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15
키시온 영지 (1)
빼애애애앵―
철그럭. 철컥.
키시온 자작령으로 향하는 지선 완행열차 안.
어쩐 일인지 이번 실습에 가장 흥분한 사람은 아서나 안젤리움 쌍둥이들이 아니라 첼이었다.
“전에 갔을 땐 문제의 주요 화물 운송 중이라 성벽 구경도 못 했다고. 진짜 궁금한 데가 많은데, 드디어 거길 정식으로 가 보는구나.”
이시엘은 군것질하고 싶다는 쌍둥이들을 데리고 식당 칸에 가 있어서 지금 6인 객실 안에는 아서, 클레이오, 첼 세 사람뿐이었다.
아서는 첼의 흥분이 잘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씨가 좋기는 해도 별 특색은 없는 산골짜기인데, 첼 네 취향에 맞으려나? 뭐가 그렇게 보고 싶어? 듀브리스에 광산 생기기 전엔 룬데인까지 가는 데 열두 시간도 넘게 걸리던 동네라고.”
광산 개발 이후 듀브리스행 기차 노선이 확장돼서 마지막 분기점까진 빠르게 올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이전에 걸리던 시간의 절반만 써도 되도록 가까워진 게 7시간 거리였다.
유랑극단도 한 해에 한 번만 들르고 무도장이라곤 단 한 군데도 없는 산중의 키시온 자작령에, 세련된 도시 취향의 첼이 관심 갖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첼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시엘이 처음으로 멜라미드의 검을 들어 본 자작나무 숲이랑, 겨울에도 안 어는 작은 샘물터, 키시온 자작부인과 외팔이 존의 묘에 성묘도 하고, 폐광한 암염 동굴 속 예배당이랑….”
“뭐야, 네가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 여긴 관광 안내서 같은 데도 안 실린 동넨데.”
“이시엘이 있잖아! 난 이시엘이랑 기숙사를 같이 쓰니까. 긴 겨울밤 동안 서로의 머릴 빗어준 뒤 손발에 크림도 바르고 탕파로 데워 둔 침대에서 차랑 간식 나눠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호방하고 화려한 걸 좋아하는 첼에게서 나오리라 생각지 않았던 말이었다.
아서와 클레이오는 멀뚱한 얼굴로 서로만 쳐다봤다.
‘진짜야? 너도 하메랑 그런 짓 해?’
‘그럴 리가 있냐.’
이제 암살 위협과는 멀어졌어도 방을 더럽게 쓰는 아서는 여전히 하우스메이트가 없었다.
클레이오로 말할 것 같으면 네보와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나눠 먹을 만큼은 친해졌어도 같이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다정함 따윈 없었다.
“너흰 진짜 친해졌구나.”
“후후, 제법 공을 들였지.”
아서도 휘유우- 하고 탄성을 냈다.
“이시엘은 좀처럼 자기 얘기를 안 하는데 너한텐 다르게 구네.”
“우리 아서 왕자님이 이시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준 덕이지. 힘들 때 위로해 주는 사람에겐 마음을 열게 되어있거든.”
“야, 내가 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이젠스 성에서 이시엘을 홀랑 밀어버리고 혼자 아슬란을 상대하려던 거부터 되짚어 가볼까?”
그건, 이라든가, 그때엔 사정이, 라든가 입을 달싹이던 아서는 결국 가만히 머리만 긁적였다.
달칵.
“무슨 얘기들을 그리 열띠게 하나.”
이시엘이 등장하자마자 첼은 태도를 싹 바꾸었다.
“파리사에 도착하면 어디 가보고 싶은지 이야기하고 있었어.”
“그리 볼 것 없는 소읍이라니까. 첼, 너는 무슨 기대를 하는 거냐?”
“또 그런 점이 좋은 거야.”
이시엘은 첼의 언동을 따라갈 수 없는지 가볍게 고개를 저었고, 아서와 클레이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뒤늦게 군밤과 파스티 봉투를 잔뜩 쥐고 나타난 쌍둥이들이 ‘뭔데뭔데, 뭐기에 너네만 뭐 훔쳐 먹은 것처럼 웃고 있어!’라고 소리치며 객차의 혼잡을 더했다.
.
.
.
몇 시간 후, 파리사 시.
아서는 클레이오가 꾸린 거대한 짐가방을 들고 앞장섰다.
그를 따라 역사 밖으로 나선 클레이오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거한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피부는 밀빛, 머리색은 불타는 듯한 진홍, 눈동자는 한여름의 초록인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체격이랑 이목구비는 완전히 다르지만 저 머리색은 1킬로미터 밖에서 봐도 이시엘의 핏줄 같은데.’
금세 지척까지 다다른 중년 남자는 간소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허리에 찬 검은 귀물이고 태도는 귀족적이군.’
체구가 거대하고 이시엘과 닮지 않았을 뿐 잘 뜯어보면 꽤 단정한 외모를 지닌 자였다.
쌍둥이들을 챙기다 남자를 뒤늦게 발견한 이시엘이 눈에 띄게 반색했다.
“아버님,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클레이오는 속으로 헛숨을 삼켰다.
저 거한이 친척이 아니라 아버지란다. 집사도 하인도 마부도 아닌, 영주가 파리사 역까지 직접 말을 타고 마중을 나온 것이다.
소탈하다 못해 파격적이었고, 아서가 왜 저렇게 자랐는지도 알 법한 처사였다.
물론 놀란 건 클레이오뿐인 듯했다.
“잘 지냈느냐, 이시엘.”
“네. 덕분에 무사히 지냈습니다. 아버님도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나야 늘 같지. 항상 네 걱정이다. 미에츠 선생 소식을 적은 편지 이후로 네 이야길 듣지 못했구나.”
“저도 별 일 없습니다. 스승님께서도 트리스테인 영지에서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평소 번잡하게 구는 일 없는 이시엘이 드물게도 상기된 얼굴을 했다.
괜히 멜키오르에게 꼬투리를 잡힐까 편지 왕래도 자제하던 부녀는 지난 겨울방학 이후 근 1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거였다.
여름에는 소위 초소 습격 사건과 반역죄 조사 때문에 돌아오지 못한 이시엘이었다.
애틋하게 딸의 모습을 살피던 슐리만 키시온은 아서에게도 안부를 물었다.
“아서 님도 별고 없으셨습니까?”
“저야 항상 팔팔하죠!”
다그닥 다그닥.
덜그덕. 히이잉.
훈훈한 인사가 오가는 가운데, 요란하게 달려온 마차가 키시온 자작의 뒤로 급히 멈춰 섰다.
마부석에 앉은 두 사내는 알비온 육군의 하사관 제복 차림이었다.
크고 작은 두 사내 중, 빼족하고 키가 큰 사내가 먼저 넉살을 떨었다.
“하이고, 영주님이 말 타고 쓍 가버리셔 갖고, 우리는 부리나케 따라잡느라 꽁지가 빠질 뻔했어라?”
체격이 퉁퉁하고 손이 커다란 사내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귀한 딸냄 얼른 보고 잡어서 아주 애가 탔다 그래?”
아서는 두 사람을 아는지 반갑게 소리쳤다.
“조셉! 조지!”
“아이고, 우리 꼬마 왕자 키가 또 컸어. 이젠 황소만해졌네요.”
“훈장 받았담서요!”
“조셉은 안 본 새 머리도 더 벗어지고 조지는 배가 더 나와서 벨트가 두 칸이나 늘어났네!”
“야이! 요 주둥이 보래. 못된 소리는, 어, 수도 가서도 못 고치고요?”
“나는 보이는 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아서는 어린애처럼 히죽대며, 어깨를 치려는 조지의 솥뚜껑 같은 손을 샥 피했다.
“얼씨구!”
리피와 레티샤가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아서가 꼬마 왕자예요?”
“요 꼬망이들은 또 누구여?”
“꼬망이 아닌데. 리피 안젤리움이에요.”
“레티샤 안젤리움요.”
“안젤리움 자작가의 애들이고, 이쪽은 첼레스테스 탕페트 드 네쥬. 얘는 클레이오 아세르. 모두 나와 이시엘의 제일 친한 친구들!”
“어구, 다들 이 먼 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우린 실습생 같은 건 안 오는 덴데, 어, 왕자랑 소영주님이 그 뭔 학교에 가가지고 이런 일이 다 있네그려.”
“야야, 조셉! 소영주님 말고 아가씨라고 불러야지. 남들 있는데….”
“맞다.”
왕실에서 강요한 어린 후계자가 있으니 영지 바깥사람들 앞에선 이시엘을 소영주가 아니라 아가씨로 부르는 것이 규칙인 모양인데, 조셉과 조지는 영 어설펐다.
이런 순박한 이들을 이끌고 중앙의 조사관을 견뎌야 했으니 키시온 자작도 지내기가 쉽지 않았겠다 싶었다.
두 명의 일등 상사는 아서의 머리를 다 헤집어놓고 어깨를 두드리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아서는 웃었다. 늘 환하게 웃는 놈이긴 해도 오늘 표정은 유독 티 없이 맑았다.
살아오면서 많은 불우한 일을 겪었지만, 늘상 불행하게 자라지는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그가 어떻게 트리스테인 영지 사람들 사이로 순식간에 녹아 들어갈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추운 데 살면 기질이 비슷해지기라도 하나?’
아서와 아이들, 두 병사는 왁자지껄 마차에 짐을 싣고 티격태격 안부를 전했다.
한 발 떨어져 그 부산스러움에 넋이 빠져 있던 클레이오에게 슐리만 키시온이 인사를 건넸다.
“변경의 영지라 차분하지 못한 점 사과드리겠소. 마법사께서는 필경 클레이오 경이시겠군요.”
키시온 자작은 겨울 정원의 케이프 코트 주머니에 삐죽 꽂힌 마법사용 완드를 본 모양이었다.
“네, 네. 클레이오 아세르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드 키시온.”
슐리만 키시온이 클레이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맞잡은 손은 마디가 굵으며 굳은살로 가득했다. 무인의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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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의 밤은 가을에도 차가웠다. 일행이 짐을 풀고 얼마 되지 않아서 해가 떨어져 사위가 어두웠다.
저녁 식사는 대개의 귀족가 만찬처럼 밤 9시까지 기다리지 않고 7시에 곧장 시작되었다. 키시온 자작은 허례허식을 차리지 않는 실용적인 성격 같았다.
막 복구한 성벽 안에 위치한 키시온 자작의 거처는 투박한 3층 석조 건물이었다. 아주 오래되었고, 보이는 것만큼이나 구식이었다.
만찬실 역시 방한용으로 카펫을 깔고 벽에 태피스트리를 대 놓았을 뿐 검박하기만 했다.
타닥. 탁.
증기 라디에이터 대신 장작을 넉넉히 넣어 지핀 화로가 공기를 따스하게 달궜다.
전깃불 역시 먼 고장의 이야기로 바깥에는 횃불, 실내에는 가스등을 밝혀 놓았다.
가운데 놓인 16인용 식탁은 표면이 군데군데 갈라지고 파여 견뎌낸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곳에선 특이하게도 식탁의 상석을 비워 두었다. 키시온 자작은 돌로 깎은 석좌 대신 보통은 기사단장이 앉는 자리에 앉았다.
클레이오는 왜 그런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틈 없이 저녁 식사가 나왔다.
하인들은 음식을 모두 한 번에 옮겨와 식탁 위로 쭉 늘어놓았다.
전채-본식-후식을 갖춘 호화로운 코스 요리와는 거리가 먼 메뉴로 소 내장을 넣어 걸쭉하게 끓인 스튜, 고기와 함께 조리해 육즙이 가득 밴 사과와 감자가 곁들여진 멧돼지 구이였다.
부근의 암염 광산은 폐광된 지 오래고 트리스테인 영지처럼 교역이 활발한 것도 아니니 식탁이 소박한 것도 당연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들 드십시오.”
“와, 이 스튜 정말 먹고 싶었어요! 냄새만 맡아도 눈물날 것 같아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서 님.”
아주 어릴 때부터 아서를 봐왔을 텐데 키시온 자작은 왕자를 아주 깍듯이 대했다. 이시엘의 태도가 어디서 왔는지 알 법했다.
반면 아까 마중을 나왔던 조셉과 조지는 둘 다 하사관이었다. 일등 상사 둘은 말만 존대일 뿐 아서를 조카 대하듯 하는데, 정작 영주의 태도는 아주 판이했다.
제 몫의 스튜를 뜨며 클레이오는 키시온 자작과 아서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렇게 기계적으로 입에 든 걸 넘기려던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어?”
그릇에 담긴 건 양파 당근 셀러리 소의 위인 양과 벌집양을 넣고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한 뒤 로즈메리와 타임을 곁들여 끓인 스튜였다.
토마토소스로 감칠맛을 더한 것도 아니고 귀한 향신료가 든 것도 아닌데, 군내 하나 없이 부드럽고 녹진한 양과 벌집양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음식은 좀 입에 맞소이까?”
“정말 훌륭합니다, 자작님. 이 스튜는 정말로 일품이군요.”
클레이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서가 덩달아 촐싹댔다.
“그치?! 맛있지, 레이?”
화로의 불빛이 뺨 한쪽에 드리운 이시엘의 표정이 평소보다 부드러운 만큼, 아서도 친구들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들뜬 모양이었다.
“그래, 부드럽고 고소해. 주방장의 솜씨가 아주 훌륭하네.”
“아, 여간해서는 맛있단 이야기 안 하는 네 입에 맞으면 진짜 최고란 거지. 머레이에게 전해 주면 기뻐할 거 같아요. 얘는 진짜 입이 까다롭거든요.”
“아니, 이 친구의 과장입니다….”
초면인 키시온 자작에게 까탈스런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클레이오의 사회적 자아가 아서의 나댐에 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