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24
이후의 세계 (4)
클레이오는 재차 저항했다.
“아이스크림 녹는다. 난 내려놓고 디저트마저 먹는 거 어때.”
“다음 주에도 먹을 건데, 뭐.”
“캔튼 부인이 그날은 페드르 북부식 만찬을 차려주신댔어.”
클레이오가 병석에 누운 동안 시작된 친구들의 정기적인 병문안은, 어쩐지 요즘 들어선 주간 아세르 저택의 디너 모임으로 발전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으면 도련님의 식사량이 평소보다 늘어난다는 걸 깨달은 캔튼 부인이 열렬히 메뉴 개발에 매진하며 생긴 관습이었다.
“난 그거 맛있더라, 하얀 참치 소스를 친 송아지 냉채. 차갑고 보들보들한 송아지 냉채에 참치랑 앤초비의 감칠맛이 아주!”
“고소한 치즈 넣은 아뇰로티랑 화이트 트러플 잔뜩 뿌린 리조또도 너무 맛있었어.”
“좋다아.”
“너무 좋지. 항상 대접만 받았으니 다음엔 답례로 와인이라도 좀 사 올까?”
쌍둥이들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첼이 조언했다.
“뭘 사 와도 얘네 집 지하 셀러에 있는 것만 못할 텐데, 부인은 그냥 너희가 맛있게 먹어주는 걸 더 좋아하실걸.”
“그렇다면 꽃 선물은 어때? 전에 캔튼 부인이 꽃을 좋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
“하긴, 꽃은 누구나 좋아하고.”
“맞아. 연령 불문 모든 레이디들은 꽃을 좋아하지. 꽃은 다음 주부터 바로 보내고, 여름휴가 때엔 부인과 부엌의 친구들에게도 드 네쥬 호텔 숙박권을 선물하지.”
“그거다, 그거! 레이도 같이 휴가 갈 거니까, 다들 그때 함께 쉬면 되겠다. 신나!”
7월로 예정된 니네베 호수 방문을 떠올리고 레티샤가 환호했다.
그런 자매를 리피가 제지했다.
“레티샤, 우리 놀러 가는 거 아냐. 일단은 니네베 성의 복구 임무가 있거든?”
“말이 그렇지 노는 거 아님? 클레이오는 복구, 아서는 시찰, 우리는 호위라 이거잖아. 거기에 비공개 방문이면 걍 휴가지.”
“리피 말이 맞아. 다 같이 한숨 돌리려고 넣은 일정이지. 내 건의였으니까, 고맙게 여기라고?”
“최고야. 첼은 멋쟁이. 좋았어, 수영복 가져가야지!”
잠자코 친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클레이오는 오랜만에 삼촌다운 기질이 발동했다.
“거기 호수는 여름에도 추운데 수영을 하겠다고?”
“그게 문제가 되는 건 우리 중에 레이 너뿐일걸.”
레티샤의 해맑은 답에 클레이오는 힘이 쭉 빠져버렸다.
“뭐 그것도 그렇군. 그러니 사람 구실 못 하는 날 제발 이제 진짜 좀 내려놓지 그래?”
“어, 너무 가벼워서 들고 있는 걸 까먹었어. 미안!”
겨우 응접실이 조용해지나 했더니,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베헤못이 온몸의 털을 팡 부풀리며 화를 냈다.
“냐아악? 캬아하아아아아악?(니네베 호수? 뭐가 좋다고 갇혀 있던 델 또 가냐?)”
“그냥 다 같이 가는 휴가니까 화내지 마, 못 선생. 정 그러면 같이 갈까? 마차 안에 좋은 침대를 놔 줄 테니까.”
“먉!(하여간!)”
“오히려 다른 애들은, 나는 안 갔으면 했는데… 내가 가자고 한 거라고.”
“이제 와서 새삼 네가 고양이 새끼랑 말을 하는 게 놀라운 건 아니고, 하나만 정정할게. 마차 아니고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될 거야. 정말 기대되지 않니?”
첼의 희희낙락한 꼬락서니를 노려보며 베헤못은 기분 나쁜 티를 내듯 귀를 낮게 꺾어 내렸다.
“미야아앍.(본묘는 빼주도록 하라.)”
***
일주일 후.
수도방위대 학교 연구제자 연구실.
쪼르르륵―
프란은 아주 연하게 탄 커피를 머그에 담아 클레이오 쪽으로 밀었다.
이쯤 오면 연구실의 본래 주인보다도 연구실 관리와 유지를 일임받은 프란 쪽이 훨씬 주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잘 정리된 테이블 맞은편에 도톰한 플란넬 셔츠와 스웨터 차림으로 앉은 클레이오는, 1월의 전투 이후 두 번째로 바깥출입을 했다.
한동안은 의식이 없었고, 의식이 돌아온 후에도 과도한 마법 사용의 후유증, 정신적 충격과 부상의 여파로 앓고 또 앓았다.
지금도 몸에 부대낄까 싶어 풀을 먹이지 않은 채 첫 단추도 풀어둔 셔츠 깃 사이로 목덜미까지 하얗게 뻗은 상흔이 어른어른 비쳤다.
막대한 에테르를 퍼부어 상처를 모두 지울 기회 따윈 없었을 것이다. 1월의 난리 직후엔 수도의 모든 마법사들이 탈진 상태였으니.
그런 주제에 습관처럼 마법식을 열어 커피를 차갑게 식히려 들기에, 프란은 머그를 쓱 들어 극소형 마법식 바깥으로 당겨왔다.
“그냥 따듯하게 마시지. 위장이 너덜너덜해져 놓고서 차가운 각성 음료를 탐닉하는 건 좋지 못한 취미다.”
몇 달 만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나 설렜던 클레이오는 나라 뺏긴 표정을 했다.
“아니, 프란 설마 너까지 이러기냐.”
“여전히 커피포트를 내가 들어야 하는 상황이 개선된다면 나도 성인인 네게 이런 세부적인 주의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데 네가 정도를 모르고 행동하잖나.”
“후우.”
캔튼 부인은 클레이오를 밀착 간호하며 금지한 항목이 많았다.
그중에서 제일 괴로운 건 아래 세 가지였다.
커피 금지.
차가운 음료 금지.
음주 금지.
전투의 부상은 진작 다 나았고, 이미 생긴 상처는 보기만 흉할 뿐 통증 또한 특별히 없었으며, 일시적으로 고갈되었던 에테르 역시 지금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고 해도 캔튼 부인을 위시한 주변 사람들은 클레이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일 당장 죽을 사람 취급을 당하며 집에 갇혀 있던 게 장장 석 달이었다.
‘내가 아무리 누워서 뒹구는 걸 좋아해도 그건 심했어.’
몇 번 병문안을 왔던 프란도 부인에게 포섭이 되었는지 영 협조해줄 기미가 없었기에, 클레이오는 결국 뜨뜻미지근한 커피에 만족해야 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어제의 관측 비행은 꽤 성과가 있었다며?”
“그래. 연구 장소와 마석을 함께 제공하는 지원을 해준 데 감사를 표한다. 다소 과한 감은 있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그 화제를 꺼내니 프란의 표정이 한결 온화해졌다.
클레이오는 바보처럼 히죽거렸다.
“과하다니, 과한 게 뭔데? 집에 누워서 쓰고 싶은 데 맘대로 돈 쓰는 거 꽤 장래 희망에 근접한 상탠데.”
그건 작년에 이 연구실에서 두 사람이 마주했을 때 했던 대화의 연장이었다.
‘약속’이 없어도 기억력이 좋은 프란은 간신히 펴졌던 이맛살을 다시 찌푸리고는 씹어뱉듯 답했다.
“‘불로소득을 누리는 악덕 자본가’란 비난이 그렇게 듣고 싶다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복기에 클레이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굉장히 듣기 좋군.”
“그보다는 왕가의 해체에 자금을 보태는 숨은 급진주의자 소리를 듣는 게 더 빠를 거다.”
“왜 얘기가 그렇게 튀냐?”
속이 타는지 커피를 벌컥 들이켠 프란이 탁 소리가 나게 컵을 내려놓았다.
“하늘의 ‘흑색 반점’을 분석하여 그것이 신의 축복과 천체의 이동에 의한 기적이 아니라 므네모시네의 문과 조응하는 일종의 마법 설계이자, 일련의 에테르 반응에 불과하다는 가설을 증명할 거다.
고작 한 나라의 대관식 때문에 별들이 이동하리라 믿던 것이 오히려 놀랍지. 그리고 그 결과를 발표하면 지금 시점에서 가장 타격을 받을 존재는 대관식을 기다리는 자, 아서 리오그난이 아닌가.”
“그러려나? 솔직히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팔짱을 낀 클레이오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프란에게 한 대답은 진짜였다.
하늘에 뜬 반점의 관측을 하고 싶다고 해서 거기 필요한 마석 몇 개 쥐여준 게 다였으니까.
어차피 이 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바가 없는데, 자신이 어떻게 몇 수를 앞서 보는 책사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서사 개입도는 세상의 멸망을 되돌린 새벽, 99%에 다다른 후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모른다. 클레이오에게 주어진 미래는 진실로, 정해진 경로가 없는 세계이다.
“백치인 척 에두르는 태도가 이제 와 통할 거라 여기고 그리 행동하는 건 아닐 테고. 역시 건강이 덜 회복된….”
“그게 아니라, 예측 성흔이 완전히 먹통이 된 거라고.”
클레이오는 보란 듯 오른손을 휘휘 흔들었다.
의심스럽게 상대를 쳐다보던 프란은 테이블 한쪽에 쌓여 있던 종이 뭉치를 끌어왔다. 팸플릿과 유인물, 신문 몇 부였다.
“안착한 성흔이 무력화되는 경우가 있단 말인가? 네 성흔의 문제는 증명할 방도가 없으니 물론 지금의 그 리오그난이라면 신의 보증 같은 건 더 이상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 네가 프리실라 바틀비 의원의 출마 때 기부금을 냈을 때 예비한 뜻은, 충분 이상의 결실을 얻었다. 요즘엔 이런 유인물을 학교의 심부름 하는 사환 애들까지 읽고 있더군.”
클레이오는 오랜만에 글자를 눈에 담았다.
유인물은 활자가 크고 내용이 간결해서 눈에 쏙 들어왔다.
‘대관식 없어도, 그는 우리의 왕.
왕에게 왕관을, 평민원에 입법권을.’
아서를 지지하는 프리실라 바틀비 의원의 성명이었다.
바틀비 인쇄소 사장의 부인이자, 깃발의 단원들에게 차와 샌드위치를 대접해주던 부인은 이제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초선 의원이다.
“뭐어 정말 우리 화이트 씨가 대관 일식을 마도 과학적으로 분석해낸다면, 다음 왕은 정말로 신의 보증이 아닌 다른 곳에서 통치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도 좋겠지.”
“물론 리오그난이 참 먹음직스런 과실을 앞에 걸긴 했다. 국왕 대리가 평민원의 입법권 도입을 주장하다니. 네 발상인가?”
“프란시스, 너는 내 능력을 과도하게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럴 리가. 난 왕실 자문위원회에 자리도 없어. 그저 수도방위대 마법 고문에 불과하다고.”
프란의 치켜올라간 눈매가 조금 더 사나워졌다.
어찌 되었든 현재까지 입법 권한은 귀족원과 국왕에게만 있고, 평민원은 법안 제정에 대한 이의 제기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한 세대 전 이루어진 불완전한 분립에 불만을 가진 이들은 많았고, 전쟁의 여파가 가라앉자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아서는 공식적으로 평민원 입법권 도입을 국왕 대리 권한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멜키오르와 아슬란의 실각으로 인해 그들을 따르던 세력이 빠져버린 귀족원은, 수도를 수호한 공적과 강대한 무력을 소유한 국왕 대리의 뜻을 어그러뜨리기 어려웠다.
아서를 뒷받침하고 있는 건 일신의 무력과 티플라움 광산에서 비롯한 금력뿐만이 아니었다.
거센 민의였다.
재산 기준의 문제로 투표권이 없는 사람들은 공적으로 좌절된 열망을 아서를 향해 투영했다.
일부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왕에게 품는 그런 열망은 활동의 자원을 소모시키며, 막연한 시혜에 미래를 거는 행동이라 비판했지만, 그다지 반향을 얻지 못했다.
제비꽃 클럽 역시 끝끝내 여성 참정권 확대를 밀어붙이는 아서에게 찬성하여 공식 지지를 표명했다.
심지어는 평민원 의원들조차 메이드와 여교사들이 무얼 아느냐고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정이니, 그들로서는 아서의 의지가 중요했다.
왕의 즉위에 대중의 지지가 관여되는 상황은 꽤 기묘했다.
3왕자의 즉위는 상속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적에 의한 것이라는 묘한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이제 소버린 지구 구석의 펍에서는 아서의 왕위 즉위에 대한 내기는 하지 않았다. 오래전, 아서에게 돈을 걸었던 자들이 큰 이득을 보고 승부가 끝났다.
요즘 내기 용지에는 다른 내용이 올라왔다. 아서는 카르멜라와 압살롬 2세 중 어느 쪽에 비견될 것인가, 하는 겨룸이었다.
“귀족원 의장인 페텐카도 딱히 말릴 생각 없는 거 보니 평민원 입법권은 지금 강행하면 의외로 쉽게 얻게 될 것 같던데?”
“세르게프로서는 다른 귀족들이 성장하는 것보다 리오그난의 측근으로서 권력을 나누지 않는 편이 이익일 테니. 결국 형태를 바꾸었을 뿐 귀족과 왕족의 식상한 권력 추구인데, 여기에 새로운 환상을 덧씌우는 행위는 기만적이다.”
“네 미간이 안 펴지는 이유가 이거였구나. 아서 문제로 클라리온에서 뉴 커런트가 갈라져 나온 거 때문이지? 루치올라의 주요 필진들까지 뉴 커런트로 가버렸다며.”
아픈 데를 찔린 의 창간 멤버는 공연히 안경만 끌어 올렸다.
전쟁 전 살던 펍 위층 다락방에서 방을 뺀 뒤 어디로 갔나 했더니, 전후엔 스위프트 거리에서 가까운 신문보급소 4층에 자릴 잡은 그였다.
프란이 선생 노릇 중인 기술자 야간 교실과 가까워서이기도 하지만, 노동 시간 단축 의제에 집중하는 의 영향력을 넓히는 데 매진하려고 그런 듯했다.
한데, 난데없이 새 잡지가 출현해 왕위 문제로 공론장이 뒤덮이자 여러 가지로 일이 복잡해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