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94
294. 나의 행복을 묻지 않기에(4)
붉은 눈동자가 부서질 듯이 흔들린다. 척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을 열던 단이 흘긋 마왕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가 태연히 흘러나왔다.
“저도 모르게 조급해졌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그냥 포기했거나.
한숨 같은 혼잣말이 뒤따랐다. 그건 단 스스로를 향한 반농담에 가까웠으나, 뛰어난 청력으로 그걸 들은 데온은 칼에 찔린 듯 얼어붙었다. 본인이 원인 제공자라는 것을 아주 잘 아는 청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너…….”
쓸데없이 기민한 두뇌가 원인을 파헤치고 유추한다. 삽시간에 추려진 답은 하나같이 끔찍했다.
데온 하르트가 단을 거부했기에, 단은 자신의 쓸모를 되돌아본 것이다. 하여 쓸모를 보이기 위해 이리 무리한 일을 벌였을 테고.
어쩌면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처음부터 이 상황을 상정하고 일을 벌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소리 없이 몇 번이고 열렸다 닫히던 입이 이내 목 졸린 듯한 신음을 뱉었다.
“……나 너 못 구해.”
“압니다.”
“너 죽는다고.”
“알아요.”
상황이 상황이라 그를 빼내지 못한다.
바로 전날 일이 터져 의심을 사는 상황인데, 군단 간의 불화를 유도한 녀석을 감싸면 어떻게 되겠는가. 단은 죽어야 한다.
그래서, 데온은 끝내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위태롭게 떨리는 목소리가 공간에 아스라이 흩어졌다.
“대체 왜 그런 건데…….”
왜 내게 언질도 없이 멋대로 행동한 거냐고…….
네가 밉다. 미워서 미치겠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든다 했더니만, 정말 마지막까지 이러는 게 끔찍하게 싫다.
눈을 덮은 손 아래, 붉은 눈동자가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의 빛을 띤 채 침잠했다.
“…….”
무너지듯 가라앉은 데온의 분위기를 살피던 마왕이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중간에 단과 눈이 마주쳤으나 멈추는 대신 검지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는 엄지로 데온을 가리키며 싱긋 눈을 휘었다. 뜻하는 바를 눈치챈 단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데온 하르트의 정신을 수습하라고.’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그가 무너지면 기껏 다 끌어안고 가려는 저의 행동이 무색해지지 않나.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지하를 벗어나고, 단은 마왕이 떠난 자리에서 다시 눈을 돌려 데온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느리게, 속삭이듯이 그를 불렀다. 마스터.
“이제 진정하셨습니까?”
“……그래.”
데온이 고개를 들었다. 물기 없는 얼굴이 단을 똑바로 마주하고, 기댈 생각 따윈 없으니 어설프게 손 뻗지 말라는 듯, 혹은 무언가 눈치챈 듯 독기 서린 목소리가 악다문 잇새로 떨어졌다.
“넌 정말 좆같은 새끼야.”
“오.”
어느 정도 진정되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온은 확신했다.
“너, 처음부터 이 상황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
“…….”
“네가 실패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어. 무모한 계획이라는 걸 몰랐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그저 실패해도 손해 볼 게 없어서 행동한 것이리라.
“넌 지금 모든 걸 안고 가려는 거야.”
지금 내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그가 내 죄를 가져간 채 죽는다면 나를 향한 의심은 어느 정도 사그라들 터.
단의 입장에서는 계획이 성공하면 두 군단장 간의 사이가 틀어지니 이득이고, 실패하면 데온 하르트를 의심의 늪에서 꺼낼 수 있으니 그것대로 이득인 것이다.
“씨발 새끼.”
결국 예상대로, 그는 본인의 목숨마저 수단으로 여겼다. 그것도 다름 아닌 나를 위해서.
핏물이 일렁인다. 발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뱀처럼 몸을 휘감고 올라와 목을 졸랐으나 데온은 꿋꿋이 단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절로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사나운 눈빛에도 단은 개의치 않고 씩 웃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험악한 분위기를 추스르듯 능글맞게 튀어 나갔다.
“제가 지는 게임에 무언가를 걸 리 없잖습니까.”
“개새끼.”
“거, 입이 험하시네.”
처음부터 ‘실패’는 없는 계획이었다. 단은 만족했다.
그게 심히 불만스러운 듯 데온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진짜 입이 험한 게 뭔지 보여줘?”
“……뭐, 그래도 하나는 계산 미스였더군요.”
말 돌리는 꼴을 보니 더 짜증 난다. 그러나 데온은 이어진 단의 말에 채 짜증을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전 마스터가 제게 오만 정이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어도 마스터에겐 별 타격이 없을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단은 아직까지도 동요를 완전히 수습하지 못한 데온을 대놓고 훑었다. 마치 이거 보라는 듯.
“지금 이 모습을 보니 아닌 것 같네요.”
“…….”
“마스터. 이건 혹시 착각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흔들림 없는 눈이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흔들림 없는 단단한 목소리가 또렷이 이어졌다.
“전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으로 움직인 겁니다. 마스터의 감정은 그것의 희생양이 된 것이고요.”
난 크루엘 하르트가 아니다.
순수하게 당신을 위해 희생하는 그림을 그리기엔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 나는 그저 당신이 재앙으로서 완성되기를 바란다는 지극히 사적인 욕망에 따라 움직였다.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를 우위에 두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제 이기심을, 진심을 다해 당신을 위한 사람의 숭고한 희생과 겹쳐 보시면 곤란합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데온 하르트라는 사람에게 스몄음에도. 언제부턴가 데온 하르트를 ‘재앙’이 아닌 ‘한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에도, 결국 단은 변함없이 자기 자신의 욕망을 우위에 두었다.
실로 역겨운 인간이지 않나.
‘애초에 당신이 싫다니 어쩌니 하며 ‘재앙’으로만 보고 있노라 외친 주제에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이럴 거면 그런 말은 하지 말 걸 그랬지.
제멋대로 흘러간 의식이 과거에 나눴던 어느 한 대화를 회상한다. 하르트 소속의 성문을 열기 위해 비밀통로를 이용할 때였던가.
사실 그때 한 말과 달리 난 이미 당신을 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재앙’이라는 단어는 이미 단물 빠진 껌이 된 상태였고.’
그럼에도 그런 말을 했던 이유는 껌의 단물이 빠졌음에도 습관적으로 턱을 움직이듯, 관성에 의해 내뱉은 발언이었을 터.
만약 당시의 발언이 진심이었다면 이후 아무렇지 않게 데온 하르트에게 장난을 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감정을 다시 떠올리고 곱씹으며 적절히 거리를 뒀겠지. 그러나 자신은 그 대화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통로 밖으로 나가려는 그에게 장난을 쳤다. 절대 가볍다 말할 수 없는 대화는 쉽게 잊은 뒤였다.
‘뭐, 그래봤자 지금은 위선이고 역겨운 합리화일 뿐이지만.’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데온 하르트를 보았다.
“그러니까 숨 쉬어.”
“……헛소리.”
그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 듯, 데온이 퉁명스러운 음성을 내었다.
“나중에 두 번 죽기 싫으면 나보고 왜 울어주지 않았냐고 찾아오지나 마.”
실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단이 픽 웃는다. 그러나 데온은 진심이었다.
화를 낼지언정 울지는 않을 거다.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거야. 너 따위는 내게 타격을 주지 못한다. 새빨간 눈동자가 피를 품고 반질거렸다.
“아무럼요.”
“……빌어먹을 새끼.”
“욕 한번 다양하게 하십니다.”
울컥한 데온이 말을 뱉으려 할 때, 발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내려가고 있음을 알리듯 의도적으로 크게 울리는 구두 굽 소리. 데온과 단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이어서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는 9군단장을 대동한 상태였다.
“대화는 잘 끝났어?”
“…….”
이 상황에서 잘 끝났을 리가 있나.
데온이 짜증스럽게 입을 열다가 그의 곁에 있는 트로버를 보고는 멈칫한다. 어색하지 않을 만큼의 짧은 정적을 사이에 두고, 마왕을 한 차례 노려본 그는 몸을 돌렸다.
“쉬러 갈 겁니다. 저 새끼는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고요.”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네. 제 손을 떠났습니다.”
아예 연을 끊은 듯,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에 단이 소리 없이 웃는다. 미련 없이 자리를 뜨는 데온과 아예 키득거리기 시작한 단을 눈을 가늘게 뜬 채 번갈아 보던 마왕이 이내 싱긋 웃었다. 작디작은 혼잣말이 속삭이듯 허공에 흩어졌다.
“데온 넌 정말 사랑받는 존재구나.”
이것도 운이라면 운일까. 보는 내가 다 부러울 정도야.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잘 못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여기, 단이 널 보고 싶다고 하던데.”
“?”
의문을 담은 눈이 어서 말하라는 듯 단을 향한다. 단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힐긋 마왕을 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마왕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뻔뻔하긴.”
“…….”
“난 이만 갈 테니 둘이서 대화 잘 나누도록 해. 일단 단은 죄인이니 트로버는 대화 끝나면 걔 아무 데나 잘 가둬두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마왕이 손을 흔들며 위로 올라간다. 트로버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단을 보았으나, 단은 곧장 입을 열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트로버의 재촉 따윈 잡음으로 넘겨버린 채, 내려올 때의 거리와 마왕의 걸음 속도를 묵묵히 계산하여 그가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멀어졌다 싶을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네요. 다름이 아니라, 그때 내기의 보상을 요구하고 싶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트로버 님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뵙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이어서요.”
“뭐, 일단 날 이곳에 부른 건 이해하는데…….”
마력을 걸고 들어주기로 약속했던 소원권.
……빌어먹을.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들어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이미 마왕성에 쫙 퍼진 소문으로 단의 소식을 알고 있는 트로버가 곧장 얼굴을 구겼다.
“바라는 게 뭔데? 만약 빼내 달라는 부탁이면….”
“데온 하르트의 편이 되어주십시오.”
“…….”
예상 밖의 답이었다.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잠시 굳어 있던 트로버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뭐야, 정말 그거면 돼? 살려 달라, 빼내 달라, 이런 게 아니고?”
“트로버 님을 통해 도망쳐봤자 얼마 못 가 다시 잡혀 죽을 것을, 길동무 만들 생각이 아니고서야 뭐하러 그런 부탁을 하겠습니까. 도망자로서의 의미 없는 삶은 제게 있어 죽는 것보다 더한 것이기도 하고요.”
“……좋아!”
생각보다 별거 아닌 부탁이었네!
제가 죽고 혼자 남을 데온 님이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평소 그럴 것 같지 않게 굴면서 순진하긴. 기분 좋은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나였다면 더한 것을 빌었을 텐데.’
어쨌건 이쪽엔 이득이다.
혹여나 마음이 바뀔세라 트로버는 냉큼 그걸 ‘소원권’으로 받아들여 아예 못을 박았다.
“확실하게 데온 님의 편이 되어드리도록 하지!”
머릿속의 계약서가 반응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계약에 도장을 찍었다는 것을 느낀 단이 씩 웃었다.
“든든하네요. 흔쾌히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둑잡기에서 조커 카드를 뽑아간 상대를 보는 듯한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