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306
306. 누구보다 큰 죄를 지을지어다(4)
통신이 끝나고 나갈 채비를 마친 알레테아는 등 뒤에 따라붙는 불안한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기실 절실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을 마주하고 멈칫한 것도 잠시, 빙긋 미소를 지은 그녀가 제 오라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오라버니.”
“…….”
린델 라이너는 통신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뜬 지 오래다.
둘만 남은 공간에서, 알레테아는 감히 황제의 얼굴을 두 손을 답삭 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친절하고, 상냥하고, 분노할지언정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던 굳건한 사내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그를 안심시키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전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그건 네 감이니?”
“아뇨. 하지만….”
예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술이 익숙한 문장을 뱉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죠.”
전 황제, 숙부님께서 종종 하시곤 했던 발언.
아, 정말…. 역시 난 가족에겐 못 이기겠다. 엘피디우스는 무너지듯 웃었다.
“정말이지… 그래.”
“…….”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알레테아가 돌아선다. 가벼운 인사 한마디만 남긴 채,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길을 떠난다.
그럼에도 엘피디우스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막을 수 없었다.
황제이기에, 정치적인 상황 따위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알레테아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왜 하필 저 아이가 영웅이 된 건지.’
차라리 내가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을 원망하는 한편으로는 그녀가 영웅이 된 것을 이해할 수밖에 없어 절망하게 된다. 지금 그녀는 그야말로 ‘영웅’에 걸맞은 행동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역시 황제는 네가 되어야 했어.”
혼자 남은 공간에서, 엘피디우스는 낮게 중얼거렸다.
***
코앞까지 온 결전에 인간계 전역이 전운에 휩싸였다.
‘……아니지, 마족들이 출발했으니 전쟁은 이미 시작된 건가.’
통신을 끊은 산국의 왕이 한쪽에 서 있던 사에린을 돌아보았다.
다가온 전쟁으로 인한 긴장감은 둘 사이에도 머물고 있어 잠시 그녀를 보던 연화는 이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떠나는 대신 과인과 함께 산국을 돌아보는 것은 어떤가?”
“…….”
“제법 아름다운 풍경이 많은데. 그대도 직접 보면 만족할 거야.”
지나치게 희망적인 발언이다.
그러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기에 사에린은 상대의 의도대로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전쟁의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 부려 먹으려는 속셈은 아니신가요?”
“이런, 들켰나.”
***
르웨체의 국왕은 조용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2차전이라……. 본래 1차에서 끝났을 것을 아등바등 전력을 끌어와 억지로 만들어낸 마지막 기회다.
미래를 그리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만히 보던 것도 잠시, 그가 속삭이듯 흐리게 중얼거렸다.
“……질 수도 있겠지.”
질 가능성이 다분한 전쟁이다.
패배국의 말로는 언제나 비참했으니, 같은 인간도 아닌 마계는 더하겠지.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어차피 남은 길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현세대를 지킬 수 없다면 후세대라도 지켜야 함이 옳으니.”
무릇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의 용사를 죽인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른 용사가 탄생하겠지. 이를 통해 후세대가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될 터.
그렇기에 기껏 키워놓은 병력도, 힘들게 모은 영웅도, 심지어는 식량까지도 기꺼이 내놓은 것이다.
‘인류애 같은 건 없다. 다른 나라가 무너지면 르웨체 또한 무너진다는 사실만 아니었어도 타국에 지원은 하지 않았겠지.’
남은 가족이 없는 르웨체의 국왕에게 사람은 두 분류로 나뉜다.
르웨체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자.
타국인 위에 자국민이 있으니. 지금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타국을 지원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오랜 가뭄에 내 백성 먹여 살리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인간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국왕은 그저 자국을 위하기에, 인간계를 지켜야 했다.
그뿐이었다.
***
그리고.
각국의 성에 때 이른 첫눈이 내렸다.
온난한 기후인 산국부터, 중간에 위치한 르웨체, 북부에 위치한 제국까지.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
전시상황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드벨라니아는 착실하게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유독 이곳저곳에서 자주 보이던데, 어지간히도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양이지. 데온은 받은 서류를 넘겨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요즘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문을 향하던 걸음을 멈춘 드벨라니아가 웃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정보를 구해야 해서요.”
“다른 군단장들을 만나는 게?”
“아군의 정보도 중요하니까요.”
“그래?”
팔랑-.
팽팽한 분위기와 달리 서류가 가볍게 넘어간다. 데온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드벨라니아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을 툭 뱉었다.
“네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겠지.”
“…….”
“나가봐.”
그를 둘러싼 공기가 어울리지 않게 온화하고 태평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눈을 가늘게 뜬 채 데온을 살피던 드벨라니아는 시간을 오래 끌지 못하고 고개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만나야 할 이들이 있어 바쁜 상황이니까.
‘어디 보자, 약속 시간이… 10분 뒤네.’
다행히 딱 맞춰 도착할 수 있겠어.
좀 더 데온 님 근처에 머물고 싶었는데 아쉽다. 데온 님께 드린 서류 중 일부 내용은 일부러 유출했는데, 그 반응을 보지 못하다니.
벌써부터 반응이 오는 듯 시끌시끌한 복도 끄트머리를 보던 드벨라니아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땅을 박찼다. 소란의 원흉들과 마주치기 직전, 복도 한쪽에 있던 그림자가 잔상처럼 휙 사라졌다.
날래고 유연한 몸을 이용해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목적지까지 도착한 드벨라니아는 버려진 창고 문 앞에 섰다.
몇이나 모였으려나. 작은 호기심을 품은 채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문을 열자 안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하나, 둘… 좋아. 전부 모였네.’
그대로 문을 닫고 안에 들어서며, 그녀는 싱긋 눈을 휘었다.
“마음은 정했어?”
“…….”
“뭐, 여기 왔다는 것 자체가 마음을 정했다는 뜻이겠지.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지?”
품에서 지도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그럼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설명할 테니, 잘 들어.”
***
드벨라니아가 나가든 말든 그녀는 안중에도 없는 데온은 서류를 읽는 것에만 집중했다.
마계에 붙은 다른 왕국들이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다 할 물증 하나 없는 심증뿐이라 하여도 촘촘한 감시하에 두고 있으니 아마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지.
‘감시에 병력을 소모하게 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뭐…….’
어차피 그들을 이용해야 할 정도로 이쪽의 전력이 궁핍하지 않다. 데온은 가볍게 생각하고는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리고 가장 첫 문단에서 눈에 들어온 단어에 멈칫- 시선을 고정해야 했다.
[영웅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 근처에 프리미로 기사단이 배치되어 있음.]프리미로 기사단.
선배님이, 스티그마 프리미로가 이끌던 정예 기사단이 아닌가. 선배님이 제국에 남겨둔 흔적이자 유능함의 증거.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들이 아무리 정예라고 해도 용사나 영웅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영웅들과 용사의 싸움에 일반인을 끼워놓다니, 이건 거의 죽으라는 뜻 아닌지.
이걸 진행한 것으로 보이는 엘피디우스나, 그 꼴을 그냥 두고 본 군주들이나……. 그들이 정녕 제정신인지 의심하며 흐린 한숨을 내쉬었다.
‘영웅만으로도 피곤한데, 선배님의 기사단까지…….’
슬쩍 시선을 내려 허리 조금 위에서 찰랑이는 핏물을 보았다.
……영웅들을 죽이는 것을 넘어 선배님의 기사단이었던 이들까지 죽인다면, 과연 이건 어디까지 차오를까. 수많은 목숨이 덧없이 꺼져가는 전쟁터에서 모든 원흉인 나는 진정 이것에 집어 삼켜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난 살아서 마왕성으로 귀환해야 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환각 따위에 죽을 수는 없다.
‘프리미로 기사단을 죽이지 않는 편이 안전하긴 한데…….’
각 군단장들과 군단은 세 나라의 성을 공격해야 하니 남는 전력이 없다. 그들 중 일부를 이쪽으로 빼내는 것은 전력 낭비인 데다, 애초에 영웅들이 있는 쪽엔 혼자 갈 생각이었던 탓에 이런 상황은 염두에 두지 않아 특별히 떠오르는 방안이 없기도 하고.
‘조금, 귀찮아지겠네.’
마왕군 중 일반 병력 정도만 적당히 뽑아서 데려갈까.
그렇다면 몇 명을 데려가는 것이 적당할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니 이쯤 생각하자.’
나중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겠지.
대충 생각을 정리한 데온이 미간을 꾹꾹 누르던 손을 내려 서류를 잡았다. 그대로 다음 장으로 넘기려던 순간, 쿵쿵거리는 거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소란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대장!”
“대자아앙!!”
“……어, 왜.”
뭔데.
소란의 틈바구니에서 적당히 가운데에 자리 잡은 클레터가 들고 온 이불을 조용히 바닥에 깐다. 그 위에 선 이들이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았다.
……진짜 뭔데?
“왜 저희는 계획에서 빠져 있는 겁니까!”
“……아?”
“이번 전쟁에 저희는 참전하지 않잖습니까!”
“대장도 참전하면서!”
뭐야, 그걸 벌써 알았어? 생각보다 소식이 빠른데…?
피곤한 의심 대신 소식을 빠르게 주워듣는 뛰어난 청력에 대한 감탄으로 적당히 끝맺으려던 사고는, 이어진 누군가의 발언으로 방향을 급격히 틀었다.
“프리미로 기사단이 대장을 거슬리게 한다면서요?”
“……그걸 누구한테서 들었어?”
데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분명 누군가 의도적으로 전한 거다. 이 녀석들을 전쟁에 참전시키려고!
이는 달리 해석하면 미친개들을 죽이고자 한다는 뜻이 되기에.
‘왜지?’
데온은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내게 정신적 고통을 주기 위해 참전시키려는 건가? 아니면 내 전력을 줄이려고? 앞의 것들에 비해 확률은 희박하지만 미친개들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러한 속내를 알 리 없는 미친개들이 아차 싶었던 듯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가 싸우겠습니다!”
“마왕성의 병력이란 병력은 죄다 출전시키면서 저희만 남기는 게 어딨습니까!”
“마족도 얼마 없는 마왕성에 마왕과 머문다니, 생각만 해도 뻘쭘합니다!”
데온 하르트의 질문처럼 누군가로부터 ‘들은’ 것은 아니다. 숙소에 서류 일부와 함께 쪽지가 있었으니까.
프리미로 기사단이 있다는 것과, 데온 님 혼자 그곳에 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들과 전투를 치른 이후 곧바로 영웅들과 전투를 치를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아마 피로가 상당히 쌓여서 위험할 수도 있다는 추측까지.
“프리미로 기사단만이라도 저희가 상대하게 해주십쇼!”
“걔네랑 싸우고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싸우다가도 영웅이 보이면 바로 튀겠습니다!”
“너네…….”
대장을 사랑하는 로프티 기사단원들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저래서 바닥에 이불을 깐 거였군. 아주 작정하고 온 거였어. 미간을 짚은 채 한숨을 푹 내쉰 데온이 나직이 욕설을 뱉었다.
“일어나 이 새끼들아.”
“참전하게 해주십쇼!”
“해주십쇼오오!”
“……프리미로 기사단은 정예야.”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가 소란을 끌어내렸다.
분위기를 읽은 로프티 기사단원들이 멈칫- 데온을 바라본다. 데온은 착잡한 얼굴로 아직도 드러누워 있는 이들을 눈에 담았다.
“너희가 그들과 정면으로 맞붙는 건 곤란해.”
확실히 프리미로 기사단 같이 죽여봤자 손해인 놈들과 싸우는 것은 피곤하고 귀찮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이 녀석들을 대신 내보내야 할 정도라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미친개들은 이러한 사정도 모르고.
“……저희도 나름 정예입니다!”
“대장의 눈에는 저희가 부족해 보이시겠지만, 이래 보여도 저희 나름 경력이 쌓였습니다. 적어도 살아남는 것 하나는 잘할 자신 있습니다.”
“알지. 너희가 정예라는 걸 왜 모르겠어.”
10년 넘게 싸우고 구른 끝에 살아남은 놈들이 이 녀석들인데, 어느 누가 정예가 아니라 당당히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너희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