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66
지금 시간 (3)
이곳은 매서운 바람이 백사를 흩트리는 폐허의 수도, 세계와 세계를 잇는 문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깊은 물은 냉랭하게 고요하다.
프란은 클레이오의 손을 놓고 팔짱을 꼈다.
그는 마법사를 오래 알았다. 그러므로 클레이오가 저 미묘한 미소를 짓고서 뜬구름 잡는 듯한 소릴 늘어놓을 때엔 늘 진실을 말했다는 걸 경험적으로 깨달았다. 얼마나 믿기 어려운 내용이든 늘 그랬다.
“납득하기는 어렵지만, 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딴 소릴 지껄이진 않겠지.”
지극히 프란 다운 응수에 무어라 답하려던 클레이오는 파랗게 질린 입술을 떨며 기침을 했다.
그들 가까이로 다가온 디오네는 클레이오가 누워 젖은 모래 위로 저 역시 무릎을 닿게 해 앉았다.
그리고 서클을 펼쳐 클레이오의 남은 상처를 치유했다. 외상이 얼추 붙자 클레이오는 그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클레이오? 나를 의지해달라고 한 말은 참 면목이 없지만, 지금은 아직 늦지 않은 때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언제든 당신은 내게 힘이 돼 줬습니다.”
조금 쓸쓸하게 웃은 디오네는 [치유]의 식을 닫은 뒤 훈풍을 일으켜 주변을 따듯하게 했다.
차가운 아침을 지키고 선 기사와 넋이 빠진 표정으로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귀를 열어두고 있는 관료를 위해서.
여름 정원의 케이프에 감싸이지 않은 클레이오의 손발에 겨우 온기가 돌았다. 어느새 반드르르 바짝 마른 털을 빛내는 유니콘도 따스함이 좋은 듯 꼬리를 살랑였다.
하지만 그건 신의 힘이 아니고, 프란 역시 잘 아는 마법식을 조합한 4레벨 마법사의 마법이었다.
정말로 신은, 기적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게 된 것일까.
“아서가 세상의 시간을 다 가져가서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함께 이미 천 년을 살아냈고, 그렇기에 다음 천년기를 수호할 의무를 충족해버린 건지도 몰라.”
서서히 의식을 되찾으며, 프란의 [치유] 마법이 일으키는 기척을 느끼는 동안 클레이오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천 년의 시간 동안 수십 번의 반복이 일어났다. 그 시작과 재시작은, 칼리오페가 안배한 주인공과 세계 사이의 결착을 닳게 했다.
“그렇다면 국왕의 불멸성 역시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닌가? 반대로 그의 불멸성이 가시지 않았다면 상처 회복이 왜 저리 더딘 거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아서의 부상은 아주 느리게 나았다. 벌어졌던 가슴의 상처가 서서히 흉터로 엉기다가 가장자리부터 미미하게 지워지는 모습이 프란에게 관찰되었다. 목을 베어도 한순간에 붙던 과거의 양상과는 판이했다.
마법식을 갱신하여 한층 온기를 더한 디오네가 대신 대답했다.
“불멸성은 한시적인 것이고, 천 년은 참으로 긴 시간이었기에 그의 성흔에도 기한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다만 아직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을 뿐.”
“천 년이라니. 당신의 개입인가?”
디오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겠지만, 내게는 그런 힘이 없는걸요. 신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게 된 것조차, 아서 왕이 시간을 전부 걷어간 부재의 순간을 맞이했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영혼이, 주인공과 편집자가 모두 이 세상으로부터 유리되어 모든 연관이 끊기고, 시간의 부재로 인하여 자동 기술 시스템조차 멈추어서.
그녀는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클레이오를 돌아보았다. 이전에 그녀가 오로지 그레이어 자작의 조카이자 사업가이기만 하던 시절에, 침상에서 앓던 클레이오의 안부를 물을 때처럼.
“이제 세상을 쓰는 펜은 내가 만든 체계를 벗어났고, 나는 이룰 수 있는 바를 다 이루었어요.”
클레이오는 제법 열띤 어조로 그녀의 말을 이었다.
“어제의 마지막 시간과 오늘의 첫 시간 사이에, 천 년이 있었어. 호박 마석과 아서의 성흔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우리들은 가능한 한 수많은 시도를 해 본 거야. 그건 약속했던 세 번보다 훨씬 많았지.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여기, 이 방대한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비록 물 밖에서는 읽을 수 없는 이야기이고, 결코 정전이 되지 못할 초고이지만.”
눈을 크게 뜬 프란은 자정에 겪었던 기시감을 되새기고야 만다.
한 번이나 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져서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무심해진 그런 습관처럼, 그는 자신의 손에 쥔 무거운 권한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의 멸망은 극복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여겨졌다.
아무런 논리적 이유 없이.
“믿는구나. 믿어 줘서 고마워, 프란.”
“도대체… 이 상황에서도 그렇게 웃는 이유가 뭐냐.”
“미래가 기다려져서.”
삐빗. 삐비빗.
이 놀라운 진실의 순간에 제레미가 가진 포옹의 반구가 멋없는 알림음을 냈다. 관료는 품속에서 수정 반구를 꺼내 들어오는 전신을 프란과 함께 확인했다.
[오전 4시, 오전 6시 균열 예측 기기 측정값 오류로 추정. 오전 8시 예측기 감지부 복구 불가 판정. 측정값 게시부 암전.원인: 한곗값 이상의 에테르 흐름 감지로 인한 회로 정지. 복구 3회 시도하나 실패. 룬데인 중심지에서 대규모 균열 예상. 긴급 철수 요망.]
산업부의 연구원으로부터 온 통신이었다.
스슷, 스스스슷― 스르르르르.
그와 동시에 악몽 같은 모래무지가, 흘러내리는 흰색의 절망이 호수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눈을 꽉 감았다 뜬 프란은 스웨인에게 주변을 정리하도록 명령한 후, 클레이오에게 되물었다.
지금은 세기의 마지막 날이고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다. 여전히 저 균열이 지반을 갉아대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미래를 맞이할까?
“미래가 기대돼? 균열이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네가 희생하면 된다는 게 답이라면, 네가 겪었다는 천 년이란 시간은 왜 필요했던 거지?”
“나는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갔다가 반드시 돌아올 거니까. 그건 정말 다른 일이지. 그러니 나를 도와줄래?”
한 팔을 뻗어 공작의 완드를 펼쳐낸 클레이오는, 천 년간의 간격에도 아랑곳 않고 온전히 자신의 머릿속에 되돌아온 ‘약속’의 「기억」으로 원대한 [경감]의 식을 펼쳐 낸다.
앙상한 손에 들린 완드가 바닥을 찍으니 그로부터 시작된 환희의 백금빛이 온 땅을 다 뒤엎어, 침식해오던 멸망을 물리친다.
그것은 실로 천사가 일으키는 기적이며, 지극히 강대하기에 멸망을 가속화시키는 이계의 권능이다.
클레이오의 마법이 강력할수록 들이닥칠 균열의 반동도 거대하다는 걸 알기에 프란은 도무지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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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오가 번 시간은 본인의 말에 따르자면 ‘차 한 잔 마시고, 숨 돌릴 정도’라고 했다.
제레미는 흰 일각수를 탄 레이디 디오네 ― 혹은, 여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직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 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다.
아까 수색을 나갔던 병사들은 빈사의 상태로 숲의 나무뿌리 아래 엎어져 있던 태서턴 트리스테인을 이송하느라 브리스텔로 귀환했다.
병사들을 돌려보낼 때, 프란은 현 상황을 정리하여 지휘부로 전송했다.
‘국왕 생명에 지장 없음, 균열은 현재 일시적 중지 상태이나 스텔라 방벽 가동을 유지, 항공대는 정찰을 지속하고 상황 보고할 것.’
되돌아온 통신을 보니 기사단장도 977기의 인물들도 깨어나지를 못해서, 프란은 여전히 불편한 최고 명령권자의 권한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제 므네모시네의 문 앞에 남은 일행은 아서 왕과 그를 둘러멘 스웨인 경, 레이디 디오네, 아세르 공작과 자신 그리고 고양이였다. 세상의 운명이 달린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 자리한 조합이라기엔 좀 기묘했다.
제레미는 생각했다.
‘기묘한 일이 이것뿐만도 아니지만.’
상처는 다 나았건만 피로한 기색으로 깊은 잠에 빠진 국왕은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이미 므네모시네의 문을 넘기로 한 아세르 공작은 브리스텔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는 듯하여, 이 뜬금없는 조합의 일행이 여기로 오게 됐다.
바로 수도방위대 학교의 연구제자 연구실이었다.
대전투가 벌어진 직후니 학교 건물 대부분은 주춧돌도 없이 사라졌는데, 몇 군데만은 기적적으로 남아 있었다. 시계탑이 그랬고, 다음으론 연구제자 연구실이 그랬다. 2층은 제대로 날아갔지만 1층의 절반 정도는 제법 번듯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선두로 나가 문 앞에 선 아세르 공작은 웃음기 하나 없이 자물쇠를 여는 진언을 외웠다.
“[학예의 영묘 베헤못을 찬양하라!]”
제레미 툴민은 어렵게 웃음을 참았다. 다년간 관료로 일한 후 포악한 정치적 풍파에 휘말려 감정을 누르는 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분명 때와 장소에 안 맞는 소리가 입 새를 비어져 나왔을 것이다.
그가 참는 기색을 알았는지 공작의 다리께에서 어정거리던 ‘학예의 영묘’께서 캬르르륵, 털을 세우며 뭔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베헤못은 아세르 공작의 유명한 고양이이다.
털을 말려주자 정신을 차린 고양이는 발딱 일어나 제 주인에게 붙어 한차례 난리를 피운 뒤엔 그의 곁을 벗어나질 않았다. 저 산짐승처럼 커다란 놈은 애완동물이라기엔 너무 사나워 보여서 제레미는 시침을 떼고 앞만 봤다.
저 영물이 아까 아세르 공작에게 한 것처럼 온몸의 체중을 실어서 달려들면 자신이라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급박한 때에 한갓지고 사사로운 생각을 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유독 맑은 겨울의 오전이 지나 정오가 가깝자 따스한 해가 내리쬐고, 멸망을 목전에 두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느긋했다.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서 새로운 세기를 보게 될 거라는 확신이 솟았다.
제레미는 스스로의 믿음이 너무 낯설어서 도리어 의심이 들었다. 평생 한 번도 낙관주의자였던 적이 없던 자신이, 대체 왜 그런 근거 없는 희망을 가지게 됐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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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오는 찻잎을 찾는답시고 연구실 안을 뒤적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무슨 차란 말이냐.’라고 프란이 일갈하자, 세상이 지금 끝나도 차 한 잔 마실 틈은 있는 거라며 능글거렸다.
‘폭격의 여파로 건물들이 뱃속을 드러낸 도시에서도 사람들은 오후에 차를 마셨어. 그런 게 인간성인 거야. 좀만 기다려 봐.’ 같은 말을 하면서.
프란은 속이 답답해져 중정에 나와 찬 공기를 폐에 채웠다. 코앞의 프란을 무시하며 건물의 중정을 거닐던 신수는, 벌써 여러 번 그렇게 해 줬는데도 또 칭찬을 바라는 듯 디오네의 손에 고개를 디밀었다.
디오네는 유니콘의 반짝이는 갈기를 다시 슥슥 쓸어주었다. 신수는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현실성 따위 모두 내다버린 그들의 모습을 보던 프란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결국 에즈라 세르게프는 스스로가 신인지도 모르는 당신을 신으로서 경배해왔던 것이군.”
프란은 어느 증오스러운 권력자가 에즈라를 상대하는 일만은 녹록잖게 여겼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세상의 신을 진정으로 연인처럼 사랑하는 자를 대하기란 쉽지가 않다. 에즈라 세르게프가 가졌던 건 광인이거나 선지자의 자질이고, 사실상 그는 둘 다에 속하는 존재였다.
디오네는 놀란 기색으로 반문했다.
“이 애가 에즈라인 걸 어떻게 알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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