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17
키시온 영지 (3)
슐리만의 회고를 들은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모든 인간은 과거를 회상할 때 그 자신만의 편향된 방식으로 서사를 재구성하기 마련이지만, 이건 너무 괴리가 크지 않은가.
‘아서 자식, 나한테 말한 거랑 완전 다르잖아. 산사태 무서워서 엄마 품에서 빌빌대며 떨었다더만. 거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말면 어떡해. 어떻게 된 놈이기에 여덟 살짜리가 수원지 무너지는 걸 [강화]로 막아?’
아직 미에츠를 만나기 전, 키시온 군영의 군인들에게 조카 취급을 받기 전, 아서는 클레이오가 예상했던 대로 8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 비인간적인 강인함과 평정심까지 포함하여.
“그때의 아서 님은 사자의 검과 같은 기세를 가졌으며, 칼끝뿐 아니라 자루에까지 날이 서 있는 존재였습니다.
저 역시 영웅담을 들으며 자랐으나 그에 감화되는 소년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찬가의 힘을 아는 왕가의 후예, 진정 신의 선택을 받은 이가 존재한다는 걸 그날 이후로는 단 하루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슐리만 키시온은 에테르 그릇을 작게 타고났으나 호된 수련으로 중급 수준에 오른 검사였다.
그 시절엔, 막 에테르 감응력이 발현한 아서에겐 비할 바 없이 강한 기사였을 터.
그런데도 슐리만은 빈사의 소년에게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뻔했다고 담담히 술회했다.
그가 ‘언약’했던 에드워드에게도, 에드워드의 언약에서 풀려난 후 다시금 말로써 충성을 맹세한 필리프에게서도 감지하지 못했던 신성함이 아서에게는 감돌았다.
이시엘은 아서에게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 딸아이이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식 사랑이 과한 부모의 허튼소리로 들릴지 모르나, 이시엘의 눈은 밝고 의기는 굳건합니다.
그 올곧은 아이가 스스로 택한 주군을 온전한 자신으로서 보필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사의 약속, 고귀하고도 결연한 ‘언약’이 파훼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슐리만 키시온은 1급 반역죄를 저지를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클레이오는 슐리만을 미신적이거나, 지나치게 감정에 휘둘리는 인물이라고 여길 수 없다.
조금만 말을 나눠 봐도 슐리만은 차분하고 이성적인 성정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신의 설계에 의해 배치된 것이 그의 운명이었을 뿐.
“멜키오르 저하께서 세자위에 오른 이후 이 영지에 대한 중앙의 지원은 거의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금은 내는데 돌아오는 것이 없었소.
무가의 상속에 대한 법을 지켜 딸아이 대신 남자 후계자를 두라는 압박도 거세졌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기보다, 선택의 여지를 만들지 않도록 하는 처사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키시온 영지의 외성벽을 허물 것을 예비하고서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포석을 놓으신 것이 아니겠소.
하지만 세상에는 말입니다, 사지임을 알아도 걸어 들어가야만 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숙련된 병사와 산지에 익숙한 기사는 하루아침에 양성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정식 병사로 등록된 농군과 약초꾼의 자식들이 저는 자랑스럽습니다. 압살롬 방벽을 지킬 이들이.”
첼은 꼬고 있던 다리를 반대편으로 바꿔 꼬며 가벼이 반문했다. 물론 말의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병기가 다 닳고 부서지도록 수련을 해도 소드마스터 하나가 진격의 원을 날리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데 말인가요?”
슐리만은 그 냉정한 평가에도 화내거나 흥분하지 않고 답했다.
“멜키오르 저하는 수도에 앉아서도 세상천지 만물을 꿰뚫는 분이시죠.
그분이 아르모리크 공작을 보냈다는 건, 반대로 소드마스터라도 오지 않으면 성벽을 단숨에 돌파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뜻이 됩니다.
만일 전원이 목숨을 건 결사항전을 했다면 좀 더 긴 시간을 끌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아군과 싸우기 위해 병을 양성한 것이 아닙니다.”
슐리만은 귀하게 키운 병력을 국내 정치 요인으로 소비할 마음이 없었기에 외성 벽이 무너진 시점에서 곧바로 연행에 응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이 사망한다 하더라도 열여덟 명의 기사와 삼백 명의 병사가 남는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클레이오는 자작의 냉정한 판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병사야 전부 이 부근 출신이고, 여기보다 더한 벽지는 없으니 전출시켜봤자 징벌이 되지 않아. 최악의 경우래 봐야 군복 벗고 약초꾼으로 돌아가는 거고. 병력이 보존되기만 하면 브룬넨 침공 시점에 예비군으로 소집할 수 있지.’
아서가 왕이 되기 전에 슐리만이 죽는다면 제5대 키시온 자작위는 먼 친척 꼬마가 차지하겠지만, 키시온 영주가 그 경우를 생각지 않았을 리 없다.
슐리만은 브룬넨이 반드시 압살롬 방벽을 넘어올 것이라 믿었다.
전시라면 이시엘이 자력으로 영지를 탈환할 수 있으리라 예상한 것이다. 그때에는 수많은 규칙들이 유명무실해짐을 슐리만 역시 알고 있을 테니.
겉으로는 우직해 보이는 사내인데 속에 든 것은 철혈의 의지였다. 정치를 모르지도 않고 요령이 없지도 않았다.
하긴, 그가 정말로 순박하기만 한 이였다면 미친 폐왕자를 지지하며 멜키오르와 같은 싸움판에 올라설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타닥.
탁.
첼과 클레이오가 각각 생각에 빠진 동안 벽난로 속 장작이 불타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키시온 자작은 장작을 더 집어넣고 불이 잘 붙도록 갈무리했다. 익숙한 솜씨였다.
다시금 주홍빛으로 화르륵 돋워진 난롯불을 바라보던 자작은 한층 가벼워진 어조로 말했다.
“주제넘은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동무들과 함께할 때엔 아서 님과 이시엘이 제 나이다운 얼굴을 하여 기쁩니다.”
“그건 여기 클레이오 경의 기여가 크네요.”
“첼레스테스 경의 기여 역시 적지 않고 말입니다.”
클레이오의 틈도 두지 않은 반격에, 첼은 슬쩍 입가를 구겼다 폈다. 어쩐지 욕을 들은 것 같지만 클레이오는 못 본 척했다.
수도방위장 수훈자인 두 사람의 애들 같은 짓에, 방금까지 진지한 태도로 군영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논하던 슐리만의 얼굴도 자식 둔 애비의 것으로 스르르 바뀌었다.
아이들을 동료로서 존중하는 동시에, 자식과 자식 같은 왕자의 친구로도 여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처음 상경했을 무렵엔 아서 님을 따라 매일 저잣거리의 가게에 들렀다고 이시엘이 그러더군요. 생전 처음으로 밤에도 번잡한 술집에 가 봐서 놀랐다고 말입니다.
아, 사정은 압니다. 암살 위협으로 인해 아서 님께선 기숙사에 머무르기 어려운 때였던 것을요.”
어색하게 눈을 돌리던 첼과 클레이오의 시선이 중간에서 딱 마주쳤다.
아슬란이 보내던 암살자 때문도 있었겠지만, 아서 본인도 인정했다시피 학교 결계를 넘어오는 대담한 놈은 흔치 않았다.
말을 안 해도 두 사람은 생각이 통했다.
‘그거 정말 백 퍼센트 안전을 위한 행동은 아니었을 텐데.’
‘아서는 룬데인에서 난다 긴다 하는 술집을 다 꿰고 있어. 그게 그냥 나온 리스트겠니.’
물론 두 사람은 자작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자식이 인생을 건 주군이, 일정 부분 불한당 술꾼의 본성을 갖고 있다는 걸 부모에게 알려 뭐한단 말인가.
게다가 암살자는 진짜로 있었고, 수도 동안에서 붉은 눈 자객에게 습격당했을 땐 이시엘이 함께 싸워 줘서 살았다.
그때는 이미 이시엘도 술집에서 자신 몫의 무알콜 음료를 주문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물론 암살자가 끊긴 후로는 굳이 학칙을 어기지 않기로 해서 밤 시간엔 아서 님이 무얼 하는지 모르게 되었다지만, 딸아이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아서 님을 믿었습니다.”
슐리만 자작이 벽난로 위에 놓였던 스크랩북을 내려왔다.
송아지 가죽으로 장정한 매끄러운 표지 안쪽엔 아서, 이시엘, 977기 친구들의 활약상이 적힌 기사가 잔뜩 스크랩돼 있었다.
그중 슐리만이 가장 자랑스럽게 가리킨 것은 예의 기사였다.
“이렇게 어엿한 모습을 보여주시리라 말입니다. 그분은 열 살에 이미 병사들을 북돋울 줄 아는 연설가였으니까요.”
팔불출 부모 같은 슐리만의 모습에 첼은 이 밤 처음으로 표정을 풀고 청량하게 웃었다.
“아하하. 아서가 제대로 된 인간으로 자란 건 곁에 이시엘과 자작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확실히 멜키오르와 다르죠.”
슐리만이 당연하단 듯 고개를 끄덕이자 첼은 다음 화제를 매끄럽게 이어 붙였다.
“그리고 저도 이시엘이 웃을 때가 좋습니다. 이제 보니 그 애의 이목구비는 사별하신 자작부인을 닮은 거였군요.”
클레이오는 첼의 그윽한 시선을 따라 등 뒤를 돌아보았다.
등지고 있어 몰랐는데, 벽에는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귀부인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크림처럼 흰 피부, 탐스러운 다갈색 머리에 다정해 보이는 눈동자를 한 여인의 외견은 이시엘이 열두 살쯤 더 나이 먹는다면 딱 그런 얼굴이 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복식은 한 세대 전 귀부인의 것이었지만, 에테르 감응자임을 나타내듯 ‘멜라미드의 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립이 붉은 레이피어는 이시엘의 애검으로, 클레이오에게도 낯익은 무기였다.
“머리와 눈 색은 저를 닮았지만, 이목구비는 처인 아이드웬을 그대로 뺐습니다.”
“그 사슴처럼 우아한 동작도 어머님을 닮은 것이로군요.”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도 사소한 부분에서 그녀와 똑같은 방식을 보여줄 때마다 늘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아이드웬에 관해 아십니까?”
“몹시 아름답고, 강하고, 다정하신 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리들 사이에서 난데없이 백조가 난 듯, 부인께선 멜라미드 집안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주 별달랐던 분이라고 말한답니다. 그분을 기억하는 분들은 누구나요.”
클레이오는 불현듯 눈치챘다.
이시엘이 외가에서 박대당한 걸 첼은 쭉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저 태도로 보아 뒷조사까지 확실하게 했다. 키시온 자작에게 질문하는 건 조사의 마무리 작업 같았다.
“…그 애가, 외가에서 쾌적한 나날을 보내지 못한 것은 압니다. 설마 그리로 아이를 보낼 줄 몰랐던 제 무지의 소치입니다.”
“도대체 이시엘처럼 올곧고 강하며 뛰어난 아이에게 그 집안은 왜 그렇게 군 건가요? 멜라미드 가문이 사람들의 입을 막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버려 자세한 내막을 아는 이가 없더군요.”
키시온 자작은 멜라미드와 척을 진 사이였고 그 가운데엔 29년 전의 사건이 있었다.
대지주인 멜라미드 가문에 물려 내려오는 검은 본래 압살롬 2세의 왕조 귀환 때 식량 보급의 공을 세워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몇 세대 내내 검은 가보로 장식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에테르의 기운을 감지해야만 검집의 봉인이 풀리는데, 에테르 감응력을 가진 아이가 내도록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왕이 불미스럽게 사망하고 필리프가 대관식을 치르던 해, 멜라미드의 가주는 자신의 자식 중 가장 아름다운 딸에게 진상품인 검을 들려 대관식 참석 행렬에 포함시켰다.
왕가의 것을 왕가로 되돌린다는 의사 표명과 함께. 가주는 정통성이 부족한 필리프의 낯을 세워주고 한 자릴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젠트리 계급이라 하나 대지주인 멜라미드 가주는 어지간한 하급 귀족들보다 위세가 높았다. 엄청난 지참금이 준비된 결혼 적령기의 딸은 그가 가진 최고의 자산이었다.
그러나 새 왕에게 줄을 대는 김에 수도의 유력자에게 미모의 딸을 비싼 값으로 팔아치우려 했던 멜라미드의 계획은 작은 사고로 인해 완전히 틀어졌다.
오래도록 검집을 빠져나온 적 없던 멜라미드의 검이 아이드웬의 손에서 제멋대로 폭주한 것이다.
대관식 도중 폭력 사건을 일으켰다가는 누구도 성치 못할 터.
기사단이 달려오기 전, 하급 귀족이라 행렬의 뒤에 섰던 키시온 자작이 먼저 나서서 사고가 커지는 걸 막았다.
‘검이 기뻐하느라 그런 것입니다. 적절히 써 주면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라는 젊은 키시온 자작의 말에, 지금 막 검의 주인이 된 아이드웬이 답했다.
‘제가 이 검을 적절히 쓸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슐리만 키시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한 해 후, 두 사람은 척박한 키시온 영지에서 결혼했다.
아이드웬은 지참금 한 푼 없이 키시온 자작의 신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