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7
혁명의 잿빛 불꽃 (1)
수여식 동안 홀의 갤러리는 텅 비어 있었다. 참석자는 의전관, 왕실시종장과 의식을 도울 시종 몇 뿐이었다.
보아하니 이 상훈 역시 귀족원은 반대했지만멜키오르가 ‘고유 스킬’을 써 밀어붙인 것 같았다.
공문에는 가족을 초대할 수 있다고 고지되어 있었으나 클레이오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기디온과 블라드는 콜포스로 돌아갔고, 그레이어 집안 역시 첸트룸 상행의 처리를 하느라 엄청나게 바쁜 탓이었다.
‘게다가, 머쓱하잖아… 무슨 상장 받는 고등학생도 아니고.’
기사 위에 준하는 지위를 부여할 뿐 [언약]이 생략된 수여식은 단출했다.
의전관이 시키는 대로 문장을 따라 읽고 앉으랄 때 앉고 서랄 때 섰더니 금세 끝났다.
왕실 시종장이 받치고 선 훈장은 녹색, 흰색, 남색의 세 줄이 섞인 리본에 매여 있었다. 사자와 방패가 새겨진 금색 주물이었다.
멜키오르는 장갑에 감싸인 손가락을 움직여 클레이오의 옷깃에 훈장을 달아주었다.
의전관은 홀 전체가 울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이로서, 클레이오 아세르 경에게 영세의 영광으로 남을 알비온 왕국의 수도방위장을 수여하노라.”
‘진짜 어색하네.’
옷깃에 매인 훈장도, ‘경’이란 호칭도 낯설어 뒷머리를 긁적이는 클레이오의 팔을 멜키오르가 붙들었다.
“자, 그럼 준비는 됐나?”
“…이제 다 끝난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행사는 이제 시작이지. 자, 눈이 부실 테니 방비를 하지.”
“무슨 방비 말입니….”
파팡―!
파앙!
왕의 홀 문이 열림과 동시에 엄청난 소란과 빛이 일거에 쏟아져 들어왔다.
소란의 정체는 사진용 플래시와 기자들의 다급한 질문이었다.
파우더로 빛을 내는 플래시 램프는 시끄럽고 연기가 나 불꽃놀이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온 것 같았다.
중정에 면한 왕의 홀 정문은 몰려든 기자들과 사진사, 삽화가들로 북적였다.
수여식 내내 사위가 조용했던 건 마법 덕이었다.
왕의 홀 정문에는 티플라움이 박혀 있으며 거기 새겨진 마법식이 [방음][차폐]란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클레이오 경, 한 말씀 해주십시오! 생존 인물 중에선 최연소로 정식 기사 위를 받았는데…!”
“멜키오르 왕세자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마수에 대해서는….”
신문이 있으니, 기자가 있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이런 사태는 상상조차 못 했던 클레이오였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 클레이오와 달리 멜키오르는 이런 상황에 익숙해 보였다.
그는 한 손을 어린 영웅의 어깨 위에 얹고, 나머지 한 손은 우아하게 흔들며 기자들에게 인사했다.
“모두, 한 번에 하나씩 질문해 주십시오. 오늘은 의 마구스 씨 먼저.”
***
멜키오르는 실로 기묘하면서 무서운 작자였다.
‘어떻게… 19세기 왕족으로 태어난 놈이 그렇게 능숙하게 미디어를 주물러대? 말도 안 돼.’
오늘자 주요 일간지 대부분에, 멜키오르와 어정쩡하게 붙어선 클레이오의 사진 혹은 그림이 실렸다.
왜 훈장을 서둘러주나 했더니 마수 등장으로 인한 불안감을 불식시킬 요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김에, 시민의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는 소년 영웅과 함께 그림도 한번 만들어 보려는 공작이었을 터.
설상가상으로 신문은 아이들의 놀림거리까지 되었다.
수업을 마친 오후, 자연스레 클레이오의 응접실로 와 상석을 차지한 첼이 깔깔 웃어댔다.
“여어, 레이. 남들은 널 완전히 멜키오르의 심복이라고 생각하겠는데?”
“마음대로들 생각하라지. 사진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넌 이제 수도의 명사인데 정말 자각이 없네!”
“흐으음, 근데 너무 밝고 흔들려서 얼굴은 잘 못 알아보겠어. 리피 네가 보기엔 어때?”
“맞아, 레티샤. 암만 봐도 이쪽의 그림이 나은데?”
“낫긴 한데 안 닮았어.”
리피가 손에 든 신문을 바짝 들어보였다. 리피와 머리를 맞댄 레티샤가 턱을 손으로 짚으며 갸웃댔다.
“저번에 마수 잡았을 때도 그렇고, 신문 삽화가들은 눈이 없나? 왜 이렇게 레이랑 안 닮게 그리는 거야?”
“그렇지? 레이는 항상 흐느적흐느적 맥아리가 없는데.”
“그림의 이 ‘클레이오 경’은 멋있고 늠름하잖아.”
쌍둥이들은 해맑은 어조로 뼈를 때려댔다.
클레이오는 플라스크에 담아 둔 위스키만 크게 한 모금 머금었다. 이탄 향이 후두를 감돌며 당겨진 신경을 느슨하게 해 줬다.
물론 분위기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안젤리움 쌍둥이들은, 마음대로 클레이오의 교복 깃을 잡아당기며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뭐야, 술 냄새. 아저씨 같애!”
“그래도 여기 달고 있는 훈장 약장은 멋져! 이거 이제 꼭 달고 다녀야 하는 거지!”
“증조할아버지는 레티샤가 이 약장 갖고 싶다고 하니까, 커서 직접 국왕전하께 받아내라고 했는데! 히히.”
“그래그래, 너희도 언젠가 받을 수 있을 거야.”
“뭐야, 레이. 완전 아무렇게나 대답해.”
“맞아. 성의 없어.”
그때 류바 사감이 클레이오의 기숙사 현관을 두드렸다.
“클레이오?”
“네, 사감님.”
“방금 왕실에서 네게 하사품이 도착했단다.”
“하사품이요?”
“아무래도 음식 같은데 너무 양이 많아 이 방으로 올려 보내질 못하겠구나. 와서 보렴.”
“먹는 거래!”
“뭘까!”
“가보자!”
류바 사감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발딱 일어난 쌍둥이가 클레이오의 양 팔을 잡아끌었다.
기숙사 1층의 로비로 내려간 클레이오는 또다시 술이 필요해졌다. 장벽처럼 쌓인 박스에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이다.
리오그난 왕가의 문장이 찍힌 수십 개의 박스는 모두 디저트였다. 각종 파이, 퍼지, 토피, 초콜릿.
‘정말 참신한 괴롭힘이군.’
이 먹음직스럽게 잘 구워진 단 것들은, 치수가 안 맞아 예복을 못 입었다는 말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유머러스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대응이었지만, 솔직히 멜키오르가 하면 그 어떤 짓도 안 웃겼다.
박스를 뜯어보던 쌍둥이들만 신이나 환호성을 질렀다.
“난 버터 토피!”
“오랑제뜨는 내가 먹을래!”
“좋아!”
먹는 거란 말에 조르르 따라 내려와 주둥이를 킁킁 들이밀던 베헤못이 불평했다.
“에우우우우우웅(단 것은 이제 질리는데, 왜 술 든 게 없느냐).”
열의 없이 박스를 열어보던 클레이오 역시 베헤못과 같은 심정이었다.
수십 개의 상자 중 레몬타르트가 든 박스 하나만 집어든 뒤 나머지는 류바 사감에게 맡겼다.
“선생님.”
“그래, 클레이오야.”
“이건 기숙사의 학생들과 직원, 사환들에게 모두 공평히 나누어줄 수 있을까요?”
“어머, 왕실의 하사품을 그래도 되겠니?”
“그럼요. 함께 나누라고 왕세자 저하께서 배려해주신 걸 겁니다.”
“마음 써 주어서 고맙구나.”
쓸데없이 멜키오르의 이름값을 높여준 것 같았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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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오는 한 손엔 파이 상자를, 한 손엔 플라스크를 쥔 채 베헤못을 데리고 교내를 산책했다.
홀짝거리는 동안 플라스크의 위스키는 모두 사라졌다. 혼자 다 마신 것은 아니고 베헤못에게 절반쯤 빼앗기긴 했다.
술을 다 마신 고양이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영역시찰을 위해 학교의 숲 속으로 사라졌다.
클레이오는 핏속을 도는 위스키에 힘입어, 원래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은 긍정적인 마음을 억지로 북돋웠다.
‘이제 더 미뤄선 안 돼. 프란을 잘 구슬려봐야 해.’
오늘은 미리 류바 사감에게 물어 소재를 파악한 후 프란의 본진을 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상자를 꽉 쥔 클레이오는 기숙사의 북측 입구를 향해 미적미적 걸음을 옮겼다. 박스 안에 든 건 따로 챙겨두었던 레몬 타르트였다.
‘날 세우는 동물을 길들일 땐 일단은 먹이라도 줘 봐야지.’
지난 원고에서도 프란은 시고 단 것을 매우 좋아했다. 머리가 안 굴러갈 때는 그런 맛이 감각을 깨운댔나, 뭐라나.
그간의 패턴으로 볼 때 원고는 진행 방향이 바뀔 뿐 세부 설정은 그대로인 경우가 많았다.
‘오늘은 프란과 결판을 내야지.’
학교로 돌아온 후 프란을 만나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매번 쏙쏙 빠져나가버렸다.
자유 연구시간에 마법 실습실을 늘 잡아 놨는데 같이 쓸 놈이 안 나타나니, 마법 연습 하나만은 실컷 했다.
덕분에 [속성증폭][발화][추적][가속]을 엮어 마광석 주철을 매개체로 쓰는 [제후천사의 불]을 이론적으론 거의 다 완성할 수 있었다.
또한 [제후천사의 불]의 진언을 짜내는 동안 이상한 점 역시 하나 알게 됐다.
신기하게도 원래 세상에서 많이 인용되고 오래 읽힌 작품의 문장일수록, 진언으로 삼을 때 마법의 위력이 세졌다.
제일 많이 써본 [방어] 마법을 새 진언으로 시험해보니 틀림없었다.
‘무슨 전승이니 서사시에서 표현을 인용해 오는 게 진언 작성의 기법 중 하나라고 듣긴 했는데… 저쪽 세상 글도 통용이 되다니 뭐 이렇게 허술하지?’
알면 알수록 미스터리가 더해지는 세계였지만, 오늘은 프란이 오길 기다리며 자유 연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티플라움의 에테르 영구 활성화 난제를 해결하는 일이 이제는 시급해졌다.
티플라움은 나라의 명운을 결정할 전략자원으로서, 그것을 완벽히 활용해야 다음 전쟁에서 알비온이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클레이오는 마음이 급했다.
는 이전보다 진행이 한참 빨라졌다. 그렇다면 전쟁 역시 이르게 벌어진단 뜻이다.
‘왕실 자문위원회의 때 크뤼엘 공작도 그랬지 아직도 티플라움 가공 문제가 해결이 안 됐다고. 그걸 딱 풀어내는 사람이 바로 프란인데… 이 자식이 연구의 ㅇ에도 관심을 안 보이고 있으니 큰일이잖아. 그나저나 방은 왜 이렇게 높은 델 차지하고. 으으윽.’
반골 유급생, 프란시스 가브리엘 하이드-와이트의 방은 기숙사 북쪽 첨탑 6층, 가장 끝 방이었다.
원래는 징계를 받은 학생에게 주어지는 독방인데, 괴짜 프란시스는 혼자 쓰는 게 좋다며 그대로 방을 점령해 버렸다고 사감에게 전해 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탑의 나선계단을 힘겹게 오르자 나타난 방은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와야 할 꼴이었다.
‘이 쓰레기는 다 뭐야.’
문짝을 뜯어냈는지 어쨌는지 어디가 입구인지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프란, 안에 있어?”
클레이오의 키만큼 높이 쌓인 종잇장의 탑 사이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클레이오 아세르.”
“꺼져.”
축객령은 무시했다.
클레이오는 종이와 책 뭉치를 조심스레 피하며 난장판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프란은 천이 다 뜯긴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
“누가 들어오는 게 싫으면 문을 다시 달든지.”
“내가 선생이나 왕자였더래도 이렇게 무시했을 테냐? 너는 권력자들에게만 고분고분하게 구나 보군.”
“저기,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모르겠는데….”
“‘에테르 감응력이 높고 마법식 활용력 역시 탁월하게 뛰어남. 나무랄 데 없는 자질을 가짐.’이라. 제베디에겐 꽤나 꼬리를 흔들었나 본데.”
프란이 팔락팔락 넘겨보고 있는 건, 클레이오의 1학년 1학기 학업평가 서류인 듯 했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왕립 수도방위대 학교의 학생 성적이나 인적사항 기록 서류 역시 공문서로 취급돼. 빼돌리거나 불법으로 복제하면 사법 처리를 받아.”
“하! 사법 처리? 알량한 훈장 하나 달고 나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나? 더 말 섞을 가치를 못 느끼겠군. 나가.”
“나도 이 쓰레기장에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지만, 오늘 오후 세 시간은 네게 붙어있어야 해서 말이지.”
“그런 억지를…!”
“네 개인적 공간을 침범당하는 게 싫다면연습실에 오지 그랬어? 몇 번을 불렀는데 한 번도 안 나타났잖아.”
“수도를 지킨 영웅께서 한낱 유급생에게 연연하다니 황공하게라도 여겨 줘야 하나?”
클레이오는 한 손을 허리에 짚은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열여덟 살이면 중2병일 나이도 지났잖아. 왜 이렇게 비딱하게 굴어.’
“그럴 필요는 없고, 여기 레몬 타르트나 받아.”
더 말이 길어질 것 같아 얼른 박스를 뜯었다. 새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팍 퍼져나갔다.
“내가 왜 그런 걸…!”
“맛있게 먹어. 나는 그럼 방 좀 구경해도 되지?”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듯 프란 앞에다가 박스를 펼쳐놓은 클레이오는, 그와 멀찍이 떨어져 방 안을 살폈다.
클레이오의 등 뒤에서 뭐라고 웅얼대던 목소리는 타르트를 먹는 소리로 서서히 뒤바뀌었다.
‘왕실에서 보냈으니 어지간히 맛이 있겠지.’
책장에 눕혀진 묵직한 사전 표지는 어쩐지 리볼버 모양으로 살짝 파여 보였지만 클레이오는 못 본 척 했다.
창가에 놓인 책상으로 눈을 돌리자 정치적 팸플릿, 참여를 호소하는 전단지, 철필로 긁어 등사한 성명문 같은 것이 보였다.
낯선 인쇄물 사이에, 아는 매체도 있었다. 소위 좌파 주간지라는 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 정치 성향이야 자기 자유고 연구만 잘 하면 되지. 일단 마법사이긴 하잖아? 다른 인물들 능력이 그대로이니 프란 역시 그렇겠지.’
프란은 지난 원고에서도 마법사였다. 물론 레벨 높은 마법사는 아니었다.
‘닥터 하이드-와이트’의 위대함은 마법이 아니라 마도과학의 영역에서 발휘되는 것이었기에.
어떻게든 프란을 구슬려 보려는 마음에 클레이오는 어설픈 화술로 애를 썼다.
“이건 이네. 프란, 너도 이 잡지 읽어?”
먼저 공감대를 형성한 뒤, 본론으로 들어가 보려는 시도가 눈물겨웠다.
여러 번 들여다보았는지, 평평하게 펼쳐진 양면 페이지 사설의 기고자는 ‘지브릴 블랑쉬’였다.
그 페이지에 프란은 빨간펜질을 잔뜩 해놓았다. 클레이오는 중요한 사실을 포착해냈다.
‘이거 아예 내용을 다시 쓴 거잖아? 문체는 똑같고 주장만 다른데? 본인 글인가?’
“아니… 프란 넌 독자가 아니라, 기고자였구나… 참, 대단하다.”
이번에는 몸이 아니라 영혼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한숨이 푸우욱- 쉬어졌다.
‘너무 열심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