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14
배움의 기쁨 (3)
‘하지만 그것이 강함 뿐 아니라 명예와 관련된다는 것이 또 신묘한 설계이긴 해.’
이 세계는 인간 전술병기들이 그보다 약한 인간들의 규칙과 명령에 복종하는 곳.
저 인외의 강자들이 명예와 기품에 연연하는 것 역시도, 어쩌면 무력에 의한 압제를 막으려는 신의 안배일지 모른다.
알비온의 기사들은 국왕에게 언약을 하고 브룬넨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공후에게 맹약을 한다.
우니카에서는 일족 회의의 장에게 맹세를, 세리카에서는 영예로운 무과의 관직에 들어 천자의 군사가 된다.
그러나 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카롤링거의 기사들은 충성선언을 교수형으로 파훼한 탓에 착란을 일으켰고, 에텐셀 왕가의 몰락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혁명 정부에 투신한 기사들 중 죽지도 미치지도 않고 살아남은 이들은 보통의 병사와 큰 차이가 없는 하급 에테르 감응자들이었다.
빅투아르 모로의 통치기에 태어나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에테르 감응자들은 아직 상급 레벨에 이를 나이가 되지 못했다.
그런 탓에 카롤링거의 마수 피해는 타국보다 극심했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더 우월한 능력을 가졌으니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으련만, 철저하게 인간의 법과 규약, 혹은 명예와 의무의 영광으로 묶여 있는 세계’의 이면이었다.
이 애들이 기사로서 제 몫을 하여 미래의 환란을 이겨내려면 정의롭고 명예로워야함을 안다.
그렇지만 클레이오로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서를 비롯한 아이들이 여전히 어리다는 사실을.
달칵.
회중시계를 꺼내 본 이시엘이 입을 열었다.
“아서 님. 시간이 늦었으니 이야기는 이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소식 전하고 들어가시지요. 클레이오 너도 쉬어야지 않겠나.”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으니, 아서와 클레이오의 컨디션을 생각해 한마디 건넨 거였다.
무릎을 탁 친 아서는 이제야 뭔가를 기억해낸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 맞다. 나 놀러 온 거 아니고 우리 다음 실습지 정해져서 알려주러 온 거였는데!”
“어딘데?”
본래도 실습이 적지 않은 수도방위대 학교였지만, 마수 출몰 이후로 현장 파견 횟수가 더더욱 늘어났다. 중간고사 이후로도 실습을 가야한다고 듣기는 했는데 바빠서 잊고 있었다.
“키시온 자작령이야!”
클레이오는 눈에 띄게 반색했다.
“원래 거긴 수도방위대 학교 실습지가 아니잖아? 웬일이람.”
안 그래도 한 번쯤은 자작령에 들러볼 핑계가 없을까 고심하던 차였는데 이런 방향에서 기회가 올 줄이야.
“이번에 병사와 기사들을 다 정식 등록했잖아. 그래서 실습지 허가가 났나 보더라고. 나랑 이시엘이 한참 못 돌아가고 있는 걸 알고서 학장이 실습지 배정을 손 좀 봐준 것 같아. 노인네가 제법이라니까.”
“너는 학장한테 말본새가 그게 뭐냐.”
“어이! 너야말로 노인네가 기운이 뻗친다고 욕했잖아.”
“그건… 그냥 너무 시키는 일이 많아서 한 소리고.”
아서 이놈은 지도교수 욕하는 걸 뭘 그렇게 유심히 듣고 있다 사람 민망하게 하는지.
어쨌거나 제베디가 직접 배정해준 것을 보면 봄에 있었던 키시온 군영의 일은 제대로 마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이시엘과 아서가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가지 못한 것이 학장은 마음 쓰였던 것 같다.
말을 마친 아서가 자리를 정리했다. 클레이오도 미적미적 따라 일어나 두 사람과 같이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남녀 기숙사가 갈리는 입구에서 클레이오는 가방을 뒤적여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이시엘, 이거 새 건틀렛. 너랑 첼 거랑, 쌍둥이 거. 좀처럼 만나질 못해서 가지고만 있었는데 잘됐어. 네가 좀 전해 줘.”
이번 건틀렛은 지난번 것보다 더욱 호화로웠다. 마석 다이아몬드를 바탕으로, 제베디가 주입한 지식을 결합해 강도를 높인 [방어] 마도구 티플라움 건틀렛이었다.
완성이야 진작 했는데 야간에는 여학생 기숙사 출입이 안 되어 건네질 못했다.
클레이오는 그간 해가 뜬 시간에 기숙사로 돌아온 날이 단 하루도 없었던 것이다.
이시엘은 말문이 막힌 듯 눈만 깜빡였다.
주머니 안을 슬쩍 들여다본 아서만 눈을 빛냈다.
“와, 다이아몬드! 이거 원 아까워서 끼지도 못할 만큼 반짝이는 마도구네. 잠도 못 잘 정도로 바쁘다더니, 이런 건 또 언제 손을 댄 거냐.”
눈꼬리에 눈물까지 달고 하품을 하던 클레이오가 말했다.
“하암. 원래 일이 바쁘면 딴 일로 현실도피 하고 싶어지거든. 라센티 백화점 매장을 늘린 뒤 물품 대느라 고생한 레이디 디오네는 평생 안 하던 자수 놓기가 다 하고 싶어지더래.”
“이럴 수가. 피곤하면 그냥 자야지 왜 딴 일을 해?”
아서는 몸을 쓰는 일 전문인데다 아직 젊어서 모르는 모양이다. 피곤도 지나치게 쌓이면 자려고 누워도 눈이 말똥말똥하고 쉬이 잠이 오질 않는다는 걸.
사실은 아슬란 놈이 어깨에 보란 듯 두르고 다니는 ‘박편의 이창’만 떠오르면 자려다가도 짜증 나서 잠이 깬다는 사실을 클레이오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런 자잘하고 구구절절한 원한을 말해 봐야 이해 못 하는 놈이다.
“너도 안 자고 여기 와 놓곤 뭔 소리야. 아무리 검사가 잠을 줄여도 된다지만, 너희 둘 다 제발 사흘에 한 번은 좀 자라. 밤새 불 꺼놓고 대련하지 말고.”
“당연히 상태를 봐 가며 하는 일이다. 네가 걱정할 만큼 무리하지는 않는다.”
“그래! 이시엘이 얼마나 철두철미한데. 내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이제 가서 자라고 한다고.”
“너희 기준은 믿을 수가 없어.”
“우리 걱정보다 네 몸부터 챙기시지!”
세 사람의 끝도 없는 말 잇기는, 왜 안 들어오고 거기 서서 서리를 맞고 있느냐는 류바 사감의 잔소리에 의해 끝났다.
오랜만의 다정한 밤이었다.
***
그 주의 일요일.
클레이오는 아주 오랜만에 거울을 들여다봤다.
그간은 자료 읽고, 문헌 찾고, 찾아 정리한 것을 외우고, 결계 보강하고, 마법식 응용하느라 매일이 휙휙 지나갔다.
같이 공부하는 동기라도 있으면 발제나마 나눠서 할 텐데 제베디와의 수업은 늘 1:1.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전에 비할 바 없이 넓어진 에테르 그릇을 채우기 위해 에테르 순환을 거듭하느라 잠까지 줄여야 했다.
그 와중에, 아세르 저택에는 새로 나온 자동차를 한 대 사 두었다.
항시 머무르는 주인이 없다 보니 마사도 비고 마차도 없는 저택이었는데 좋은 대체품이다 싶었다.
최근 카롤링거에서 공기압 타이어가 발명되어 소량이지만 쓸 만한 자동차가 나오기 시작했단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구입했다.
그런 뒤 저택의 사용인 중 젊은 축에게 운전을 배우게 했다. 가장 두각을 드러낸 건 미라라는 어린 하녀였다. 그녀에겐 봉급을 더 늘려 주고 모자와 제복도 새로 맞추었다.
혹시라도 지난번 같은 일이 생기면 저택은 두고 다 함께 차에 타고서 수도를 벗어나라고 일러두었다.
‘재산이야 얼마든 되찾을 수 있지만 생명은 그렇지 않아요.’라는 말에 캔튼 부인은 또다시 아들 군대 보내는 어머니의 표정이 되어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었다.
그렇게 눈코 뜰 새가 없는 나날을 보낸 결과, 클레이오의 얼굴엔 그간의 과로가 고스란히 반영되고 말았다.
원래도 어둡던 눈 아래가 검게 퀭하고, 머리는 부스스 길었다. 간신히 조금 불어났던 체중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시식 빠져나갔다.
부석부석하고 파리한 뺨을 쓸어보던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분명 디오네에게 한소리 들을 텐데.’
여전히 괴이한 취향을 자랑하는 젊은 사업가는 ‘그나마 봐줄 건 얼굴인데 이렇게 다루면 어떡해요!’ 라든지 ‘머리에 베르가못 오일이라도 좀 발라요!’ 같은 소릴 할 게 뻔했다.
눈속임도 안 될 건 알았지만 클레이오는 끝이 다 끊어진 머리에 빗을 대고, 평소엔 대충 묶는 타이도 거울을 보며 제대로 딤플을 만들어 맸다.
디오네가 새로 보내준 재킷을 걸치고 머리 리본도 사용했다. 그녀의 말은 순순히 따르는 편이 뒷감당이 편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몇 주 만의 외출이었다.
디오네의 사무실과 멀지 않은 세인트 리저벳 스퀘어 맞은편에, 건물 앞부분부터 처마 장식으로 꾸민 세리카식 찻집이 문을 열었다.
비단옷을 입은 점원의 안내를 받아 올라가자 디오네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늘 인산인해를 이루는 명소이지만 주요 출자자인 디오네는 한적하고 전망 좋은 2층 테라스 자리를 딱 차지하고 있었다.
“왔어요, 도련님? 완전 얼굴 까먹겠어요. 머리도 많이 길었네요. 에그, 낯빛 상한 거 보래. 이게 뭐예요!”
“미안합니다, 레이디 디오네. 그간 공부하느라 정말로 바빴습니다.”
“요즘 열심히 한단 소린 들었어요. 나무라려는 거 아니니까 얼른 앉아 봐요. 우롱차는 내가 주문해 놨어요. 우리 상회에서 공급하는 최상품이죠.”
두 사람의 자리에는 대나무 차판과 자사호 같은 다구 일습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흉내만 내는 게 아니라 꽤 본격적인 세리카식이군요.”
디오네는 찻잎 뜨는 용도의 스푼인 차칙에 새겨진 연꽃 부조를 손끝으로 쓸었다.
“이국 흥취를 파는 델 어설프게 꾸려 놔선 금세 바람이 꺼지죠. 저도 투자만 했지 와보는 건 처음인데, 세세한 부분까지 제대로 해 두어 마음에 드네요.”
“레이디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수도 시민들에게도 대단히 인상적인 장소가 될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게 돼야 하는데 말이죠. 아무튼, 오늘은 좋은 소식이 많으니까 기대해요.”
레비 유한회사 사무실에 들렀다 온 디오네는 서류 가방에서 익숙한 봉투를 꺼냈다.
클레이오의 3분기 수익을 정리한 장부였다.
‘어째 평소보다 봉투가 좀 두툼한데.’
“짠! 이거 봐요. 드 네쥬 에스트 호텔 부지 임대료를 새로 조정했어요. 지가가 워낙 올랐으니 특약이 발동된 거죠. 임대료를 500만 디나르로 올렸어요!”
부동산에 관련한 유지ㆍ보수ㆍ관리와 비밀유지 비용까지 더해, 연간 임대료 총액에서 8%의 수수료를 받는 그녀의 수익 역시 급상승했단 뜻이다.
고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한 클레이오는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재계약은 5년 후가 아니었던가?
“특약이요?”
“그때 계약서 다 읽었잖아요. 설마 잊은 건가요?”
이미 아득하게 느껴지던 재작년 봄.
디오네와 카타리나가 함께 작성한 계약서를 보기는 했다. 하지만 순수하게 머리에 남아있었냐면, 당연히 까먹었다.
클레이오는 재빨리 ‘약속’의 기능에 매달렸다. 떠오른 「기억」의 두루마리가 엄청난 속도로 파르르 돌아갔다.
“음, 그러니까, 연 임대료가 공시지가의 4% 이하 금액에 도달할 경우 5년 이내에도 재조정이 가능하다…는 특약 말이군요.”
“맞아요! 역시, 수도를 구한 대마법사답게 기억력이 비상하네요. 자세한 건 직접 읽어 봐요.”
자신의 치부를 부러 드러내 보일 이유는 없기에 클레이오 역시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서류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달각.
쪼르르륵.
그동안 디오네는 능숙하게 첫 찻물을 버리고 녹신녹신해진 찻잎에 다시 따듯한 물을 부었다.
차를 내리는 일은 선생을 구해다 배웠는지 능숙해 보이는데, 어째 움직임이 부산한 걸 보니 정말로 들뜬 모양이었다.
젊은 사업가로 두각을 드러내는 그녀이지만 쏠쏠한 현금의 원천이 되는 클레이오의 부동산 관리 일은 놓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두 사람은 심장을 얽어맨 계약한 사이가 아닌가.
“동안의 기차역에 새 결계를 설치하기로 한 뒤 호텔 부지의 지가가 아주 천장을 뚫었어요. 동안의 지가가 서안을 추월한 건 역사상 처음이에요. 드디어 1억 디나르 돌파입니다.”
1억 디나르.
이젠 자산 전체가 아니라 순수하게 부동산 가치만 천억 원에 이르렀단 뜻이다.
클레이오는 손안의 서류를 다시금 내려다봤다.
두 번 봐도 실감 나지 않는 숫자였다.
외제니아 라니에리
“이제 클레이오 당신이 룬데인의 주요 지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거 아나요? 물론 내 수수료도 전대미문의 금액이긴 하지만.”
“지가가 날뛰면 셋방의 방세도 많이 올랐을 텐데, 동역 부근에서 일하는 짐꾼들 원성이 자자하겠습니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프란의 다락방에 찾아가 침대 다리 옆에 금화를 부려놓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는 클레이오였다.
교통도 좋고 전망도 괜찮고 밥까지 맛있는 숙소는 흔치 않은데, 방세가 부족해 쫓겨나면 큰일이 아닌가.
여전히 마음이 덜 풀린 프란에게 어떻게 금화를 건넬까 생각하니 뾰족한 수가 안 떠올랐다.
‘거기다 부동산 갑부인 나한테 눈을 곱게 뜰 리도 없고. 어쩐담.’
“그래서 그 위대하신 왕세자 저하께서 요 노른자위 땅에 일꾼과 서민을 위한 왕실 공영 주택이란 걸 짓기 시작했잖아요. 뭐어, 여길 노른자위 땅으로 만든 것도 저하 본인이시지만 말이죠.”
“학교에만 틀어박혀 있느라 영판 몰랐던 소식입니다. 헌데, 동편에 그런 대규모 단지를 조성할 만한 부지가 어디 있습니까?”
“역 뒤에 조차장 동쪽으로 남은 부지예요.”
“아, 기억납니다. 일전에 마수가 출몰했을 때 첼이 거길 임시 비행장으로 써서 비행기를 이륙시켰죠.”
“이제 그런 일은 못 하게 됐네요. 거길 왜 나대지로 남겨놨나 했더니, 세자 저하께선 앞날을 내다보듯 대단한 분이시라고밖엔.”
내용만 늘어두면 칭찬의 말이지만 코웃음 치는 말투, 과장된 억양, 부채를 탁 접는 모양새를 합쳐서 보면 은근히 신랄한 비웃음이었다.
“…워낙에 대단하고 뛰어난 분이시지 않습니까.”
내무보안국에 끌려갔던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한 적은 없지만 디오네가 누군가.
그녀는 기디온이 거액의 보석금을 내고 클레이오를 북문 지하에서 빼내왔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 일의 배후가 멜키오르인 것 역시도.
그런데도 여전히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고 충실히 클레이오의 곁에 남아준 것은 오로지 계약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디오네는 드러내 과시하지 않을 뿐 은근히 담대한 반골 성향이 있었다.
레이스 부채 너머에서 빛나는 눈엔 수도를 뒤흔드는 열광에 휩쓸리지 않는 냉정함이 감돌았다.
“티플라움 탄광도 그렇고, 철도며 공업단지 조성을 미리 준비한 것도 그렇고… 국왕 대리는 말이죠, 혹시 당신이랑 비슷한 성흔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평소에 절대 장갑을 벗지 않잖아요.”
“글쎄요. 소문은 소문일 뿐. 원래 귀하신 분들은 맨살을 잘 드러내지 않는 법이잖습니까.”
“그 소문이 맞다는 가정 하에요. 그렇다면 저하께서는 므네모시네의 문이 터져나갈 것을 왜 방비하지 않으셨던 걸까요? 미래를 손바닥 보듯 아시는 분께서?”
클레이오는 답을 안다.
멜키오르는 이 세상이 불확실성과 혼란 속에서 뒤흔들리길, 그리하여 궤도를 영구히 이탈하길 원하는 자이므로.
그것은 언급될 수조차 없는 진실.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긴 청년은 숙우로 옮겨진 우롱차의 향을 음미하며 말을 아꼈다.
누구든 멜키오르에 관해선 적게 아는 편이 좋다. 일신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서라도.
하지만 파편적 단서만 가지고도 멜키오르의 회귀자적 측면을 알아보는 디오네의 지혜가 참으로 대단했다.
디오네 자신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클레이오의 노골적인 회피에, 물빛 눈이 속눈썹 아래에서 그늘졌다.
탁.
부채를 접은 디오네는 언제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냐는 듯, 스위치를 딸각인 것처럼 화제를 전환했다.
“뭐, 므네모시네의 문에서 마수가 나온 건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아무튼 그건 지난 일. 지금은 모두들 로열 웨딩 이야기만 하는걸요.”
“아아… 그거 말이죠. 어린 메이드들부터 교직원들 사이에까지 큰 화제더군요.”
“그럼요! 언론도 결혼 소식으로 난리랍니다. 이거 봐요.”
디오네의 서류 가방에선 또 한 무더기의 신문과 잡지가 불쑥 튀어나왔다.
누구의 로열 웨딩이냐면, 아슬란 리오그난과 그의 약혼자 외제니아 라니에리의 결혼이었다.
아슬란은 이번 세대에 처음으로 약혼한 알비온의 왕자로서, 약혼 상대를 대동한 그의 귀성은 퍼레이드 직후의 축제 분위기를 한결 북돋웠다.
어린 시절엔 심각한 결함을 가진 저주받은 왕자여서 나중에는 구귀족과 신귀족 세력 간의 알력 때문에 정혼자조차 없는 왕세자와 달리, 둘째 왕자의 혼사는 가볍게 받아들여졌다.
충격적인 사건 직후이다 보니 더더욱 그 기억을 지울 만한 경사가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멜키오르 역시 아슬란의 혼사로 달아오르는 분위기를 굳이 제지하지 않고 언론의 과열 경쟁도 묵과하는 듯했다.
그건 간과가 아니라 묵과였다. 내무보안국의 언론 검열 시스템은 여전히 건재했으니까.
‘하지만 멜키오르도 생각을 잘못한 거야. 아슬란이 단란한 가정을 이루면 홀아비 왕세자보단 두 배의 가산점을 깔고 가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번듯한 가정을 갖추는 일은, 21세기까지도 왕족과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기본 조건 아닌가.
‘2왕자는 말 뒷발로 쥐를 잡은 건지 어떤 건진 몰라도 말이지.’
이제는 아슬란조차 제가 경멸하는 대중의 힘을 어느 정도는 깨달은 것 같았다.
대중의 지지를 형편 좋게 이용한 후 일단 집권만 하면 다 엎으려는 심산이라 하더라도, 과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슬란이 평민들 앞에서 친히 손을 흔들어주며 환호에 응답하다니, 지난 원고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약혼녀 이름을 저렇게 소개한 것만 봐도 컨설팅 엄청 잘 받은 세팅이란 말이지.’
이건 그 고귀하신 쥴레이카나 머리 굳은 브룬넨 군부 인사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발상이 아니었다.
‘역시 헤스터인가?’
아슬란 진영으로 간 헤스터 워드는 골치 아프고 지독한 변수임에 틀림없었다.
멜키오르는 이 상황을 몹시 흥미로워할 테지만, 클레이오로선 따듯한 찻물에 데워진 위가 쿡쿡 쑤시는 느낌만 강해졌다.
브룬넨과 알비온 관계는 긴 경색과 짧은 화평을 오간 탓에, 서로에 대한 양국의 국민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외제니아 공녀는 아버지 쪽에 카롤링거와 포리고 왕족의 피가 섞인 점을 내세워 알비온인의 반감을 누그러뜨렸다.
외제니아는 여러 왕국의 핏줄이 섞인 귀족답게 엄청나게 긴 이름을 가졌지만, 그녀가 자신을 소개하는 이름은 부친의 성인 라니에리였다.
에텐셀도 카스틸리엔도 아닌 포리고 왕가의 방계 성은 외제니아라는 이름과 썩 잘 어울렸다.
클레이오는 디오네의 설명을 흘려들으며 잡지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호화로운 사양의 부인 잡지는 석판 인쇄로 컬러까지 들어가 있어 공녀의 외모를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이젠스의 포도원에서 매니저가 한 호언처럼 공녀는 상당한 미인으로, 아주 고전적인 풍모를 지녔다.
자그마한 키와 동그마한 체형, 따듯한 남보랏빛 눈에 고운 뺨이 발그레해 제 나이인 스물다섯 살보단 한참 어려 보이는 영애였다.
아슬란과는 6촌지간이다보니 그녀 역시 빛도 반사되지 않은 검은 머리를 가졌으나, 폭신폭신 부푼 곱슬머리가 너무도 귀여워 아슬란이나 쥴레이카와는 인상이 사뭇 달랐다.
외제니아의 곁에서 약혼녀를 에스코트하고 선 아슬란은 든든하고 다정해 보였다.
‘이 그림만 보면 자기 말이랑 개를 죽인단 소문이 도는 음침한 왕자처럼 생기진 않았네. 9교쯤 되니 언론플레이는 멜키오르만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이거지.’
예전에 스웨인 템플이 은근슬쩍 전해준 소문은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아슬란이 더 이상 꼬리가 잡힐 만한 잔혹 행각을 보이지도 않거니와, 그는 위세 높은 왕조의 영웅. 명확한 근거 없이 불길한 소문을 퍼트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팔락.
다음 페이지에는 외제니아와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카롤링거어와 알비온어를 잘하고, 지극히 다정하며 밝은 성격, 좋아하는 꽃은 백일홍….
“그러니까 백일홍 모양 브로치는 좀 식상하다 이거예요.”
“아, 공녀가 좋아하는 꽃이지만 다른 상회에서도 앞 다투어 만들 테니 말이죠?”
“그렇죠. 오히려 실제 백일홍과 같은 1:1 크기의 보석 꽃에 티플라움 와이어를 넣어 빛을 내는 편이 차별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러 송이 모아놓으면 빛나는 꽃다발이 될 테니 엄청난 주목을 모을 것 같긴 하지만, 제작비용 생각하면 이익은 미미할 텐데요.”
“비싸면 비쌀수록 끌리는 사람들이 있죠. 우리나라에서만 장사할 게 아니잖아요. 로열 웨딩은 대기회라구요. 왕족이 결혼하면 그해의 유행 아이템이 몇 배는 더 팔리게 돼요! 어느 나라든 신흥 부자들은 자기 결혼식에서도 왕후 귀족과 비슷한 걸 해 보고 싶어 하니까요.”
어째 영 감이 안 좋았다.
클레이오는 ‘약속’의 두루마리를 펴 외제니아 라니에리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녀 역시 이전 원고에서는 언급조차 없는 이였다.
요아힘 황제가 병석에 눕지 않은 채 후계자로 아슬란을 택했으니 정략결혼을 서두를 이유도 없었지 않은가.
‘아무리 원고가 바스라지고 있다 해도 저자의 억지력은 장난이 아니라고. 이번에도 알비온의 2왕자는 홀아비로 죽을 공산이 크지 않을까?’
클레이오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최대한 설득력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찻집까진 좋았지만 결혼식 관련 사치품 제작에 대해선 좀 더 숙고를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결혼식이란 게 여신상 앞에서 선서를 할 때까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보니.”
디오네와 클레이오 두 사람은 일종의 경제 공동체를 이룬 사이였다.
디오네의 사업이 흔들리는 걸 원치 않는 클레이오는 일반론을 들어 그녀를 살살 만류했다.
이전 세상에서도 청첩장 찍고 난 뒤 파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 말도 아니고 당신 조언이라면 새겨두도록 하죠. 일리는 있어요. 유행과 여론 때문에 뜬 아이템은 바로 그 여론 때문에 진흙에 처박히기도 하니, 유념해 둘게요.”
“귀담아들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물론 처음엔 다른 상회에서 로얄 웨딩 유관 상품으로 돈을 끌어 모을 수도 있지만, 그게 화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말투 봐. 이렇게 늙은이처럼 구는 양반인데 학교에 돌아가면 아직도 동무들과 같이 기차 타고 실습을 가야 하는 학생이라니, 어딘가 부조리하게 느껴지네요.”
“부조리할 것까지야 없잖습니까….”
애늙은이 같다는 말은 각계각층에게서 천 번은 들어 이젠 귀가 간지럽지도 않았다.
실제로 먹어버린 나이를 뱉어 놓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요. 그럼 어린애가 삼촌 흉내 내는 것처럼 우스우면서도 대견하다고 해 둘게요. 이번 실습지는 키시온 영지라고요? 당신 친구들의 고향에 가 보겠네요. 어째, 재미나겠어요. 아아, 그립다. 전 3학년 땐 콜포스로 갔던 기억이 나요.”
클레이오와 친구들이 이젠스 성에서 벌인 일을 모르는 디오네는 이번에‘도’ 무사 하라며 안전을 당부했다.
“안 그래도 다들 기대가 큽니다.”
“기대라… 흐음, 이런 걸 주문한 걸 보면 또 꿍꿍이가 있는 거죠?”
디오네는 잡지에 뒤섞여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봉투 하나를 클레이오에게 쓱 밀어주었다.
“고객의 주문품에 대한 비밀엄수 항목을 넣어서 지불했지 않습니까.”
“알아요. 회로 접지를 막아둔 마석이 에테르 반응으로 타버리면, 그 뒤부터 작동하기 시작하는 기판 같은 특이한 물건이라도 왜 주문했는지 묻지 말란 거죠.”
클레이오는 봉투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에테르를 감지하면 마석이 타고, 그러면 회로가 연결돼 작동되는 시한 장치였다.
에테르 감응성이 높은 마석 알렉산드라이트가 봉인처럼 회로 사이를 막아둔 기판의 마무리는 마음에 들게 정교했다.
주문 그대로인 완성품에 클레이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참… 디오네가 내막을 찔러볼만한 물건이기는 하지.’
물론 말은 뾰족하게 해도 클레이오가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은 역시 디오네였다. 그녀는 어디에서도 고객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지 않을 터였다.
“저희가 친밀한 동료이지만 또 서로 간엔 모르는 부분도 있어야 교제에 신선함이 더해지지 않겠습니까? 레이디 디오네도 이번 페드르 출장 무사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아유, 우리 클레이오 도련님 이제 장가보내도 되겠어. 첼과 놀다 보니 유들유들함이 옮았나봐! 알겠어요, 고마워요. 다녀와서 봐요!”
사실 클레이오가 정말로 걱정하는 건 출장 따위가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디오네가 오래오래 출장을 다녀줬으면 할 정도였다. 다음 기억된 세계가 열릴 때에는 수도가 위험했으니까.
‘당분간이라도 자리를 비운다니 잘 됐어.’
므네모시네의 문 주변 결계도 재설정했고, 제베디에게도 앞으로 나올 던전에 대해 설명해 두었고, 수도방위대 마법단 기동조사단 단장으로 복귀한 에즈라와 그의 부관 다리아에게도 언질을 했으니 잠시 정도는 수도를 떠나도 되지 싶었다.
키시온 영지로 가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