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70
예언자 마르키온 (3)
솨아아아앗!
썰물이 빠져나가듯 클레이오의 에테르 그릇이 무차별적으로 새어 나갔다.
유량이 끝 간 데 없어 바다처럼 충만한 에테르는 그의 목을 감싸 쥔 길라드의 손등으로 스며들었다.
길라드의 손등 위에 깃펜 모양 성흔이 모습을 드러냈다.
툭.
투툭.
손등에서 흐른 핏물이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에 아랑곳 않고, 길라드는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자랑스레 하늘을 향해 뻗었다.
목을 조이는 힘이 약해진 틈을 타 클레이오는 흐려져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간신히 떴다.
질식의 와중에도 ‘약속’의 판별은 가짜 성흔의 정당성을 부정한다.
[변형 스킬: 기생의 술식―타인의 생명을 거름 삼아 에테르량을 늘리는 사술(邪術).]
‘고유 스킬’이 아니었다. 저것은 성흔의 겉모양을 흉내를 낸 마법일 뿐이다.
그걸 안다 한들, 클레이오에게는 광기에 휩싸인 예언자를 저지할 힘이 없었다.
길라드의 서클은 축 늘어진 마법사의 신체에서 에테르를 뜯어내며 더더욱 범위를 넓혀갔다.
슈우우웃―
길라드는 제 에테르에 붙들린 위대한 마법사의 육신을 내려다본다.
그의 전신을 달구는 것은 일종의 전능감이다.
기생행위의 끝은 피기생자(被寄生者)의 죽음이다. 살아남는 것은 길라드 자신이어야 했다.
“네가 알던 것은 온전치 못하고, 내가 아는 것이 온전하다.”
마법사의 절명과 길라드의 성공이 이뤄지려던 순간, 누군가 길라드가 조성한 견고한 [차폐]를 엄청난 힘으로 찢어내기 시작했다.
쿠웅!
쿠쿠쿵!
키이이이이이잌!
금빛 검기였다.
결코 다른 사람의 것과 혼동할 수 없는, 찬란한 낮의 빛.
“레이!”
바깥에서부터 길라드의 마법 반구를 베며 아서가 뛰쳐 들어왔다.
“크으읍!”
시전 중인 마법이 검기로 파훼당한 충격은 컸다. 길라드는 시커먼 피를 바닥으로 토해 냈다.
털썩.
그가 놓친 클레이오의 기다란 몸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구겨졌다.
아서는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과 단상 위에 선 길라드 그리고 클레이오를 발견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아서가 검기를 날렸다. 단상 위에 선 길라드의 목을 정확하게 노린 조준이었다.
쿠쿵!
쿠쿠쿵!
순식간에 길라드 주변으로 좁아 든 반구가 아서의 검기를 힘겹게 흘려냈다.
실제로 검을 맞부딪치는 것보단 위력이 떨어지는 [진격의 검]이었지만, 에테르를 한계까지 뻗쳐낸 아서의 검격은 스킬이 가진 약점마저 강제로 상쇄시켰다.
스스스슷!
쿠콰쾅!
연이어 세 차례 검기를 날린 아서는 길라드가 방어에 급급한 동안 단상으로 달려들어 클레이오를 낚아챘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마법사는 아서에게 붙들려서도 여전히 허수아비처럼 흐늘거렸다.
아서는 자신을 엄호하며 뒤따른 이시엘에게 클레이오를 넘겼다. 턱을 꽉 문 이시엘은 명령 없이도 아서의 뜻을 알아들었다.
그녀가 클레이오를 접어 메고 뒤편으로 물러난 새, 아서가 다시금 베그의 검에 에테르를 그러모았다.
빛의 탑을 세우듯 찬연한 검기였다.
구우우우우우우!
쿠콰콰쾅!
검기와 길라드의 방어막이 부닥치며 천지가 울리는 진동이 생겼다.
아서의 타격력은 엄청났다. 6레벨 검사의 통상적인 파괴력을 상회했다.
그는 단상이 패도록 두 발을 디디고서, 정석적인 하단 베기의 자세로 계속해서 같은 위치를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길라드의 방어막이 점점 더 얇아졌다.
“쿠어엌. 쿨럭.”
울컥울컥 검은 피를 토해내면서도 길라드는 청금빛 구를 넓혀 가려 안간힘을 썼다.
아서와 길라드의 대치가 길어지자, 아까까지 길라드의 에테르에 휘감겨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이게 무슨…!”
“으아아아아아악!”
“도망가요. 흐흑!”
모두가 악몽에서 갓 깬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마법사와 검사의 대결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본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가면이 벗겨지고 신발끈이 풀렸다. 눈물과 토사물에 젖어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자들에게 귀족다운 품위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길라드는 그들의 비참한 꼴에 힘을 얻었다.
스스스슷―!
최후의 기력을 다 짜내 기세를 올린 길라드의 에테르가 아서의 발목을 타고 올랐다. 보랏빛 에테르는 얼음으로 만든 불처럼 선뜻한 감각을 아서에게 선사했다.
그때, 사방으로 달아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물을 거스르듯 달려오는 인물이 있었다.
환시에서 벗어난 첼이었다.
익숙한 에테르의 기운을 눈치챈 이시엘이 클레이오를 붙들지 않은 한 손으로, 검대에서 바스타드 소드를 빼내 검집째로 던졌다.
“고마워, 이시엘!”
자신의 검을 찾은 첼은 풀물이 밴 옷깃을 휘날리며 밤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카아아앙!
길라드는 첼의 공격을 방어하느라 아서에 대한 구속력을 늦추고 말았다.
스읏!
재빠르게 발을 뺀 아서는 길라드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왼팔을 베어냈다.
푸슛!
핏물이 폭발적으로 튀었다. 길라드의 피는 붉지가 않았다. 대신 청금빛 먼지가 떠다니는 자줏빛이었다. 마치 마수의 피와 같이.
상처는 순식간에 말라붙어 금속성의 단면을 드러냈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바닥에 착지한 첼이 길라드의 나머지 한 팔을 붙들고 그의 몸을 바닥에 짓눌렀다. 검사의 억센 팔에 제압되어서도 길라드는 버둥거리며 발악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에테르가 꺼지고 아서의 검이 길라드의 목에 겨눠졌다.
“길라드 에클립시. 항복해라. 수도방위대로 가서 네가 벌인 일을 해명해야 할 거다.”
길라드의 위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한층 더 우렁찬 소리로 소리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너는 나의 종들을 압도하지 못할 것이다아앜!”
쿠쿵.
쿠콰콰콰쾅!
굉음과 진동이 천지사방을 흔들었다.
정원을 둘러싼 저택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먼저 문 뒤에서 대기중이던 접객 하인들이 펄쩍 뛰어올랐다.
지하로 이어진 문에서도 수십의 사람이 뛰쳐나왔다. 앞치마엔 빵 부스러기가 묻고 국자를 든 채인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가 공포에 질린 비명을 울렸다.
단상 역시도 균열을 피해 가지 못했다. 나직하던 단이 갑작스레 폭발해 첼과 아서가 디디고 있던 바닥이 꺼졌다.
사납게 튀는 파편에 맞아가면서도 첼은 끝까지 길라드를 놓지 않았으나, 지하에서 돋아난 거대한 팔이 그녀의 몸을 낚아채 내동댕이쳤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단상의 돌무더기가 뭉쳐 마수로 화하기 시작했다.
카캉!
카카캉!
아서가 다시금 검기를 내질렀지만 마수는 쓰러지지 않았다.
마침내 지하를 벗어나 지상에 두 발로 선 돌 거인은 첼을 내던졌던 것처럼 아서 역시 꽉 쥐어 바닥에 메다꽂았다.
퍼어억!
[강화]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곧장 반격에 나설 수 없을 만치 무작스러운 공격이었다.첼과 아서가 등을 맞대고 숨을 고르는 새, 붕괴된 저택의 석재를 자석처럼 끌어모으며 곳곳에서 돌의 거인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 수는 열 마리에 달했다.
길라드가 소리쳤다.
“[여기 와 내 축성을 받아라, 종들이여!]”
구구궁.
쿠쿵. 쿵.
명령을 들은 석조 괴물들은 모두 길라드를 향해 무거운 걸음걸이를 내딛었다.
길라드는 가장 가까이 온 골렘을 먼저 무릎 꿇게 한 후 마수의 이마에 손을 대고서 긴 진언을 읊었다.
아지랑이가 맺히듯, 길라드의 손 아래 조아린 골렘의 전신에서 보라색의 에테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쿵.
쿠쿵.
쿵. 쿵. 쿵.
땅이 울렸다.
“으아아앜!”
“살려줘요!”
“꺄아아아악!”
퍼걱!
퍼억!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접객 하인 하나와 무도회 참가자가, 길라드를 향해 가는 거대한 괴물의 발에 팔다리를 짓밟혔다.
다시금 일어선 첼과 아서의 협공도 마수의 움직임을 둔화시켰을 뿐, 완전히 쓰러뜨릴 수 없었다.
채챙!
키키킥!
검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다. 이시엘은 마수의 정체를 알아챘다.
‘골렘!’
하지만 첼과 아서는 길라드의 뒤편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소음을 내며 싸우고 있어, 말을 전할 수 없었다.
이쪽도 사정은 만만찮았다.
바닥이 푹 패도록 주먹을 내리찍는 거인을 피해 이시엘이 몇 미터를 휙 뛰어올라 물러났을 때, 희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두드렸다.
“내려…줘….”
“정신이 돌아왔나?”
“…응.”
비틀대던 클레이오는 간신히 자신의 두 발로 섰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매무새도 흐트러진 꼴로, 완전히 쉰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창을 다섯 개 내리꽂을 테니, 꿰뚫린 놈들부터 하나하나 처리해 줘. 기억하지, 골렘의 약점?”
“기억한다.”
이시엘은 기억력이 좋았다. 에즈라의 강의 내용 역시 똑똑히 되새길 수 있었다.
골렘의 약점은 입 안이었다.
“부탁해.”
파아아아앗!
눈부신 금빛 에테르가 정원의 가장자리로부터 중심까지 펼쳐졌다.
지름 80m의 서클은 미처 정원을 다 뒤덮지 못했지만, 그 빛만은 온 세상을 밝힐 것처럼 찬란했다.
클레이오는 아직까지 허리끈에 잘 매여 있던 주머니를 끌렀다.
잘그락.
마광석 청동편이 클레이오의 손을 떠났다.
동시에, 어두운 천공으로부터 빛의 거창이 지상으로 내리꽂힌다. [추적]의 마법식까지 덧입은 ‘아킬레우스의 창’이었다.
“[셀 수 없는 재난을 안길 자 분노하노니, 첨예한 청동의 창이여 내리꽂히라!]1)”
쒜에에에에에에에엑― 쿠쿵―
쿠우우우우우우웅―
쿵― 콰아아아아앙―
다섯 개의 창은 천상으로부터 지하까지 거인 넷을 꿰뚫어 그들을 바닥에 못 박는다.
길라드를 지키며 등을 맞대고 있던 네 기의 거인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사지를 버둥거렸다.
난투의 와중에도 길라드의 ‘축성’을 받아 전신에 보랏빛 에테르를 머금은 한 마리의 거인은 한 손으로 클레이오의 청동 창을 받아냈다.
길라드를 목표로 [추적]해가던 창은 거세게 뒤흔들렸다.
뚜둑.
우지직.
골렘의 둔하던 움직임이 민활해지고, 마치 지성이라도 얻은 듯 두 눈구멍의 빛이 환해졌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참상에도 거인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빠각!
마침내 거인의 손안에서 부서진 창이 먼지로 흩어졌다.
에테르를 잔뜩 뜯긴 뒤 급하게 시동시킨 마법의 반동으로 클레이오는 몇 걸음 물러서다 풀썩 주저앉았다.
쿨럭!
한 움큼의 피를 뱉어낸 클레이오는 그에 아랑곳 않고 곧바로 [경감]과 [치유]의 마법식을 불러일으켰다.
“[비탄은 밤을 지배할지 모르나, 낮은 환희를 귀환시키리니!]2)”
이전의 마법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새로이 해가 뜬 것 같았다.
아서, 첼, 이시엘의 피가 멎고 골렘에게 짓밟혀 다리가 부스러지고 허리가 뒤틀렸던 사람들의 몸이 수복된다.
황금의 빛에 감싸여.
쓰러져있던 사람들이 온전한 형태로 되돌아가는 자신의 사지를 입 벌린 채 내려다봤다.
상처가 나았는데도 혼란에 빠져 주저앉았던 사람들을 이시엘이 일으켜 세웠다. 무도회 참가자뿐 아니라 사용인들도 여럿이었다.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사용인들에게선 귀마개를 빼냈다.
회복의 정도를 보던 이시엘이 또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이 좁은 공간에서 마수와 격전이 벌어질 텐데, 남아있었다간 모두 몰살이었다. 첼과 아서가 애를 써 골렘의 접근을 막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완전히 쓰러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서는 생각했다.
‘뭔진 몰라도 저 축성인지 뭔지가 끝나면 좋은 꼴은 안 날 것 같단 말이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성흔의 존재는 드러내봐야 귀찮은 일만 생기겠지만.’
앞으로의 입장이 난망해질 것도 아랑곳 않고, 아서는 망설임 없이 ‘무한의 전경화’ 성흔을 전개했다.
남은 골렘들과 길라드를 이끌고 아공간으로 들어가려던 아서는, 곧 한 가지 난점을 깨달았다.
‘골렘은 이동자로 지정이 안 되잖아… 제길!’
성흔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반드시 아공간으로 들어가는 게 발동 조건이었다.
그렇게 데리고 들어가 길라드를 처치한다 한들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마수를 멈출 수 없다면, 마수를 풀어놓고 저만 도망가는 꼴이 된다.
반대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대상자로 지정하고 있다간 곧장 골렘들에게 짓밟힐 판이었다.
누구는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고, 누구는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
짧은 시간 동안 아서는 실행 가능한 가능성을 모두 검토했다.
결국 그는 성흔의 사용을 포기했다. 자신이 온전히 활용하기에는 아직 과분한 능력이었다. 그는 사람의 목숨으로 시험을 해보고 싶지 않았다.
허둥지둥 일어난 무도회 참가자들이 무너진 저택의 폐허를 가로질러 도망가는 동안, 이시엘은 그들의 뒤를 지키며 바닥에 누운 골렘을 무력화시켰다.
클레이오의 창을 정통으로 맞아 미처 몸을 일으키지 못한 골렘 위로 이시엘이 뛰어올랐다.
가늘게 틈을 벌린 아가리에 극도로 집중한 검기를 송곳처럼 꽂아 넣고, 그대로 체중을 실어 콱 박아 넣었다.
혀를 꿰뚫린 골렘은 두 눈의 빛을 잃고서, 와르르 뭉친 돌무더기로 돌아갔다.
치유 마법으로 힘을 되찾은 아서와 첼 역시 가까이에 있던 골렘들을 잡아 족치기 시작했다.
“레이 덕에 움직이기 한결 나아졌군.”
“좋아, 가 보자고!”
콰직!
쿠콰쾅!
창을 맞지 않은 골렘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싸움의 요령을 깨달은 아서가 달려오던 골렘들을 향해 [진격의 원]을 낮게 날렸다.
감은 눈 안쪽으로도 잔상이 남을 만한 검기의 반원이 쉴 틈 없이 마수의 무릎과 발꿈치를 부서트렸다.
쿠쿠쿵!
콰직!
거대한 마수는 작은 산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첼과 이시엘이 재빠르게 달라붙어 아서가 무너트린 골렘의 턱관절 사이로 칼끝을 끼워 넣었다.
순식간에 일곱 마리의 골렘이 돌덩이가 되었다.
골렘들의 방어선이 허물어졌다. 길라드를 지키고 선 두 마리 골렘의 팔다리 가동 범위를 교묘하게 피해 첼이 몸을 날렸다.
그러나 호전적인 기사예비생의 공격보다, 길라드의 세 번째 축성이 조금 더 빨리 끝났다. 이제는 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길라드는 마구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내 충실한 종이여, 나의 적을 격멸하라!]”
1) Iliad』, Homer, 편역.
2) 「Song」, Algernon Charles Swinbur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