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65
키시온 제5대 자작 (13)
이중 발진으로 발동된 ‘낙원의 들판’은 본디 메이지 마스터의 서클 범위인 반경 1킬로미터를 훌쩍 뛰어넘었다.
8레벨에 다다른 클레이오의 에테르는 흐릿한 백금색이었다. 백금빛 백광의 전개는 동트지 않는 하늘에 진력이 나 사람의 힘으로 새벽을 현현시키는 행위처럼 보였다.
바스슥― 프스스슷.
마침내.
무시무시한 에테르의 발출을 견디지 못하고 마법사의 육신이 마모되기 시작한다.
초록색 머리끈이 풀리며,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푸르스름한 뺨과 이마를 뒤덮는가 싶더니, 거친 머리카락의 끄트머리가 끊겨 바스라진다.
그럼에도 클레이오는 펼쳐진 정화의 마법식으로 에테르를 밀어 넣길 멈추지 않는다. 암흑이 완전히 가실 때까지 이 마법은 지속될 예정이다.
신의 사자가 자아낸 마법 앞에서 암흑의 말단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듯 꺾여 엎어져 말라붙었고, 종내에는 재조차 남기지 않았다.
스스스슷― 스으으—
암흑 아래, 얼어붙은 겨울 땅이 어느새 온전하게 드러났다.
트로모스의 존재는 우스우리만치 무력하게 지워졌다.
브룬넨으로 가 실종된 전직 용병의 삶과 죽음에 대해 궁금해할 이는 없으므로, 혹여나 호기심 많은 후대의 학자가 그의 행적을 뒤쫓는다 해도 생몰년도의 오른편에 오는 숫자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암흑은 허망하게 말살되어, 전승조차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저것의 최후를 목격한 클레이오는 결코 자신이 본 광경에 관해 증언하지 않을 것이므로.
사람이 접할 수 있는 매체 그 어느 것에도 저것의 양태에 관해 기록하지 않으리라. 평가든 비평이든 발상 자체를 세상에 남기지 않는 것이야말로 저것이 받아 마땅한 처분이므로.
그런 단호한 결심 한편으로는 회색빛 자기 의심이 우울하게 차오른다.
그가 불러낸, 반쯤 미치고 반쯤 슬픔에 잠긴 덴마크 왕자의 독백은 불가능과 무의미, 자기혐오와 연관된 것이다.
여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표백된 세계의 법칙들. 그러한 규준에 비춘다면 자신 역시 에테르를 비통상적으로 획득한 존재이다.
자신은 그저 신화적 폭력의 실행자로 선택되었을 뿐 그 이유는 여전히 미상인데도, 이 세계의 법칙에 조응하며 숨죽여 살기에는 지나치게 방대한 힘을 소유하고야 말았다.
언젠가 제베디는 스쳐 지나가듯 클레이오에게 말했다.
‘어떤 힘은 때때로 그것을 소유한 자들을 너무 먼 곳까지 데리고 간단다. 나는 네가 마법의 새 경지를 볼 것을 기대하면서도, 또 그리되지 않기를 바라게 되니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으로 복잡한 것이다.’
실은 클레이오 자신도 알고 싶었다.
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그는 무엇이 되며 어디에 발 디디고 있게 될지.
모든 인간에게 주제와 분수, 자리와 임무가 있는 세상에서 왜 자신에게만 이토록 버겁게 거룩하고, 또 애통하게 고독한 자리가 주어졌을까.
애곡처럼 울리는 내면의 질문엔 답하는 자가 없고, 마법식의 작용에 진압되어 바람마저 잦아든 겨울 가운데 클레이오는 홀로 있다.
그동안에도 ‘낙원의 들판’은 점점 더 범위를 넓혀 클로토강 동안을 뒤덮어 갔다.
듀브리스와 파리사 전체가 빛의 권역에 들었다.
압살롬 방벽의 거친 표면에 황금빛이 가 닿는다.
적의 피로 오염된 물을 한가득 묶어둔 클로토강의 수원에도 은총이 내리 쬐인다.
키시온 자작이 수문을 닫아 둔 덕에, 마법은 거기에서 더 먼 곳까지 나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저 강물이 모두 흐른 뒤였다면 클레이오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돌이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적들의 사체를 건져냈다 해도 오염이 더 심화되지 않을 뿐, 이미 오염된 물이 키시온 영지의 척박한 대지를 좀먹을 터였다.
살릴 수 없었던 자작을 생각하며, 클레이오는 키시온의 땅을 되살려갔다.
암흑이 쓸고 지나간 풀잎 하나, 흙 한 줌에까지 정화가 베풀어졌다.
남아있는 어둠이 모두 융해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천재지변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에테르 감응자들조차도 자신의 발아래에서 빛나는 마법식의 부분을 마법식이라 알아보지 못했다.
알비온의 보통 사람이 아는 마법이란 부러진 다리를 붙여주고, 보석을 감정해주는 소담한 빛의 일이었다.
아침을 옮겨온 듯 지평선을 밝히는 광휘를 어찌 마법이라 상상할 수 있을까.
이 마법 안에서 클레이오 개인은 무화(無化)된다. 남는 것은 신과 구원의 기적에 대한 찬양이다.
.
.
.
깎아지른 듯한 협곡 위에 선 세실 휴잇 키시온은 생각한다.
그의 손에는 슐리만 키시온의 검이 들렸고, 그립은 달라붙듯 그의 손안에 놓여 있다.
자작의 호의로 그의 검을 쥐어 봐도 그 무게에 눌려 손목이 바들바들 떨리던 자신이었다.
힘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그는 잘못 뛰는 심장 박동과 비대해진 기관이 다른 장기를 압박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에테르’라는 것을 불러일으켰다.
이 엄청난 기운이 제 몸에 머무르는 동안엔 못 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진즉 다 외웠으나 몸으로는 구현할 수 없었던 검식이 물 흐르듯 자연스레 구사됐다.
그런 그를, 이시엘 키시온이 타오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보는 자녀의 눈동자는, 그 열렬함의 온도만은 연인의 것과 다르지 않다.
세실은 책을 많이 읽었다. 몸 숨길 곳이 마땅치 않은 자작저 안에서, 구석진 가내 서고는 세실의 아지트가 되어주곤 했기 때문이다.
투박한 가내 서고에는 의외로 통속 소설이 제법 많았다. 죽은 자작 부인의 취미였다고 했다.
가정교사는 질색을 했지만 세실은 그런 이야기들이 좋았다. 옛 시절의 연애담, 슬프고도 안타까운 고대의 연인들에 관한 이야기.
그는 그 아름다운 세계와 이어질 수 없는 남녀의 안타까운 애정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현실의 자신은 닿을 방도가 없는 격정에 관해서.
하늘에 맹세코 슐리만 키시온은 단 한 번도 세실 자신을 박대하거나 비열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바로 그래서 세실은 미워할 대상을 외부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영원히, 스스로가 가장 미웠다.
골칫덩어리 가짜 후계자에게 친부모조차 준 적 없는 자애를 보이는 슐리만 자작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다.
하물며 이시엘에 관해선, 그녀에게 가까이 가는 일조차 죄스럽게 여겨졌다.
아름답고 고귀하며 강인하고 강직한 이시엘.
본래 저의 것이던 자리를 훔쳐 간 어린애를 미워하지조차 않는 동남 전선의 영웅.
불과 대적의 기사.
응접실의 벽난로 선반 위에 둔 가죽 장정의 스크랩북은 나날이 두께가 더해져 갔다.
전쟁으로 물류 사정이 더 나빠져 파리사 같은 벽지엔 신문이 몇 주에 한 번 뭉텅이로 도착할 때가 흔해졌다.
키시온 자작은 드문 휴식 시간이면 신문에 실린 이시엘과 니네베 연대의 활약상을 한 자, 한 자 짚어 읽어보고는 흐뭇하게 미소 짓곤 했다.
그들 부녀는 서로 만나지 않아도 믿음이 굳건했고, 확인하지 않아도 서로의 사랑을 온전하게 느꼈다.
아, 어떻게, 저 완벽한 부녀의 삶과 실천에 자신이 개입될 수 있을까.
이 전쟁이 끝나면 자신은 ‘돌아가야’ 했다.
자작저의 사용인들은 곧 후계자의 방을 다시 꾸며 이시엘의 것으로 되돌릴 계획을 짰다.
영지민과 군인들이 말하는 ‘소자작님’이 세실이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그는 언젠가 되돌려 보내질 손님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사실 그에겐 돌아갈 곳이 없었다.
부모는 오로지 휴잇의 이름과 자존심만 가진 무능한 몰락 귀족이었다. 이시엘의 대고모라는 선대 후작의 부인은, 세실 역시 단 세 번 배알한 게 전부였다.
이시엘이 뜻을 이룬다면 자신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가져온 트렁크를 그대로 들고서 이제는 아는 이조차 없는 휴잇의 영지로 돌려보내질 것이다.
그리움도 아쉬움도 느끼는 이 없이.
그런 때 다가온 ‘리젤로테’의 편지는 폭발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어두운 감정에 신관을 연결하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펑, 터져버린 것이다.
세실은 제 몸을 감도는 검은 피가 들끓는 것을 느낀다.
생각은 또렷하게 이어지지 않고, 시야는 5코루나를 내면 만물상이 보여주는 만화경 속 풍경처럼 끊어졌다.
이시엘의 하얀 뺨에서 다이아몬드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건 어떤 만화경 무늬보다도 찬란했다.
이제 이시엘의 젖은 초록색 눈은 오로지 세실만을 담는다.
그녀의 눈에 담긴 진노와 격정은 말로 표현될 수가 없다.
복수?
그것은 너무나 단면적인 표현이다.
지금 이시엘의 세상은 오로지 세실과 그녀 단둘 사이의 간격으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세실은 그것이 제 몸에서 피어오르는 에테르의 강력함만큼이나 기껍다.
그 옛날 미에츠 선생이 아서와 이시엘에게 가르치는 것을, 어린 세실은 창가에 앉아 몰래 엿듣곤 했다.
‘검술은 대화 같은 거다, 얌마들아. 거친 언어든 정중한 언어든 뭐든, 검과 검을 맞대면 오가게 되어 있어. 인간이 막돼먹으면 검로도 막돼먹어진다, 엉? 말본새 드러운 불한당 되는 거야. 둘 다 기본 검식 120번, 추가로 실시.’
그렇다면 이것 역시 대화가 아닌가.
세실은 온몸을 태우는 듯한 사나운 힘을 느끼며 검을 쥔다. 슐리만 키시온이 가르쳐준 방식대로.
자질 없는 가짜 후계자에게도 자애로웠던 그가, 손수 한 동작 한 동작 바로잡아준 자세 그대로.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깡마르고 굽어진 체형도 똑같았다. 그가 에테르를 불러일으키고 자작의 커다란 검을 가볍게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히드라의 독 덕분이었다.
세실은 자신의 남은 삶이 고작 십여 분가량밖에 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안다. 아무 자질 없는 자신이 이런 힘을 가지게 되었으니, 응당 생명을 불태워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충분히 치를 만한 대가였다.
이제 이시엘 키시온은 죽을 때까지 그녀 생애의 십 분을 잊지 못하게 될 터이므로.
저 아름다운 존재가 자신을 미워하지조차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차라리 네가 날 미워라도 했다면. 하지만 네게 나는 그 정도 가치도 없는 타인이었지.’
사랑이 아니라면 증오도 좋았다. 길가의 나무나 돌멩이보다는, 부모의 원수가 나았다.
무고하고도 선한 이들의 등 뒤를 보며 일방적인 열등감을 폭발시킨 자신은 지옥에 갈 것이다. 옛 이야기 속 지옥이란 게 존재하기나 한다면.
“이시엘, 너는 네가 키시온 자작이 될 거라고 여겼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키시온 자작이다. 나를 많이 증오하고, 필요 없는 자비심은 잊어 줘. 기만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니까.”
스으으읏―!
카가각! 솨앗!
시간 단위를 재기도 어려운 찰나간에 검이 세 번 방향을 바꾸었다.
이시엘 키시온은 답할 가치가 없는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 배신자에게 줄 것은 죽음뿐이었다.
지금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눈앞의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부친과의 귀한 추억들이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사랑이 모자라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이시엘은 귀하고도 엄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자신의 유일한 자녀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아이가 고심해서 한 선택은 모두 존중했으며, 아이드웬의 몫까지 아이를 감싸주려 무척이나 애를 썼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지극히 다정하고 애정 가득한 초록색 눈이었다.
보통 귀족들이 자식을 손수 기르고, 가르치고, 가까이 두고, 말을 들어주고, 놀이에 어울리며 키우지 않는다는 건 수도에 가서야 알았다.
자신은 아버지의 가장 자랑스러운 보물이자 최고의 선물이었다.
아버지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으니까.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이시엘. 아이드웬과 널 만난 건 내 인생의 축복이었단다.’
저도 항상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이 허위와 기회주의의 시대에 영원한 충성과 맹세를 지키는, 기사인 아버지가요.
아버지는 나의 전범이고 미래였습니다. 나는 바로 ‘키시온 자작’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한 치의 갈등이나 미세한 양가감정도 없이.
아버지.
아빠.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았다면, 다르게 행동했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당신을 보러 오는 것보다는 전선에서 제 몫을 하는 기사이길 바라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사령관이자 변경백으로서 명예롭게 전사했다. 그의 행동은 그 누구도 비난치 못할, 영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시엘은 죽은 영웅이 아니라 살아 있는 비겁자인 아버지도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