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62
Ibid (2)1)
그래서 삶이 내내 고통뿐이었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사랑에 미달하는 미온함은 내면의 평온에 도움이 된다.
최초의 반복이 개시되었을 때의 절망은 시간의 흐름에 의해 희석되었다. 자신의 행동이 세상과 기억의 멸절을 막을 수 있는가 하는 의심 역시.
그러니까, 역사의 이어짐이 헌신할 만한 가치인지를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클레이오는 화평을 얻었다.
반복은 시간에서 뜻을 빼앗는다.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이 폐기되어버린다. 클레이오는 제가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인지 친인들인지 무엇인지조차 단언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사안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거듭된 반복 속에서 인간 영혼의 가능성은 대단하게 개화했다.
노인은 경화된 회상의 지층 아래로부터, 아주 머나먼 옛날에 생성되어 이제는 고대 세계의 유물처럼 느껴지는 기억을 힘겹게 캐내 본다.
국제연합의 아버지, 국제노동자당을 집권 정당으로 만들어내고, 세계적인 기간산업 국유화를 이끌어 냈으며, 마침내 연합의 수상 직에 오른 프란 화이트가 그 모든 수식어를 가지기 전에, 풀냄새 나는 진에 취해서, 박람회의 영롱한 불빛을 서러워하며 내어놓았던 회상.
저 자신은 그저 깃발이 구겨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붙잡고는 다음 손으로 넘어갈 때까지 벌벌 떨며 한 발, 한 발 딛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말하던 혁명가의 유언.
걷는다. 걸어간다. 계속 걷는다.
길은 이어지고, 헌신은 확실히 소용이 있었다. 이전의 변경은 다음의 반복에 반영이 됐다.
현재의 변혁은 과거의 사람들을 소명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다음에 태어날 이들을 구제했다.
클레이오는 어쩌면 거의 유일하게 비극의 원전을 아는 이로서 이 개정에 기쁨을 느꼈다.
최초에 그는 진보 사관이 좌초된 세계에서 태어났지만, 지금 이곳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세계였다.
그는 되돌아온 세계를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노정이라고 인식했다.
과거와의 연계를 잃은 현재는 그저 현재로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획득했다.
그건 참 좋았다.
그러한 만족은 결국 망각의 축복을 입어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지만.
사실을 고백하자면, 결국에는 기억마저도 흐려졌다.
절대로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동남 전쟁 전사자들의 눈물로부터 그린 듯 선명했던 친구의 미소까지, 사람의 머리가 가진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아스라이 지워졌다.
사명을 실현키 위해 벌였던, 세계사의 향방을 건 대결조차도 결국에는 상세가 지워졌다. 그때 네가 먼저 검을 들었나? 나의 창이 대지를 엎은 것이 먼저였나? 그런 것들.
처음엔 제가 마법을 잃은 것에 실의를 느꼈던 클레이오도 나중에는 감사하게 되었다.
이제 과거는 그것이 고통스러웠건 행복했건 간에 모두 아름다운 화석처럼 느껴진다.
완전 기억 능력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주의 깊게, 박물관의 소장품을 환기하듯이 아주 조심스레 꺼내야 하는 기억들이다.
그에게는 과거로부턴 남겨진 그 어떤 유류품도 유물도 기념품도 없기에 오로지 자기 자신의 불확실한 기억과 고양이 한 마리만을 간직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약속’의 힘은 약해져 알비온어와 베헤못의 말 외에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클레이오는 문맹자로서 이 세상의 여러 언어를 새로이 배웠다.
카롤링거어와 브리카어뿐만 아니라 세리카와 우니카의 말들 역시 아동용 철자 교본을 보며 처음부터 익혀갔다.
더듬더듬 헤매며 1형식 문장에서 시작되는 여정을 천천히 밟아가는 일은 오히려 세계에 대한 실감을 강하게 만들었다.
할 일이 있다는 건 기꺼운 일이다.
클레이오는 결코 그 어떤 새로운 말에도 유창해질 수 없었지만, 성실한 학습자다운 실력으로 실무에서 쓰기 충분할 만큼은 익혔다.
그런 식으로 한 계단씩 밟아가며 직접 익힌 언어는 능력이 줄고 늘고의 차이는 있어도 일순간에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익힌 말들은 국제연합의 집행위원 노릇을 하던 시절 큰 도움이 되었다. 사소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러나 조용한 밤이면 자문해 볼 때가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고작 만들어진 것을 구한다고 영원을 할애하는 것이 허망하지 않은가 하고.
하지만 어차피 태초에 이 우주는 여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종래엔 떠나가 버린 신들에 의해.
신은 인간의 역사에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을 질 수도 없다. 우리가 남겨졌다. 우리가 해야 한다. 온전한 지속과 미래의 창출을.
그리고 어쩌면 그 모든 목적이 다 이뤄진 때엔 반복 역시 멈추지 않을까? 인류를 살도록 하면?
때로는 꿈속에서, 무의식이 일궈낸 비합리적 공간 속에서 아서가 속삭였다.
‘네 뜻을 들어주고 싶지만, 이것만은 안 돼. 레이.’
므네모시네의 문을 통하여 세계를 넘어가는 것이 멸망 앞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던 때가 있었다. 그 찰나의 아서는 절박했고 클레이오 역시 절박했다.
자신의 에테르 그릇이 깨어지고 황금의 완드가 아서의 심장을 찌를 때에, 그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말을 들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그건 내내 확인할 수 없는 항목으로 남았다. 아서와 나누었던 최후의 대화를 대조해볼 수 없었으니까.
9교, 최초의 생애 이후 아서는 자신을 레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클레이오 본인이 그러한 부름의 가능성을 차단했기에.
클레이오는 알았다. 아서 리오그난에게 클레이오 아세르는 더 이상 처음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그러면서도 여러 생애 동안 그들은 다시, 처음 만났다.
언제든 클레이오는 아서가 자신을 기억하는지를 판별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봤지만 그 단단한 푸른 눈과 공적 자아로 빚어진 미소 속에서 사자의 검으로 친우를 베어야 했던 왕의 고통은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애초에 친애가 없다면 통치와의 사이에서 택해야 할 일도 없었다.
클레이오는 이 결말도 마음에 들었다.
사실 아서에게 과거와 반복을, 세계와 운명이 연동된 주인공의 역할을 납득시켜야 했더라면 그편이 더 난처했을 것이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믿게 한단 말인가?
이곳엔 여신의 흔적도, 성흔도, 클리오도 없는데. 믿음을 강제로 집행하게 만들 정도의 엄청난 에테르 역시 클레이오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서의 양 손등이 깨끗하고 그의 왼쪽 이마 위에 아무런 상처가 없듯이.
[퍼레이드를 마친 아서 리오그난 국왕이 왕의 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클레이오의 잡념을 깨트린 것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또렷한 목소리이다.
다시 돌아온 1949년.
클레이오는 거실에 놓인 텔레비전 수상기로 아서의 골든 주빌리 행사를 보고 있었다.
49년도의 봄인데 벌써 컬러 송출이다. 바로 두 달 전엔 같은 자리에 앉아 유인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는 방송을 봤더랬다.
데르니에와 메리디에스의 대부분 국가가 참여해 결성한 우주 연합 소속 우주선은 그렇게 인류의 반경을 대기권 밖으로까지 넓혔다. 인간의 쾌거였다.
우주 개발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23개국의 연구마법사들은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서도 마법식의 운용이 가능하단 사실을 증명해내고는 밤하늘에 23개의 불꽃을 쏘아 올렸다. 마법의 빛이었다.
그건 참호와 참호 사이 무인 지대에 설치할 철조망의 대량 생산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기에서야 가능해진 협력이었다.
이번엔 히드라의 독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나 궤도전차도 없었다.
한 국가가 아니라 인류의 연합이 무력을 독점하게 된 세계. 그건 먼 옛날에 읽었던 고전 SF소설이나 전후의 시리즈물 같기도 했다.
그러나 클레이오는 냉소적으로 굴지 않으려 든다. 인간은 꿈을 꾸고 이상을 가지는 종이다.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룰 가능성을 함께 가진다.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문명 세계 전체의 통화 통일에 성공한 역사는 클리오의 세상에서는 가능했던 적이 없지만 이곳에서는 이룩되고, 지속이 되었다.
인간에 의한 생물종들의 멸종도, 해양과 대기의 오염도, 방사능에 물든 도시도, 아사자들의 신발이 내던져진 고장도, 학살당한 이들의 뼈 사이에서 정글이 돋아나는 광경도 없는 세계에서는.
마법은 많은 경우에서 정말로 마법이었다. 정치와 경제와 교육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마법이 돌파해내기도 했다.
이제 1레벨 정도의 에테르 감응자는 너무나도 많아서 특별히 집계하지 않게 되었다. 이전 시대의 수도방위대 기사단장 미에츠 이후로 다시는 소드마스터가 태어나지 않았다.
1930년대에 세상의 모든 에테르 감응자는 국제연합의 소속으로 재편되었다. 귀족원 해체 전 마지막 상원 의장이었던 이시엘 키시온은 생애 후반기 내내 국제연합군 소속 장성으로 복무했는데, 예순 살에 퇴역할 적에도 정확히 6레벨 기사였다.
처음 칼리오페의 세계로 왔을 때 이 작고 정교한 모형 정원의 구조에 의문을 품던 클레이오도 수없이 많은 반복 뒤에는 삶에 무뎌져서, 때로는 그러한 편이 견디기가 나았다.
지금 여기, 1873년에 태어난 1레벨 마법사 클레이오 아세르는 알비온 산업부 산하 마법국 관료로 경력을 시작하여 국제연합의 마법 분과 집행 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꼬박 55년간 인류를 위해 일한 뒤 명예롭게 은퇴했다.
그렇다 한들 클레이오 아세르는 그다지 알려진 명사도 아니었고, 비슷하게 오래 재직한 공무원들에 비해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린 일도 드물었다.
그럼에도 그는 반세기의 세월 동안 제가 대처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위기를 극복해가며 세상이 현재의 형태가 되는 데에 일조했다고 자부했다. 오로지 사람의 방법으로. 얄팍하게 저열해질 수 있는 동시에,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헌신적일 수 있는 보통 사람의 힘으로.
‘이번에는 정말로, 어긋남 없도록 균열을 완전히 막아냈지.’
명백히 현대에 다다른 세계는 클레이오를 흡족하게 했다.
사람이 서로를 공격하여 자멸하는 일은 나중 회차가 될수록 드물어졌다.
대체로 인류의 안위를 위협하는 것은 전조 없이 틈입하는 멸망이었다. 그건 반드시 새하얀 모래무지의 형태로 오지는 않았다. 시간이 역방향으로 흐르거나, 되감기다가, 뚝 끊겨버리는 일도 있었다.
어느 날은 잠든 채 침상까지 범람한 물에 잠겨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이시엘의 손에 뭍으로 끌려 나온 적도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세계가 전거로 삼은 팔림프세스트의 페이지가 지극히 협소하고 취약하기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클레이오는 추측했다.
그는 멸망이 일어나는 몇 가지 분기점을 주의하면서 세상의 운영에 작게나마 관여해갔다. 그에게는 정말이지 많은 기회가 주어졌으므로 해볼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일을 해 봤다.
물론 정치가가 되기에는 선출직으로서의 매력이 부족했고, 군인이 되기엔 신체 조건이 나빴다.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거의 소멸의 도정에 서 있던 육신은 표준적인 체격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레지나의 자라지 않던 머리카락처럼.
클레이오는 그 점을 그냥 받아들였다. 그의 조건으로는 관료가 되거나 연구자가 되는 편이 계획과 개입에 용이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관절이 아프고 등이 쑤셔서 좀처럼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킨 클레이오는 퇴직 선물로 받아 아껴두었던 리오그네스를 마호가니 냉장고에서 꺼냈다.
티플라움 식을 써서 전기를 연결 안 해도 냉기가 유지되는 냉장고는 가전보다는 가구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노인은 샴페인 코르크를 능숙하게 빼낸 뒤 첫 잔은 고양이의 물그릇에 따르고, 그다음으로 자신 몫을 플루트에 따랐다.
고양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클레이오의 잔을 주시하다가 샴페인의 거품이 잔의 좁은 끝까지 올라오자 곧장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 클레이오의 손을 탁 내리쳤다.
발톱을 다 집어넣어서 긁히진 않았지만 힘이 상당해서 클레이오는 술을 조금 흘렸다. 왁스로 윤을 낸 오래된 가구에 흐른 기포 섞인 물방울이 부엌의 서향 창으로 든 햇살과 부딪쳐 영롱했다.
“떽. 저녁에 약을 먹어야 하는데 술은 거기까지만 해라, 이놈아.”
“너무한데, 못 선생. 이거 다 거품이고 잔엔 고작 삼분의 일 찼어.”
1) ‘같은 자리에서(ibidem)’의 약어. 동일한 문헌을 연속해 재인용할 때 출처를 표시하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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