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31
외전1. 빛이자 황금 되신 현인 (2)
출신이 좋고 용모가 단정한 힐레이다 세이들은 차기 시녀장이 될 거라는 평가를 듣는 시녀이다.
그녀는 자신이 모시는 높은 분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이끄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귀족가의 자녀로 태어난 힐레이다는 카롤링거어까지 잘했으니, 가정에 우환이 많은 필리프에겐 꼭 필요한 인재였다.
성대한 국혼 후 8년이 지났다.
자존심 센 쥴레이카 왕비는 고생스럽게 알비온어를 익혀 수준 높은 실력을 지니게 됐다.
하지만 정이라곤 없는 배우자와 대화할 땐 여전히, 옛날 귀족들처럼 카롤링거어를 썼다. 혁명 전에는 카롤링거어가 데르니에 대륙의 외교적 공용어였던 탓이다.
필리프의 카롤링거어 실력은 좋게 봐줄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더더욱 그렇게 행동하는 게 분명했다.
광활한 마인라트 영지의 공녀로 태어났으며, 선황의 남동생을 부친으로 둔 쥴레이카는 황제의 여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고귀한 귀부인인 자신이 그 평민 여인과 더불어 궁성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도 용서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부간의 성실을 약속하는 [언약]을 맺지 않았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적자를 낳아주었으므로 쥴레이카는 왕비의 의무를 다했고, 필리프는 의무를 다한 배우자에게 필요 이상의 헌신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푸른 피를 가진 자의 방식이 아니었으니까.
냉랭한 국왕 부처의 사정을 모두 알면서도 힐레이다는 무거운 입을 꽉 다물어, 부처 모두의 신의를 얻었다.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일이 드문 왕과 왕비는, 자신들의 아이를 힐레이다에게 맡기는 데에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 결과 그녀는,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서, 우거져 숲이 된 코티지 정원을 가로지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어린 왕자를 쫓아.
아슬란 왕자는 코티지 2층의 침실로 어린 강아지처럼 뛰쳐 올라가버렸다.
다급히 왕자를 따라잡은 그녀는 숨을 가다듬기도 전에, 어린이의 질문과 맞닥뜨렸다.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카롤링거어로 아슬란이 묻는다.
“【힐레이다, 힐레이다! 저 애는 왜 누워만 있어? 말도 못 하고?】”
힐레이다 세이들은 아슬란 왕자의 호기심을 저지시키는 데 실패했다. 노련한 시녀인 힐레이다에게도 이 솔직하고 생기 넘치는 왕자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왕세자가 될 것이란 기대를 받는 왕가의 적자는 호기심이 많고 건강한 아이였다.
왕자는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온 궁성을 쏘다녔는데, 숲 그늘로 어두운 코티지를 특별한 모험의 터전으로 여기는 듯했다.
귀중히 여기는 외아들이 이곳에 들른 걸 안다면 쥴레이카가 터트릴 화는 무시무시할 것이다.
‘그나마 레이디 엘레네가 기도를 하러 갈 시간이라 다행이지.’
점점 더 정신의 혼란이 심해지는 레이디 엘레네는, 이제 하루의 대부분을 궁전의 작은 여신상 앞에서 꿇어앉아 기도하며 보냈다. 궁에 파견된 신녀 하나만이 엘레네의 안위를 돌보는 처지였다.
그래도 언제 다른 시녀들의 눈에 띌지 모르니 힐레이다는 서둘러 아슬란을 구슬렸다.
“【멜키오르 님은 많이 아프답니다.】”
“【그래서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고, 혼자선 밥도 못 먹고, 정원을 거닐 수도 없는 거야? 백-치?】”
“【전하, 그런 말은 입에 담으시면 안 됩니다.】”
아슬란은 그 백치에 대해서 꽤 많은 걸 알았다. 어른들은 잠든 어린이의 침상 곁을 지키며 별 이야기를 다 하니까.
브룬넨어를 써서 속살거리면 못 알아들을 줄 아는 모양이지만, 아슬란은 어머니의 언어를 꽤 잘 알아들었다.
브룬넨에서 어마마마를 따라온 귀족 출신 시녀들은 모두 같은 말을 했다.
출신 모를 천것에게서 난 불길한 아이를 궁에 두는 건 몰상식한 일이라고. 어마마마를 모욕하는 처사라고.
“【왜?】”
“【그건 나쁜 말입니다. 지체 높으신 전하께는 걸맞지 않은 것이에요. 자, 이제 멜키오르 님을 쉬도록 해 주어요.】”
그녀는 자연스레 아슬란을 감싸 침실 밖으로 이끌었다. 마음에 드는 시녀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서면서도, 일곱 살짜리 왕자는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쟤는 매일 누워있던데, 또 쉬게 해 줘야 해? 하루 종일, 매일매일? 누워선 뭘 하는데?】”
“【아무것도요.】”
“【하지만 오늘은 쟤의 생일이라면서! 근데도 못 일어나?】”
아슬란은 카롤링거어와 알비온어를 함께 쓸 만큼 똑똑한 소년이었다. 그가 보기에, 오늘 이 외진 별궁 앞으로 실려 오는 건 분명, 생일 때 터트리는 폭죽과 잔치에서 켜는 등불이었다.
“【있잖아, 오늘 배웠어. 4년에 한 번 달력에 하루가 더 있는 날이지. 선물 받은 거 같은 날인데, 쟤는 누워만 있다니. 심심하지 않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아슬란 님.】”
어떻게 그럴까. 새소린 들릴까? 근데 쟤는 몇 살이야? 어떻게 저렇게 금이랑 상아로만 만든 인형 같지? 내 강아지 루안을 데리고 와서 놀아주면 안 될까? 아니야 어마마마가 루안의 흙발로 카펫을 밟게 하지 말랬는데.
어린아이의 말은 맥락이 없고, 단편적이며, 폭발하듯 튀어 오른다. 반짝이고 버거운 것. 낯설면서도 혼란을 주지 않는 목소리였다.
멜키오르는 눈을 떴다.
그는 오전에 시녀가 눕혀놓은 자세 그대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의 침실로 달려 들어온 어린아이가 누구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아슬란 리오그난에게서는 속마음이 흘러나오는 대신, 오로지 육성만이 들려왔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형제’들에겐 스킬이 적용되지 않았다.
건강하게 자라 뛰어다니는 아이, 또박또박하게 영민한 목소리, 멜키오르가 이 육신을 입은 후 두 번째로 돌아오는 2월 29일.
고통으로 인해 뒤엉켜있던 멜키오르의 뇌리에 시간과 연도가 뚜렷이 자리를 잡는다. 이제껏 듣고 보았던 모든 정보가 올바른 색인을 얻는다.
망각의 축복 없이 터질 듯 적재된 기억들 사이에 질서가 들어선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올바른 순서대로 기억할 수 있다.
지금은 1872년.
과거에는 이토록 오랜 세월 자아를 정립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멜키오르가 기나긴 혼돈에 빠져있는 동안, 어느 샌가 끝의 시작이 다가오고 있었다.
곧 필리프는 신녀 테오필라 이그레인을 만나리라. 왕을 낳기로 예정되어 있는 그 신녀를.
실성한 정인과 냉랭한 왕비 둘 모두에게 내쳐진 필리프는, 혼인의 정절을 지키는 종류의 배우자는 아니었다.
필리프가 종종 춘희의 밤을 사는 일은 귀족들 사이의 공공연한 농담거리였다. 탄신연 때 궁성을 출입하는 코르티잔에게 손을 뻗는 것은, 물론 권장할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사리에 안 맞는 난행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신녀와 국왕 사이에 있을 단 하루의 밤은 신화의 장치이지, 정욕이나 사랑의 결과일 수가 없다.
아슬란의 순수도 곧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제 말구유와 마구간, 성스러운 어머니에게서 난 박해 받는 자, 우리 세상의 왕이 올 차례이니.
여신이 총애하는 영웅의 노래를, 멜키오르는 속수무책으로 청취해야만 한다.
전적인 순종도, 완전한 저항도 늘 같은 결말을 맞이하고야 마는데, 그에게는 왜 생각과 의지가 주어진 것인지.
하지만 이 시작은 멜키오르가 과거에 알았던 그 어떤 시작들과도 다른 조건을 가지는 것만 같았다.
이번에 그 모질고 혹독한 신이 예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쨌거나 역사는, 새로운 천 년의 주인공이 태어나기를 열렬한 기대 속에 고대하고 있다.
그 가운데 멜키오르 리오그난의 고통, 서사의 부가적 요소는 행을 얻지 못한다. 이 서사는 그를 해명해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애초에 창조되지도 않은 서사가 어떻게 해명의 기능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 세계는 1873년에 창조될 것이다.
이제 멜키오르는 창조 후 뒤따를 그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 신의 의지와 안배는 그에게 형벌이자 족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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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레이다, 나가기 전에 덧창을 닫아 줘. 오후의 해가 부시니.”
멜키오르가 내린 이 생애 최초의 명령을 힐레이다는 들었다.
그녀는 귀가 밝았다. 그녀를 높은 자리로 이끈 자질 중 하나였다.
젊은 시녀는 명령을 내린 존재, 부드럽고 다정하나 결코 거절할 수 없는 강제력을 지닌 목소리를 낸 자를 향해 돌아본다. 소금기둥이나 석상이 될 것 같다는 공포심 속에서.
뼈 위에 피부만 한 겹 씌워놓은 듯 실체감 없는 육신을 두르고도, 침상 위에 일어나 앉은 왕자의 모습은 성스러울 만큼의 위엄이 있었다.
암흑을 물리칠 대천사가 강림한다면 바로 저러한 양태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아슬란의 손을 쥔 것조차 잊은 채, 힐레이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수적 피해:
영민한 아슬란은 이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타인의 관심과 세계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첫 번째 경험을.
***
“오, 와, 왕자님, 잘 보, 보세요, 꽃이 지고 나면은, 구근을 파내서… 말려갖고 보관을 해야 합니다.”
별궁 코티지 가든의 정원사 토머 솔레르는, 아네모네 구근을 파내는 시범을 보였다.
그와 함께 쪼그리고 앉아, 투박한 손 위에 놓인 구근을 들여다보던 멜키오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같지 않게 아름다운 소년의 턱 아래로, 여자아이처럼 길어난 백금빛 머리카락이 사르라니 흔들렸다. 잘라 줄 시기가 한참 지나서 그랬다.
소년은 몸가짐이 고상하고 태도가 어른스러웠지만, 어른의 손이 세세하게 닿지 않아 옷은 왕자의 것답지 않게 낡았고, 오전 나절에 오는 선생들은 영 제대로 되먹질 못했다.
토머는 삼 년간 아이를 알아 왔지만, 늘 그렇듯 감히 그 앨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아네모네를 기르는 법만 열심히 설명했다.
“파, 파내지, 아, 않으면은 얼어요. 다. 꽃을 이듬해에 보려면 이, 이, 말린 구근을 불려서, 철에 맞춰 심어 주어야지요.”
“그래.”
토머는 말재주가 없고 말도 느렸지만 왕자는 끈기 있게 그 설명을 경청했다.
평생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토머는, 크고 듬직한 몸집이 주는 인상과 다르게 타인의 기색에 예민한 편이었다.
서쪽 해안의 변경 카르메인 읍을 떠나본 적 없던 토머가 궁성까지 오게 된 이유는, 그가 일하던 주인댁의 따님이 왕의 레이디가 되어서였다.
딸이 데릴사위를 데려올 줄만 알고 있다가 졸지에 정부가 되었단 소식을 들은 비티아 씨는, 곧 세상을 떠나버렸다.
카르메인 읍에는 그 후로도 소문들이 떠돌았다. 엘레네 아가씨가 낳은 아이는 영 멍텅구리였다느니, 엘레네 아가씨도 실성을 했다느니.
‘소문 따위 순 거짓말이잖어.’
미쳤다는 엘레네 아가씨는 십 년 만에 보아도 머리색만 희어졌을 뿐 이전처럼 곱기만 했고, 멍텅구리란 애는 이렇게 의젓하고 명석한데, 왜 이 궁성의 사람들은 첫째 왕자를 역병처럼 대하는 건지.
빈민가에서 자라난 고아인 토머로서는 혈통이니 관례니 하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내년에도 꽃이 피는 건가?”
“그르믄요.”
“매년?”
“마, 맞습니다요.”
“괜찮군. 정원 일을 더 배워보고 싶어.”
순박한 정원사는 멜키오르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이전에는 택한 적 없는 것을, 이 새로운 조건 하에서 택하는 일은 충동적이었다.
어쩌면 저자는 멜키오르에게 배움을 허락할 수도 있고, 혹은 내일 당장 벼락을 내려 이 정원사를 판면에서 끌어내버릴 수도 있겠지.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었다.
“조, 좋은 생각입니다, 왕자님.”
토머는 헤벌쭉 웃었다.
가르치지 않아도 여러 가지 외국어를 하고, 두꺼운 책을 읽고, 형편없는 교사에게서도 무언가를 얻어 내는 왕자가 흙과 꽃에 관심가지는 것이 기뻤다.
고작 열 살 남짓 소년이면서 공허하게 삭막한 눈을 한 저 고아한 존재에게, 작은 즐거움 하나라도 심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년 피어나는 꽃이 왕자를 위무할 수 있도록.
이전 십 년간 폐허처럼 우거졌던 정원은, 시골에서 올라온 토머의 손길 아래 정갈하고 생동감 넘치는 모양으로 변했다.
철마다 다른 들풀과 꽃이 피어나도록 식재한 정원은 편안하고 아늑했다.
봄이면 물 맑은 연못가로 분홍, 자주, 흰빛의 앵초가 다른 키로 자라나고, 이어진 바위 정원에는 이끼가 끼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한 아름다움을 조성해낼 수 있는 이의 영혼은 맑고 단순했다.
늘 거기 있었으나 이번 생애에야 이름을 알게 된 토머는, 열한 살의 멜키오르가 알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진실된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실제로 들리는 말과 게시되는 생각 사이의 괴리가 없었다.
멜키오르는 오래도록 토머를 바라본다.
사랑이 많은 순진한 이를.
어떤 예감이 멜키오르의 내면에 떠오른다. 스스로는 출처를 알 수 없을 문장이다. 신의 통제력이, 세계를 감당하지 못하여 비틀린 행간을 타고 흘러내린 문장.
‘사랑은 연약하고 실패하기 쉬우며 보장이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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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잖아 그 예감은 올바른 것으로 밝혀진다.
엘레네 비티아는 멜키오르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자신의 정원사와 함께 자살했다.
이것은 반복 없이, 처음 있었던 사건으로서 멜키오르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결혼한 귀부인의 염문이 새삼스러울 게 없는 궁정이었으나, 천한 말더듬이 정원사와 왕의 정부가 붙어먹었다는 정확한 소문은, 사교계의 유희와 완전히 다른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엘레네의 행동은, 불명예를 확정시키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 삶을 견딜힘이 없었던 가련한 여인의 저항이기도 했다.
그 자살은 누구도 웃게 만들지 못했다.
쥴레이카는 지독한 모멸감을 느꼈다. 왕의 정부를 용인해야 했던 것으로 모자라, 천한 것들이 저지른 천박한 범죄의 꼬리표가 그녀의 이름 뒤까지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시종들을 함구시키고 비밀스레 시신 수습을 명령한 필리프는, 불륜을 하다 자살한 첫사랑의 장례를 마친 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무기력하나마 방비를 해 주던 부친이 완전히 무력해지자, 우리의 주인공과 그를 낳은 신녀에게는 살해의 위협이 닥쳐오기 시작했다.
아서가 사경을 헤맬 때마다 세상은 조금씩 부스러져갔다. 멜키오르의 존재가 고통을 겪는 이상으로, 세계의 불확실성 역시 심화되었다.
세계의 붕괴가 드러내는 심연은 어떠한 징조처럼 느껴졌다.
여덟 번의 생애 동안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던 놀라운 지식들, 기억 이전의 과거가 세계의 틈새로 스며 나왔다.
기묘한 희열 속에서 멜키오르는 신이 겪고 있을 불안을 생각했다.
이것이, 당신이 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멜키오르, 자신의 여정 역시 몇 배로 험난해졌다.
성흔의 여파로 인해 어린 시절을 죽은 것처럼 보내는 동안, 아슬란과 쥴레이카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나마 이용할 수 있는 패인 필리프는, 거의 빈사 상태에 빠져들었다.
성흔은 오로지 자신과 대적할 왕자들에게만 적용이 불가능한 것, 필리프는 예외적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도로 발전한 ‘성흔’의 추가 기능조차도 의식을 잃은 자를 상대로는 적용시킬 수 없었다.
죽어가는 필리프가 간혹 정신을 차릴 때 바로 곁을 지키고 있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내심 깊은 멜키오르는 그 일을 해냈다.
맨 처음에는 내무보안국이라는 명목상의 조직을 얻었고, 맨 마지막에는 왕세자 책봉 서류에 서명을 하게 했다.
완벽한 서류를 앞에 둔 조지프 크뤼엘 공작의 분노어린 얼굴을 보면서도 멜키오르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저 살의가 이전 생애와 다른 것일까를 판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크뤼엘은 문서를 무효화시키지 못하자, 책봉의 공표를 방해했다. 결국 멜키오르는 책봉식 없이 왕세자가 되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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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세사(細事)와 인물이 지나가고 나서도, 정원만은 멜키오르에게 남았다.
스무 살 청년의 사지는 우아하게 길지만, 흙일에는 묘하게 서툰 구석이 있다. 그는 불린 구근을 차가운 땅에 비뚤비뚤 심는다. 처음 익히는 정원 일이 주는 기쁨은 아직 쇠하지 않았다.
지난 생애들의 실패는, 그에게 회한 뿐 아니라 축적된 앎 역시 남겼다.
일곱 번의 반복 후에는 마침내 세상에서 신의 은총을 거두는 일에 성공하였으니, 언젠가는 신의 펜 끝을 꺾어놓을 수도 있겠지.
꾸준한 정원사는 매년 같은 구근을 불리고, 묻고, 파내며 해를 보낸다.
별들의 운행을 막아서고, 세계의 규약에 파열을 일으킬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