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71
제1화 황제의 암행
대륙통일!
유티아 대륙에 존재하는 나라는 단 하나, 신명대국뿐이다. 신명대국의 이름 아래 화폐와 도량형이 통일되고 각 주(州)의 편제도 이뤄졌다.
드래곤 평원을 중심으로 대륙을 북과 남, 이주(二州)로 나누고 주 안을 십성(十城), 또 그 안을 백시(百市)로 나눴다.
드래곤 평원의 북부지역을 북주(北州)라 일컫고 평동왕 수라혈마에게 북주주(北州主) 수라왕이라는 호칭이 내려졌다. 또한 이와 같은 이치로 평서왕 진천에게 남주주(南州主) 청검왕이라는 호칭이 내려졌으며, 매화일검에게 남주(南州) 남하성주(南下城主; 구 뉴얼국)의 작위가 내려졌다.
신명대국이 대륙을 통일하기까지의 전공을 가려 다른 아홉 명의 고수에게도 성주의 작위가 내려졌다.
신명대국의 권고를 받아들였던 이콘, 브디스, 뉴얼의 왕들에겐 예우를 갖추고 변방의 시를 맡겼으며,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왕족과 귀족들은 모두 오지로 유폐되거나 처형되었다.
세상은 바뀌었다.
더 이상 과거 찬란했던 나라들은 지도상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고 신명대국의 이름만 존재할 뿐이었다.
대륙의 황제인 주첨기는 지역을 편제하고 남은 왕족과 귀족들의 처우를 확정했다. 또한 대륙의 치안을 담당하는 법병을 효율적으로 운용시켜 대륙에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폐하.”
혜공이 허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던 주첨기는 심기가 불편한 모습이었다. 그간 불철주야 대륙의 안정을 위해 힘썼고 그에 따른 합당한 결과가 있었으나, 1년 가까이 누적된 피로는 그가 아무리 무적의 몸이라 할지라도 무리가 갔다.
“많이 피곤해 보십니다요, 폐하. 일도 좋지만 폐하의 존신부터 챙기셔야 합니다요.”
“혜공 공, 에드먼의 귀족들은 잡아들였는가?”
“각 성주들이 노력하고 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폐하.”
“벌써 1년이 지났다.”
빠른 대륙통일의 빈틈을 타 변방으로 도망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대륙은 매우 넓고 통일 후 안정을 위해 많은 인력을 투입시킬 수 없었던지라 그들을 잡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있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요, 폐하.”
“아니다. 민란은 어떻게 되었나?”
“황제폐하의 빈민정책 아래 민란은 더 이상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요. 하오나 패망한 국가들의 잔존세력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헌데 대국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도적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습니다.”
“걱정할 정도인가?”
“아닙니다요. 각 성의 성주들이 민란과 도적단 토벌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그리고 남은 귀족들의 처우는 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관직에 등용된 타국의 귀족들이었던 자들은 향후 10년간 감시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이며, 앞으로 더 많은 인재들을 등용하고 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예, 폐하.”
혜공은 연신 허리를 꾸벅였다.
주첨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근처로 걸어갔다.
드워프들이 만들어 놓은 수도의 전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하나같이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건물들, 수도 중앙에 설치된 거대분수,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뛰노는 아이들…….
더 이상 그들의 얼굴에서 전쟁이란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첨기 자신이 그토록 꿈꿔왔던 전쟁 없는 이상국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대륙통일을 한 지 정확히 1년이 지난 지금, 주첨기는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야 대륙은 안정되었고 백성들도 통일대륙의 백성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했다.
“지난해 도망쳤던 마족과 드래곤에 대해서도 감감무소식인가?”
“예, 폐하.”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쥐구멍 속으로라도 들어갔나 보군.”
안정된 대륙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위험요소가 존재하고 있었다. 지난해 도망쳤던 마족과 드래곤의 행방은 찾기도 힘들었고, 신명대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을 도망친 귀족들도 그 잔존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신명대국에 투항한 귀족들도 겉으론 친 신명대국을 외치고 있으나 속내는 어쩔지 그들만이 알 것이었다.
황제 주첨기가 아무리 산을 가르고 바다를 뚫는 무위를 지니고 있어도 사람의 속까지 꿰뚫어볼 수는 없다. 그래서 향후 몇 년간은 재등용된 귀족들의 감시가 철저해야 했다.
“자, 그렇다면…….”
주첨기가 미소 지으며 혜공 쪽을 돌아보았다.
“예, 폐하. 말씀하십시오.”
혜공도 미소로 대답했다.
주첨기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
“혜공 공, 고수들 중 역용술이 으뜸인 자가 누군지 아는가?”
“역용술이라면…….”
혜공은 기억을 되짚었다.
역용술이라 함은 얼굴의 형체를 바꾸고 타인의 모습으로 외모를 탈바꿈하는 기술을 말하는데 한 명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천면괴인 장우생이라는 고수의 역용술이 400고수들 중 가장 으뜸인 줄 압니다요. 실제로 장우생의 진짜 모습을 본 자가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요.”
“짐 앞에서도?”
주첨기는 눈초리를 올렸다.
“모르겠습니다요.”
“하하, 장우생이라…… 남주의 남하성 프리다를 맡고 있는 자 말인가?”
혜공은 인명부를 뒤적이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주첨기는 이에 장우생을 급히 황성으로 부르라고 명했다. 혜공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나 명을 수행했다.
장우생이 황성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주첨기는 은밀히 장우생과 혜공 그리고 만소자를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황제폐하.”
미남형의 얼굴로 굵은 눈썹이 눈에 띄는 장우생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주첨기는 장우생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얼굴뼈와 근육을 조절하여 얼굴형태를 바꾸고, 그 위에 동물의 표피를 입혀 피부를 달리했으나 주첨기의 머릿속에 그의 본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본모습은 지금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추했다. 사실 장우생이 역용술에 매진하게 된 것도 추한 자신의 외모 때문이었다.
“자작.”
“예, 황제폐하.”
“지금 짐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가?”
“어찌 감히…….”
장우생은 고개를 조아렸다.
혜공과 만소자는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장우생.”
주첨기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하자 장우생은 몸을 떨며 그렇노라고 대답했다.
주첨기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지금 짐의 모습으로 변해 보아라.”
“폐하…….”
장우생의 목소리가 떨렸다. 신하 된 자가 어찌 황제의 얼굴을 할 수 있겠는가?
장우생이 고개를 돌려보니 혜공의 무서운 얼굴이 보였다. 감히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표정으로 혜공은 단호했다.
“어서!”
주첨기의 호령이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장우생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턱을 잡고 위로 올리니 얼굴을 덮고 있던 동물가죽이 위로 찢겨져 올라갔다. 나머지 부분을 마저 찢어 버린 후 얼굴근육을 본래대로 돌려놓았다.
장우생의 추한 외모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폐하, 시행하겠습니다.”
한 번 쳐다보는 것으로 주첨기의 얼굴골격과 근육의 위치 그리고 특징들을 파악했다.
드드득
뼈가 움직이는 소리가 혜공과 만소자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한편 혜공은 장우생의 역용술에 흥미가 동하고 있었다.
추한 얼굴을 미남형으로 바꾸는 역용술!
장우생의 이목구비가 점점 주첨기의 것과 닮아갔다. 이어 장우생이 몸을 비틀자 전신에서 뼈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장우생은 전신의 뼈까지 움직이고 조합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어느새 주첨기의 이목구비는 물론 체격까지 똑같이 변했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동물가죽을 얼굴에 붙이고 살을 만들고 나자 모든 게 끝났다.
“햐―!”
혜공은 탄성을 질렀다.
역용술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말 신기하다. 혜공은 무례라는 것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주첨기와 장우생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대단하다, 대단해. 장우생, 그대는 짐이 되었구나. 나 주첨기가 되었어!”
주첨기는 기뻐서 외쳤다.
눈 밑의 작은 점까지 빼다 박아 선황이라 할지라도 누가 자신의 자식인지 알아맞히지 못할 것이다.
장우생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혜공, 장우생에게 짐의 황복을 입혀라.”
“예?”
혜공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만소자도 놀라서 신음을 흘렸다.
주첨기는 피식 웃었다. 탁상 위에 올려진 커다란 화분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설령, 가자.”
[끼……!]갑자기 설령이 화분의 흙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주첨기의 어깨 위에 앉았다.
“폐하! 폐하!”
불안한 예감이 맞는 것 같다. 혜공은 다급하게 주첨기 뒤로 다가갔다.
“혜공 공, 짐은 짐의 나라를 돌아볼 것이다. 장우생, 짐이 없는 사이 그대는 짐의 모습으로 황좌를 지켜라. 지금까지 개혁하고 통일했던 정책들엔 변함이 없으니 이를 지켜나가라. 혜공 공과 만소자가 그대를 옆에서 도우리라.”
“폐하! 아, 암행(暗行)에 나서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요?”
“그렇다. 개인적인 여행이라고 해도 되겠지.”
혜공은 순간 황제의 눈에 빛이 감돈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방랑자라면 누구나 걸치고 있을 하르제 망토에 곧 헤질 듯한 낡은 부츠, 그리고 회색 톤의 간단한 의복은 그를 평범한 여행객으로 만들었다.
보검 청강검을 평범한 검집에 넣고 허리에 걸쳤다. 신명대국 고위급 검사들의 특징인 흑발과 흑안도 다른 색으로 바꾸니 그는 검을 소지한 여행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주첨기는 유유히 성문밖으로 빠져나왔다. 성 밖에는 수많은 마차들이 즐비하게 대기 중이었다.
‘마차라…….’
마차를 보니 문득 그것을 타고 대륙을 유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멀리 갔으면 한다.”
주첨기는 한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꿈꿔왔던 일이다.
자신이 이룩한 나라를 돌아본다는 것. 자신의 땅을 밟고 자신의 백성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생활상을 눈에 담는 것.
이윽고 그날이 왔다.
“목적지는 없습니까?”
보자마자 들려온 하대에 마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첨기의 전신을 훑었다. 혹 도주 중인 범죄자일까?
하지만 도피하듯 마차에 오른 이는 당당하기 그지없는 얼굴이라 금세 의심을 거두었다.
“음…….”
주첨기는 어디로 갈지 잠시 생각했다.
“남주 남하성 쪽으로 가게.”
“남주라면……?”
마부는 머리를 굴렸다. 황성에서부터 남주 남하성까지의 거리는 꽤 됐다.
“남주까지라면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거리입죠”
주첨기는 대답 대신 금화 두 닢을 꺼내 마부에게 내밀었다.
마부는 고민 없이 금화를 받아 들고 허리를 굽실거렸다.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손님이 다른 마차를 탈 기세라 마부는 얼른 마부석 위로 뛰어올랐다.
“출발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황성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손님의 기색을 읽은 마부였다. 바로 채찍으로 말의 엉덩이를 때렸다. 말이 울음소리와 함께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부는 손님의 내력이 궁금했다. 도망치듯 수도에서 빠져나가면서도 당당한 얼굴! 높은 사람들이나 지닐 법한 위엄까지, 단순한 여행자라고 생각하기엔 사람 그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존재감이 남달랐다.
마부경력을 되짚어 볼 때 이런 존재감을 지닌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이름이 뭔가?”
문득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마부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보코버리라고 하는데, 이름이 어려워서 흔희들 보콜이라고 부릅죠.”
“그렇군. 보콜, 가족이 있을 텐데 이렇게 바로 가도 되겠는가?”
자신의 가족을 염려하는 말이 들리자 그제야 보콜의 얼굴이 펴졌다.
“제 일입죠. 제 마누라는 서방이 오랫동안 안 들어오다 돌아올 땐 그만큼 주머니가 두둑해진다는 걸 아는 여자입죠. 헌데, 쫓기시는 분은 아니신 듯한데 수도를 떠나야 하는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니 맘에 두지 말게, 보콜. 자네에게 해가 오는 일은 없을 것이야.”
주첨기가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보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의 속도를 올렸다.
주첨기는 창밖을 보며 감상에 젖었다. 자신이 이룩한 나라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수도의 백성들은 모두 평화스러운 표정들이었다. 각기 성실히 일하며 남과 같이 사는 평범한 삶…….
“제가 이래도 제 아들놈은 법병대장입죠. 수하만 100명이라던데…… 실은 이 마차도 그 녀석이 구해 준 거랍니다.”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아들이 법병대장이니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아들이 법병대장이군. 장한 아들을 두었네.”
주첨기가 담담하게 말했다.
보콜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손님의 외모를 보니 아들 또래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장한 아들을 두었다니? 더군다나 아들이 법병대장이라면 이 말을 들은 사람들 대부분운 움츠러들기 마련인데 이 손님은 담담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상대해 본 보콜이라 목소리에 당황한 그의 마음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럽죠. 손님께서는 높으신 분 같은데…… 이런 누추한 마차가 불편하시진 않으십니까?”
“높으신 분? 하하, 내 의복이 어색해 보이나?”
주첨기는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손님은 이런 누추한 마차를 타실 분이 아니실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죠. 거슬렸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십시오.”
“아니네. 아니야. 보콜, 자네는 장한 아들이 마련해 준 이 마차가 어찌 누추한 것이라고 말하는가? 아들이 들으면 많이 섭섭할 거야.”
“그렇습니까?”
보콜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손님의 정체를 대체 종잡을 수 없다. 금화 두 닢도 선뜻 선금으로 주고, 아들이 법병대장이라고 밝혔는데 하대는 여전하고, 또한 그것이 매우 익숙하다.
‘그저 손님만 목적지에 모셔다 드리면 되는 거지.’
보콜은 머리가 아파 손님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사람마다 각기 사연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수도를 본격적으로 벗어나면서 넓은 들판이 이어졌다. 가끔씩 마주 달려오는 마차들도 있었지만, 그 마차들이 지나가고 나면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적적해진 보콜이 뒤쪽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혹시 손님께서는 검사님들을 직접 뵌 적이 있습니까?”
“검사?”
“예, 아들이 그러는데 검사님들은 하늘을 날고 물 위를 달린다고 했습죠.”
“그런가? 내 보지 않아서 모르겠네만 자네와 같은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지.”
주첨기가 능청을 떨며 말했다.
보콜의 얼굴 위로 능글맞은 미소가 떠올랐다.
“제 아들은 수많은 검사님들을 직접 봤습죠. 검사님들뿐만이 아니라 수라왕 전하와 청검왕 전하도 뵈었고, 믿으실지 모르시겠지만 황제폐하를 멀리서 직접 뵌 적도 있습죠.”
“그래?”
주첨기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예, 제 아들은 에드먼 전쟁에서 전공을 인정받아 법병대장이 되었습죠. 그 전쟁 때 모든 검사님들과 수라왕, 청검왕 전하 그리고 황제폐하를 멀리서 뵈었다고 들었습죠.”
“아, 무슨 전쟁인지 알 것 같네. 남하하던 에드먼의 수만 군사를 회유 하고 대국의 병력과 합류하여 역으로 에드먼 황성을 순식간에 점령했던 그 전쟁 아닌가? 그 전쟁이 바로 대륙통일의 시발점이 되었지.”
“손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군요. 바로 그 전쟁에서 제 아들이 전공을 세우고 법병대장이 된 것입죠.”
주첨기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 보콜은 아들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들자랑을 할 때마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대단하네. 그때 전공을 인정받아 법병대장이 된 자는 100여 명밖에 안 되는데, 그 속에 자네의 아들이 속한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그렇습죠. 제 아들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장군까지 할 인재입죠.”
보콜은 손님과 대화하는 사이 의심을 모두 떨쳐 버렸다. 이래서 사람은 대화를 나누라고 했다. 대화하는 사이 보콜은 손님이 절대로 악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다.
비록 하대를 하지만 이는 손님의 인품 때문이 아닌 위치에서의 당연함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손님의 성함도 모르고 있습니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한 달 동안 동행할 사람인데 당연하지. 내 이름은…….”
주첨기는 마땅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이었다.
“스워드네.”
보콜은 스워드란 이름이 손님의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손님의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흡사 절대 부러지지 않은 검을 보는 것 같다.
“좋은 이름입니다, 스워드님.”
보콜은 보통 손님의 이름 뒤에 ‘씨’를 붙이지만 이 손님은 꼭 ‘님’을 붙여야만 할 것 같았다.
데리안은 통일 이전에 신명대국 제45구역이라고 불렸다. 통일이 되면서 시로 개편되었고 외지와 수도를 잇는 큰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데리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스워드님.”
멀리 데리안의 불빛이 보였다.
늦은 밤이라 성문을 지키고 서 있는 경비병들 외에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마차는 경비병들 앞에서 멈춰 섰다.
“성안으로 들어가는 중입니까?”
경비병이 물었다.
“예.”
“두 분의 신분증을 보여 주십시오.”
마부 보콜은 허리춤에서 주섬주섬 신분증을 꺼내 경비병에게 보여 주었다. 신분증에는 보콜이 사는 곳과 그의 이름 그리고 신분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엔 이를 공인하는 만민당주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대륙의 모든 백성들은 대륙이 통일된 1년 사이 신분증을 발급받았고, 신분증을 발급받은 사람만이 백성으로 인정되어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좋습니다.”
주첨기 차례가 왔다.
주첨기는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황성에서 나올 당시 이미 준비해두었던 신분증에는 평민으로 위장된 내용들이 적혀 있어 경비병들은 의심 없이 마차를 통과시켰다.
“여관은 어디로 가는 게 좋겠습니까? 데리안에는 5등급에서 1등급까지 모든 여관들이 다 있습죠.”
“보통의 여행자들이 가는 곳으로 가게.”
“3등급 말씀입죠?”
“그러게.”
보콜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3등급 여관 ‘바람이 머무는 자리’라는 곳에 마차를 세웠다. 여관 앞에 서 있던 종업원이 마차를 넘겨받았다.
주첨기와 보콜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3등급 여관이라면 다들 그렇듯 바람이 머무는 자리 또한 1층에는 주점, 음식점 형태로 되어 있었다.
취객들이 음유시인들의 음률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삼삼오오 모인 여행자들은 맥주잔을 부딪치며 무엇인지 모를 내용으로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잔뜩 술에 취해 코가 뻘게진 이들이 주첨기와 보콜을 흘깃 보더니 다시 술을 마셨다.
여관주인은 풍성한 몸매를 지닌 중년여인이었다. 가득 찬 손님들로 바쁜 그녀는 종업원과 몇 마디 주고받은 후에야 주첨기가 들어온 것을 알아챘다.
“어서 오세요. 오, 보콜 씨! 오랜만이네요.”
1층은 시끄러웠다. 소리 높여 말해야 겨우 들릴 정도였다.
“하루 머물다 가려고. 깨끗한 침대 있어?”
“오늘 따라 손님들이 가득 차서요. 아, 마침 한 곳이 비었네요. 지금 청소하도록 시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어요?”
보콜은 주첨기의 눈치를 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첨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보콜이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고…… 스워드님, 저녁은 뭐로 드실 겁니까?”
“이 집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뭔가?”
여관주인은 자연스럽게 하대하는 주첨기와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보콜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아들이 법병대장이야!’라고 외치고 다니는 보콜이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공손했다.
‘보콜 씨는 저 손님에게 왜 저렇게 공손하지?’
높은 위치의 사람이라면 이런 평범한 여관에는 오지 않을 텐데 말이다.
“통돼지 바비큐가 가장 맛있긴 한데 그만큼 값이 나가는 것입죠.”
“그걸로 하지.”
보콜은 여관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들었지? 통돼지 바비큐! 큰놈으로 잡아와. 가만있자, 저쪽 자리에 앉아 있으면 되지?”
“가장 큰놈으로 대령하겠어요. 그럼 앉아 계세요. 아, 내 정신 좀 봐. 50쿠퍼입니다.”
여관주인과 보콜은 주첨기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 있는 주첨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를 원하는 두 사람의 눈빛.
‘아……!’
급히 나오느라 잔돈은 챙겨오지 못했다. 주첨기는 웃으면서 금화 한 닢을 내밀었다.
젊은 청년이 쉽게 금화 한 닢을 꺼내자 여관주인은 그제야 보콜이 왜 이 청년에게 공손하게 대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이런 거금을…….”
여관주인은 당황한 미소를 지었다.
“잔돈은 부담 갖지 말고 준비되는 대로 주게.”
주첨기가 카운터 위에 금화를 올려놓았다. 금화를 받아 든 여관주인은 또다시 들어온 다른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가시죠.”
주첨기와 보콜은 빈 곳에 자리를 잡았다. 주첨기의 뒷좌석에는 건장한 중년사내들이 모여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모두들 얼큰하게 취해 목소리가 한껏 커져 있었다.
보콜은 사내들의 목소리가 너무 큰지라 신경이 거슬렸다. 눈썹을 살짝 찌푸린 그와 반대로 주첨기에게는 그 소리마저 좋게 들렸다. 하루 일과를 마친 성실한 백성들의 저녁이 아닌가?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스워드님.”
“그런가?”
“그렇죠. 헌데…… 여행을 하시는 중입니까?”
“여행?”
“급해 보이시나 특별한 목적지가 없는 것 같아서 말입죠. 여행지로는 제가 잘 알고 있습죠. 황제폐하께서 승전하신 곳곳의 전장을 돌아보는 것도 검사수업을 하시는 데 좋으실 것 같군요.”
“내가 검사로 보이나?”
“많은 손님들을 대하다 보니 어느 정도 눈치라는 걸 가지게 됐습죠. 혹 대학의 검사수업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보콜의 시선은 주첨기의 허리에 달린 검집으로 향해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냥 느낌입죠. 제 아들놈도 지금은 법병대장이지만 나중엔 검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죠. 위대한 신명대국의 검사님들처럼 말입죠.”
“하하, 나는 검사수업을 하는 중이 아니네. 하지만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은 맞네. 그리 서두르는 여행도 아냐. 천천히 대륙을 돌아볼 걸세.”
“그런데 수도에서는……?”
“여행의 조바심이랄까? 무작정 빨리 수도를 떠나고 싶었던 거지.”
“하아, 전 또 무슨 급한 용무가 있는 줄 알고 오해했습죠. 맞습니다. 남자가 마음먹었으면 후딱 해치워 버리고 싶은 그런 게 있습죠. 그럼 남주 남하성으로 향하면서 좋은 곳이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게나.”
잠시 후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다. 여종업원은 서비스라면서 맥주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보콜은 맛있는 음식을 보고 손을 싹싹 비빈 후 입가의 침을 닦았다.
“맛있군.”
황성에서 먹는 음식과는 다른 맛이 있었다. 황성에서도 최대한 검소하게 먹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때마다 혜공이 주방장을 혼내는 바람에 그의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자네도 어서 들게.”
“예, 예!”
그제야 보콜은 돼지 뒷다리를 뜯어 한입 가득 물었다. 끼니를 거르고 마차를 몰고, 또 타고 온지라 둘은 두 사람이 먹기에 많은 양을 단숨에 비웠다.
주첨기는 한 곳을 바라보았다. 여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여종업원과 취객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여종업원은 익숙한 자세로 대처했다. 취객들의 술주정을 애교스럽게 받아넘기는 법은 수년간 여관업에 종사하면서 이미 익혔다.
하지만 취객은 그럴수록 여종업원을 더욱 거칠게 끌어당겼다.
“어랏? 어딜 가나 꼭 저런 놈이 있습죠. 술만 먹었다 하면 물불 안 가리고 여자 끼고 침대에 누우려는 놈들…… 남자들 망신입죠. 저 모습을 지 마누라한테 들켜야 하는데 말입니다. 낄낄, 그냥 신경 끄십쇼. 저런 놈들까지 신경 쓰다간 몸이 남아 남지 않습죠.”
보콜도 술이 약간 취한 목소리였다.
짝!
장내가 시끄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취객이 여종업원의 뺨을 때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종업원은 바닥으로 쓰러져 흐느꼈다.
“저런 못된 놈이, 여자를 때려?”
보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취객이 여종업원의 머리칼을 잡았을 때 주첨기는 포크 하나를 들었다. 그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진 것을 눈치챈 보콜이 말했다.
“남자가 돼서 여자를 때리다니, 저런 못된 놈은 혼쭐을 내 줘야 합죠. 곧 법병이 올 겁니다.”
보콜의 말 대로였다. 어느새 밖으로 나갔는지 여관주인이 법병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법병이 들어온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사람들은 마시고 있던 맥주잔을 내려놓고 취객에게 다가가는 법병을 주시했다.
“제 말이 맞습죠? 여자를 때리는 저놈은 분명 아비도 몰라볼 놈입죠. 저런 놈들은 한 번 혼쭐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릴 겁니다.”
“법병들이 빨리도 왔군.”
“괜히 법병들이 아니죠.”
보콜은 콧날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저런 법병들의 대장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주첨기도 내심 흐뭇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봐,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들었다!”
법병들은 약한 자에겐 약하게 대하고 강한 자에겐 강하게 대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랑 같이 가야겠다.”
조장으로 보이는 법병이 말했다.
머리칼을 잡혔던 여종업원은 취객의 팔을 뿌리치고 법병 뒤가 숨었다.
취객은 얼굴에 자리한 기다란 흉터마냥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내 돈 주고 창녀와 자겠다는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야? 법병이라고 남의 잠자리까지 참견하는 거야?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누군지 알 필요 없다. 자세한 건 우리랑 같이 가서 말해도 되겠지. 끌고 가라.”
조장이 법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뒤에서 얼굴을 굳히고 서 있던 법병들이 취객에게 접근했다.
“내가 누군지 아냐고!”
취객은 허리춤의 검을 꺼내 들었다.
주첨기가 볼 때 취객의 검은 흔히 볼 수 있는 검이 아니었다. 명망 높은 장인이 전력을 쏟아야 겨우 나올 만한 품격을 지닌 검으로 일반 여행자가 갖고 있을 물건이 아니다.
“검술을 익힌 자군. 검 또한 날카로워 보이니 취했다고 하여 방심한다면 큰코다치겠군.”
주첨기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조장도 주첨기와 같은 생각이었다.
“상대는 경험이 많은 검사다. 방심하지 마랏!”
착!
법병 셋이서 취객을 포위하며 할버드를 겨누었다. 취객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일순간 몸을 비틀었다. 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동작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날카로운 검이 할버드의 날이 달린 부분을 베고 지나갔다.
챙그랑!
할버드의 날이 바닥으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취객은 눈앞의 법병에게 몸을 던졌다. 칼코등이로 법병의 콧잔등을 찍어 버리고선 여관 문을 향해 뛰쳐나갔다.
“방심하지 말라고 했지? 모두 연무장에서 기합받을 준비나 해라.”
조장이 여관 문 앞을 가로막았다.
취객과 조장은 서로 대치한 상태로 전의에 불타는 눈빛을 교환했다.
“흐헙!”
취객은 조장의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조장이 급히 검을 비껴 쳐냈다.
하지만 취객은 이미 이를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발로 조장의 복부를 밀어 찼다. 조장은 뒤로 나자빠졌다.
“1년 전만 해도 난 너희들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던 곳에 있었다. 빌어먹을 세상! 다음에 내 눈에 띄면 모두 죽여 버릴 줄 알아!”
취객은 그 틈을 비집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자, 잡아라!”
쓰러진 조장이 급히 일어서며 외쳤다. 이미 취객은 여관 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순간 주첨기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그가 탁자 밑으로 집게손가락을 퉁겼다.
챙!
쇠붙이가 튕기는 소리.
포크는 바닥 위를 스치듯 듯 여관 벽을 향해 매우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두꺼운 여관 벽도 뚫어 버렸다. 하지만 너무 낮게 날아간지라 이를 눈치챈 이는 없었다.
“으악!”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도주했던 취객이 발뒤꿈치를 부여잡고 있었다. 발 뒷목에 포크 하나가 깊게 박혀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피가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피가 어느새 땅을 흥건히 적셨다.
“이, 이익!”
발목으로부터 이는 극심한 고통! 거기만 아픈 것이 아니라 전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법병들이 취객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이, 이놈! 자기 발에 포크를 꼽고 뭐 하는 거야?”
법병들은 취객을 금부로 호송했다. 사람들은 법병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여관 안은 언제 소란이 벌어졌냐는 듯 활기를 되찾았다. 애꿎게 당한 여종업원도 한구석에 앉아 머리칼을 빗고선 반쯤 열린 단추를 채웠다.
“아마도 그 취객은 법병들의 포위망을 그토록 쉽게 뿌리친 걸 보니 타국의 기사였던 모양입죠?”
보콜은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켠 후 말을 이었다.
“통일이 빨리 이뤄졌기 때문에 그사이 도망친 기사들의 수도 꽤 됩죠. 그들 대부분이 악심을 품고 있으니 스워드님도 여행을 하실 때 이들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군.”
“개중엔 기사도를 중시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렇게 막나가는 놈도 상당합죠. 어라? 포크가 어딜 갔지? 이봐, 여기 포크 하나 가져다 줘!”
보콜이 주방 쪽으로 외쳤다.
‘과거 무사들의 처분문제가 아직도 많이 해결되지 않았군.’
주첨기는 생각했다.
투항한 기사들은 그들끼리 세력규합을 못하게 할 요량으로 각각 타지로 전출시켰다. 그러나 투항하지 않은 기사들은 법병들을 피해 도망쳐 다니고 있었다. 여덟 개의 나라가 한순간에 통일되었으니 각 나라에 존재하던 기사들의 수를 합쳐도 족히 만 명은 넘을 것이다.
‘또한 그들을 제압하기엔 법병들의 훈련도가 약하다. 이를 보강해야겠구나.’
황성 안에서 보고받는 일과 직접 보고 듣는 일에는 차이가 있었다. 주첨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들어가 있겠네.”
먼저 방으로 올라간 주첨기는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잠에서 깬 설령이 주첨기 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주첨기는 설령의 머리를 쓰다듬다 잠들었다. 설령도 게슴츠레하게 뜬 눈을 다시 감은 후 주첨기의 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등잔보다는 초가 좋습니다. 등잔은 거추장스럽기만 해서…….”
보콜은 초 한 뭉텅이를 집어 주첨기에게 내밀었다. 주첨기는 들고 있던 등잔을 내려놓았다.
원하는 목적지가 있으면 극한의 경공술로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는 그지만 지금은 천천히 유람하며 세상사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야영할 때를 대비해 육포와 마른음식들을 든든히 챙기는 것도 중요합죠. 특히 이 지네 가루는 들짐승들을 쫓는 데 최고입죠.”
가득 찬 바구니 위로 보콜은 온갖 잡동사니를 올려놓았다. 그 가격이 도합 5실버에 이를 정도로 꽤나 많은 물량이었다. 보콜은 어깨에 메고 가서 마차의 짐칸에 실었다.
마차는 곧 출발했다.
“이곳에 도적단들은 출몰하지 않는가?”
문득 주첨기가 물었다.
“도적단이라니요. 엄연히 황제폐하께서 계시는 본토(本土)인데…… 도적단들은 물론이고 도적의 코털도 보이지 않습죠. 하지만 본토를 벗어나면서 조금은 위험합죠. 여관에서 봤던 그런 놈들이 모여 도적단을 이뤘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립죠.”
“도적단을?”
“그렇습죠.”
“분명 황제…… 폐하께서 각 지역에 황명을 내리시길 무고한 양민을 괴롭히는 도적단을 엄히 다스리라 하셨을 텐데?”
주첨기의 어조는 무거웠다.
“그건 뭐……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습죠. 아무리 위에서 억압해도 밑에서 꾸물꾸물 기어오는 것들이 있습죠. 해가 있으면 달이 있고, 뭐 그런 것 아닙니까?”
“흠…….”
주첨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자신은 대륙통일을 하여 전쟁이 없는 이상국가를 건설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돌아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스워드님, 본토에는 도적단이 코털만큼도 없으니 걱정 마십쇼.”
보콜과 본토를 돌아본 지 열흘이 흘렀다.
보콜의 말대로 도적단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드래곤 평원, 즉 본토는 주첨기가 신명대국을 개국했을 당시부터 직접 다스려온 곳이라 지금은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되어 있었다.
‘본토는 평화스럽구나. 하지만 황성이 있는 본토만이 내 나라가 아니다. 이 대륙의 모든 곳이 바로 내 영토이자 내 백성들이 사는 곳이지. 본토와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들을 하루 빨리 돌아보고 싶구나.’
마차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주첨기의 지시대로 보콜은 다음 도시들을 그대로 지나쳤다.
황성을 떠난 지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본토의 국경을 넘게 되었다.
“도시로 들어가겠습니다. 이 도시를 지나치면 또 노숙을 해야 합죠. 벌써 보름간 노숙했지 않습니까?”
“그러게나.”
국경을 넘고 나서 도착한 첫 번째 도시, 오토(Auto)의 밤은 싸늘했다. 마차를 세우는 경비병들의 표정부터가 그랬는데, 모두들 생기가 없는 얼굴이었다.
성문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경비병은 그들을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주첨기가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인뎁쇼?”
“무슨 일?”
경비병 두 명이 달라붙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도시로 들어가려는가?”
경비병은 보콜의 전신을 훑어보며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오랜만에 마주친 사람이 싸늘하게 대하자 보콜도 심기가 뒤틀렸다.
“그렇소.”
보콜도 똑같이 대꾸했다.
“마차 통행료는 1실버, 두당 통행료는 50쿠퍼요. 마차 안에 몇 사람이 있소?”
“한 분만 타고 계시오. 헌데 무슨 통행료요? 도시로 들어가는데 통행료를 받는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오. 뭐 이런 곳이 다 있소?”
“마부 포함 두 명이라…… 총 2실버군. 통행료가 없으면 돌아가시오.”
“에?”
보콜의 왼쪽 입꼬리가 기분 나쁘게 올라갔다. 가만히 둘러보니 웅성대는 사람들 모두 자신과 같은 입장이었다.
보콜도 평소 한 성질 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는 마차 위에 올라타 도시로 진입할 요령으로 채찍을 잡았다.
챙!
경비병이 파이크로 말의 목을 겨누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목을 찔러 버릴 기세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엄연히 황제폐하께서 통일하시어 대륙 어느 곳도 자유스럽게 왕래할 수 있게 되었건만. 내 이 일을 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구만!”
보콜은 성질이 나서 외쳤다.
“본토에서만 있었던 모양이군. 벌써 이곳은 두 달 전부터 통행료를 받고 있었다. 아마 당신만 몰랐나 보군.”
“내 지금이라도 당장 수도로 돌아가 이 일을 황성에 고할 것이오!”
“흥, 마음대로!”
보콜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마차에서 내렸다. 흉흉한 기세로 걸어갔다. 경비병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뭐? 내가 누군지 알아? 내 아들 뻘밖에 안 되는 놈들이……! 내 아들이 본토 수도의 법병대장이야.”
그제야 경비병들의 기세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경비병 둘은 서로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하는 수 없습니다. 신임 영주님의 명입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강행하시면 말을 죽이고 그쪽과 마차 안의 손님을 연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통행료를 내십시오.”
경비병들의 어투는 다소 공손하게 바뀌었지만 양보는 없었다. 그들이라고 이렇게 하고 싶을까? 모두 상부에서 지시한 내용이기에 이를 지켜야 했다.
보콜은 이를 알면서도 얼굴이 시뻘게졌다. 콧바람을 씩씩 내뿜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보콜은 경비병을 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줄 수 없다.”
마차에서 주첨기가 내리며 말했다. 경비병들의 시선이 주첨기에게 쏠렸다.
“마부가 말했듯이 대륙은 황제폐하가 통일하시어 모든 백성들의 왕래가 자유롭도록 이를 황제의 이름으로 보장하셨다. 지금 너희들의 행위는 황제폐하를 기만하는 것임을 알고 있느냐?”
주첨기가 호통쳤다.
“너, 넌 뭐냐?”
기세등등한 주첨기의 태도를 본 경비병들이 당황했다.
“스워드님, 더럽고 치사하니 그냥 통행료 주고 들어가십쇼. 그냥 상대를 안 하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빨리 들어가서 몸 좀 씻고 싶고…….”
“안 되네. 이는 황명을 어기는 일이네. 본토를 떠나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주첨기는 단호했다. 그는 경비병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광이 번뜩였다. 경비병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이곳의 시장이 누구냐?”
“예?”
놀란 것은 보콜도 마찬가지였다. 한 도시를 맡고 있는 귀족의 이름을 간단히 묻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두 달 전에 부임하신 사, 사루만 남작님이십니다.”
“사루만?”
주첨기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으나 사루만이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권고에 응한 국가의 높은 귀족 중 한 명일 텐데, 그들의 부임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곳 북산성의 성주인 계주의 일이다.
“사루만이라…… 지금 나를 막으면 경을 칠 것이다. 막을 것인가? 보콜, 이만 가지.”
주첨기는 싸늘한 한마디를 남기고서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예!”
보콜도 경비병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어 준 후 마부석 위로 뛰어올랐다.
보콜이 채찍을 잡았다. 그가 왼쪽 집게손가락으로 경비병의 파이크를 가리켰다.
“그날에 내 말들이 찔리면 너희들이 보상해야 할 것이다.”
보콜이 채찍으로 말의 엉덩이를 때렸다.
[히이잉!]말이 울음소리를 토했다. 첫 번째 말발굽이 지면을 울렸다. 경비병들은 허겁지겁 옆으로 물러났다. 마차는 유유히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스워드님, 정말 대단한 기백이었습죠. 정말 그 사루만 영주에게 직접 쳐들어갈 기세였습죠.”
보콜은 통쾌한 듯 키득거렸다.
“막았으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네.”
“예? 하하, 스워드님의 농담은 처음 듣습니다.”
주첨기는 피식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겨우 본토를 벗어났을 뿐인데 개발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다. 아직 저녁이다. 그런데 행인들이 많이 보이지 않고 간혹 바삐 움직이는 경비병들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