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30
그리고 삶은 이어진다 (3)
그 순전하고 완전한 형태를 그리는 광원은 사람이 자아낸 에테르 순환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에테르의 원천처럼 보일 정도였다.
신앙심이 깊은 학생들은 여신의 이름을 부르며 찬가를 낮게 읊조렸고, 신앙이 없는 학생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기적을 마주했다고 확신했다.
그런 사정으로 ‘마법 기초 시연과 실습’ 과목은, 개강 첫 주가 채 지나기도 전에 수강 신청자가 터져 나가도록 몰리게 되었다.
클레이오는 강의 첫날부터 못 박아 두었듯 새로운 것은 하나도 안 가르쳤다.
‘마법 이론을 올바르게 알릴 능력 같은 게 있지도 않고요. 이 수업은 실습 중심이고 해당 과제를 시연 가능하면 모두 패스입니다.’
그렇게 제대로 1학년 1학기를 보낸 학생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기본 마법 기술을 시연하고 이어서 실습하게 할 뿐이었는데, 알파벳 첫 글자만 그리게 하는 필기체 교본처럼 단순해 보이는 게 함정이었다.
정말이지, 그의 시연은 두렵기까지 했다.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마법의 정석을 눈으로 보는 건, 책으로 읽는 것과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클레이오 아세르의 시연에선 교과서에 기재된 모든 마법과 마법의 과정이, 삽화처럼 완전히 동일하게 재연되었다.
인쇄기에 넣어 판으로 뽑아내듯 그 마법 전부는 꼭 같은 강도와 범위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이 가능했다.
그런 에테르 조정은, 도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알레스테어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대단한 8중 복합 마법 같은 걸 보여줬다면 애초에 차원이 너무 다르니까 놀라지도 않았을 거야.’
그러나 수도방위대 학교 학생들이라면 검사반 아이들까지, 1학년 1학기엔 무조건 배우는 기초 수련법 하나 가지고 이런 무시무시한 격차를 느끼게 만드니, 모두의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
하지만 그 대단한 마법을 펼쳐 보이는 아세르 공작 본인은 당장 길가다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꼬락서니를 한 남자였다.
나이가 스물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갈색 머리가 얼룩덜룩 희게 센 데다가, 푸석푸석하게 마르고 지친 인상이었다.
작년 2학기의 첫 수업 날, 소문의 아세르 공작을 실물로 처음 본 학생들은 대단히 실망해서 낙담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군인이자 마법사, 알비온 유일의 공작이며 왕실 자문 위원, 왕실 마법감의 애제자이자 유일한 후계자는 첫 수업에서 교실 문을 열다가 문이 문틀에 걸리자 힘도 못 쓰고 비틀거리던 사람이다.
시간에 딱 맞춰 수업을 마친 후에는 꼭꼭 반주를 곁들여 스승과 함께 학교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평범한 인물.
도무지 당대 제일의 권력자로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었다.
처음엔 왕이 측근을 공작위에 앉힘으로써 상원을 무력화시키려는 계책을 썼다고 사람들이 여겼으나, 실상 아세르 공작은 한 번도 의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왕권을 견제하지도 않았지만 드러내서 아서의 정책을 지지하는 행보도 없었다.
저 바깥에서 그에 대한 의견은 극단적으로 나뉘었다. 아서 왕자를 왕으로 만든 최고의 공신이라 하기도 했고, 아서 왕자가 가진 최악의 갈등 요소라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보는 클레이오 아세르는 그냥 마법사였다. 마법의 정수를 체화한 원형적인 마법사. 그들에게 정치는 아직 먼 문제였으니까.
학생들을 상대할 때는 소문의 공작 완드조차 꺼내놓질 않아서, 사람을 초월하는 정밀함과 강력함을 겸비한 마법이 오로지 손끝의 에테르로부터 빚어졌다.
물론 어린애들을 모아놓고서 자랑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을 거다.
에테르의 유량이 시간의 강물처럼 광대한 자에게 교과서용 마법 같은 건 숨 쉬는 일보다 쉬운 것이었을 테니.
알레스테어가 보기에 공작 각하는, 가끔은 혼자 숨 쉬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약골이라서, 정말로 마법 운용이 숨쉬기보다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도 권위를 내세우거나 아이들을 찍어 누르는 행동은 일체 하지 않고, 그렇다고 환심을 사기 위해 과하게 친절한 척하지도 않았다.
그냥 늘 똑같이 예의 바른 무관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적절히 존중해주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두 클레이오 아세르를 좋아했다.
“그건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검사니깐, 말만 못 하게 하면 마법사 정돈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막 만용을 가졌었잖아? 완전 개꿈이었잖아?”
“그치. 세상 존나 넓고 사람 같지도 않은 개쎈 인간이 막 있네? 그런 게 여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란 건가?”
“이 세상의 마법이 여신에게서 기인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개인의 탁월함은 두드러지는 것이다. 클레이오 아세르를 제가 가진 역량 이상으로 신격화시킬 필요는 없지만, 그가 한 위대한 공헌들을 격하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오, 오늘 얘 말 길어. 아닌 척하면서 최고로 아세르 공작 빠라니까.”
“벨라트릭스, 너는 내 말을 왜 늘 곡해하는…!”
“자자, 진정하고, 일단 항의 편지 취합할 날짜를 정하자. 검토를 한 번 하긴 해야 하니까 다음 주 수요일 정도가 좋겠어.”
오늘 3층 교실에 모인 수도방위대 학교 에이스들은, 자신들의 조교수인 클레이오 아세르 공작에 대한 언론사의 허위 보도에 대항하기 위해 토의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오늘 자 룬데인의 일간지 절반이 클레이오 아세르를 모함하고 있었다.
이건 비상사태였다.
“요즘 전쟁 후일담이랍시고 검증도 안 된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출판되는데, 이거 자체가 문제야. 얼마나 지난 전쟁이라고 그렇게 흥미 본위로 소비하는지.”
“옳지옳지. 진짜, 환장. 선배들도 다들 그렇잖아. 정말 최전선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하는데.”
제각기 한숨을 내쉰 아이들은 연병장 한쪽, 등나무 아치 앞에 작게 세워진 전사자 추모비를 내려다보았다.
동남 전쟁 중 수도방위대 학교는 학도병까지 출전하여 상당한 수의 졸업생과 적지 않은 재학생을 잃었다.
비석의 가장 첫 줄에는 학교를 지켜내다 전사한 전 기사단당 피어스 클라겐 후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로는 그와 꼭 같은 크기로 졸업생, 재학생 전사자들의 이름이 이어졌다. 길고 짧은, 그러나 오래 산 자가 적은, 그 많은 이름들.
종전 직후 한두 해 동안 학교는 교사를 증축해야 했다. 전쟁 당시 전선에 차출되느라 수업 과목을 모두 이수하지 못한 선배들이 학교로 돌아와 수업을 듣느라 교내가 북적였다.
어떤 이들은 쾌활했고 어떤 이들은 음울했지만 그들은 모두 영혼의 일부를 동부의 차가운 벌판 어딘가에 떼어놓고 온 것처럼 살았다.
그러한 고통을 번연히 아는 자들의 공동체로서, 학교의 결속력은 기이할 정도로 강해졌다.
그 전쟁은 모든 시민의 전쟁은 아니었기에.
모든 치열한 전장에, 가장 붉게 물든 대지에는 항상 저 은총의 마법사가 있었음을, 자신들만은 기억해야 했다.
같은 에테르 감응자이자 동문으로서.
“애초에 왕실 자문 회의조차 출석을 안 한다는 아세르 공작에게만 공격이 쏟아지는 걸 보면 뭔가 수상하기도 하지.”
“왕과 공작이 전쟁 전처럼 돈독한 사이가 아니라는 얘기야 널리 퍼져있으니까. 왕권 견제 얘긴 그냥 구실이라고만 여겼는데, 그게 구실이 아니라 진실이 되는 편이 이익이 되는 세력이 있고.”
“글쎄. 처음엔 정치 공작인가 싶기도 했는데, 그렇다기엔 또 어설픈 작전이지 않나? 의외로 원인은 조잡할 수도 있다고 봐. 우리 누나가 재무성에서 일하잖아. 이것저것 물어보니 저 아세르 공작한텐 청탁이 절대로 안 먹힌다던걸. 누군가에겐 그런 태도도 아니꼬워 보인 게 아닐까?”
“근데 나 아세르 공작이 왜 사람 만나는 거 싫어하는진 내가 아세르 공작 아니라도 알겠는데.”
“에테르 유수 말이군. 그런 사소한 이상 정도로 수도 없이 나라를 지켜낸 유공자를 백안시하다니.”
에테르 유수.
그건 학계에까지 정식으로 보고된 명칭은 아니었으나, 아세르 공작 주변에서 지내다 보면 머잖아 알게 되는 현상이었다.
서클도 안 여는데 사람에게서 그냥 에테르가 샜다. 전쟁 동안 수많은 대마법을 썼던 후유증이란 소문이 돌았다.
그의 마법 사용 전력(前歷)은 대부분 군사 작전인 탓에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사항이 더 많았다.
어쨌든 에테르를 미리 소진해야 해서 생긴 버릇인지, 에테르를 소진해대니까 더 넘쳐흐르는 건지 전후 관계는 모르겠지만, 아세르 공작은 별거 아닌 일에도 아무렇지 않게 마법을 썼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빡빡한 와인 코르크를 뽑아내고, 야외 수업에서 비가 오면 학생들을 전부 감싸는 방어막을 쳐 주거나 쉬는 시간에 나눠 마실 아이스티의 얼음이 녹지 않도록 온도를 보존했다.
실로 하찮기까지 해서, 자신들이 그 마법의 경묘함을 아는 마법사들이 아니라면 무시무시함이 와 닿지도 않을 사소한 생활의 편의들.
벨라는 탁자 위의 비스킷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뭐, 원래 인간이라는 게 자기랑 다른 종류 사람에게는 각박하게 굴잖아.”
물론 여기 수도방위대 학교의 마법사들은 아세르 공작의 그런 무심함에 거의 열광했다.
그는 마법이 인간의 모양을 하고 나타난 기적이었다.
적대심이나 질투심 같은 건 생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에테르와 감응했고, 서클을 알았다. 그들이 마법의 시작에 서 있다면 아세르는 끝에 서 있는 존재였다.
바깥세상의 시끄러운 논란은 오히려 학생들 사이의 숭배를 더 강고하게 만들었다.
십 대 시절 대개의 학생들이 자신만은 남과 다르고, 자신만은 남들이 모를 세상의 진실을 알 거란 자만에 빠지기 쉬웠다.
그런데 정말로 상황이 그런 생각에 불을 지펴버리지 않는가.
‘당신들은 클레이오 아세르를 모른다.’라고 소리치기 딱 좋게. 덧붙여 ‘나는 아는데.’
“그리고 그 넘치는 에테르로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마리아 교수님의 수도 복원 현장에 익명으로 지원하는 일이잖나. 굳이 시끄럽게 알리기 싫다며 조용히 다니니 알려져야 할 이야기는 안 알려지고, 모함만 널리 퍼지는군.”
“애초에 말이지 마법으로 똥군기를 팍팍 잡았다니, 그거야말로 아세르 조교수 성미랑 안 어울리는 짓인데? 기본적으론 남한테 별로 관심도 없어 보이는 데다, 그 정도로 기력이 있는 인간이 아니잖아. 대체로 뭐든지 다 귀찮아하던데.”
“오죽하면 맨날 와인 반입하기도 귀찮다고 학생 식당 와인 창고 자체를 새로 채워 넣은 사람인데. 그건 진짜 감사함. 나 다소스 와인 학교에서 처음 먹어본 거 아니?”
클레이오 아세르는 재학 중 학교에다 막대한 기부금을 붓더니, 몇 푼 안 되는 주급을 받는 강사가 된 후에도 강의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금액을 써 교수 기숙사의 술 창고뿐 아니라 학생 식당의 와인 재고 목록까지 갈아엎었다.
신입생 시절 제베디의 마법을 깨고 교수 기숙사의 술을 훔쳐 먹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 그런 일을 하자, 학교는 완전 축제 분위기가 됐었다.
“하여간 맛있는 거 아니면 입에 넣기도 싫어하는 성미 빤히 보이던데, 그런 사람이 보급도 변변치 않던 동남 전선에서 개전부터 종전 이후까지 구르고 또 구르다 저 꼬락서니가 된 걸, 찌라시들 하여간.”
“그렇지만 우리 항의만으로 반론의 신빙성이 있을까? 우린 전선에 나가보지도 못했던 기수인데, 너희가 뭘 아냐고 하면.”
알레스테어는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급행 소인이 찍힌 편지 두 통을 꺼냈다.
“바로 그럴 줄 알고 아세르 공작의 직속 부관이던 스베토 페이스풀 선배랑 진 페르스 선배에게 미리 연락 넣어 봤지. 별로 바깥세상 일에 관심 없는 양반들이다 보니 소식을 몰랐던 모양이더라고. 펄펄 날뛰면서 이렇게 장문의 항의문을 보내주셨다, 이거야.”
“좋았어, 알리!”
“그거다! 그걸 맨 위에 얹어서 보내면 파괴력 좀 나오겠는데.”
“그리고 보내는 대표자 서명에 제베디 교수님 이름 적어달라 그래. 1등으로 달려오실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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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아세르가 2층의 개인 침실.
근 한 달 만에 휴가를 얻은 아서는 벽난로 앞 카우치에 엎어진 채 뭉개진 발음으로 꿍얼댔다.
“흑색선전을 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냐. 환장한다고. 진짜 방법이 없나.”
아서의 주변으로 오늘 자 신문 여섯 종이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었다.
아서보다는 아서가 가져온 리오그네스에 관심을 두고 있던 클레이오는 별 흥미 없다는 말투로 툭 뱉었다.
“너한텐 없어. 다른 언론사들이 반박 기사를 써주길 기다릴 밖에.”
“차암, 국왕 대리가 돼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구나.”
“좋은 통치자라면 언론 출판 탄압은 금물이야. 뭘 그렇게 억울한 표정을 하는데.”
“억울하니까, 지인짜 억울하니까 그렇지! 전선엔 와보지도 않은 놈들이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써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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