞붙었다가는 백이면 백, 처참하게 깨진다.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존재가 제국 측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이곳에 있는 것도 아니기에 크루엘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0군단장이 있는 마왕군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 녀석’이 필요하다.”
“아…….”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없지. 지원 요청도 늦어.”
마찬가지로 제국의 또 다른 영웅.
자신보다도 먼저 영웅이 된 누군가를 떠올리며, 크루엘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이윽고 천천히 말을 뱉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전투를 멈추는 것이 최선이다. 0군단장의 참전을 막으려면 그것밖에 없어. 그렇지만 마족과 대놓고 협정을 맺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겨우 반격의 기회를 얻은 저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도 없을 테니…….”
툭.툭.툭.툭.
집게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린다.
이것 역시 ‘영웅’이라는 칭호가 주는 망설임.
지켜야 하기에 얻은 칭호이건만, 오히려 발목을 붙잡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그는 짐짓 인상을 쓰면서도 결국 머릿속의 계획을 입 밖에 내어놓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물러난다.”
“예?”
“단, 쫓아오는 놈들은 무조건 죽인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확실하게 죽여야 돼. 절대 밀리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약한 면을 보이지 않고 서서히 물러난다.
딱 본래 영역인 인간계까지 물러나며 먼저 인간계를 침범하지 않는 한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여야 한다.
“이제 와서 물러나면 너무 속 보이지 않을까요. 마족들도 눈치챌 겁니다.”
“그래서 말했잖아. 쫓아오는 놈들은 ‘확실히’ 죽이라고.”
“…….”
“물러나는 우리에게 덤벼들었다가 처참하게 깨지면 알게 되겠지.”
저들은 0군단장의 소식을 듣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구나.
밀리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문제가 생겨 급히 물러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갖고 있어 봤자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쓸모없는 땅, 이 땅을 위해 검을 들어야 할 의미를 갖지 못한 것뿐이다.”
“…….”
“그런 의미를 내비쳐야지.”
공식적인 협정을 맺을 수 없지만, 암묵적인 협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제국의 영웅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크루엘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영웅으로서의 첫 데뷔전을 망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0군단장이 날뛰지 않아야 가능하겠지만, 그는 마왕군이 밀려서 온 지원이니 아마 괜찮을 거다.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굳이 나설 이유가 없지.”
“하긴……. 0군단장이 직접 전투에 나서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윗분들은 결과만을 본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따지는 것이 아닌, 그저 결과만을.
그런 의미에서 크루엘이 지휘하는 병력이 마왕군에 밀려 다시 인간계의 침범을 허락한다면, 윗분들은 분명 그의 영웅 자격을 다시 논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는 곤란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조용히 입술을 짓씹은 크루엘이 다시 명령을 내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지, 지휘관님!”
천막을 걷고 급히 들어온 한 불청객 때문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가쁜 호흡, 흙투성이의 옷차림을 확인한 크루엘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사가 호흡을 가다듬고 알아서 보고하기를 기다리며, 잠시 벗어 놓았던 건틀렛을 끼고 검을 허리춤에 찬다.
다짜고짜 뛰어 들어온 것에 대한 질책은 없었다.
효과적이고 빠른 소식 전달을 위해 급하거나 중요한 일인 경우 누구든 곧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명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크루엘은 그를 질책하는 대신 조용히 전투 준비를 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고─
“마왕군이 진격을! 선두는 0군단장…….”
덜컹.
병사의 보고가 채 끝맺기도 전에 곧바로 투구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계획이 어그러졌다.
상황은 처참했다.
전장의 상황을 전부 훑기도 전에, 이미 파악을 마친 크루엘의 눈이 투구 안에서 차갑게 가라앉았다.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 속수무책으로 밀려오는 전선. 더해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 소리와─
──웃음소리.
누구의 비명이고, 누구의 웃음인가.
“……하.”
실소가 나왔다.
크루엘은 검을 움켜쥐고 전장을 노려보았다.
적어도 그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 중 적을 죽이며 웃는 미친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마족들이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울분을 풀기라도 하듯 유쾌하게 웃으며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완전히 넘어갔군.’
분위기가 저쪽으로 넘어갔다.
전쟁은 사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불리한 전쟁일지라도 사기가 드높으면 약이라도 빤 듯 미친 듯이 적들을 처치해 나갈 수 있고, 제아무리 유리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사기가 바닥일 경우 고전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지금 이 싸움은 제국 측이 불리하다.
‘안 돼.’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리도 허무하게 밀려서야.
손을 써야 한다.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감각이 선명해진 상태에서, 크루엘은 어느 한 곳을 바라봤다.
시끄러운 전장 속, 유일하게 공간이 단절되기라도 한 듯 고요하기 그지없는 곳.
그곳에, 악마가 하나 서 있었다.
***
“흐핫, 아하하하핫!!”
단검이 손안에서 자유자재로 돌아갔다.
묘기라도 부리듯 똑바로 쥐어지기도 하고 역수로 쥐어지기도 하며 때로는 손등을 타고 넘어가기까지 하던 단검은 여기에 잠시라도 홀린 이들을 잡아끌어 또 하나의 희생자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몇 명이 희생되었던가.
단검이 뽑혀 나온 자리에서 피가 솟구친다. 이제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동료의 희미한 신음 소리가 주위에 있던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눈앞의 검은 악마는 절대 상대를 쉽게 죽이지 않았다.
힘줄을 끊든, 손을 잘라 내든, 혹은 눈을 찔러서라도 반격의 여지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 이를 즐겁다는 듯 웃으며 난도질했다.
혹여 실수로 바로 죽였다 하더라도 그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본인의 잔혹함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아, 악마…….”
어디선가 떨리는 목소리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아마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겠지.
전장에서의 약한 소리는 사기를 위해서라도 좋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를 나무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 있는 병사 자신조차도 그랬다.
간신히 억눌러 놓았을 뿐인 감정이 발버둥 치며 저 말에 강력한 동의를 표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악마.’
저치를 두고 악마라 할 수 없다면, 누구더러 악마라 하겠는가.
손이 덜덜 떨린다. 다리가 땅에 박힌 듯 굳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상대를 난도질하는 저 뒷모습은 무방비하기 그지없건만, 병사는 차마 함부로 무기를 겨눌 수 없었다.
겨누는 것 자체는 쉽다.
무기를 들어, 저 무방비한 등을 향하게만 하면 된다.
다만, 그랬다가는.
‘나 역시 저렇게 되겠지.’
싫다. 두렵다.
행동을 했을 때 당면하게 될 결과를, 병사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도망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등을 돌리는 즉시 눈앞의 악마가 쫓아오리라는 것을 본능이 알려 주고 있었기에.
달려들지도 못하고 도망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끝내 병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희게 질린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누가 제발.’
──살려 줘.
짧디짧은 외침이 폐부에서부터 솟구치듯 올라왔다가 목구멍에서 눌려 삼켜진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쨍그랑!!
“……어?”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었다.
화악 불어오는 흙먼지에 눈을 감았다 뜨니, 언젠가 멀리서 본 적 있는 갑옷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동시에 병사는 무기를 든 팔을 축 늘어뜨렸다.
“아, 아아…….”
살았다.
안도가 굳어 버린 몸을 다정히 토닥인다.
금방이라도 풀려 버릴 것 같은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고 서서, 병사는 눈앞의 존재를 또렷이 눈에 담았다.
제국의 새로운 영웅. 전장의 별. 이성적인 지휘관.
크루엘.
그가, 여기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