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16
키시온 영지 (2)
클레이오 곁에 앉아있던 쌍둥이들도 신이 나 거들었다.
“과장 아닌 거 같은데.”
“그치만 이 스튜는 정말 최고예요!”
웃음소리 속에서 키시온 자작령의 첫 밤이 깊었다.
만찬 후 응접실로 장소를 옮겼던 일행은 밤이 깊으며 하나하나 자리를 비웠다.
우선 쌍둥이들이 자러 갔다.
아서는 조지와 조셉에게 끌려 회포를 풀러 갔고 이시엘은 당연한 듯 아서를 수행했다.
부녀간의 친밀한 대화는 아까 역에서 성으로 올라오며 말머리를 나란히 하는 동안 다 끝낸 모양이었다. 서로 간에 존중과 사랑이 충만하여 긴말이 필요 없는 부녀 사이 같았다.
어느덧 응접실의 벽난로 앞에는 클레이오와 첼 그리고 키시온 자작, 세 사람만 남았다.
위스키 병은 벌써 절반이 비었다.
주변을 물린 키시온 자작이 목소리를 나직이 낮췄다. 그리고는 정치적인 수사도, 우회적 암시도 없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엄청난 이야길 꺼내는 것이다.
“첼레스테스 경, 그리고 클레이오 경은 한 번 와볼 기회도 없던 영지를 위해 자원과 힘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달그락.
빈 유리잔을 내려놓은 첼은 드물게도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
“결말이 엉망이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실 건 없어요.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됐다면 로드 키시온을 뵐 장소가 이 따듯한 응접실이 아닐 공산이 컸잖아요.”
“두 분과 안젤리움 자작이 수도에서 애써준 덕에 곤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순수한 이타심이었겠나요. 로드 키시온과 저는 같은 배에 타고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이인걸요. 여기 클레이오 경을 포함해 모두가 그렇죠. 우리는 같은 결말을 원해서 여기에 있는 거잖아요.”
비록 그 결말로부터 원하는 바는 모두 다르다 하더라도. 결말을 향하는 여정이 험난하다 하더라도.
첼의 뜻을 이해한 키시온 자작이 두터운 목을 두어 번 끄덕였다.
아서가 왕위에 오르는 길이 뱃길이라면 수면 아래선 크라켄이 기어 나오고 파고는 하늘을 뚫으며 기상청에선 풍랑 경보에 폭풍 해일 경보를 내릴 수준이었다.
문득 클레이오는 궁금해졌다.
‘키시온 자작은 어쩌다가 아서의 편이 된 거지?’
첼에게는 반골 모험가 기질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수도에서 세력이 단단한 사업가다.
안젤리움 쌍둥이들은 부친이 알비온 유일의 해군을 지휘하므로 정쟁에 말려들어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클레이오 자신이야 이 세계의 구조와 목적을 알기에 아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적으로도 잃을 건 돈뿐인 상인의 차남이라 책임질 것이 적었다.
하지만 키시온 자작령은 변경의 군영.
키시온 자작은 왕위 계승 투쟁에 잘못 휘말렸다간 큰 화를 입을 처지였고, 실제로도 대단한 피해를 입었다.
충성스런 왕조의 기사이자 영지민을 아끼는 영주가 무엇 때문에, 고작 혼외자에 불과한 어린 소년에게 영지 전체의 명운을 걸었을까?
물론 이시엘은 이 영지를 물려받을 적임자였고 외세의 침공을 막아낼 변경백의 자질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이 이 우직한 영주에게 진정 반역죄를 무릅쓸 만한 목적이 될까?
이시엘은 키시온 영지를 물려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수도방위대 소속 기사로 충분히 위명을 날릴 만한 재능을 이른 나이에 개화시켰다.
실제로 만나본 키시온 자작은 반드시 친자에게 군영을 상속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야심가 같지는 않았다.
같은 의문을 첼 역시도 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궁금한 적은 있어요. 로드 키시온은 어째서 아서를 택했던 건가요?”
이것이 주인공의 배경에 불과할 때에는 한 줄의 서술로도 충분했던 동기가, 이제는 중요한 조건의 하나로 다가온다.
슐리만 키시온은 여기 낡은 나무 의자에 꼿꼿이 앉아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사내이고, 클레이오는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아서를 지지하게 된 이유에 관해.
“사람들은 제가 자녀에게 영지를 물려주고자 하여 반역을 저질렀다고도 하더이다. 하지만 그분, 아서 님을 왕으로 택한 것은 제가 아니라 이시엘이었소.
그 애가 먼저 알아보았고, 저는 나중에 알았습니다.
세상에는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멀리는 레오니드 폐하가, 가까이로는 압살롬 폐하가 계실 겁니다.
키시온 집안의 아이는 누구든 걸음마를 뗄 때부터 초대 자작의 이야기를 듣고 자랍니다.
식탁 앞의 빈 석좌를 보셨을 것이오.
가문의 시조는, 압살롬 폐하께서 핀토스 산맥을 넘어 처음 거하신 자리에 석좌를 놓았습니다. 그때 증조부는 폐하의 왼편에 앉으셨다 합니다.
그래서 대대로 키시온의 영주는 영주관 만찬실의 상석에 앉지 않습니다.
우리 가문의 핏줄은 그 빈자리에 걸맞은 이를, 이 방벽을 지키며 영원히 기다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기사왕을.”
슐리만은 그 석좌의 주인이 이번 세대에 출현했다고 믿었다.
“고작 여덟 살의 나이로 석좌 앞에 선 아서 님은 멋모를 어린아이도 저주받은 왕자도 아니었소. 그저 자신이 그 자리의 주인임을 아는 이였습니다.
테오필라 님은 신력을 가진 신녀였습니다. 그리고 아서 님은 분명 테오필라 님의 신력 일부를 물려받으셨습니다. 예언의 신성을. 그러나 미리 본 미래에 한없이 휘둘리지 않을 굳건함을 말입니다.”
클레이오는 재빨리 ‘약속’의 「기억」을 작동시켰다. 첫 기억된 세계 ‘여왕의 정원’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고스란히 떠올랐다.
‘여덟 살이라면 한창 환시를 보던 시대의 아서잖아.’
‘꿈에서 보던 것, 불길한 환상들은 미래에 도래할 순간이라는 걸’ 아서는 분명 여덟 살에 알았다고 했다. 1881년의 산사태를 통해서.
편견을 걷어내고 관찰한다면 그 시절의 아서는 그야말로 신의 뜻을 아는 아이였을 터.
제법 오래 붙어 지냈는데도 아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지나가듯밖에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시엘 역시도 과거 아서가 ‘여름 궁전의 폐왕자, 버림받은 신녀의 아이로 불리던 때가 있었으나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던 아서 님을 두고선 그 말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고 짧게 요약했다.
클레이오가 어렴풋이만 알던 아서의 어린 시절은 슐리만 키시온을 통해서야 비로소 세부 묘사를 얻을 수 있었다.
슐리만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는 테오필라와 아서에 관해 꽤 많은 것을 알았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1881년도의 일입니다.”
늦가을, 야밤의 산사태로 인해 영지엔 비상이 걸렸다.
기사 전원과 병사들, 영주까지 매달려 잔해에서 영지민들을 구조해내야 했다.
하늘이 뚫린 듯 퍼붓는 비는 밤새 멎지 않아 압살롬 방벽과 수원지의 제방을 확인시키기 위해 보냈던 레인저들마저 제때 닿질 못했다.
테오필라가와 아서가 머무르던 여름 궁전 별채 역시 성하지는 않았다. 본채처럼 완전히 무너지진 않아도 절반 정도는 토사에 덮였다.
하지만 그들을 살피러 오는 이는 없었다.
무너진 기둥에 깔려 움직이지 못하던 테오필라는 의연하게 아서를 품에서 내보냈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산이 구릉구릉 울고, 큰물이 계곡으로 차오르는 와중이었다.
테오필라는 젖은 흙이 퇴적된 부엽에 뒤섞여 늪마냥 푹푹 꺼지는 산으로 여덟 살 난 외동아이를 보낸 것이다.
구조를 요청하는 것도 소식을 알리려는 목적도 아니고, 그저 그 아이가 가고 싶어 한다는 이유만으로.
슐리만의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클레이오는 그 상황을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듣는 것도 읽는 것도 아니다.
직접 그 빗속에 선 듯 차갑고, 진흙탕에 발을 묻은 듯 질척이는 감각이 훅 끼쳐온다.
‘이게 무슨…!’
그 순간, 클레이오만이 볼 수 있는 문자가 응접실의 어둔 벽 위로 투사되었다.
[―사용자의 서사 개입도가 상승합니다.누적 비율: 64%] [―‘약속’의 5단계 기능이 개방됩니다. 「직독」능력이 생성됩니다.
—펼쳐진 것을 본래의 뜻 그대로, 처음 쓰일 때의 상황처럼 온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조건: 독해의 대상이 진정으로 읽히기를 원할 때에만 발동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약속’의 기능이었다.
이것은 삽입장.
직접적으로 상연되는 과거의 장면.
⁂⁂⁂
클레이오의 정신은 이제 1881년의 밤에 속해 있다.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테오필라의 목소리는 낮고도 낭랑하다.
“아드님은 가서 할 일을 하십시오. 그리되는 것이 내 아드님의 운명일 터.”
그 말이 끝나자 어머니의 팔 안에서 떨던 소년은 경련을 멈추고, 유리알 같은 청록빛 눈을 맑게 뜨는 것이다.
그의 슬픔과 공포는 재해 자체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재해의 여파로 인해 수몰될 무수한 양민들의 비명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클레이오조차 읽지 못했던 과거에 키시온 영지의 어느 마을은 물에 휩쓸린 폐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영지는 가물은 지역이기에 고도 높은 산중의 수원지에 물을 끌어와 둑을 쌓아 가두었다.
둑엔 늘상 사람 눈이 가 닿도록 관리했으나 그 밤에는 재난이 연이어 일어난 탓에 경비병은 참변ㅇ르 당하고, 교대 인력은 도착하지 못했다.
산사태에 뒤이어 수원지 둑의 붕괴가 일어난다면 키시온 영지의 마을 하나가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비극을 막기 위해 아서는 달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어차피 그는 현재의 시야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눈을 감아도 기억과 꼭 같이 쓰러진 나무와 무너진 암석 사이를 재바르게 가로지를 수 있을 터이다.
소년의 표정은 담담하고, 두 다리에는 주저함이 없다.
마침내 소년은 균열을 일으킨 둑 앞에 가 닿는다. 이미 경비 초소는 산사태에 휩쓸려 사라져버렸다.
소년의 눈높이에서 흙탕물이 쏟아진다. 약간의 힘만 더 가해진다면 수압을 못 이긴 둑은 산산이 터져나가, 토사와 합쳐져 물의 재앙이 될 것이다.
소년은 두 손을 든다.
아직은 아무런 상처가 없는 아이의 뽀얀 손이 거센 물을 가까스로 가로질러 둑의 균열에 가 닿는다.
균열이 둑의 벽으로 퍼져나간다. 아이의 온몸이 젖는다. 아이의 작은 주먹으로 쏟아지는 물을 막는 것은 역부족이다.
아이는 침착하게 군다.
균열 속으로 손을 밀어 넣은 아이는 가까스로 석벽을 붙잡는다. 이제 소년은 고개까지 물에 처박혀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여전히 소년은 무언가를 기다리듯 버틴다. 숫제 폭포를 거슬러 기어오르는 모양새로. 가을밤은 차다. 손발에는 감각이 없다. 물이 소년의 인후를 채운다.
그렇게 마침내.
암흑 속에서 한 점 빛이 돋는다.
희미하던 금빛은 이윽고 소년의 온몸을 덮고, 아이의 몸을 전도체로 삼은 에테르는 [강화]로 현현하여 석벽 전체로 퍼져나간다.
아서는 여덟 살 하고도 삼 개월째에 에테르 감응력을 발현시켰다.
그는 바로 그날 [강화]를 일으켜 마을 하나의 수몰을 막아냈다.
⁂⁂⁂
「직독」의 효력이 사그라졌다.
클레이오는 젖은 흙에 발이 푹푹 꺼지는 우중의 산속에서 어느새 아늑한 응접실로 되돌아왔다.
그는 손바닥의 식은땀을 바지에 닦았다.
잔뜩 긴장했던 등이 아팠다.
키시온 자작의 말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에테르 [강화]를 일으켜 둑을 막고 있던 아서 님을 찾아낸 이는 미에츠 선생이었습니다.
평소 에테르 감지 능력이 매우 예민하고 감이 좋은 그였는데도 영지민 수십을 구해내는 데 몰두하느라 알아채는 것이 늦었던 겁니다.
마지막 한 사람의 부상자까지 끌어내 마른 천막 아래 누였을 즈음엔 새벽이 밝아왔습니다.
부산스레 사람들을 돕던 미에츠 선생은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산중으로 사라지더군요.
한 시간쯤 흐른 후, 자신의 귀한 검으로 둑을 막아 놓은 미에츠 선생은 검 대신 소년 하나를 안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눈 밑이 검푸르게 질리고, 팔다리 전체가 동상으로 얼어붙고, 에테르 고갈로 인해 토혈을 해대던 흙투성이 소년.
그가 바로 아서 님이었습니다.
이름을 묻자 소년은 이리 대답했습니다.
‘레오.’라고 말입니다.
그건 정복왕 폐하의 이름을 줄인 애칭이었습니다. 이제는 왕가에서도 좀처럼 붙이지 않게 된 이름말입니다.
누구도 그걸 농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저희의 레오니드였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