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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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틸리엔의 여왕
클레이오는 몇 달을 침대에 누워서 보냈지만 수도 소식에 영 어둡지는 않았다.
캔튼 부인이 전화선을 방까지 연결해주어, 디오네와는 자주 연락을 한 덕이었다.
온건파라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공화정을 지지하는 이들이 모여 있던 에서, 의회제에 긍정적인 아서를 왕으로 추대하여 훗날엔 입헌 군주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파가 승기를 잡고 편집장을 교체한 건 최근의 작은 화젯거리였다.
그 결과 클라리온에서 축출된 기존의 강경한 왕정폐지론자들은 항의의 의미로 를 창간했고, 거기에 고무된 의 필진 여럿이 자리를 옮겼다.
“언론사들 내부의 동향까지 파악하고 있나? 그레이어 씨의 정보 수집력이 감탄스럽군.”
“전해주면, 레이디 디오네가 기뻐할 거야. 네 칭찬을 들었다고.”
비꼬아봤자 통하지 않을 걸 깨달은 프란은 한숨만 내쉬고는 최근 자의 클라리온을 팔락였다.
“그렇다고 해도 여덟 살에 산사태를 막은 일까지 끌고 와 신화적 후광을 조성하는 짓은 참으로 속악하지 않나? 그런 건 제대로 된 언론인이 쓸 만한 글이 아니다. 정말로 실망스러워. 그들이 아서 왕자에 대한 찬양에 할애한 지면의 십 분의 일이라도 필리프의 사망과 멜키오르의 하야에 대한 진실을 캐보았다면 이보다는 덜 실망스러웠을 거다.”
“그, 음… 멜키오르의 문제라면 아무튼 전부 까발리기 어려운 사정이 있고, 또, 저기 프란, 그 민망한 찬양은 아서가 시킨 게 아닌 건 알지? 정말로 조직해서 하는 일이었으면 그런 노골적인 찬사를 싣게 했겠어?”
“그래. 그게 리오그난의 선전이 아니라는 점이 나는 가장 통탄스럽다. 보다 많은 이들이 왕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길 원하는데, 그런 상황은 요원하다는 게.”
클레이오는 프란이 응시하는 문장들을 눈으로 따라 읽었다.
‘한 번 왕의 즉위에 민의가 반영되면, 이 경험은 반동으로 되돌려진다 하더라도 또다시 반복되게 마련이다. 한 발을 내디디면, 자연히 두 번째 걸음을 내디딜 수밖에 없다.’
‘당신이 그를 왕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에게 당신의 뜻을 따르도록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순진하게 보이는 믿음이 드러나는 문장이었다.
혹은 순진하려고 하는 믿음이.
“음, 프란 너는 왜 사람들이 왕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지 않으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과 희생을 대신해줄 존재를 원하길 마련이니까. 나 역시 그렇고.”
프란은 대답 대신 혀만 차고는 빈 커피 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
사각. 사각사각.
신생 카스틸리엔 연합국의 여왕 외제니아 라니에리 카스틸리엔은 ‘1897년 6월 14일’이라 쓰인 날짜 하단에, 아직 낯선 서명을 기입했다.
그녀가 맡은 첫 번째 외교 업무는 알비온과의 종전 조약을 맺는 일이었다.
알비온의 국왕 대리인 아서와 외제니아 여왕은 키시온 영지의 압살롬 방벽 아래 지어진 가건물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았다.
밝은 표정을 한 아서가 먼저 서명을 했고, 그에 이어 외제니아가 수결했다.
테이블에 함께 올려둔 왼손의 약지에서 12캐럿의 블랙다이아몬드 반지가 빛났다.
여왕의 자그마한 손에 끼이니 행성처럼 커다랗게 느껴지는 반지는 카스틸리엔 가문의 가보였다.
차분한 색감의 테이블보 위에서 그 강렬한 보석은 무섭도록 눈에 띄었다.
보석의 존재감은 공식적인 소유주인 외제니아 자신에게도 버거웠다.
그녀는 생각했다.
‘특정한 귀금속을 소유했다고 나라를 다스릴 권리를 얻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 본래 믿음이라는 게 논리에서 생겨나는 건 아니지.’
마인라트, 이자르, 옐레니아, 라에티카 네 공국의 폐허에서 탄생한 카스틸리엔 연합국은, 오늘 국제 사회에 처음 나서게 된 신생국이었다.
일곱 공국 중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동부의 세 공국은 각기 떨어져 나가 독립 국가가 되었다.
서쪽으로는 알비온, 남쪽으로는 카롤링거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네 개의 공국들 사정은 내륙의 공국과는 달랐다.
기사단이 완전히 와해되고 후계자들마저 사망할 만큼 피해가 컸으며, 아슬란과 그 일파의 전횡으로 인해 평민 계층에서도 강제 징집의 후유증이 대단했다.
거듭된 패배로 군이 축소되면서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시민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마침내 마지막 순간, 수십 년간 헌법 도입을 요구했던 이들이 건국의 승기를 잡았다.
이론도 세력도 있으나 광범위한 지지층을 가지지 못했던 이들이 구심으로 삼은 인물은 바로, 피난민들의 공녀 외제니아였다.
카스틸리엔이 멸망시킨 나라를 카스틸리엔이 물려받은 형식으로, 입헌 군주제라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도입되었다.
정작 외제니아는, 황제의 생전에는 한 번도 카스틸리엔의 일원으로서 영화를 누려본 적이 없었건만.
그녀는 사람들 앞에 나가 아슬란과 쥴레이카가 자신을 어떻게 박해했는가를 소리 높여 말했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그들 두 모자는 전 황제의 자녀를 모질게 핍박한 자들이 되었다.
동정받는 일 따윈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외제니아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거라면 모두 이용했다.
‘어차피 헤스터도 쥴레이카도 아슬란도 감시꾼 샤프롱도 다 죽었는데, 어쩔 거야.’
여왕이라는 명칭은 상징적인 것일 뿐, 카스틸리엔 연합국의 의사결정기구는 어디까지나 의회였다.
그녀는 여러 이해관계 사이의 기묘한 평형을 맞추는 추 같은 존재였다. 국내의 요구만이 아니라 국외의 요구에도 말이다.
강경파 귀족이나 군부 출신 인사가 또다시 이웃 나라의 실권을 얻길 원치 않는 알비온 측은 외제니아가 즉위하는 조건으로 각 공국에 대한 전후 배상금 청구를 포기했다.
몰수된 공가의 재산은 알비온에 환수되는 대신, 연합국의 전후 복구와 농지 정화에 이용될 예정이었다.
권위 의식에 찌들어 결사 항전을 외친은 늙은 사내들보다야 평화 하나만을 기치로 내건 외제니아와 그녀의 내각 쪽이, 알비온 외교부 입장으론 훨씬 나은 상대였다.
드물게 아서, 세르게프 의장, 클리퍼드 외무상의 의견이 일치하는 사안이었다.
실상 종전이 더 절실한 것은 카스틸리엔 연합국 측이었다.
흉작이었던 전쟁의 해에 알비온이 겪었던 식량 위기는, 공국들이 겪은 고난에 비하면 약소한 것이었다.
동쪽 공국 중에서도 클로토강에 근접한 옐레니아와 이자르의 피해는 극심했다.
수원을 오염시키는 구 브룬넨 군주국 군대의 전략은 알비온뿐 아니라 클로토 강물로 농업용수를 대는 브룬넨의 곡창지대에도 타격을 입혔다.
하류인 테르게스티는 부유한 상업 도시로, 상주하는 마법사의 수도 많고 가용 자원도 많아서 강 하구에 티플라움 보를 쌓고 거기다 반영구적인 정화 마법을 걸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공국들에는 그런 여력이 없었다.
‘설령 있었더라도, 브룬넨에선 씨가 말라버린 마법사나 마석을 평민들을 위해 써줄 지도자는 없었겠지.’
외제니아는 엄숙하고도 품위 있는 표정 밑에서, 자신은 오로지 기아로 인하여 왕이 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아는 전쟁과 학살과 파괴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한때 시골 영지에 숨겨져 자라던 황제의 사생아는, 먼 시골에서 요양을 했던 황제의 사랑받는 막내딸, 상복을 입은 여왕, 옷깃에 보랏빛 목백일홍을 꽂은 살아있는 반전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모든 전사자의 약혼자, 어머니이자 딸로 자청하는 외제니아 라니에리 카스틸리엔.
약혼자의 시신 없는 무덤 대신, 모든 전사자를 기리는 전사자 기념비를 원한 여왕.
샤프롱의 위협에서 도망 나온 외제니아는 알비온을 떠난 뒤, 처음엔 테르게스티에 가 자그만 상단 사무실에서 무역 번역 일을 했다.
그러나 테르게스티 역시 브룬넨군에 의해 점령되며, 일하던 상단 사람들과 같이 억류된 해안방어진지에서 죽다가 살아났다.
아서와 그의 친위대가 벌인 대단한 전투를 외제니아 역시 목격했다. 도저히, 브룬넨이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공국 중의 하나인 라에티카로 돌아갔다.
별로 정(情)도 소속감도 느껴본 적 없는 고장이지만, 피난민들 사이에서 노인과 어린아이를 돌보며 보내는 하루하루는 고된 만큼 잡념을 앗아 가 외제니아의 마음을 단순하게 해 주었다.
어차피 모두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라 그 누구도 외제니아를 특별히 다른 이방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평형 상태는 곧 깨지고 말았다.
알비온과의 전쟁이 패배로 끝난 뒤에도 잔존한 이자르 기사단의 일부가 경계를 넘어와, 무주공산이 된 이웃을 병탄하려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첫 희생물은 외제니아가 머물던 라에티카 공국이었다.
멎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포탄의 굉음과 에테르의 빛이 다시 지상을 휩쓸자, 피난민들은 간신히 정착한 거리에서도 도망을 가야 하게 생겼다.
브룬넨의 동부는 험한 산지였다. 서부의 온난하고 넓은 평지를 두고서 언제까지고 도망만 갈 수 없었다.
전사한 큰아들의 사진을 항상 로켓에 품고 있는 베르거 부인, 결혼한 지 이 년밖에 안 된 남편이 전장에서 실종된 슐츠 부인, 오빠가 폐인이 되어 돌아온 그라프 양, 모두가 더 이상 전쟁 따위는 견딜 수가 없다고 울었다.
독을 마시고서도 살아 돌아온 전역자들은 몇 남지 않은 기사들의 전횡을 그대로 두고만 보진 않았다.
각 공가의 파괴적인 전쟁 전략에 이의를 가진 자들이 점점 늘어났으나, 그들의 구심이 될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외제니아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날부터 외제니아는 남은 염색 물약의 개수를 세지 않았다.
물약을 먹지 않게 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새카만 카스틸리엔의 머리카락 색이 되돌아왔다.
처음 그녀의 이름을 알린 연설은 지금도 종종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죽어간 이들을 위해 묵념합시다. 그들을 추도하고 나서, 그들을 사지로 몰아간 공작들을 타도합시다. 백성의 목숨을,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자들이 다시 이 땅의 지도자가 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슬픔과 고통을, 타고난 마법도 일신의 무력도 없어 하찮게 취급되는 여인의 삶을 압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 어떤 생명이 하찮단 말입니까? 신께서 내리신 삶이 삯일꾼의 어린아이보다 공후에게서만 더 값지겠습니까? 그 누구라도 목숨은 오로지 하나만 가지고 있습니다.’
외제니아는 그때도, 습관처럼 흰색의 백일홍을 옷깃에 꽂고 있었다. 곧이어 백일홍이 자라는 곳에 사는 모든 여인들이 그녀를 따라 하게 되었다.
꽃은 지금도 외제니아의 드레스 깃을 장식하고 있었다.
잡념을 흩어낸 외제니아는 제 몫의 펜을 단정하게 내려놓았다.
그녀가 마음을 정리하도록 기다리던 아서는 자연스레 외제니아를 에스코트했다.
서명을 마친 두 사람이 가건물을 나서자 눈이 부실 정도로 플래시가 터졌다.
“이로써 양국 간에 종전 협정과 상호 불가침 조약이 성사되었습니다.”
공국 측과 알비온의 언론인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온 기자들의 질의에 길게 답해준 두 정상은 키시온 성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축하연이 시작되기 전, 아서는 대기실에서 잠시 마주한 외제니아에게 속삭였다.
“공식 축전은 보냈어도 얼굴을 뵈니 좋군요. 늦었지만, 진심으로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부디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키가 작은 외제니아가 고개를 젖히듯 들어보니, 아서는 번듯한 국왕 대리 대신에 춤을 사납게 추던 남자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서가 소탈한 진심을 드러낸 만큼 외제니아도 슬쩍 마음을 열었다. 외제니아는 아서에 대해, 어딘가 사람을 진솔하게 만드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일단은 ‘전 약혼자’를 살해한 아서에 대해 외제니아가 가진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럼요, 난 건강해야죠. 아무래도 호전적인 전쟁광보다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자들의 여왕 쪽이 외교 파트너로서는 좋지요?”
전쟁에는 책임이 없으나, 홀로 남아 나라를 짊어지게 되었다는 외제니아의 입장은 신생 브룬넨 왕국에 과도한 전쟁 배상금을 안기지 않으려 하는 아서에게도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하나, 지금 두 사람이 하는 말은 외교의 언어가 아니었다.
“맞습니다. 정말이지, 안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연회에선 절대 춤 신청을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거참 반가운 이야기네요. 그때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이지만, 국왕 대리의 리드는 정말로 아니었어요. 저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작정이니까 이번엔 춤을 자제하죠.”
“이젠 저도 아는데 아프게 찌르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곧 두 사람을 연회장으로 안내하는 시종이 화동과 함께 도착했다.
연회장에 도달한 외제니아는 알비온 측의 화동이 건넨 백일홍 다발의 향기를 맡기 위해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상복을 입은 여인은 마법으로 생기를 보존한 꽃들보다 더 생생하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종신 집권할 수 있는 강력한 군주가 아님을 잘 알았다.
자신의 즉위는 상황과 힘의 균형이 만들어낸 일시적이고 이례적인 사건이다. 누구도 운영해본 적 없는 이 새로운 체제는 금세 붕괴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다만 몇 년 만이라도, 사람들이 삶을 다시 일굴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것만으로 자신은 역할을 다한 것이다.
카스틸리엔의 여왕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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