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02
제 사랑을 죽인 이가 또한 모두 죽는 것은 아니기에 (1)1)
제 발치에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던 비취 월계수 가지를 집어 든 멜키오르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늘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아르모리크 공작조차 보이지 않는데, 저것은 경계할 것도 하등 서두를 것도 없다는 태도였다.
이 기괴한 공간이 그에게는 친숙해 보인다.
편안한 기색의 멜키오르와 달리 경계를 풀지 않은 아슬란은 저의 무력함에 분노한다.
어째서인지 이곳에선 제 육신을, 혹은 정신의 현현을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늘상 입에 담던 ‘천한 것’이라는 말조차도 혀를 옭매인 듯 입술 밖으로 튀어 나가질 않았다.
고귀하신 어머님의 긍지와 그녀의 연약한 육신 모두에 상처를 입힌 이 더러운 종자가 또다시 요사한 수작을 부리는데도 발검조차 할 수 없다면, 자신은 무엇을 위하여 검의 극의에 다다랐단 말인가?
말로 표현 못 할 만치 깊은 원한을 불태우는 아슬란과 마주한 멜키오르의 얼굴엔 평화로운 미소만이 머무른다.
그는 선뜻한 맨발로 청금빛 개울을 아무렇지도 않게 디디더니, 낡은 바짓단을 짙은 자빛으로 물들이며 이편으로 건너온다.
남청색 물방울에 젖어 든 창백한 발이 풀잎 사이로 긴 자취를 남긴다. 그 아름다운 움직임의 선은, 찬가를 기록한 필사본의 한 구절을 크게 키워둔 모양새 같다.
그렇게 아슬란의 지척까지 다가온 멜키오르는 그저 설렁설렁 단어를 내보냈다.
찬탈자로서의 이자는 자음으로 못을 박고 모음으로 정을 내리찍는 것 같이 말했다.
그러나 변변치 못한 흙일 누더기나 걸친 놈이 하는 말은 강렬한 언사와는 거리가 있었다.
상대를 설득하고자 하는 진지함 따윈 전혀 없는, 하루살이의 무게보다 가벼운 태도였다.
“언젠가 너는 아서의 마법사에게 나의 진정한 목적은 에테르의 폐지가 아니며, 현존하는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는 것이라 했지? 그 말이 그르지 않다. 잘 아는구나, 나의 형제.”
아슬란의 굳어져 있던 얼굴이 더욱더 차갑게 식었다.
전쟁 전 니네베 성에서 아슬란과 클레이오는 독대했다. 수행원들은 문밖으로 물려놓았다. 한데, 멜키오르가 어떻게 그들 사이의 말을 아는 것인가.
그 마법사는 3왕자를 배신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필시 저것이 제가 가진 괴이한 능력으로 그의 생각을 읽어낸 것이리라.
“그렇지, 바로 맞추었다. 네가 읽어서 이전 시대의 자취를 알았듯 나 역시 읽어서 세계에 관하여 알았다. 읽고 또 읽도록 된 저주는 끝의 끝에서, 마침내 권능이 되었단다.
반복과 순환을 거듭한 끝에 이솔트의 언약이 세계를 지탱하는 기둥이 아니라 휘어져 지반을 뒤트는 억센 뿌리로 화해버렸듯.”
그 말을 마친 멜키오르는 어느새 바닥에서 솟아난 청마노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너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고, 무지가 앎보다 광대하다. 그러나 너는 네가 부차적 존재로서 속해 있는 이 전기에 관하여 들을 권리가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긴 이야기. 신이 쓰는 인간의 서사시.”
멜키오르는 노래하듯 말한다.
어울리지 않게도 찬가를 부르는 신의 종처럼 굴며, 그는 한 차례 더 뮈토스의 홀을 툭 기울였다.
홀의 움직임에 따라 아슬란은 저도 모르게, 언제 생겨났는지 모를 호박석 바위에 걸터앉게 되었다.
한적한 숲에서 한담이라도 나누려는 것처럼 멜키오르는 다리를 길게 뻗었다. 굽이굽이 길어질 이야기를 암시하듯.
어언간 바닥에 덧그려진 청금색 자취는 모두 지워졌다. 멜키오르는 그 휘발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는 마치 이곳이 코티지의 정원이기라도 한 양, 그들 사이의 구원(舊怨)이 저 청금빛 물의 흔적처럼 모두 증발하기라도 한 양, 아직 루안이 살아 있고 아슬란이 기쁨만을 알던 어린 적자이던 시절인 양 부드럽게 말한다.
중의적인 표현, 이중의 의도, 분개를 일으키게 하려는 이면의 모욕이 없는 친절과 다정만이 남은 말투라니.
멜키오르의 낯선 태도에 아슬란은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분노가 식은 자리를 채우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히 텅 비어야 할 그 공간에, 자신이 인식하지 못할 복잡한 맥락이 들어차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건 아슬란의 오래된 원한 이상으로 연원을 모를 감정이었다.
“놀랄 것 없단다. 너는 나를 이해하고자 했잖느냐. 나와 너, 이 왕가의 운명에 대한 네 이해의 범위는 오늘 보이는 지평 너머에 가 닿을 거란다.”
멜키오르는 정말로 아슬란이 과거에 했던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꼭 같은 표현을 들먹였다.
역시 저것은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게 맞았다. 어머니는 옳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적어도 자신의 머릿속으론 침습할 수 없다고 여겼거늘.
“그러하지. 리오그난 왕가의 핏줄은 그 번잡스러운 독해로부터 벗어난 존재였지. 여신의 축복을 받은, 3왕자의 마법사 역시.”
‘닥쳐라’ 라든가 ‘그 사이한 행각을 멈추어라’ 같은 말은 아슬란의 속에서만 맴돌 뿐 음성이 되지 못했다.
멜키오르는 무심하면서도 친밀한 어투로 술회를 이어 나간다.
“한낱 인간이 두려운 성취를 이룬다 한들 신은 제 뜻에 어긋나면 그의 의지를 꺾어버리지. 그리하여 그다음 생애에선 능력의 한계가 설정되며, 그 때문에 또다시 새로운 문제와 변수가 생기는 것이 반복의 궂은 점이지.
알고 있나? 삶에 미련을 가진 인간의 영혼은, 저 영토 잃은 신들과 마찬가지로 거듭해 또다시 태어나지. 여섯 번째 강물에 씻기고도 천상의 공기가 되지 못한 영혼이 재차 이 세상으로 돌아와서, 다른 시대에, 다른 이름과 다른 부모를 가지고.
그러나 여기 다음 천년기를 목전에 둔 시대에 다다라 사자(死者)의 영혼을 순환시키는 법칙은 엄밀성을 잃고, 강물의 경계는 흐트러지고 말았지.
이를테면 그 잉크 얼룩 같은 아르모리크 공작은 어떠한가?
그자는 다섯 번이나 다시 태어났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현손자로, 다음엔 또 증손자로 지겹게도 태어나다가, 마침내 다섯 번째로 맞이한 생애를 아홉 번이나 되풀이하며 살았단다.
혹은 너의 유모 게르다를 꼽아볼 수도 있겠지. 그 가여운 여인은, 본래는 다음 시대로 넘어가서야 다시 태어날 운명이었거늘 이 반복의 저주로 인하여 결국, 네 칼에 죽도록 되었지.
아, 그것이, 신이 자으신 서사가 불러일으킨 파국이다. 조악하고, 하찮아서 인과의 파편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 이야기가.
신은 낡고 볼품없는 기계 장치처럼 삐걱이며 내려와 인간이 제 삶을 씨실과 날실 삼아 직조해낸 서사를 무작스레 풀어버린다.
운명의 실을 자아내고 엮고 자르는 힘을 다 잃은 불완전한 신답게도.
결국 이 세상에는 ‘끝’이라는 개념이 진정으로는 부재한다.
여덟 번 반복을 겪고도 이 구간에 걸린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고, 아홉 번째로 또다시 반복되는 중이지.
시간의 흐름이 제자리를 맴도는 대신 온전히 미래로 이어졌다면 너의 영혼은 강을 건너 새로운 이름과 육신 속에서 태어나야 옳았다.
하지만 보아라, 너는 아슬란 리오그난으로서 그 지독한 생을 아홉 번이나 살아내고야 말았단다.
너는 왕국의 2왕자로 거듭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태어났어야만 했다.
그때에는 네가 나의 형제도 아닐 것이며, 너의 어미도 어미가 아니며, 내가 너를 알아보지도 못하여야 했는데.
그랬다면 네 어미도, 그리 죽어갈 필요는 없었겠지. 그리하여 네가 여기 신들의 정원에 들 일도 없었을 것이며….”
멜키오르는 거의 숨이 멎을 듯 경직된 아슬란이 평정을 되찾도록 조금 기다려 주었다.
“부정은 무의미해. 알지 않나? 너의 그 참혹한 분노와 원한은, 고작 한 번의 생애로 축적할 수 없는 깊이를 갖췄음을.
그건 몇 번이고 반복된 과거의 부산물이며 소거되지 않은 기억의 침전물이다. 불씨를 대화재로 만드는 연료이니.”
아슬란은 유일하게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선을, 빛조차 삼켜버리는 그 검은 눈을 멜키오르에게로 고정한다.
신들의 정원이라니.
괴물은 이제 신을 참칭하기에 이른 것일까?
그러나 예감은 이성과 다른 방향으로 달음질친다.
이 괴이한 정원에서는, 실제의 속박에서 벗어난 공간에서는 모든 말들이 진실처럼 들린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적의 행동이,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손해와 이익을 계산할 수 없었던 행보가, 삶 내내 품고 있었던 위화감이 또렷이 앞뒤를 갖춘 해명을 얻는다.
그토록 간절하게 간구하였던 진실.
세상의 이치.
아슬란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온전하게 기억해낸다.
이 모든 것은 피 묻은 손으로 망연히 선 아슬란에게 선고처럼 들이닥쳤다.
그가 조정할 수도, 대응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지금 이곳에는 밝혀놓은 초도, 어머니의 베일도 없건만 아슬란은 제 손에 묻은 피를 감지한다. 어머니의 피.
이 정원에서 눈뜨기 전 자신이 거하던 곳은 쾨네부르크의 궁성이었다.
내궁의 협소한 가정 예배당, 어머니는 그곳에서 결행이 있길 바랐다.
그런 다음에?
그런 다음에, 세계는 아슬란의 앞에서 갈라지고 흩어져 사라졌다.
공간이 연결을 잃고, 틈새의 어둠을 드러내다가, 읽지 못할 문자들로 화해 비산했다.
쥴레이카가 죽을 때, 세상은 함께 끝났다.
적어도 아슬란에게는 그랬다.
“그렇지. 너의 세상은 그때 멸망했지. 너는 세상을 복종시킬 힘을 가지기 위해, 유일하게 세상을 바칠 가치가 있는 대상을 잃게 되었다. 그 이상의 역설이 있겠나?
역설이 만든 붕괴의 틈새에 빠져 너는 이곳에 도달한 거란다.”
멜키오르는 인위적이리만치 곱게 난 눈썹의 아치를 늘어뜨린다. 마치 애도라도 표하는 것처럼.
저것은 감히 모친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네 모친을 핍박했다 여기나? 그 고귀하면서도 가련한 여인은, 신이 만든 난장판 속에서 벌써 다섯 번이나 제 유일한 사랑이자 그녀의 모든 것인 아들이 참살당하는 것을 보았는데도?
그래서 살아남은 나머지 생애가 행복했느냐면 그렇지도 못하지.
네가 최초로 승리하였을 때, 네가 두 개의 왕관을 쓴 마도사가 되었을 때, 아서 리오그난을 처형하던 승리연의 마지막 날 세상은 닫히고 말았단다.
내가 잔인했는가, 신이 더 잔인했는가?
아서 리오그난이 살다 죽으면 세상은 함께 닫힌단다.
우리가 살든 죽든, 그 시점에서 살아온 생애는 모조리 폐기되고 또다시 리오그난 왕가의 세 아들로 태어나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아서를 천 년의 제왕으로 빚어내기 위해서 새로운 해가 떠오르듯 죽은 자들은 다시 태어나지.
우리의 이 숙명이 되돌아오고 그러도록 예정되어 있는 원망이 생겨나는 것 역시, 신에게는 1월 다음에 2월이 오고 2월 다음에 3월이 오는 것 같은 연쇄일 뿐.
빛의 축제 뒤에 오는 새해를 생각해 보려무나. 모든 신년은 재생의 제례이며 새 연도는 새 창조의 첫날이 된다.
그 무한한 반복은 단선의 역사가 출현하지 않는 세계의 제의이다. 주기적으로 되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불멸하며, 영원토록 패배하게 되어 있지.
하지만 언제까지 이 고통이 계속되어야만 하겠나?
우리는 시간의 갱신을 중지시키고 반복을 폐지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가능성이며 주인공의 대적자로서 설계된 자들이 할 수 있는 지고의 행동이지.
우린 아서 그 앨 죽일 필요가 없단다.
태양이 떠오르는 시각을 바꾼다고 일월의 규칙이 바뀌겠느냐?
거기엔 아무런 의미도 없어.
우리가 묶여 있는 순환의 원칙은 너무나도 오래되었지. 다른 것은 없는가? 이곳은 막다른 길인가? 오래된 것은 죽어가나, 새로운 것은 아직 오지 않은 이 난세2)가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겠는가?
가짜 예언자와 진짜 선지자가 읽던 것을, 나 역시 읽었지. 그리하여 알았다.
그곳, 멸망한 옛 세계에서 사람들은 돌이켜지지 않는 역사를 가졌다는 것을.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삶의 조건에서 의미를 발명해냈지. 고통과 시련에서 선택의 징표를 읽는 믿음이 생겨나, 그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은 시간의 끝을 구원이라 칭했다.”
어느새 멜키오르의 윤곽 위로 희미한 에테르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건 너무나도 숭고한 빛이라, 세상에선 이미 사라져버린 신성력을 떠올리게 했다.
모든 슬픔이 씻겨 사라지도록 한다는 신의 힘.
“그들은 인간의 힘으로 시간을 끝냈다.
그러니, 이곳 칼리오페의 세계에서는 내가 진실한 마지막을 이룩하겠다. 역사의 여신의 신민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을 왜 우리라고 하지 못하겠는가? 한 번 불탔던 것이, 두 번 탈 때에는 재조차 남지 않도록 할 것이다. 네가 네 권능을 가진다면 이룩될 일이다.”
긴 이야기를 마친 멜키오르는 또다시 뮈토스의 홀을 들어올렸다.
아슬란은 자신의 신체가 드디어 단단한 옭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음을 알았다.
눈앞의 멜키오르를 밀어내려는 듯 꺾어버리려는 듯 들어 올린 아슬란의 오른손을 뮈토스의 홀이 훑었다.
그러자 검사의 강직한 손등 위로 마구 긁어내린 듯 불규칙적인 모양의 성흔이 솟아났다.
툭. 투두둑.
도르르 돋아난 핏방울이 정원의 분홍빛 풀잎에 맺힌다.
장식한 머리글자처럼 선명하게 붉은 피였다.
1) 「The Ballad of Reading Gaol」, Oscar Wilde
2)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Antonio Gramsci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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