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29
그리고 삶은 이어진다 (2)
여름꽃들이 지고 햇살의 열기가 느슨해져 가는 9월.
구름 같은 인파가 궁성 앞 광장에 모여들었다. 알비온의 국기를 흔들며 아서의 이름을 연호하는 이들은, 아서의 국왕 대리 취임식과 발코니에서의 연설을 기대하며 모인 군중이었다.
얼마 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왕세자는 심각한 건강 악화를 이유로 국왕 대리 직무를 아서에게 이양하고, 즉위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공표했다.
왕의 홀은 여전히 수리 중이었기에 그나마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청금석의 홀에서 예식이 진행되었다.
본래는 선왕의 모친이 기거하던 대비궁의 아담한 홀인지라 영애들의 데뷔탕트 무도회가 주로 열리던 장소였다.
유행이 두 세대쯤 지난 홀은 오래된 내장을 떼어내고 석회를 발라 단정하게 마무리했다. 그 이상의 멋을 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그런 연유로, 예식은 궁성이라기보단 시청의 홀처럼 보이는 배경에서 진행되었다.
바깥의 소란도 [방음] 마법을 건 홀 안에서는 전연 들리지 않았다. 음성적 경계는 무거운 침묵을 수호한다.
단상 아래는 예식의 증인으로서 필수적인 인원으로 성직 귀족 3인, 법복귀족 3인과 각료직을 가진 대 귀족 여남은 명, 아서 왕자와 그의 측근들만 자리했다.
그들은 긴장 어린 침묵 속에서 단상 위를 지켜보았다.
국왕 대리 지위를 정식으로 내려놓기 전, 마지막 업무로서 논란의 아세르 공작 서임식이 예정돼 있었다.
새 공작은 신귀족식으로 작위명 역시 성으로 통일했다.
멜키오르의 동원이 바로 아서가 반대했고 첼레스테스는 지지한, 이쪽의 책임을 덜면서도 클레이오를 공작으로 만드는 방안이었다.
그간 아서 진영의 가장 중요한 전력이자 후원자였던 클레이오를 왕실 자문 위원으로 들여보내는 일을, 퇴임할 멜키오르가 실행하는 것이다.
멜키오르는 이 서임의 대가로 거래를 제안했다. 요양할 거처를 직접 고르게 해 달라는 요구였다.
그 장소는 의외롭게도, 혹은 의외롭지 않게도 니네베 호수의 성이었다. 클레이오는 망설임 없이 멜키오르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렇게 거래가 완료되었다.
멜키오르가 임명의 주체가 되자 명분상 ‘아직은 정식 국왕 대리가 아닌’ 아서에게 시시비비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게 되었다.
사실상 정치적 요식 행위이자, 절차적 샛길에 가까웠지만 첼과 클레이오는 아서를 위해 어떤 방법이든 쓸 각오였기에 일이 이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의 예식이었다.
나지막한 단상 위에는 헨리에타 카발리 부주교와 왕실 의전관이 자리했다.
멜키오르는 그들 다음에 나타났다.
시녀장의 부축을 받아 더듬더듬 지팡이를 짚으며 나온 남자는 아주 낯선 존재였다.
시력을 북돋우는 마도구 안경을 착용해도 겨우 빛과 어둠 정도만 구분되는 것이 고작인 왕세자는 그저 단상 위에 올라 의자에 앉는 행동조차 힘에 겨워 보였다.
예복 역시 약식으로 착용하고, 장갑조차 끼지 않아 오래되고 참혹한 상흔이 그대로 드러났다.
좌중에 은은한 경악이 퍼져나갔다.
이곳에 모인 증인들은 나라의 요직을 차지한 자들이었다. 응당 정무적 감각이 무디지 않은 자들이므로 불필요한 첨언은 없었으나, 그들의 눈빛은 숨길 수 없는 충격에 흔들렸다.
‘저자가 진정 그 멜키오르 리오그난이란 말인가.’
국왕 대리로서 그의 마지막 업무는 ‘클레이오 아세르 1대 공작’의 서임이었다.
멜키오르가 단상에 오르고 난 뒤 아래에서 기다리던 클레이오 아세르가 앞으로 나섰다.
밀도 높은 정적 속에서 마침내 클레이오와 멜키오르는 서로를 마주한다.
클레이오는 이 이야기의 숙적이었던 자를 본다.
그를 묶어두었던 불의 수레바퀴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풀려난 남자는 신성한 존재론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아름다움은 범접 가능한 것이 되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눈은 필리프의 것과 꼭 같은 여린 청록색이다. 홍채의 금빛 이채는 연한 빗금으로만 남아 해 아래에서만 반짝일 수 있었다.
남자는 한 음절씩 분리하지 않으면 말이 들리도록 할 수조차 없을 만치 쇠잔했다. 그 존재의 연약함은 도저히 수복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나, 새로이 공작이 된 출세자의 몰골 역시 병자인 왕세자와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빳빳한 셔츠의 칼라를 높이 세우고 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의 마법사는 새파란 안색을 한 채, 인생에서 세 번째로 멜키오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먼저의 두 번은 훈장을 받을 때였고, 마지막은 작위를 받는 지금이다.
클레이오는 나라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영광을 다 획득하였으니, 아서가 클레이오를 무릎 꿇리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단상 위의 두 사람을 응시하는 아서는 견고하게 웃음을 지은 채였다. 웃음의 아래층이 읽히지 않는 위정자의 얼굴이다.
이제 멜키오르는 동생의 표정을 뜯어보는 일은 할 수 없다.
왕세자는 그저 예식에 포함된 구절을 힘겹게 암송했다.
이야기가 계속 쓰이고 있다면 최고로 지독한 아이러니라고 비평할 수 있을, 한 문장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찬가의 힘을 알고 미덕을 따르는 자가 되시오.”
클레이오는 불안정하게 균형이 맞지 않는 몸을 느리게 일으켰다.
무릎을 꿇을 때에는 클레이오 아세르였으나, 일어날 때에는 아세르 공작이다.
알비온의 유일한 공작은 한낱 숨조차 올바르게 쉬지 못하고 목 안으로 기침을 넘겼다.
왕세자는 약간 비껴 난 시선으로 왕실 의전관이 로브를 둘러주는 클레이오를 바라보다가, 무심하게 돌렸다.
클레이오는 지금까지도, 한때 신의 대적자를 자처하던 이가 무엇을 읽고, 무엇을 보아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는지를 몰랐다.
처음에 만났던 그는 진실을 알게 된다 한들, 아서를 오래 살도록 하며,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세상의 끝을 온유하게 기다릴 이는 아니었다.
여신조차도 도무지 다시 쓸 수 없던 구절로서의 멜키오르 ― 지워지지도 긁혀나가지도 않던 완고한 대적자가 나중에는 자신의 두서없는 폭로 앞에서 그 모든 행동을 접고, 분노를 거두고, 저항을 중단했다.
기술적으로 그를 서사의 중심에서 분리하는 편집이 가해진 후, 모든 일이 다 끝난 후 평화의 안온함 속에서, 의문은 점점 더 막막하게 팽창한다.
이게 다인가? 이것이 끝인가? 미래는 영원할 것인가?
눈앞의 저이에게 묻는다 해도 그는 이제 결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으리란 듯 고요하게만 군다.
.
.
.
이날 오후 아서는 멜키오르로부터 정식으로 권한을 이양받은 국왕 대리가 되어 취임 연설을 마쳤다.
젊고 강하고 아름다운 국왕 대리의 취임은 국내외에서 모두 열광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서의 취임식은, 주변 국가들에게 사실상 새 국왕의 즉위로 받아들여졌다.
취임 연설 이후 이어진 훈장과 작위의 수여식엔 수많은 전사들뿐 아니라 영웅적인 공로를 보인 시민들, 그리고 미치슬라프 페히테가 영예를 얻었다.
또한 태서턴 트리스테인이 공작위를 반납했음을 정식으로 공표했다.
홀로 남겨진 마지막 트리스테인 공작은 구류에서 풀려나자 다시 멜키오르를 모시기를 바랐다.
‘그분께서 왕이든 그렇지 않든 나는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동시에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맺었던 언약이 모두 풀렸음을 트리스테인 기사단원들에게 알렸다.
아무도 그 연유에 대해 설명을 듣지 못했지만, 그건 그가 죽음에서 돌이켜졌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는 누구에게 어떻게 충성할지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돌려주었다.
‘극북의 영지를 지켜낸 고귀한 기사로서, 그대들은 그대들의 왕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왕실 직할령이 된 트리스테인 영지는 미치슬라프 페히테 후작이 통치를 위임하게 되었다.
수도방위대 기사단장 미치슬라프는 모친의 뜻에 따라 그녀의 생전에 페히테 후작위를 물려받았다.
페히테 영지는 이미 네 개의 행정 구역으로 갈려 주변에 흡수된 뒤였기에 아서는 새 영지를 하사하려 했으나, 미치슬라프는 연고가 있는 트리스테인을 자신이 맡길 바랐다.
실제로 통치의 실무는 수도를 떠나기 어려운 미에츠 대신 기사 라이사가 담당하도록 했다.
그 수가 확연히 줄어든 트리스테인 기사들은 수도 전투의 부상이 나은 후, 라이사의 통솔 아래 북으로 돌아갔다.
멜키오르는 태서턴 트리스테인의 마지막 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모든 공적인 의무를 내려놓은 왕세자는 오랜 시간 시녀장으로 봉사했던 힐레이다와 최소한의 시종, 그리고 국왕 시해 혐의에서 벗어난 기사 태서턴과 함께 니네베 호수로 떠났다.
***
1898. 5
쾅!
“이건 말도 안 되는 흑색선전이야. 마법사로서 좌시할 수 없는 조악한 선동 문건이라고. 항의 편지를 보낼 테니, 함께 쓰자!”
977기가 졸업한 후로도, 대를 이어 학생들의 모의 작당실로 쓰이는 3층 맨 끝 교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보풀이 인 로브를 비뚜름하게 걸쳐 입은 마법반 2학년 학생이 책상을 내리치며 열변을 토하고 있는 탓이었다.
귀울림 때문에 양손으로 귓가를 꾹꾹 누른 동료 학생 둘이 투덜거렸다. 드루실라와 벨라, 두 사람은 연습용 검을 지참한 쪽이었다.
“이워트 쟤는 요즘 말투가 왜 저래.”
“루치올라를 너무 많이 읽어서 아닐까. 지브릴 블랑쉬의 열렬한 팬이잖아.”
“지브릴 블랑쉬는 훌륭한 언론인이자 활동가지만 그 때문에 이런 의견을 가진 게 아냐. 애초에 그는 아세르 공작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니까, 본론에 좀 집중하라고!”
어느새 기척 없이 교실로 들어온 세 번째 학생이 파들거리는 이워트의 어깨를 꾹 눌렀다.
2학년 학생 대표, 마법반 알레스테어였다.
“그래, 본론. 클레이오 아세르 공작의 전시 행적에 관해 찌라시들이 또 찌라시했다 이거지.”
“이번엔 진짜 길게 가네? 1달째 연재인가. 점점 개소리가 시끄러워져.”
“사태를 파악했으면 이걸 시정하기 위한 방안을 의논했으면 한다.”
드루실라와 벨라는 제각기 와글와글 떠들었다.
“방안, 뭐. 벌써 얘기한 그거 아냐? 항의 편지 보내자는 거!”
“그치. 무지하게 많은 항의 편지.”
“애들 다들 써 줄라나?”
“흠. 내가 아까 점심시간에 간을 좀 봤는데, 마법반은 상급생들까지 전부 다 써 준다고 해. 지네들 ‘넘버투’를 위해서라면 백 장 정도는 얼마든 쓰겠단 놈이 서른 명은 돼.”
“와, 입학 인원수 늘어난 보람이 있네.”
“성인교육원 분들도 그, 전쟁 때 스텔라 방벽을 보수하며 같이 일해봤다고, 우리 마법사님 그럴 사람 아니래. 같이 탄원서 써주신대.”
마리아 교수의 책이 널리 알려진 후 이르게 각성한 에테르 감응자의 수도 급격하게 늘어, 수도방위대 학교 역시 오랜 전통을 깨고 입학 인원을 두 배 이상 늘렸다.
성인교육원 역시 개설되어 그 수가 폭증한 성인 감응자 교육을 담당하게 됐다. 에테르 감응자 수는 지금도 꾸준히 늘고 있었다.
벨라가 질린 듯 종알거렸다.
“그렇다곤 해도 마법반 장난 아니다, 완전 종교네, 종교.”
알레스테어는 길디긴 다리를 멋지게 척 꼬며 대꾸했다.
“그 사람 수업을 듣고 나면 무신론자도 마음을 바꿔먹게 될 지경이니까, 무리도 아니지.”
말투는 경박했지만 내용은 별로 그렇지 않았다. 반딱거리는 건들거림 아래 경이와 경외가 숨겨져 있었다.
네 명의 학생은 모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클레이오 아세르 조교수의 ‘마법 기초 시연과 실습’ 과목 수업이었다.
그러니까, 그 수업이 시작된 건 작년 가을의 일이었다.
수강 신청 책자에 갑자기 추가된 교양 과목은, 본래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도무지 흥미라곤 생기지 않는 이름처럼 커리큘럼 역시 대단할 게 없었다.
마리아 젠틸레 교수의 강의록과 마법 전서 1권을 놓고 교과서에 나오는 마법과 수련 과정을 하나하나 그대로 따라 해보는, 지성이라고는 쓸 일 하나 없는 과목 같았다.
그리고 학생들의 기대는 상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배반당했다.
작년 2학기의 첫날.
‘지금부터 에테르 순환을 해보겠습니다.’라는 말로 수업을 시작한 클레이오 아세르 공작은 오로지 에테르 순환 하나만으로 수업 1시간을 전부 할애했다.
그리고 그날, 교실에 자리했던 모든 학생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했던 건 제대로 되어 먹은 에테르 순환이 아님을 철저히 깨닫게 됐다.
근 십여 년 전, 클레이오의 학창 시절 동급생들이 겪었던 충격과 궤가 비슷한 날벼락이었다.
이제는 에테르 유량이 넘쳐 왕관이 아니라 금빛 돔처럼 에테르가 둘러싸이게 된 그 순환의 과정은, 가히 숭상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에테르를 느끼고 이해하고 순환시킬 수 있는 존재라면 그 누구도, 저 메이지 마스터를 감히 ‘죽음의 마법사’ 따위로는 부를 수 없을 것이다.
#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