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13
배움의 기쁨 (2)
다다다닷!
누군가 다급하게 복도를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 세운 베헤못이 물그릇에서 주둥이를 떼고는 발딱 고개를 세웠다.
“먀와아아아아아앙?(술맛 떨어지게 누가 저리 경망스레 구느냐?)”
벌컥.
좀처럼 들르는 사람이 없는 교실 문을 연 학생은 의외의 인물, 릴리안 베넷이었다.
“클레이오 선배! 여기 계셨군요. 학장님께서 결계 재설치 시작할거라고 부르세요!”
처음 봤을 때는 수줍음을 타는 소녀였는데, 어째 사람이 달라진 듯 말씨가 또렷해진 하급생이었다.
므네모시네의 문 폭주와 하늘의 귀족 출현은 이렇듯, 아서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안녕, 릴리안. 곧 갈게.”
클레이오가 일어서며 아서에게 자리 정리를 하라고 눈치를 줬다. 아서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물었다.
“제베디 교수가 왜 부르는 거야? 전엔 그런 거 안 시켰잖아.”
“이번 학기부터 학장님과 같이 학교 결계를 보강하는 일에 자원했거든. 지금 결계만으론 영 부족해서 말야.”
“아니, 수도방위대 마법단이며 조교들 다 놔두고 재학생인 네가 왜….”
“내가 그분 연구 제자잖냐.”
사실은 다음 므네모시네의 문 폭주를 방비하기 위해 제베디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지만, 아서가 그것까지 미리 알 필욘 없었다.
좋은 구실로 아서의 의문을 봉쇄한 클레이오는 슬슬 낮잠 잘 시간이 된 베헤못의 등허리를 쭉 쓰다듬어준 후 릴리안을 따라나섰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어느덧 시월이었다.
새로 복원한 교정의 숲에도 단풍이 들어, 석양 빛깔 잎새의 물결이 바람에 따라 일었다.
물론 지금의 학교 안에선 고양이 외엔 그 누구도 낙엽 진 산책로의 고적함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만 말이다.
검사반이고 마법사반이고 할 것 없이 지난 한 달간 지옥의 강행군이 이어졌다.
심기일전한 교수진이 눈에 불을 켜고서 동작 하나, 마법 수식 하나라도 더 학생들의 몸과 머리에 새겨 넣기 위해 기를 썼다.
그런 판국이니 본래는 자유 연구 시간이던 오후까지 수업이 길어지기 일쑤였다.
이 역시 므네모시네의 문 폭주가 남긴 여파였다.
이전처럼 가르쳐 아이들을 수도방위대에 들여보냈다간, 어린 제자들을 비명에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교수들 사이에 감돌았다.
지난 한 달은 클레이오에게 특히 더 가혹했다.
한국식 야간 자율학습으로 단련된 그조차도 진절머리가 날 만한 일정이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폐문 시간이 가까워진 세인트 파틴 도서관 열람실 구석 클레이오의 단골 좌석 주변엔 책의 탑 여러 개가 아슬아슬하게 쌓였다.
그 가운데, 녹초가 된 마법사가 새파란 얼굴로 엎어져 있었다.
바로 그 마법사를 찾아서 먼지투성이 아서가 세인트 파틴 열람실에 당도했다.
그는 로사 교수의 야간 특강까지 듣고 온 자신보다 세 배는 더 피곤해 보이는 클레이오의 눈앞에 손가락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살아 있어? 레이? 살아 있으면 오른손을 들어 봐.”
클레이오는 푸석푸석 흐트러진 머리 아래 눈만 슬쩍 치켜떴다.
몇 번 빈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목소리 내기도 힘든지 몹시 여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개소리… 집어치고 갈 길 가라.”
“야, 널 갈군 건 제베디 학장인데 왜 화풀이는 나한테 하냐?”
아서 말이 맞긴 했다.
클레이오가 하는 연구를 항상 느긋하게 지켜봐 주던 제베디는, 이제까지의 방임을 다 잊은 듯 단호하게 굴었다.
매일매일이, 이세계에 와서 얽매이리라곤 상상도 못 한 스파르타식 교육의 연속이었다.
학장은 하나뿐인 연구 제자에게 알고 있는 모든 마법을 당장 전수하려는 것처럼 조급하게 굴었다.
그 덕분에 클레이오는 제베디가 마음을 먹으면 얼마나 악독한 스승이 될 수 있는지 새삼 뼈저리게 깨달았다.
‘기말고사 공개 시연 면제해 줄 때 불길한 플래그인 걸 알아챘어야 했는데.’
클레이오가 구사하는 마법은 하나하나가 정확하고 실패가 없었다. 수도방위대 마법단의 평단원 수준은 애저녘에 뛰어넘어 버렸다.
기후 마법을 이중발진으로 성공시켜버린 마법사가 고만고만한 애들과 겨뤄 기말고사를 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연유로 클레이오는 이번 3학년 2학기 시험부터 공개 시연을 면제받게 되었다.
마법반 교수진 회의 끝에 ‘마법총론 IV’와 ‘마법실습-심화’ 수업에서 클레이오의 성적은 별도로 평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를테면 해당 과목 영구 0등이라 할 수 있었다.
평가의 불공정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냐고 당사자는 황당해했으나, 정작 동급생들은 더 이상 클레이오와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안도했다.
제베디는 껄껄 웃으며 전했다.
“너는 얼마 전 수도방위대 마법단의 객원 고문으로 등록되었으니, 병역을 수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너를 제외하고 한 명을 더 병역 면제 대상으로 추가하기로 해서 모두들 기뻐했으니 걱정 말거라.”
그래서 사람 좋게 웃으며 허연 수염을 쓸어내리던 노인이 클레이오를 곱게 다뤄주었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3학년 2학기 중간고사, 클레이오의 개인 실기 과제는 수도방위대 학교 결계 재설정이었다.
‘내가 자청하기도 했고 도움도 되는 공부긴 한데….’
프란은 저만 콜포스에 두고 돌아간 일로 아직도 화나 있고, 고양이는 결계 마법의 전문묘가 아니니, 결계 설정에 관해선 제베디보다 더 믿음직한 스승이 없었다.
‘그렇지만 잠자는 시간 빼고는 숨도 못 쉬게 사람을 몰아치다니, 이럴 줄 누가 알았냐고.’
눈뜨면 제베디 교수가 부려 놓는 자료를 토할 때까지 읽고, 오후에는 결계를 이루는 마석에 마법식을 하나하나 새겨 넣어가며 마법식 조합과 고정 방법을 연습했다.
‘약속’의 「기억」 능력도 만능은 아니라서, 출력은 자동이지만 입력은 수동 아닌가. 자료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은 순수하게 자신의 머리로만 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 제베디가 원하는 학습량을 맞추려니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의욕이 생긴 제베디의 교수법은 혹독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베디는 마법전서에서 무작위로 문제를 뽑아 쪽지시험을 보던 교사였다. 1학년 학생들 대상으로 말이다.
그가 녹록잖은 인간인 걸 잊고 있었던 클레이오 자신의 실책이었다.
당대 최고의 마법사가 연구 제자를 앉혀놓고선 그냥 떠먹여 주는 교육을 할 리가 없었는데.
제베디는 언제나 배운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방향 제시를 강요해댔다.
클레이오는 안 돌아가는 머리에서 뉴런이 다 타도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만 했다.
‘약속’의 기능에 기대 적당히 꿀을 빨고 있을 뿐, 천재도 무엇도 아닌 그로선 죽을맛 쓴맛 짠맛 다 겪은 몇 주였다.
맘 같아서는 대충 넘기고픈 공부 꼭지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말로 대충 하자니, 눈앞에 놓인 재료와 자료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귀중해 막 나갈 수도 없었다.
제베디는 학장 권한으로 수도방위대 학교 보고를 열어버렸다. 학교가 천 년의 역사 동안 축적해온 귀중한 마석들이 전부 거기에 있었다.
학장은 국보급 보물들을 전혀 아끼지 않고 꺼내어 결계 곳곳에 박아 넣었다.
마리아 교수는 그 낭비에 약간 질린 기색이었지만, 제베디는 ‘이 위기의 시대에 쓰기 위해서 선조들이 물려준 것이 아니오?’라며 반론을 일축했다.
스승의 한 발자국 뒤에 선 클레이오로 말할 것 같으면, 금전 감각 상실 측면에서는 스승을 뛰어넘었다.
마석 토파즈 하나 박아 넣을 자리에 두 개를 박자고 주장했고, 내부 결계 보강 때에는 자신의 ‘예측’ 성흔을 들먹이며 사비로 마석 루비를 잔뜩 꺼내 와 두 겹을 더 둘렀다.
분명 이 다음에는 혹한의 기억된 세계가 열릴 거라는 계시를 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제베디는 제자의 청을 잘 받아주었다.
대신 그 모든 보강 과정에 클레이오를 직접 참여시켰다.
돈도 내고 마석도 기부하며 동시에 원생 역할까지 하는 생활은,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이제 지팡이가 없으면 편히 걷기 어려운 노인보다도 십 대 후반인 클레이오의 안색이 더 새하얬다.
그 점을 아서도 지적했다.
“쯔쯧, 얼굴 봐라. 샬럿 부인이 너 쓰러지겠다고 크렘 앙글레즈를 끓여서 과일에 뿌린 거 갖다주라잖아. 여기.”
아서는 노끈으로 묶어 가져온 자그마한 유리 단지를 클레이오 앞에 살살 흔들어 보였다.
뚜껑이 살짝 들리며 바닐라와 달걀, 크림의 고소한 향기와 베리의 상큼한 향이 섞여 났다.
피곤에 지친 클레이오는 애살스럽게 구는 아서의 파닥거림을 단칼에 잘랐다.
“도서관에선 취식 금지야.”
“그러니까 잠시만 나가서 벤치에서 먹으면 되잖아.”
자세를 낮춰 책상을 짚고는 송곳니까지 다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아서의 얼굴이 해맑았다.
“…너 처음부터 그러려고 간식을 받아온 거구나.”
“응!”
클레이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여름정원의 케이프 코트도 어깨에 대충 걸쳤다.
다 못 본 자료는 새벽에라도 일어나서 이어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평소보다 빨리 도서관을 나서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고작 오후 여덟 시인데 바깥은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학교의 강 건너 서안의 불빛이 휘황했다.
서늘한 공기 중으로 전기의 빛이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마수의 침공이란 사건이 없었던 듯, 건재한 룬데인이었다.
달칵.
저녁도 거른 뒤 먹는 과일과 크림은 꽤 잘 들어갔다.
함께 가져온 나무 스푼으로 병의 내용물을 클레이오가 조금씩 떠먹는 새, 아서는 최근의 훈련이라든지, 이시엘과 첼이 함께하는 아침 단련 양상이라든지를 떠들어댔다.
“릴리안은 그때 첼이 비행하는 걸 보고 완전히 반해버렸지 뭐야. 자기도 언젠간 비행을 하겠다며 아침 연습에 합류했어. 우선은 뛰어난 검사가 되는 게 먼저란 소릴 첼에게 들었거든.”
“꽤 근성이 있는 애네.”
“얼마나 열심히 한다고. 새벽에 나가 보면 제일 먼저 준비하고 있어. 아주 기세가 팍!”
“다들 미쳤어. 로사 교수가 이미 매일 토하기 직전까지 굴리는데 새벽부터 그런 게 하고 싶냐?”
“해야지. 훈련이라도 해야 뭐가 되지. 다시 하늘이 불로 뒤덮이고, 땅이 뜨거워져도 무력하게 기도만 하고 있기는 싫으니까. 검사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클레이오는 떨떠름하게 스푼을 내려놓았다. 크림은 단데 입 안이 묘하게 썼다.
“너무 그러지 말고 적당히 해.”
“너야말로. 그런 소릴 네가 할 자격이 있어?”
그렇다. 쉬라거나, 마음을 가볍게 먹으라거나 하는 건 이제 너무 사치스러운 권고가 되었다.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하는 클레이오나, 거듭된 반복의 기억을 가진 아서뿐 아니라 평범한 하급생조차도 불안을 느끼는 시절이었다.
거대한 재난이, 우리의 삶과 시대를 뒤흔들 파도가 밀어닥쳐온다는 예감과 함께.
그 예측은 그르지 않고, 단 한 번의 칼 휘두름, 단 한 보의 발놀림이라도 더하려는 아이들의 노력은 상찬받을 만한 것이다.
결국 이 세계에서 전쟁과 방어는 모두 기사의 싸움이 된다.
이 세계에 보병으로 이뤄진 상비군이 극단적으로 적은 것 역시, 보통 사람은 총과 대포를 들고도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수련을 거듭해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기사의 검은 단순한 칼 한 자루 이상의 병기로 변모한다.
그러니 어린 기사 예비생들의 노력은 매우 이성적인 계산의 결과 이루어지는 투입이었다.
누구나 소드마스터가 될 수는 없지만, 누군가는 소드마스터가 된다. 그것은 인간 중 가장 강하고 명예로운 자들이 가지는 표식.
그렇다면 수련이라는 건 아무리 괴롭더라도 해볼 만한 일이 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