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39
알비온의 목가 (1)
‘멜키오르의 어머니인 엘레네 부인을 돌보았던 신녀가… 더 이상은 아니겠군. 전시도 아닌데 신녀가 군복을 입고 다니진 않을 테니까.’
클레이오가 아는 8교의 내용은 더 이상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정확한 도움을 주는 지침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이런 방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하기야, 지난 원고에서는 멜키오르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밀경찰의 방법론을 활용한다는 묘사 따위 없었잖아.’
이것은 지나치게 현대적인 연행 수법이다.
‘체제 전복 자체가 일어난 적 없는 국가에서 비밀경찰만 출현하다니… 어이가 없네.’
원인 없이 결과만 존재하는 것은 주인공의 운명이 지닌 모순이자 오류였다. 이제는 더 커다란 범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걸까?
바짝 굳은 클레이오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베스나의 어조가 한층 더 나긋해졌다.
“소환을 거부하는 경우 경은 1급 반역죄의 공모자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베스나가 고작 3레벨의 마법사인 점은 별 문제가 안 됐다. 상급 기사나 상급 마법사라 하더라도, 지위와 가족, 친구와 작위를 지니고 명예에 얽매인 이라면 그녀의 소환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선택은 경에게 맡기지요. 부디 현명하게 처신하시길.”
베스나는 제압구조차 가지고 오지 않았다. 클레이오가 마법을 써서 탈주한다면 즉결 처분 가능한 반역자 신세가 될 터이므로.
봉투를 뜯어본 클레이오는 국왕 대리의 직인이 찍힌, 간결한 소환장을 볼 수 있었다.
‘슐리만 키시온 자작의 1급 반역죄 혐의에 대한 참고인 소환을 요청.’
이 얇은 한 장의 종이는 그 어떤 물리적 구속보다 단단한 제약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왕세자 저하의 명령이니 소환에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침대를 벗어나던 그는, 무릎 위의 베헤못을 떼어냈다.
“야옹아, 오늘 밥은 다른 친구들에게 챙겨달라고 해.”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베헤못은 평소와 다른 클레이오의 말투에서 무언가를 감지한 듯, 그의 뺨을 한 번 핥아주고는 물러났다.
“…에우우우우웅, 에오오오옹.(…그 말투는 낯간지럽다만 사정은 알겠다. 본묘도 방도를 강구해보마.)”
베헤못은 제법 강단 있게 대답했지만, 다른 이들이 듣기에는 주인을 빼앗긴 고양이의 구슬픈 울음소리였다.
맨발에 슬리퍼, 잠옷 위에 코트만 걸친 꼴로 클레이오는 무장한 군인들에게 양팔을 붙잡혀 창이 없는 마차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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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온 후로 족히 네 시간은 지난 듯한데, 클레이오가 갇힌 감방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지하의 창살은 지상으로 10센티가량 올라가 있어, 실외의 빛을 흐리게 비췄다.
‘…이렇게 보면 보통 감옥 같기도 한데.’
풍문으로 전해 듣던 무시무시한 북문 지하는, 그가 대략적으로 떠올리던 19세기의 감옥보다 훨씬 시설이 좋았다.
압살롬 2세가 왕조귀환으로 왕성을 되찾았을 때 반역자와 귀족을 제압하며 지어졌다는 감옥 벽은 세월이 느껴지는 석조였다.
그에 어울리지 않게도 천정에는 환하게 켜진 전구가 매달려 있었다.
‘저 불을 내내 켜놓는다면 이건 이것대로 고역이긴 해. 뭐 이렇게까지 현대적으로 갖춰놨냐고.’
작년 초부터 룬데인의 주요 구역엔 24시간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티플라움 부품을 활용해 광산의 채굴 환경을 개선했고, 발전의 효율을 높여 가능한 일이었다고 들었다.
‘전기가 로얄 오페라보다 왕성에 먼저 깔린 게 신기했는데, 그 이유가 심문실 설비 때문이었나.’
전등이 환하게 밝혀져 육안으로는 알기 어려웠지만, 벽과 천장 사이 경계에서도 활성화된 티플라움의 에테르가 느껴졌다.
마법식을 새긴 쪽과 접지해놓지 않아, 천정을 두른 티플라움이 정확히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클레이오는 부실한 철제 침대의 간이 매트리스 위에 앉은 채 이미 눈에 익은 감방 안을 다시 한번 살폈다.
두꺼운 철제문은 잠긴 채였다. 식사를 들여보내거나 안을 감시하기 위한 들창 역시 밖에서 닫혀있었다.
침대 맞은편에는 수도꼭지 하나가 달린 세면대가 있었고 그 옆에는 뚜껑 달린 용변통이 자리했다.
바닥은 새로 바른 깨끗한 타일이었다. 욕실도 건식인 알비온의 일반적인 실내와 달리, 물매를 내 기울인 바닥 한쪽에는 배수구까지 나 있었다.
모두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다.
곤두세운 「지각」에는 바닥에 파묻힌 상하수도관에 물이 흐르는 소리와, 침대 뒤편 벽 안에 매설된 난방관이 내는 울림이 감지됐다.
‘여기 있으니 어쩐지, 훌쩍 세기를 건너뛴 것 같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클레이오가 갇힌 지하 1층은 궁성 북문 근처로, 지상과 맞닿아 있으니 감옥 안에선 특실로 보였다.
주어진 건 시간밖에 없었으므로 주변을 살피고 감각할 여유가 충분했다. 지하는 더 깊었다.
‘이 아래로, 적어도 두 층이 더 있어. 또, 대량의 활성화된 티플라움에다… 곰팡이 냄새, 배설물… 그리고 피 냄새가 나는군.’
심지어는 이 감방조차도 손잡이와 바닥 곳곳에 피가 튀었다가 지운 기색이 느껴졌다.
피와 오물을 세척하기 용이하도록 감방 바닥을 습식으로 해 둔 것이다.
클레이오는 시린 오한을 느끼며, 「이격」의 기능을 강하게 올렸다.
‘간파의 구조시는 횟수 제한이 있고 제약이 무시무시한 스킬이야. 아무렇게나 남용하진 않을 테니, 결국 물리적 가혹행위가 병행됐겠지.’
한층 강력해진 「이격」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침착하게 대처할 수 없을 상황이었다.
그간 서사개입도가 조금씩 더 차올랐던 걸 이런 방식으로 실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멜키오르 그 미친놈은, 반복되는 생애 동안 무슨 지식을 얻어 이렇게 현대적인 통제국가 식으로 일을 하냔 말이야.’
비밀정보부의 활동은, 알비온 사람들에겐 전연 낯설고도 새로운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 세계의 기억을 가진 클레이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운영 형식이기도 했다.
‘지난 원고에서 멜키오르는 이십세기를 살아보지도 못했어. 그런데 어떻게 한참 뒤에 올 미디어 정치나, 비밀경찰 같은 걸 이용할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답을 얻을 방도가 없었기에 생각도 않았던 문제들이, 덮어두었던 기억의 바닥에서 무작위로 튀어 오른다.
이 세계의 신은 다른 세계에 관해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멜키오르 역시 같은 것을 들여다볼 수 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고 뭘 알고 있냐고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후.’
침대에 걸터앉은 클레이오의 몸이 절로 기울었다. 이런 상태에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기가 빠졌다.
‘하급 귀족이긴 해도 슐리만 키시온은 이제 꽤 명성이 있어. 성실하고, 겸손하고, 유능해서 변경 군영의 영주들 사이엔 평가가 높으니까.’
클레이오가 아서에게 가담할 때 소년 왕자가 걱정했던 1급 반역죄 역시 압살롬 2세가 알비온에 남긴 유산이었다.
‘마지막으로 1급 반역죄가 적용된 건 이미 카르멜라 여왕 대의 일이었지. 왕권이 강력한 왕들이나 집행 가능한 법이니까. 국왕 대리가 재판 없이 자작의 즉결처형을 저지르기엔 명분이 약해.’
클레이오는 늘어지려는 몸을 다잡으며 팔짱을 고쳐 꼈다.
‘지난 역사를 기억한다면 멜키오르 역시도 키시온 자작이 브룬넨을 막는 첨병이 될 걸 알 텐데… 아서를 못 건드리니, 나라라도 망하게 할 셈인가?’
하지만 멜키오르가 알비온의 왕관을 얻으려면, 일단 나라는 남아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야밤의 연행은 목적이 불분명했다.
키시온 자작을 처형하거나, 브룬넨이 침략하기 쉽도록 만드는 게 목표일 리는 없었다.
왕세자의 진의를 파악해야 했다.
그것이 클레이오가 당장 이 감옥을 탈출하지 않은 이유였다.
몸수색을 당해 주머니의 마석 지갑과 완드를 털리긴 했지만, 제압구도 채우지 않았고 문 역시 마법적 억지력 없는 평범한 걸쇠로 잠겨 있었다.
반역죄의 수배자가 되어 쫓기는 것도 문제이지만, 역사의 향방 전체가 어그러지는 것은 더 큰 문제이기에 클레이오는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좋을지 재어보고 있었다.
전등 아래 분절된 조각으로 비치는 오전의 햇빛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타일의 칸을 찬찬히 넘어섰다.
아주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일곱 번이었다.
덜컹.
철그럭. 탕.
종소리가 그치자 철문의 빗장이 풀렸다.
감방으로 들어서는 이는, 빵 한 조각과 물컵이 담긴 쟁반을 든 베스나 드리스콜이었다.
“밤은 편안하게 보냈습니까, 클레이오 경?”
어제 새벽 보았던 남색 제복의 장정 하나가 베스나를 뒤따라 들어와, 걸상 하나를 놓고 문가로 돌아갔다.
“일단 아침 식사를 하세요.”
이 시국에 밥은 무슨 밥이란 말인가.
도저히 넘어갈 성싶지 않았다. 클레이오는 받아든 쟁반은 무릎에 쟁반을 얹은 채 물만 홀짝 마셨다.
‘냉수라도 들이켜니 좀 정신이 나나. 으.’
“편안한 밤을 보낼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드리스콜 씨.”
전등의 밝은 빛을 정면으로 받은 베스나의 입가가 정모 아래에서 치켜 올라갔다. 입가는 웃고 있지만, 눈동자만 움직여 클레이오의 위아래를 쭉 훑는 눈은 차갑다.
“이런, 경에게까지 제 이름이 알려졌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니 말입니다. 충성스럽고 강력한 기관을 이끄시는 분이니,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클레이오는 추측을 미끼로 던졌다. 예전에 첼이 언급한 적 있던 ‘왕세자의 열렬한 신도’인 비밀정보부 수장이 베스나일 확률은 엄청나게 높았다.
옅게 색을 바른 입술을 좀 더 높이 휘어올린 베스나는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자연스레 불을 붙였다.
무언의 동의였다.
‘정말로… 이 사람이 비밀정보부의 수장이란 말인가?’
역시 지난 원고에는 기재되지 않은 사실이었다.
이제 햇빛은 베스나의 구두굽을 피해 침대 발치까지 몸을 물렸다. 지하의 눅눅한 공기 속으로,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퍼져나간다.
“맞아요. 세상에는 비밀이 없어요. 저희 왕세자 저하와 저하의 충성스런 정보부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베스나는 은제 담뱃갑 뚜껑을 젖혀, 클레이오를 향해 내밀었다. 어쩐지 처음보다 더 친근해진 태도였다. 그는 사양 않고 한 개비를 집었다.
치익.
성냥을 꺼내 불을 붙여주기에 훅 빨아들였다.
담배를 마지막으로 피웠던 건 군에 있을 때 일이었지만, 습관으로 새겨진 기억은 긴 공백을 의식하지 않았다. 육체가 달라졌는데도 담뱃불을 붙이는 일은 쉬웠다.
베스나의 입가가 한 번 더 움직였다. 다소간의 놀라움을 표현하는 동작이었다.
잠시간 두 사람은 조용히 담배 향만을 음미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실상은, 좀 달랐다.
‘필터가 없어서 그런가? 담배가 왜 이렇게 독해?’
기싸움에서 지지 않으려 맞담배를 물고 깊게 빨긴 했는데, 그야말로 기관지가 지져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기가 깨끗한 룬데인에 살다 보니 오랜만에 느껴보는, 폐가 아프고 텁텁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콜록대기라도 했다간 지금의 모호한 대치조차 못 하게 될까, 클레이오는 기침을 참았다.
치익.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담배를 밟아 눌러 끈 베스나가 운을 뗐다.
“아침시간 전에 눈 좀 붙이시라 특실을 배정해 드렸는데, 영 못 주무신 것 같아 안타깝네요.”
“잠자리를 가리는 편이라 말입니다.”
큰 키에 여린 골격, 노동을 모르는 손을 가진 청년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공손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오만하게 들린다.
그 청년의 성이 ‘아세르’라면 더더욱 그렇다. 베스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인간을 꽤 선호했다.
세상의 좋은 것만을 누리고 산 젊은이에게 고통과 복종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은 꽤 즐거우리라.
‘저하께서 그저 붙들어만 두라고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