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in Character’s Little Sister RAW novel - Chapter (66)
“악마야?”
“멍멍이 오면 같이 놀자, 셋째야!”
모두에게 버림받은 이한생이 직접 알아보겠다고 핸드폰을 노려봤다. 그 모습이 불쌍해서 이보배는 지금은 낮이니 괜찮다고 위로해 줬다.
“이귀한 씨, 안녕하십니까. 보배도 안녕. 아이고, 이한생 씨. 많이 좋아 보이네. 요즘 어때요? 슬슬 각성자 등록 해도 되겠단 생각 안 듭니까?”
“그건 아직 무리예요!”
“착한 보배가 그렇다네. 그럼 믿어야지.”
박마노는 이씨 삼남매에게 아는 척을 하고 이해기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스스럼없는 접촉에 이보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스템교 다녀온 거 안 들키려고 공동묘지 건에 대해 자세히 안 물어봤더니 이런 진전이!’
“이야, 우리 이해기 씨! 잘 지냈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하하! 잔뜩 차렸으니 많이들 드시고!”
박마노가 호쾌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회의실 A라고 적힌 안내판이 붙어 있었지만 회의용 원탁엔 음식이 즐비해 있었다. 최소 오십 인분은 넘어 보여 출장 뷔페 수준이었는데 정작 회의실 안엔 일곱 명밖에 없었다.
이보배의 어깨에 박마노의 손이 올라왔다.
“원래 스무 명 예상했는데 아침에 일 터져서 저것만 남았어. 그러니까 많이 먹어. 알겠지?”
살짝 압박을 준 후 박마노가 팔짱을 끼고 구시렁거렸다.
“우리 애들은 바쁘니까 그렇다 쳐. 자식들이 빠져 가지고 평소엔 박 과장님, 박 과장님 하면서 식사 한번 꼭 하자고 설설 기던 놈들이 관리국으로 오라니까 말 바꾸고.”
결국 이 초대에 응한 외부인은 이씨 남매밖에 없단 소리였다. 이보배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의 부서 회식에 끼는 것처럼 민망한데 식사 장소까지 관리국 지하니 정말 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박마노는 관리국 헌터들에게 이씨 사남매를 소개했다. 이보배는 친한 동생, 이귀한과 이한생은 한정치산자 원, 투로 소개하며 가능한 한 건드리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해기는 달랐다. 박마노는 이해기의 조언과 전투 감각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어깨동무를 풀지 않고 계속 대동하고 다녔다.
저것은 그린라이트인가 스카우트하고 싶은 인재를 발견한 기쁨인가. 이보배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애매하게 웃는 이해기를 구경하는 동안 최요한이 남매들이 앉을 자리를 세팅했다.
“음식은 자유롭게 가져다 드시면 되고요, 저기 있는 저건 복어회니까 마음껏 드세요. 혹시 중독되면 과장님이 [피독주] 빌려준다고 하셨어요. 아, 저건 복지리.”
먹을 것은 사양하지 않는 이귀한이 가장 먼저 원탁으로 다가갔다. 이한생은 늑대 때문에 겁먹었었지만 공무원만 있는 회의실은 무섭지 않았는지 따라갔다.
“요한 씨는요?”
“저는 먼저 조금 먹었어요. 다녀오세요.”
이보배는 일단 음식 종류를 훑었다. 복어회와 복지리만 있는 게 아니다. 민어회에 장어, 기러기탕, 흑염소 수육도 있었다. 이보배는 묘하게 보양식 위주인 음식들을 보고 생각했다.
‘마노 선배 입맛이 보양식 취향인가.’
본인 취향이 아니라 부하들을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관리국 헌터가 격무에 시달리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기왕 밥을 사 주는 것 보양식을 대접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보배는 접시 바닥이 비치지 않을 정도로 두껍게 회 쳐진 복어회를 집었다. 독이 든 음식이라 그런지 가장 먼저 눈길이 갔다.
조금씩 덜기만 했는데 금방 접시가 찼다. 이보배는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최요한에게 물었다.
“동료분들께 안 가보세요?”
“저는 사무직이라 현장직분들과 친하지가 않아서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술술 흘러나오는 뻔뻔한 거짓말에 이보배가 감탄했다. 자고로 비수란 품에 숨겨져 있어야 유사시 제 역할을 하는 법이다. 이보배는 최요한의 거짓말을 이해했다.
“사무직분들은 안 오셨나 봐요?”
“사무직은 현장보다 모이기 쉽거든요. 저야 과장님 수발드느라 그게 안 되지만요. 덕분에 사무직과도 데면데면하고 현장직이랑도 데면데면하다니까요.”
그러자 최요한의 말을 모두 들은 헌터가 외쳤다.
“최요한! 친해지고 싶으면 이쪽으로 와! 놀아줄게!”
최요한이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친해지기 싫대.”
“사람은 좋은데 은근히 낯가린다니까.”
데면데면할 뿐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닌지 헌터들이 웃어넘겼다. 이보배는 덩달아 웃으며 전복죽을 먹었다.
이귀한이 음식을 챙겨 자리로 돌아가는 이한생의 목덜미를 붙잡아 다른 테이블로 옮겼다. 화르세인지가 항의하려 하자 이귀한이 천천히 고개를 젓고 이보배와 최요한만 남은 테이블을 턱으로 가리켰다.
최요한은 자신이 응원하는 후보가 아니지만 돼지의 연애는 흥미롭다. 망나니는 군말 없이 새 자리에 앉았다. 이보배는 전복죽에 정신이 팔려서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약간 피곤해 보이시네요.”
“아, 티 나요?”
이보배가 볼을 쓸자 최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피부가 거치신 게 아니라 눈빛이 살짝 멍해서요.”
“실은 제가 요즘 판매 상품을 고민 중이라.”
아라크네에게 귀찮은 일을 떠맡긴 후 이보배는 판매 상품 선정에 고심했다. B급 회복 포션은 생명줄이니 필수다. 그래도 그것만 팔 순 없으니 다른 상품을 정해놔야 재료상을 만나도 할 말이 생긴다.
엘릭서 레시피 조각의 획득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균열을 공략해 보상으로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금술사로서 업적을 세워 보상받는 것이다.
한현우는 두 방법 모두 쓸 수 있었지만 이보배는 복합계가 아니니 후자에 의존해야 했다. 애초에 라스트 엘릭서를 제작하려면 연금술사 레벨과 스킬을 키워야 하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시스템이 알려주는 레시피는 어디까지나 기본 레시피다. 거기에 연금술사가 재료를 추가하거나 공정을 변형해 포션의 기본 성능에 부가 효과를 더한다.
아예 다른 재료와 다른 공정으로 똑같은 결과물을 내는 데 성공한 연금술사도 있다. 이런 걸 창작 레시피라고 한다.
한현우는 창작 레시피로 포션을 제작했을 때 엘릭서 레시피 조각을 보상으로 받을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 외엔 아주 특별한 부가 효과를 붙은 포션을 제작했을 때란다.
“일단 기본에 충실해야 하니까 기존에 나온 포션은 전부 제작해 봤거든요. 그래서 정신력이랑 마력이 좀…….”
이보배의 통장도 3년 가문 논처럼 바닥을 드러냈다. 쩍쩍 갈라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회복 포션은 판매하지 않으실 건가요?”
“회복 포션은 B급만 판매할 계획이라서요. 일단 상태 이상 치료제를 종류별로 구비해 두고 싶은데…….”
이보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의견이 분분하더라고요.”
“솔직히 회복 포션 자체가 부족하니까 상태 이상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면 회복 포션 판매량이나 늘려달라는 의견이 많겠네요.”
“네, 그렇더라고요.”
포션 업계에 대형 자본이 침투되면서 빽 없고, 돈 없고, 인맥 없는 헌터는 포션을 구하기 힘들어졌다. 가게 오픈 5시간 전부터 줄 서서 기다리다가 선착순으로 구매한다는 충격적인 기사도 올라왔다.
그렇다고 상태 이상 치료제를 등한시할 순 없다. 균열 등급이 오를수록 다양한 상태 이상이 등장하며 개중엔 시간이 지나도 치료되지 않는 것도 있으니까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일단 해독제랑 각성제, 마비 치료제는 갖춰두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점점 늘어나서…….”
‘연금술사의 솥뚜껑’에 공개된 레시피를 보고서도 제작 실패하는 연금술사가 태반이다. 이보배는 놀랍게도 모두 성공했다. 모두 성공해서 더 문제였다.
‘다 만들 수 있으니까 다 팔고 싶어. 내 재능이 무섭다.’
좋아하는 일에 재능이 있는데, 그걸로 사람까지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이보배에게 꽤 고무적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모두 갖춰둘 순 없었다. 기본 레시피로 치료제를 만들어봐야 이보배의 성장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수요 많은 몇 개만 구비해 둘까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이보배는 최요한의 의견을 구했다. 최요한은 자신에게 의견을 구하는 이보배에게 반문했다.
“이해기 씨가 아무 조언도 안 해주시던가요?”
“작은오빠는 텄어요. 방해하면 방해했지 시키는 거 빼면 나서서 도와주진 않을 양반이라.”
“흐음, 왜 그러실까.”
이보배와 최요한의 시선이 동시에 이해기에게 향했다. 이해기는 이보배가 그를 욕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박마노와 관리국 헌터 둘을 더해 총 넷이서 대화 중이었다.
등장하는 균열을 모두 공략해야 하는가, 자원 삼아 남겨두어야 하는가로 진지하게 토론을 하는 듯했다. 나름 진지한 토의였기 때문에 이보배는 작은오빠 흉을 더 보려다 말았다.
“어쨌든 요한 씨는 뭐가 제일 필수라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해독제 아닐까요? 상태 이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증상이니까요.”
최요한은 이보배가 예상한 대로 대답했다. 본인이 독을 사용하고 있으니 그만큼 독을 접할 기회가 많아 중독 상태의 위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이보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해독제는 필수라는 생각을 굳혔다. 그때 참견이 들어왔다.
“잠깐만, 연금술사. 과장님이 말씀하신 친한 B급 연금술사 동생이 이보배 씨 맞죠?”
최요한에게 친해지고 싶으면 언제든 환영이라 말했던 헌터가 술잔을 들고 건너왔다. 헌터가 빈자리에 앉는 바람에 그제야 이보배는 오빠들의 긴 공백을 알아챘다. 어디서 뭐 하고 있나 했더니 옆 테이블에서 음식을 산더미만큼 쌓아놓고 먹는 중이었다. 이보배는 안심하고 헌터의 참견에 답했다.
“네, B급 연금 맞아요.”
“그런 건 사무직이 아니라 현장직에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최요한의 정체를 모르면 충분히 참견할 법했다. 어차피 의견은 많이 들을수록 좋기에 이보배는 헌터에게도 질문했다.
“그럼 어떤 상태 이상 치료제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각성제! 갑자기 수면 가스 나와서 의식 가물가물해질 땐 진짜 전멸하는 줄 알았지. 꼬집어도 안 깨더라고.”
각성제는 이보배도 각성 시스템교에 잠입했을 때 요긴하게 써먹었다. 이보배는 해독제에 이어 각성제도 꼭 필요한 치료제라고 확신했다.
“해독제랑 각성제는 꼭 팔아야겠어요.”
“근데 개업하시면 공무원 할인 됩니까?”
솔직히 그건 곤란했다. 이보배가 어떻게 대답할까 망설이는데 다른 헌터가 와 술잔 든 헌터를 밀어냈다.
“초면에 실례되는 소리 하고 있어. 저기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혹시 정신 쪽 상태 이상 들어봤는지 모르겠는데 현혹이라고 있거든요. 이게 걸리면 진짜 사람 피 말리는 데…….”
생소한 상태 이상에 이보배가 관심을 보이자 헌터가 신나서 설명했다. 환각, 환청 증세가 나타나면서 심해지면 피아 식별이 불가능해진다는데 대충 상태 이상 혼란과 비슷했다. 혼란과의 차이점은 현혹을 건 상대의 명령을 듣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꽤 위험한 상태 이상이니 치료제가 절실했다. 이보배는 시중에서 현혹 치료제는 파는 걸 보지 못했음을 떠올리고 판매 상품에 추가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건 아니지. 현혹은 정신력 높으면 버티거든. 그리고 몬스터 상대로 하는 헌터들은 현혹에 거의 안 걸려. 우리나 사람 상대하니까 걸려서 피 본 거지.”
현혹의 위험을 토로하던 헌터가 뒤로 밀려났다. 그 자리에 새 헌터가 앉았다. 정신력이 높으면 안 걸린다는 말을 한 사람은 마법사로 추정되었다.
“진짜 위험한 건 마력 탈진입니다. 마력 회복이 느려지고 아무 스킬도 쓸 수 없게 되어요.”
“그건 상태 이상이 아니라 네가 스킬 남발한 거잖아. 저리 비켜봐.”
결국 이보배는 회의실에 있던 헌터들의 의견을 모두 들었다. 관리국 헌터들의 소중한 의견을 종합한 결과 있는 대로 다 팔라는 결론이 나왔다.
‘괜히 들었어.’
직접 상태 이상을 경험한 사람들의 경험담을 듣는 바람에 모든 상태 이상 치료제 판매가 절실하다는 생각만 확고해졌다.
하지만 그걸 다 제작해서 팔면 이보배는 성장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연구할 시간이 부족해지고 기존 레시피대로 제작하기만 급급할 것이다.
“으으.”
이보배가 골머리를 앓자 최요한이 수박과 호박식혜를 가져왔다.
“의견이 분분해서 도움이 안 되었나 봐요. 일단 관리국 소속 헌터는 몬스터보다 각성자를 상대하기 때문에 의견이 더 치우쳐져 있다는 걸 염두에 두세요.”
최요한이 상냥하게 충고했다. 이보배는 호박식혜를 원샷하고 수박을 철근같이 씹으며 보양식을 먹느라 부족해진 당분을 보충했다.
“큰오빠, 호박식혜 먹어봤어? 맛있어.”
“우리 막내.”
“왜?”
“둘이 얘기하라고 비켜주니 일 얘기나 하는 우리 막내.”
이귀한이 오묘한 미소를 짓고 이보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어 소스가 묻어 끈적거렸기 때문에 이보배는 눈살을 찌푸리고 벗어났다.
“호박식혜가 무어냐?”
“아아, 호박식혜란 것은…….”
“아. 마리 씨가 오셨네요.”
최요한의 말과 함께 회의실 문고리가 돌아갔다. 이보배는 주둥이나 앞발로 문고리를 돌리는 거대 늑대를 기대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사람이었다.
유마리는 평균 체형의 긴 생머리가 어울리는 여성이었다. 늑대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유마리가 텅 빈 쟁반을 보고 좌절했다.
“거의 다 먹었잖아! 그러니까 그냥 먹겠다고 했잖아요, 과장님!”
“그렇지만 개일 땐 사람이랑 미각도 다를 테고, 후각도 예민하고. 그리고 개한테 양파는 좀 그렇지 않아?”
“개한테 양파가 독이면 그냥 [피독주] 쥐여 주시면 되잖아요! 복어 독엔 중독돼도 괜찮으면서 양파 독은 안 되냐고요!”
“유마리 씨 너무하네. 내가 일부러 유마리 씨 주려고 티본스테이크 남겨뒀는데.”
박마노가 인벤토리에서 뼈가 붙은 두툼한 고기를 꺼냈다. 늑대 상태의 유마리에게 주려고 했는지 생고기였다. 유마리가 울상지었다.
“그걸 아까 주셨어야죠!”
“아깐 사슴 뼈 줬잖아. 맛있었지?”
“그거 아껴서 갉아먹다 쿨타임 알림에 정신 차리고 온 거예요.”
가엾은 유마리를 위해 박마노가 남겨둔 생고기로 스테이크를 굽기로 했다. 이해기가 선뜻 나서 요리사를 자처했다.
고기가 워낙 두꺼워 익히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유마리는 생고기는 늑대일 때 자주 먹어 질린다며 웰던을 부르짖었다. 아는 사람들에게 인사한 유마리가 이귀한에게 다가갔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좀 안 좋은 냄새가 나서 예민하게 반응했나 봐요.”
“지금은?”
“이 모습이어도 후각은 평범한 사람이나 헌터보다 예민해요. 사실 지금도 조금 나는데 공동묘지 갔다 오셨다니까.”
이귀한은 늑대 모습이 아닌 유마리에겐 관심이 없는지 호박식혜를 뜨러 움직였다. 유마리가 이한생에게도 이어 사과했다.
“놀려서 죄송합니다. 놀라시는 모습이 토끼 같아서 조금 자극받는 바람에.”
“그게 어떻게 놀린 것이냐! 그건 폭행이었다! 협박이었어!”
“안 때렸어요! 안 물었어요!”
“네 더럽고 냄새나고 축축한 코가 내 다리와 엉덩이에 닿았다! 본인의 위험성을 알고 있다면 제 발로 우리에 들어가 걸어 잠가야 할 것 아니냐!”
“그래서 집에도 못 가고 관리국에서 사니까 좀 봐주세요.”
들어보니 유마리의 사연도 이씨 남매 못지않게 슬펐다.
다른 세계에 떨어진 첫날, 숲에서 괴물 늑대를 만나 물렸단다. 평생 쓸 행운을 몰아 써서 간신히 도망쳤지만 늑대 인간이 되어버렸다.
귀환은 다른 세계에 떨어졌을 때처럼 갑작스러웠다. 그립던 원래 세계에 돌아와 가족을 만날 수 있단 기쁨에 젖은 것도 잠시. 유마리는 보름달이 뜬 밤에 늑대가 되어 폭주했다. 관리국에서 한 달 동안 구류되지 않았다면 제 손으로 가족들을 물어 죽였을 것이다.
보름달은 규칙적으로 찾아온다. 그러나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폭주한다는 규칙은 깨질 수도 있고 그 불확실성을 믿기에 유마리는 너무 위험했다. 전염 가능성이 있는 괴물 늑대를 사회에 풀어둘 순 없다.
결국 유마리는 관리국에 취직했다.
‘큰오빠는 진짜 특별히 봐준 거였구나.’
관리국에서 괜히 귀환자를 한 달이나 붙잡아두고 관찰하는 게 아니었다. 이보배는 특별히 편의를 봐준 박마노에게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감사 인사를 올렸다.
“다른 세계 있으실 때도 굉장히 고생하셨겠네요.”
“그게 또, 아니란 말이죠.”
“네?”
“그쪽 세계엔 약이 있었거든요. 만월늑대병이라고 해서, 보름달 뜬 밤에도 이성을 잃지 않게 해주는 약이 있어서 그거 먹고 집 안에 웅크리고 있으면 되었거든요. 버는 돈은 다 약 사는 데 썼지만 그래도 괜찮았는데 여긴 약도 없고.”
“아, 종족이 바뀐 게 아니라 병인 거예요?”
늑대 인간이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보배는 유마리의 종족이 아예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마리는 병이나 상태 이상이라고 말했다.
“네, 상태 이상란에 대놓고 늑대 인간이라고 나와 있어요.”
‘좀비 때랑 비슷하네. 원래는 인간이어야 하는데 상태 이상이 걸려 늑대 인간이 되어버린 거구나.’
“상태 이상인 거 알면 뭐 해요, 고칠 수가 없는데. 언제 광포화될지 몰라서 집에도 못 가고.”
“보름달이 뜬 밤에만 그러시잖아요.”
최요한이 부드럽게 위로했다. 유마리는 풀이 죽어 고개를 저었다.
“영화나 소설 같은 거 보면 보름달 비슷한 거 보고 광포화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혹시 몰라서 동료 없을 땐 외출 안 해요.”
“특이 케이스인 유마리 씨의 답변이 궁금하네요.”
“뭐가요?”
최요한이 이보배가 B급 연금술사이며 판매 상품을 결정하느라 고민 중이라고 설명했다. 유마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단언했다.
“당연히 늑대 인간 치료제죠. 하다못해 그 세계에서 먹었던 약이라도 있으면 좀 안심될 것 같아요.”
“혹시 재료나 제조법은 알고 계세요?”
“약제사들 밥줄인데 알려줄 리 없죠. 저기, 이보배 씨. 초면에 이런 부탁 드리기 미안한데.”
이보배는 긴장했다. 혹시 늑대 인간 치료제를 부탁받으면 어쩌나 싶었다. 정말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태 이상인 데다가 뭘 먹여야겠다고 짐작 가는 것도 없는데 부탁받으면 어쩌나?
다행히 유마리는 개가 아니고 사람이었다. 개 같은 부탁이 아니라 사람다운 부탁을 했다.
“광포 상태 치료제 만들 줄 아세요?”
“네.”
“다행이다! 그럼 그것 좀 잔뜩 만들어서 파시면 안 될까요? 개인 의뢰니까 시세보다 더 드릴게요!”
“제가 지금 개업 준비로 바빠서…….”
“좀 늦어져도 괜찮아요! 과장님 전기치료는 이제 지긋지긋해!”
“유마리 씨, 실망이야. 내가 아니었으면 유마리 씨가 어떻게 늑대 상태로 동료들을 알아봤겠어. 유마리 씨도 고마워했잖아.”
“그건 보름달 아닌 날의 늑대일 때죠! 보름달 뜬 밤엔 진짜 불가능하다니까요!”
“유마리 씨, 난 유마리 씨의 가능성을 믿어. 처음엔 늑대일 때 아무도 못 알아보다가 전기치료 좀 받으니까 알아봤잖아. 곧 보름달 뜬 날에도 알아볼 수 있게 될 거야.”
이보배는 말로 물어보지 못하고 최요한을 응시했다. 최요한이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복날 개 패듯 팼구나.’
귀환 직후의 유마리는 늑대일 때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박마노가 전기치료로 이성과 지성을 돌려주었던 모양이다. 유마리 입장에서 참 고마운 일이겠으나 보름달이 뜬 밤에도 가능할 거라고 치료를 감행하는 게 문제다.
“그것은 저, 폭행이나 동물 학대가 아닐지.”
“실제로 효과가 있긴 해요. 광포화 상태일 때도 과장님만 보면 이빨을 감추거든요.”
다행히 보름달이 뜬 밤의 유마리에게 광포화 치료제를 쓰면 이성이 돌아왔다. 유마리는 전기치료보단 약물 치료를 받고 싶다고 성토했다.
“근데 파는 곳이 없어요.”
“그렇게 없어요? 그럼 약이 듣는 건 어떻게 아셨는데요?”
“과장님은 균열을 솔플하시니까 보상으로 나온 포션을 관리국에 뿌리시거든요. 그때 우연히 하나 나와서 써봤더니 효과가 있더라고요. 근데 아무도 안 팔아요.”
유마리가 이보배의 손을 잡았다. 필요하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그러니까 제발 부탁드려요. 더 이상의 전기치료는 정말…….”
이보배를 올려다보는 유마리의 눈빛은 치킨을 갈구하는 강아지의 눈빛보다 애절했다. 이런 얘기까지 들었는데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이보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개업하시면 주문 제작 의뢰 넣어주세요.”
“진짜요? 감사합니다!”
“마리 씨, 고기 다 구웠어요. 와서 들어요.”
유마리가 희희낙락 티본스테이크를 먹으러 달려갔다. 늑대 상태였다면 꼬리에 맞은 사람 뼈가 부러질 기세로 꼬리를 붕붕 휘둘렀을 것이다.
“개업도 안 하셨는데 주문이 들어왔네요. 축하드려요.”
“그러게요. 첫 고객님이 벌써 생겨 버렸네. 주문 제작이라…….”
“B급 회복 포션을 주 수입원으로 잡으실 거라면 주문 제작만 받으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상태 이상 전문이라고 하면 수요가 있을 거예요.”
“그것도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재료 구하기 힘들 것 같아서요. 주문이 계속 바뀌면 재료상 입장에서는 짜증 나지 않을까요?”
“하하, 그럴 리가요. 사계절의 한현우 부길드 마스터에게 소개받기로 하셨죠?”
“네.”
“한현우 부길드 마스터의 요구도 거의 맞춰주는데 이보배 씨의 요구는 난이도 ‘쉬움’일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한현우 선생님은 구매량이 많으시니까 괜찮은데 저는 소량 구입이라서요.”
“먼저 포기하지 마시고 말은 꺼내보신 후 결정하는 건 어때요? 분명히 괜찮을 거예요.”
최요한의 진심 어린 격려가 이보배의 마음에 단비처럼 스며들었다. 이보배는 최요한 앞에서 엄살을 떤 것 같아 볼을 붉히고 고맙다고 말했다.
‘전직 암살자면 어때.’
최요한의 중요한 과거사를 본인이 아닌 이해기의 폭로로 알게 되어 평소처럼 그를 대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또 암살자라는 직업 때문에 편견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닐지 염려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보배는 오늘 최요한을 만난 자신이 이전과 같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이귀한이 동생들을 만나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처럼 이보배도 비슷한 걱정을 했다.
다행히 최요한을 보았을 때 이보배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게 기쁘고 안심되면서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최요한을 향한 신뢰가 강해 놀랐다.
‘아마 먼저 믿어줬기 때문이겠지.’
처음 만났을 땐 몸에 밴 습관이었을지 몰라도 최요한은 내내 일관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이보배를 먼저 생각해 줬다. 지금도 자기 일처럼 이보배의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지 않는가.
“저, 요한 씨?”
“네.”
“애플파이 좋아하세요?”
“좋아해요.”
“시나몬 때문에 싫어하는 분들이 종종 계셔서 여쭤본 건데 다행이다. 제가 잘하는 집 하나 알아뒀거든요.”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최요한의 머리가 작게 위아래로 까딱였다.
“각성자라고 하니까 아이스크림도 포장해 주더라고요. 다음에 드릴 테니 다 같이 나눠 드세요.”
최요한의 눈가가 살짝 경련했다. 너무 웃어서 눈가 근육이 혹사당한 듯했다. 이보배는 얕보이는 것도 참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다.
* * *
이보배가 한현우를 마음속의 스승님으로 모시기 시작한 후 둘은 주기적으로 교류했다. 사적인 얘기가 오가는 건 아니다. 한현우는 주로 이보배의 성장도를 확인했고 이보배는 학습지 검사받는 사람처럼 긴장하며 답변했다.
한현우는 바쁜 와중에도 이보배에게 시간을 내 직접 만나는 친절을 베풀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이보배가 막았다. 너무 황송하고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보배가 한현우와 만나는 건 독 내성을 얻은 이후 처음이었다. 재료상이야 양쪽에 연락하는 걸로도 충분히 소개를 마칠 수 있다. 굳이 바쁜 한현우가 직접 소개해 줄 필요 없었다.
‘선생님이니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한현우는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동갑 꼰대 아닌가. 분명 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부득불 직접 재료상을 소개해 주려는 것일 것이다.
외출 준비를 마친 이보배는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선 이해기가 뱀 인형을 끌어안고 누워서 TV를 시청 중이었다.
신장 180이 넘는 청년이 마찬가지로 사람 키만 한 인형을 안고 거실을 점령하고 있으니 보기 답답했다.
“그러고 있으면 답답하니까 소파에라도 누워. 소파 비었잖아.”
“딱딱한 바닥이 아니면 등이 배기더라.”
이해기의 정신연령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의 신체 나이는 20대다. 이보배는 툭하면 아재력을 발산하는 작은오빠의 내년 생일 선물을 내복으로 결정했다. 솔직히 받고 좋아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
“나가니? 현우 만난댔나?”
“응. 재료상도.”
“같이 가줄까?”
“괜찮아.”
“보배야, 만약에 현우가 저녁 같이 먹자 그러면 먹고 들어오렴.”
“진짜 됐거든요.”
이보배는 끝까지 아재력을 뽐내는 이해기에게 오늘의 남매 암호를 입수하고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는 회사 근처 카페였다. 퇴직한 직장에 자꾸 드나들기 민망했던 이보배로선 참 다행이었다.
이보배는 카페 문을 당기려고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보다 한발 앞서 그녀의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문을 열었다. 이보배는 뒤를 돌아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지금 오셨어요?”
“네,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이보배의 뒤에서 문을 연 한현우가 그녀가 편히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잡았다. 이보배는 잰걸음으로 카페로 들어갔다. 한현우는 오늘도 멋지게 차려입었다.
‘생각해 보면 늘 잘 입었구나.’
노점에서 산 중고 군복 입고 거실을 뒹구는 이해기를 보고 나와 오늘따라 더 잘 차려입은 것으로 느껴진 모양이다. 한현우는 균열의 날 이전에 단정하게 입고 다니던 이해기와 비슷했다.
앞서 카페에 입성한 이보배가 내부를 돌아보자 한현우가 이보배를 분리된 공간으로 이끌었다.
“이쪽입니다. 조진호 씨는 이미 도착했습니다.”
재료상이 이미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이보배는 걸음을 빨리했다. 재료상 조진호는 안면이 있는 한현우와 인사한 후 이보배와도 인사를 나눴다.
이보배는 조진호의 명함을 받아 명함 지갑에 챙겼다. 다과를 주문한 후 바로 일 얘기가 시작되었다.
“포션 상점을 개업하신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네, 포션 상점 겸 공방을 운영하려고 합니다. 판매보단 개인 연구를 하는 겸사겸사 가게를 여는 거라 주문량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데 괜찮으실까요?”
이보배는 가게에서 판매할 B급 회복 포션의 재료와 수량을 적은 표를 건넸다. 조진호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견적을 냈다.
“네, 가능합니다. 이것보다 더 적은 양을 주문하는 고객도 계시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공급가는 변동 가능성이 있지만 평균적으로 이 정도입니다.”
“와, 마력초가 이렇게 싸요?”
물약을 종류별로 제작해 보느라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재료를 구매했던 이보배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대량 재배에 성공해 품질은 균등하고 물량 공급도 안정적입니다. 물론 균열 내에서 채집한 마력초만 쓰겠다고 우기는 고객분도 계십니다.”
한현우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먼 산을 바라봤다.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그도 자연산과 양식이 있으면 자연산이 좋았나 보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한현우가 변명했다.
“저는 그저 균열에서 자생한 마력초가 포션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해 보려고 우선 구매하는 것뿐입니다.”
“현재까지 연구 결과는 어떤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도 궁금해요.”
만약 차이가 있다면 채집한 마력초의 가격이나 선호도가 지금보다 더 오를 수 있다. 한현우는 얼굴을 붉히고 진실을 고했다.
“차이 없었습니다.”
“아하.”
“부길드 마스터께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시면 마력초 가격이 안정화될 것 같습니다만.”
“이런 연구는 최소 10년을 지켜봐야 합니다. 그 전엔 공개할 생각 없습니다.”
포션은 와인이 아니다. 10년을 묵혀봐야 유통기한이 지나 맹물로 돌아간다. 인벤토리에 수납해 두면 시간이 지나지 않아 10년을 지켜보는 의미가 없다.
한현우의 변명은 실로 비겁한 변명이었지만 이보배와 정보상은 웃고 넘겼다. 이 자리의 절대 갑을 놀리는 건 이 정도 선에서 그치는 게 딱 좋았다.
“그럼 소량을 단기적으로 추가 주문하는 것도 받아주시는 건가요?”
“네, 말씀하십시오.”
“제가 개인 주문 제작을 받으려고 합니다.”
“저희 거래처가 대부분 농장이라 재배 불가능한 재료는 제공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건 따로 의뢰하셔야 할 겁니다. 가능한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수량이 적어서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개인 주문 제작을 받겠다는 얘기는 한현우에게도 하지 않았다. 이보배는 한현우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까 봐 곁눈질했다. 한현우는 평소의 냉철한 눈빛을 빛낼 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재료상 조진호는 다음 고객을 만나야 한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이보배는 남은 커피를 홀짝였다.
“좋은 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큰 도움을 드리진 못하겠지만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뵙자고 할 땐 늘 거절하시더니…….”
“바쁘신 거 아는데 별거 아닌 일로 시간 뺏을 수야 없죠.”
한현우가 매우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이보배는 자신이 말실수했나 싶어 했던 말을 점검했다.
‘별말 안 했는데?’
“바쁘신데 저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시는 거라면 전 괜찮으니까 먼저 가세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현우가 몇 모금 마시지 않은 차를 단번에 마시더니 커피를 추가 주문했다. 한현우는 빈 찻잔 표면을 더듬더니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개인 의뢰라면 회복 포션에 부가 기능을 맞추실 계획이십니까?”
“상태 이상 쪽을 생각하고 있어요.”
“상태 이상 치료제라. 괜찮은 생각입니다. 실제로 아직 치료제가 나오지 않은 상태 이상도 있습니다. 이보배 씨 같은 뛰어난 연금술사가 그쪽에 매진하신다면 저희 쪽에서도 안심이 됩니다.”
사계절 길드는 적극적으로 균열을 공략하는 대표적인 길드다. 한현우의 입에서 익숙하지 않은 상태 이상과 치료제가 줄줄이 튀어나왔다. 이보배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경청했다.
“처음 보는 상태 이상이 등장한 균열엔 나름의 규칙이 있습니다.”
“어떤 건가요?”
“균열 공략 보상으로 반드시 그 상태 이상 치료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성분 분석은 불가능하지만 치명적인 상태 이상일 경우 급한 불을 끌 수준은 됩니다. 저만 해도 독보다 상태 이상 치료제 제작에 힘써야 한다는 의견을 종종 듣기 때문에 이보배 씨가 나서주신다니 무척 든든합니다.”
“아휴, 제가 뭐라고.”
이보배는 만년 전교 1등에게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한현우는 연신 진지했다.
“엘릭서를 제작하려면 다양한 상태 이상을 접하는 게 좋겠죠. 그걸 개인 의뢰로 해결하시다니 발상이 뛰어나십니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아뇨아뇨! 저 정말 한 선생님에 비하면 하찮은 잡졸이에요! 한 선생님이야말로 그렇게 뛰어나시면서 후학 양성까지 신경 쓰시잖아요. 진심으로 존경해요!”
누가 본다면 동갑끼리 잘들 논다고 평했을 것이다. 다행히 격리된 별실이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보배가 두 주먹 불끈 쥐고 한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토로하자 한현우가 이보배의 손을 잡았다.
“제발.”
“네?”
“제발 한 선생님은 버려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부탁하는 한현우의 표정이 너무 절실해 보였다. 이보배는 덩달아 진지하게 얼굴 근육을 굳히곤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싫은가 보네. 앞으론 말실수하지 말아야지.’
물론 한현우는 이보배의 안에서 존경하는 한 선생님일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한현우가 추가 주문한 커피는 뜨거웠기 때문에 그는 천천히 식혀 마셨다. 이보배는 그와 근황을 주고받다가 유마리에 관한 이야기를 화제 삼았다. 한현우는 유마리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는 숨길 것 없이 쉽게 이어졌다.
“저 개인적으론 흥미가 있습니다만 거절당했습니다.”
“거절하신 게 아니라 거절당하셨다고요?”
“네. 개인적으로 늑대 인간의 전염성에 흥미가 있습니다. 물렸을 때와 할퀴었을 때 어느 쪽이 늑대 인간으로 발현할 가능성이 높은가. 만약 물렸을 때라면 상대를 늑대 인간으로 바꾸는 독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뱀처럼 이빨에 독샘과 연결된 독니가 있는가, 아니면 침이나 혈액이 문제인가, 또는 마력이 관여하는가. 늑대 인간은 인간에게만 전염되는가.”
듣고 보니 이보배도 궁금했다. 연구할 거리가 무궁무진했다. 한현우는 아쉽다는 듯 펼쳤던 손을 쥐었다.
“그런 얘기를 했더니 실험체가 되는 건 싫다고 저를 피하시더군요.”
“음……. 이해가 갈 듯 말 듯.”
“동물 실험은 전기치료로 충분하다고 하시는데 개인적으론 그것도 굉장히 궁금합니다.”
한현우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이보배는 어쩐지 독 먹은 것처럼 기분이 안 좋아졌다.
“박 과장님의 전기치료를 귀환한 후 계속 받고 있잖습니까. 슬슬 을 습득할 거라 예상하는데 이보배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이 생긴다면 각종 내성을 습득하는 방법이 확실해지는 겁니다.”
한현우는 각종 내성 스킬의 습득법이 습득법과 동일할 경우 길드 차원에서 내성 스킬 습득을 지원할 거라는 포부를 밝혔다.
이보배는 말리려다가 그만뒀다. 그녀가 말리지 않아도 빙제나 다른 부길드 마스터들이 알아서 말려줄 것이다.
뜨거운 커피도 미지근하게 식고 커피잔도 바닥을 보였다. 이보배와 한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현우는 들어올 때처럼 문을 열어 붙잡고 이보배를 우선했다. 이보배는 문 앞에서 유독 매너가 빛을 발하는 한현우에게 고개 숙였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요. 혹시…….”
“애플파이 좋아하세요? 여기 바로 옆에 맛있는 애플파이 파는 가게가 새로 생겼더라고요.”
“정말 좋아합니다.”
한현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렇게 밝게 웃는 모습은 몇 번 본 적 없기에 이보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다행이다!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여기요. 가져가서 드세요.”
이보배는 인벤토리에서 애플파이와 아이스크림을 꺼내 한현우에게 건넸다. 한현우가 어정쩡하게 미소를 유지하고 파이를 받았다.
“저번에 아는 동생.”
이보배는 자신을 잘생긴 동생이라 칭한 김율이 떠올라서 피식 웃고 말을 정정했다.
“아는 잘생긴 동생이랑 가서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더라고요. 아이스크림 꼭 얹어서 드세요.”
한현우가 허탈한 표정으로 애플파이와 이보배를 번갈아 보았다. 아까와 표정이 180도 바뀌어 이보배는 당황했다.
‘뭐지? 사실은 안 좋아하나?’
“안 좋아하시면 편히 알려주세요.”
“그게 아닙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현우가 평상시의 냉철한 얼굴로 돌아오더니 헛기침했다.
“크흠, 혹시 괜찮으시면 제 연구실에라도 가셔서 같이 드시겠습니까?”
“저요? 전 정말 괜찮아요. 집에 가서 먹을 것도 샀거든요. 저번에도 사 갔는데 막내 오빠가 자기는 조금밖에 못 먹었다고 어찌나 징징거리던지…….”
이보배는 한현우와 몇 발짝 거리를 벌리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한현우가 파이를 인벤토리에 수납하고 거리를 좁혔다.
“댁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회사 주차장에 가면 차가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시거나, 아니면 같이 가시죠.”
“그럴 수야 없죠. 버스 한 번이면 바로 가고 밤도 아닌걸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보배는 몸을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미적거리면 한현우의 친절과 호의에 기대 버릴 것 같았다.
‘자립하는 훌륭한 제자 겸 후배가 되어야지.’
버스엔 운 좋게 빈자리가 있었다. 이보배는 의자에 앉아 앞으로의 일정을 검토했다.
‘재료는 주문하면 되고, 그래도 개업하는데 순식간에 다 팔면 좀 그러니까 회복 포션 물량을 넉넉하게 뽑아야겠다. 오늘부터 작정하고 제작하면 되겠지? 신고랑 등록 마쳤고, 부동산도 계약했고, 인테리어 공사만 끝나면 진짜 개업이구나.’
내내 와닿지 않더니 불현듯 현실감이 몰아쳤다. 직접 나서야 하는 일과 골치 아픈 일의 대부분을 아라크네에게 의뢰한 덕분이다.
‘진짜 개업하는구나.’
5년간 몸담았던 회사에서 퇴직하고 여러 날이 지났다. 이룬 것, 손에 쥔 것 없이 어영부영 시간만 흘려보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지나고 나니 다 추억이었다.
‘좀비랑 수술대 빼고. 아, 균열도 빼야지. 독 내성 수련도.’
이것저것 제하고 나니 추억거리는 별로 남지 않고 집에서 뒹군 일만 남았다. 하지만 집에서 허송세월 보내는 그 나날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일상이었다.
누군가에겐 마지막까지 인간성을 유지하게 해준 귀중한 일상.
다른 누군가에겐 과거로 돌아오면서까지 누리고 싶어 한 소중한 일상.
또 어떤 누군가에겐 이제 막 적응하기 시작한 새로운 일상.
이보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언제까지 이 일상이 유지될진 모르겠지만 가능한 한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나 왔어.”
이보배가 귀가하자 거실 바닥에서 퇴거하지 않은 이해기가 대놓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진짜 밥 안 먹고 왔구나.”
“뭐, 저녁 하기 귀찮아서 그래? 내가 할게.”
“그게 아니다. 오빠가 기억을 정리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현우가 너에게 관심이 있어.”
“진짜! 됐거든! 난 작은오빠처럼 김칫국 안 마셔!”
김칫국을 마시진 않고 통째로 들이부었었다. 이보배는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과하게 짜증 냈다. 소파에 누워 게임하던 이귀한이 나지막이 이해기를 불렀다.
“둘째야, 너나 잘하거라.”
“아니, 진짜라니까. 내가 직접 봤어. 그땐 몰랐는데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까 맞는 것 같단 말이지.”
“진짜든 아니든 걔는 내 픽이 아니야. 내 픽은 요한이다!”
“최요한은 정말 안 돼.”
쌀을 씻던 이보배는 쌀알이 으스러져라 꽉 쥐었다. 애틋한 마음 좀 먹고 가족애를 충전하고 돌아오니 오빠들이 쓸데없는 걸로 설전을 벌였다.
“큰오빠 작은오빠, 제발. 내 몇 안 되는 소중한 인맥 파탄 내지 말아줄래.”
티격태격 다투면서 노는 것 자체는 괜찮은데 이 주제가 외부에 발설될까 두려웠다. 밖에 퍼지는 순간 이보배의 사회생활은 종 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종은 종류가 많은데 무슨 종이냐고?
만종이다. 이보배의 인생에 볕 하나 들지 않는 캄캄한 밤이 시작되는 것이다.
“흥, 돼지가 돌아오니 악마와 사기꾼이 하찮은 일로 싸우는구나.”
기존의 이한생은 이 싸움에 끼지 않았다. 무시하고 지나치거나 옆에서 간식을 먹으며 관람했다. 그러나 오늘의 화르세인지는 어제의 망나니가 아니었다.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 공자는 본인 또한 매제 후보를 선정했음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쓸데없는 다툼은 그만두거라. 내가 정한 녀석이 가장 낫느니라.”
“누군데?”
“시스템교 모임에서 본 사람이라고 하면 앞으로 한 달간 외출 금지다.”
이귀한은 순수하게 궁금해했고 이해기는 눈을 부라렸다. 이한생이 당당하게 말했다.
“김율이란 자니라. 아주 잘생겼다. 인물은 누구보다 빼어나다.”
“현우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당당하기냐. 어디서 어떻게 봤는데? 진짜 얘보다 잘생겼어?”
이해기가 인터넷에서 한현우를 검색해 사진을 보여줬다. 이한생이 콧방귀를 뀌었다.
“압승이군.”
“최요한은? 걔보다도?”
“상대할 수준이 안 된다.”
이한생은 본인 얼굴이 제일 잘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기세등등했다. 실제로 본인이 삼형제 중 가장 잘생겼다고 우기기도 했다.
“그렇게 잘생겼단 말이야? 배우인가. 동네 사람이면 한 번쯤 봤을 텐데.”
“정말 잘생겼느니라. 상대가 안 된다.”
이해기는 배우를 검색하다가 잘생긴 배우 사진을 들이밀었다.
“이 사람보다도 나아?”
“그렇다!”
“이 새끼가 어디서 남자 나오는 꿈을 꾸고 왔나, 왜 헛소리를 하지.”
어떤 미남 배우를 보여줘도 그것보다 잘생겼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이해기가 계속 허들을 높였다. 굴복하지 않는 이한생 때문에 이해기는 혼란스러워했다.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잘생긴 건 아라크네인데…….”
“아는구나! 그자다! 하하, 사기꾼 너도 동의한 것이다!”
자신이 미는 매제 후보의 외모를 인정받은 화르세인지가 제 일인 양 기뻐했다. 이어지는 이해기의 말에 이보배의 손에서 주걱이 떨어졌다.
“한생이 네가 아라크네 얼굴을 어떻게 알아?”
“아, 아앗, 그것은 말이다.”
화르세인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부엌에서 밥을 휘젓던 이보배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렸다.
“보배야,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아니?”
이해기가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로 주방에 들어왔다. 그 얼굴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던 것만큼 무서웠지만 진짜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막내야, 셋째야, 이리 온.”
땅이 흔들리고 새들이 비상했다. 형광등이 점멸하고 인간의 영혼을 자극하는 끔찍하고 불길한 기운이 집을 감쌌다. 이한생이 상극인 마기를 견디지 못하고 구역질했다.
“빨리 온!”
기운은 삽시간에 걷혔지만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편애받는다고 늘 유리한 건 아니다. 이보배는 분노를 경감하기 위해 삼보일배하며 거실로 이동했다.
그날 이보배는 눈물 젖은 비상식량에 이어 눈물 젖은 애플파이를 씹어 삼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