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64
강령회 사기사건 (2)
“마담 라모르라는 분은 어떤 인물이지요?”
“마담 라모르는 사교계에 한 번도 나선 적 없는 인물이라 정보가 적네. 한데 그 내력 모를 여인의 강령회에 참여한 몇몇 귀족들 행방이 묘연하다는군.”
“그런….”
“그런데도 저택에 다녀온 자들은 안에서 있었던 일을 온통 잊어버리니 조사가 막힐 수밖에. 놀라운 미스터리이지 않나?”
‘또 지난 원고엔 안 나오는 인물이나 스킬이 등장한 건가?’
영 나쁜 징조였다.
개고생의 징조.
지난 원고에 등장하지 않는 일과 엮여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건 퇴마록에서나 봤다고. 박 신부님한테나 부탁할 일 아냐? 여기는 신녀에다가 마법사 장교도 있는데, 왜 나한테 그래.’
“그토록 심각한 사안이라면 수도방위대 마법단을 움직여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미숙한 제 역량으로 수행 가능한 임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수도방위대 마법단에게 명령을 내리면 공식적 기록이 남고 의회에도 보고가 들어가지. 무엇보다, 지금 조사 임무를 수행할 만한 부서는 세르게프 부단장의 기동 조사단뿐인데, 그에게 조용한 일 처리를 맡기느니 저택을 하룻밤 새 밀어 없애는 편이 오히려 소란이 적을 것 같군. 그대도 그와 친분이 있으니 알지 않나?”
인간의 마음을 읽는 자라 그런가. 에즈라 세르게프에 대한 왕세자의 분석은 슬플 정도로 정확했다.
에즈라가 국왕 서고를 열어 달라 137번이나 투서를 넣은 일은 아홉 번 산 왕세자에게조차 큰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그건 분명 지난 원고에선 없던 사건이었다.
“…네, 저하의 뜻을 이해합니다.”
“자신의 자녀나 친척이 미심쩍은 영능력자에게 빠져 금전을 가져다 바치더니 사라진 일이잖나. 집안의 수치를 공공연히 드러내길 꺼려하면서도 제 피붙이가 어디 가서 더 큰 사고를 칠까 근심이 많은 상원의원들의 청원 편지가 여럿 쌓여, 나로서도 고심이 된다네.”
즉, 강령회 참석자들의 실종은 집안 망신이니 남들 눈에 안 띄게 해결 좀 해 달란 얘기였나 보다.
아쉬운 소리를 하고 굽혀든 귀족들의 말을 들어주면 상원을 상대할 때 멜키오르의 입장이 더 강화될 것이다.
왕세자에겐 손해 볼 것이 없는 게임이었다.
‘정 안 되면 그깟 저택 진짜 싹 밀어버릴 수도 있고.’
모습과 기척을 숨겼대도 클레이오는 태서턴의 존재를 잊지 않았다.
명령 한 마디면 병영의 성채조차 하룻밤 만에 대파시킬 수 있는 기사를 호위로 세워두고 하는 소리가 어떻게 농담이 되겠는가.
멜키오르는 클레이오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공식적’으로 클레이오는 서임 받은 기사이니 국왕 대리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왕세자는 클레이오가 놓아둔 봉투를 다시 쭉 밀어주었다.
“그대의 성흔으로도 이 일은 예측하지 못했지?”
“그렇습니다.”
“보게. 이렇듯 신의 일에는 빈틈이 있고, 나로서도 이 생전 처음 보는 기묘한 저택이 흥미롭네. 모쪼록 상세한 조사 부탁하네.”
“노력해보겠습니다.”
***
마수학 특강 시험엔, ‘약속’의 완전기억능력을 지닌 클레이오마저도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할 문제들만 출제됐다.
강의 중 스쳐 지나가듯 대충 언급한 마수들의 이름이 답안이라, 수강생 대부분이 엿을 먹었다. 성적에 안 들어가는 과목인데도 기분만은 확실히 잡쳤다.
그 지독한 출제 경향에 살아남은 수강생은 이시엘뿐이었다.
어쨌거나, 에즈라의 마수학 특강은 그 미친 수업을 더 안 들어도 된다는 상급생들의 환호 속에서 끝났다.
내일부터는 바로 여름 방학이었다.
하지만 이전 방학과는 모두의 처지가 좀 다르게 되었다.
카멜리아 저택에서 쫓겨난 첼이 제대로 된 거처를 구하는 동안 클레이오의 집에 머무르게 됐다.
아서와 이시엘 역시 영지로 돌아가지 못해, 지내는 동안 학교의 순찰을 도는 조건으로 기숙사에 남았다.
슐리만 키시온이 직접 아서와 이시엘에게 기별을 넣었다. 재정비 중인 키시온 성 내외가 뒤숭숭한 가운데 중앙의 감사관까지 파견되어 있으니, 사실상 법을 어기고서 교육 중인 진짜 후계자와 지나치게 주목받는 식객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당분간 거리를 두려는 심산이었다.
아서는 궁성에 가 봐야 사방이 위험이고, 숙소로는 방문객용 영빈관 객실이 주어질 뿐이라 학교에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방학식 전날 클레이오는 친구들을 모두 불러 연구실에 자리를 마련했다.
중정의 간이테이블 주변에 아이들은 제각기 편한 자세로 앉거나 섰다. 오늘의 클레이오는 평소처럼 술을 식혀놓는 대신 차와 캔디만 내왔다.
오도독 오독.
바시락.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 가운데 아무도 손 안 대는 아니스 사탕을 쌍둥이들만 오독오독 까 씹어 먹었다.
먼저 입 안의 사탕을 삼킨 리피가 어색한 침묵을 깼다.
“그래서 레이, 이렇게 분위기 쫙 깔아놓고 할 얘기가 뭔데?”
클레이오는 리피의 태연한 태도가 고맙기까지 했다. 덕분에 안 떨어지던 입이 겨우 트였다.
“주말에 소환장이 와서 궁성에 다녀왔는데… 왕세자가 나에게 명령을 내렸어. 마담 라모르라는 사람이 여는 강령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자꾸 실종된다고, 거기 잠입해서 조사 좀 해 보래.”
클레이오는 왕세자에게 불려가서 있었던 일을 적당히 편집해 설명했다. 아이들은 갑작스런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잠시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는 묘하게 초조한 기분으로 아이들의 답을 기다렸다.
물론 아이들은 클레이오의 처지를 잘 알았다.
아서를 구출하기 위해 클레이오와 첼이 작전을 짰는데, 왕세자를 붙들어 놓느라 클레이오가 그에게 [경감]을 걸어 줄 의무를 뒤집어쓰게 됐단 것을.
하지만 이번 조사의뢰 건은 경우가 달랐다.
귀족들 사이를 쑤석이고 다니다 여러 사람이 얽히게 되면 또 무슨 소문이 돌지 몰랐다.
이제는 언론과 사교계 소문의 무서움을 철저히 깨달은 클레이오였다.
명령의 내용은 사사로웠지만, 명령을 내린 주체가 주체다 보니 말 꺼내기가 참 어려웠다.
왕성에 다녀온 뒤 일요일 오후 내내 뒤채다 하루 늦게 자리를 만든 게 그래서였다.
클레이오는 동료들에게 오해의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이 애들에게는 할 수 있는 한 진실하고 싶었다.
제일 먼저 상황을 파악한 첼이 코웃음을 픽 쳤다.
“마담 라모르라, 나도 이름은 한두 번 들어본 것 같아. 근데 왕세자가 불러다 협박해놓고 시킨 게 고작 그런 시시껄렁한 강령회 조사였다고?”
“시시껄렁한 일까진 아니야.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요즘 수도 일각에 예언자의 종교라는 게 퍼지고 있는데 그거랑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대.”
“어라? 그거 우리 고모도 들어봤다는데!”
“‘매 세기말에는 혹세무민하는 세력이 되돌아오지.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란다.’ 이러면서 아침 커피 진하게 내려달라고 그랬어.”
쌍둥이들은 전에 신년회에서 봤던 날카로운 인상의 부인 말투를 그럴듯하게 흉내 냈다.
“그래, 이단 종교와 심령 활동이 섞인 복잡한 사건이다 이거지. 왕세자는 워낙 용의주도하고 지독한 작자니까 이 건을 조사하다 뜻밖의 공을 쌓으면 자기 홍보에 써먹을 거고, 실책을 저지르면 너희들까지 함께 싸잡아 책잡힐지도 몰라.”
수도방위대 학교 977기 핵심 멤버들은 좋으나 싫으나 한 묶음으로 취급받는 사이였다. 클레이오가 단독행동을 한다 해도 이제는 아이들의 평판에 같이 영향을 끼치게 됐다.
꺼내둔 초대장을 집어 살피던 첼이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어여쁜 얼굴과 달리 속은 시커먼 국왕 대리면 그런 짓 눈감고도 하겠지.”
바시락.
새 사탕의 포장지를 까며 리피와 레티샤가 건들거렸다.
“헹, 근데 책 잡을래봐야 잡을 게 있어? 강령회면 쭉 둘러앉아서 귀신 부르는 그거 아냐?”
“다 큰 어른이 유령 보러 갔다 나자빠진 것까지 하나하나 찾아다 줘야 한다니, 기사 노릇 쉽지 않네.”
“완전 폼 안 난다.”
쌍둥이들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전통적인 강령회 보다는 규모가 큰 것 같다만… 아무튼 면 안 살고 귀찮은 짓이라서 나에게 떠넘긴 거겠지. 경찰은 안 움직이니까.”
무릎 위에 두 손을 얹은 꼿꼿한 자세로 이제까지의 대화를 경청하던 이시엘이 입을 열었다.
“오페라 극장 사건 이후 경찰들도 달라졌다 들었다. 새 법안이 통과되어 평민들의 신고도 허투루 무시할 수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귀족 가문의 실종 사건에 복지부동할 수 있나?”
“듣기로, 정식 실종신고를 낸 집안이 하나도 없대. 그러니 경찰은 못 움직이지. 아무도 큰 소리 나길 원하지 않거든.”
사이비종교인지 오컬트의식인지 뭔가에 빠져 생돈을 퍼붓다 어느 날부터 집에도 안 들어오는 가족이나 친척이라면 못 찾아도 상관없다 여기는 집안도 꽤 되는 듯했다.
소위 귀족이란 자들은 못난 구성원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자들이 모르는 데서 사고를 쳐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할까 걱정하는 것이다.
안 그렇겠는가?
“흐응. 그러면 왕세자는 제복경찰들조차 손 안 댈 시시한 잡일이라도, 시키면 무조건 처리해야 한다는 걸 네게 재확인시키는 거잖아. 똥개훈련이네.”
첼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시엘도 첨언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완전일치하는 드문 일이었다.
“클레이오 너의 성취가 워낙 뛰어나니 왕세자가 그런 수작을 부리는 거다. 치졸하게 구는 자이다.”
이시엘은 특유의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속 시원하게 멜키오르를 매도했다. 클레이오는 사르르 대리만족을 느꼈다.
키시온 자작령의 일 이후, 겉으로 티는 안 내도 속으로 원한을 단단히 쌓은 이시엘이었다.
진녹색 눈 안에서 한여름의 한낮 같은 분노가 뜨겁게 타올랐다.
별수 없이 클레이오는 진화에 나섰다.
아직은 멜키오르에게 맞설 때가 아니었다.
“워워, 이시엘 너무 화내지 마. 일 자체는 그냥 잡일일 뿐인데 뭐. 아무튼, 이렇게 돼서, 해변에 놀러 가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미안해.”
스스로 말을 꺼내면서도 클레이오는 입이 썼다.
‘애들 기분 좀 띄워주려고 했더만, 만고에 도움 안 되는 왕세자야.’
당분간 고향에 못 돌아가게 된 이시엘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아서 역시도 평소보다 말수가 줄었다.
그래서 클레이오와 첼은 합심해 수를 짜냈다.
이번 여름엔 모두 다 함께 클레이오의 콜포스 본가에 묵으며 바닷가에 가기로 의견을 몰아갔던 것이다.
노는 일이라면 빠지는 데가 없는 쌍둥이들은 당연히 쌍수 들고 환영이었다.
기디온도 본가에 들르라는 뜻을 은근히 내비치고, 껄끄럽게 구는 블라드는 타국에 나가 있으니 딱 때가 좋지 싶었는데….
아뿔싸,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이야.
“어떡하냐, 클레이오 경. 진짜 하기 싫겠다.”
놀릴 때만 경칭을 쓰는 첼이 리피가 까놓은 사탕 한 조각을 쏙 빼먹으며 이죽거렸다.
“놀릴 거면 도와라도 주든지.”
“뭐? 콜포스의 짙푸른 바다 대신 정신 나간 귀족 호사가들 소굴 탐험은 그닥인데. 귀여운 아가씨들이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 무도회는 모두들 가면을 쓰고 참석한다니까, 누가 귀엽고 귀엽지 않은지는 판별할 방도가 없을 거 같고… 이렇게 되었으니 조사가 일단락되면 연락할게. 방학 중에 꼭 한 번 날짜를 맞춰 보자.”
마침내 캔디 그릇 안의 사탕을 모두 아작낸 리피가 뽀시락뽀시락 쓰레기를 그러모으며 조잘거렸다.
“흐으음. 들어봐 레이, 어제 정해졌는데 말야. 이번 여름엔 아버지가 수도에 올라와 국방위원회에 참여한대. 그래서 우리도 영지에 안 내려가거든?”
“응응. 저번에 우리 가두느라 룬데인의 안젤리움 가문 타운하우스를 급히 다시 연 김에 보수공사도 할 거래.”
“아버지는 매일 위원회에 가고 우린 고모랑 지낼 거니까, 맨날맨날 토할 때까지 검 안 휘둘러도 돼.”
“그러니까 나랑 리피도 유령 저택 데리고 가 줘. 완전 재밌을 거 같아!”
“캬하하!”
첼이 쯧쯧 혀를 찼다.
“어이구, 우리 아가씨들은 한창 유령이 재미있을 나이로구만?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다 돈 뜯어내려고 조작하는 사기란다. 자칭 영매들이 쓰는 사기 기술이라면 나도 구십 가지 정돈 알고 있는걸.”
쌍둥이들은 탕페트 드 네쥬 가문의 장녀가 보이는 냉소적인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그녀의 양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면 첼이 함께 가주면 되겠다! 사기꾼들의 정체를 밝혀내고서, 나쁜 놈들이면 다 때려 부숴주자!”
“빠샤!”
매끄러운 오른손으로 턱 끝만 문지르고 있던 아서도 이들의 와글거림에 끼어들었다.
“야, 너희들만 그러기냐? 나도 가야겠다. 재밌겠는데?”
“그치, 아서!”
“사기 아니고 진짜 귀신 보면 더 재밌겠지!”
“어차피 이번 방학 때는 기숙사에 콕 박혀있어야 했는데, 그런 일이라도 있으면 좋지.”
클레이오는 아서를 황급히 제지했다.
“아서, 너까지 나설 필요 없는 일이야. 온갖 고생 다 해가며 정의로운 왕자님 소리 듣게 됐는데, 이런 구질구질한 사안에 엮여서 뭐하려고.”
키시온 영지의 일은 멜키오르가 비밀스레 벌인 작전이다 보니, 역설적으로 아서의 평판엔 영향이 없었다. 룬데인의 시민들에게 아서는 여전히 정복왕의 재림을 떠올리게 하는 용감한 3왕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평판이란 건 한 번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기는 순식간인 물건이었다.
아서는 날티 나는 태도로 양손을 으쓱 들어올렸다.
“레이 네가 웬일이냐, 평소엔 해주지도 않던 왕자 취급을 다 해주고. 그치만 이런 신나는 건수를 나만 빼고 처리하려고?”
클레이오의 눈길은 아서만 깨달을 수 있을 짧은 찰나, 아서의 오른손 위에 머무른다. 상처가 모두 사라지고 손톱이 빠진 흔적도 치유되어 매끄러워진 손 위로.
아이들은 아서가 겪었던 일을 다 모른다.
특히나 이시엘에겐 절대 알리고 싶지 않다고 아서가 간곡히 부탁했기에, 클레이오도 은폐에 협조하고 말았다.
아무리 치료가 다급했다지만 ‘편집자 권한’을 써 억지로 내막을 알아낸 게 미안해서이기도 했다.
그렇다 한들, 일어난 일이 없는 일이 되는가?
멜키오르의 명령으로 끔찍한 고초를 겪었던 아서를, 왕세자가 명령한 임무에 끌어들일 수 없었다.
“아서, 넌 안 돼.”
“왜에!”
“뭐 예쁜 게 있다고 멜키오르가 내린 명령을 네가 따라야 해.”
“그래도 우리 형인데?”
그래서 너네 형 부하가 네 팔모가지를 뎅겅 잘랐던 게 옛날 일도 아닌데 그러냐고,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삭이며 클레이오는 눈을 부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