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50
050 절대 기억력
낙양의 동남부 외곽에 있는 작은 장원의 심처.
두꺼운 천으로 창문을 가려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 채경옥이 있었다.
그녀는 눈 아래를 검은 면사로 가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여인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채경옥은 품에서 보자기에 싼 점토판을 꺼내 공손하게 면사여인에게 내밀었다.
“사부님, 이것이 환우지약의 첫 번째 조각 ‘마령주’예요.”
보자기를 열어 점토판을 본 중년 여인의 눈끝이 세차게 떨렸다.
그녀는 점토판을 다시 보자기로 싸며 채경옥이 말했다.
“고생했다. 그동안 네게 못할 짓을 시킨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는데… 경옥아, 네가 정말 큰 일을 했어.”
채경옥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사부님. 제가 원했던 일이었어요.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고요.”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며칠 세가를 떠나 있을 생각이에요.”
“괜찮겠느냐? 그렇게 되면 네 아버님이 고초를 겪게 되실 텐데.”
“지금 제가 세가 내에 있는 게 더 위험해요. 생사평 대회전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죽어서 세가의 힘이 위축된 건 사실이지만, 아버님과 담 총관은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그분들의 판단력에 혼란을 줄 필요가 있어요.”
면사여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제자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수도 없이 감탄하게 만든 재원이었다.
사마무광의 아내가 되어 세가에 들어가겠다는 계획도 그녀가 세운 것이지 않은가.
“방법은 있는 게냐?”
채경옥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해 둔 게 있어요.”
그녀가 연이어 물었다.
“사부님은 곡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아니다. 이곳에서 더 할 일이 있다. 환우지약의 두 번째 조각에 대한 단서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것을 확인할 생각이다.”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면사여인의 눈가에 따듯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마.”
대화가 끝났다.
* * *
연무장처럼 넓은 창천사마세가의 중앙대전엔 삼십 명이 넘는 세가의 핵심 요인들이 모여 있었다.
적지 않은 수다. 하지만 대전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했다.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태사의에 앉아 있는 사마천웅의 기색을 살피며 식은땀을 흘리기 바빴기 때문이다.
평소 감정 기복이 없기로 유명한 사마천웅의 중후한 얼굴은 터질 듯한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벌써 두 시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연공실에 침입했던 놈을 잡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불처럼 격노한 그의 일갈이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왜들 말이 없는 건가! 태하가 황하나 장강처럼 넓고 깊은 물도 아니거늘, 또 놈이 그곳을 무사히 건넜다 해도 낙양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 지금까지 그의 흔적조차 찾지 못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고도 어찌 대창천사마세가의 무인들이라 할 수 있냔 말이다!”
그의 언성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머리는 가슴을 파고들기라도 할 것처럼 낮아졌다.
화를 참지 못한 사마천웅의 주먹이 태사의 팔걸이를 내려쳤다.
쾅!
푸스스…….
대전을 흔드는 굉음에 놀라 고개를 들었던 사람들은 쇠보다 단단하다는 철목으로 만든 팔걸이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눈을 확 내리깔았다.
사마천웅의 우측 정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초로의 사내가 머리를 들었다.
“가주님, 이제 좀 진정하시지요. 다들 어려워서 할 말도 못 하고 있습니다.”
사마천웅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는 세가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총관 담승이었다.
담승은 지난 삼백 년 동안 대대로 사마가의 총관을 맡아온 담가장의 후예로 사마천웅과는 동배였고, 함께 자란 죽마고우이기도 했다.
사마천웅의 얼굴에서 혈기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것을 본 담승의 눈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말을 이었다.
“세가의 모든 무인이 전력을 다해 놈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곧 놈을 잡아끌고 올 것입니다.”
“그래야지.”
“일단 모든 사람에게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침입자에 대한 이야기가 외부로 새어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잘했네.”
“소가주 내외와 손자분은 의약당의 밀실로 옮겨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상태는 의약당주에게 직접 보고를 받으시지요.”
총관의 눈짓을 받은, 반백의 머리를 한 의약당주가 사마천웅에게 말했다.
“세 분 모두 기력이 쇠하긴 했어도 건강엔 큰 문제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도 당분간은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사마천웅이 가라앉은 눈으로 의약당주에게 물었다.
“회복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보양에 필요한 영약을 아낌없이 처방하고 있으니 보름 정도면 이전의 체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름이나 기다릴 수는 없네. 언제쯤 그 아이들을 조사할 수 있겠나?”
“열두 시진 정도는 지나야 합니다.”
“흠… 그전이라도 조사가 가능하다 싶으면 즉시 보고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가주님.”
사마천웅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모두 나가서 놈을 찾게. 여기 모여 있는다고 놈이 제 발로 걸어오는 것도 아니니.”
“예, 가주님.”
사람들은 그의 명령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번개같이 일어나 대전을 뛰어나갔다.
휙휙휙휙-
자신들이 익힌 최고의 경공술을 전력으로 펼치는 모습들.
그걸 본 사마천웅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떠올랐다.
“못난 놈들…… 생사평 대회전에서 세가의 정예가 그자에게 전멸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리에 오를 꿈도 꾸지 못했을 것들이…….”
유일하게 남아 있던 담승이 씁쓸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가주님,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세상만사 새옹지마가 아닙니까. 잃은 것이 있으나 얻은 것 또한 작지 않습니다. 그것을 도난당했지만 소가주가 마기와 광증에서 벗어났으니 세가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한시름 덜지 않았습니까.”
“그 작은 위안거리마저 없었다면 내가 이렇게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지도 못했을 걸세.”
그가 연이어 물었다.
“침입자에게 협조한 세가 내부의 조력자를 찾는 작업은 어찌 되어가고 있는가?”
“감찰당에서 조사 중이긴 한데…….”
사마천웅의 눈에 번갯불 같은 신광이 번뜩였다.
“담 총관, 왜 말끝을 흐리는가? 뭐라도 나온 게 있는 건가?”
“소가주의 첫째 부인의 종적이 묘연합니다.”
사마천웅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
“뭐라고? 첫째 아가가 안 보인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가주님.”
“잠시 외출이라도 한 것 아니겠는가?”
“저도 그렇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조사 중인 감찰당주의 말로는 채 부인의 행방을 아는 식솔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허…….”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으로 탄식을 토하는 사마천웅을 보며 담승이 말했다.
“가주님, 채 부인이 침입자와 내통했다고 속단하시기엔 이릅니다. 그자에게 납치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납치라…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담승은 대답하지 못했다.
환우지약을 노리고 온 침입자가 무엇 때문에 채경옥을 납치한단 말인가.
채 부인의 미모가 하남제일이라고 하지만 이런 짓을 하는 자가 여색을 탐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사마천웅이 말했다.
“하남제일표국에 사람을 보내게. 만약 그 아이가 침입자와 내통했다면 뒤에 채 국주가 있을 것이네. 세상 물정 모르는 그 아이가 혼자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지 않은가.”
“벌써 신검단주와 열 명의 무사를 표국으로 보냈고, 열 명은 채 부인을 추적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급박한 사안이라 판단되어 제 독단으로 지시를 내렸습니다. 보고가 늦어 죄송합니다, 가주님.”
“아닐세. 잘했네.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상황에 절차를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일세.”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담승이 고개를 숙였다.
사마천웅이 그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 수 있는 대화였다.
“휘아와 잠룡대는?”
“송옥루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 아닌가. 그 아이를 부르게.”
“사람을 보내기는 하겠습니다만…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마 공자는 본래 세가의 일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후우…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어. 이게 다 생사평 대회전의 후유증 때문일세. 그곳에서 제갈 아우가 죽지 않았다면 장보실에 던져 두었던 점토판이 ‘그것’이라는 걸 진즉에 알아냈을 것이고, 벌써 해석도 끝났을 텐데…….”
사마천웅이 제갈 아우라 부르는 사람은 전임 군사당주였던 지낭 제갈소였다.
그는 육대세가의 말석인 신뇌 제갈세가의 인물로 살아 있을 때 사마천웅이 담승과 함께 가장 신임하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잊힌 고대의 언어와 문물에 대한 지식이 높기로도 유명했었다.
사마천웅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눈을 감았다.
“담 총관,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즉시 보고해 주게. 나는 잠시 쉬어야겠네.”
“예, 가주님.”
* * *
며칠이 지났다.
점심시간이 지난 수향루 후원.
“츕츕추르르!”
“츄르츄르!”
정원의 나무 그늘 아래,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은 진무앙과 소소는 열심히 당호로를 빨아먹고 있었다.
보통 당호로는 꼬치에 꿴 산사나무 열매에 설탕을 묻히지만 지금 그들이 빨고 있는 건 물엿을 굳힌 것이라 더 달고 맛있었다.
진무앙이 소소에게 물었다.
“맛있냐? 츕츕츄르…….”
“네, 헤헤헤. 츄르츄르릅…….”
“츄르릅… 내가 식당 숙수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거야. 많이 먹어.”
“츄르츄르릅……. 감사합니다, 아저씨.”
열매 하나를 빼 입에 넣고 굴리던 소소가 큰 눈을 들어 진무앙을 보며 물었다.
“츕츕추르르, 그런데… 츕츕추르… 아저씨…….”
“츄르릅추르… 왜?”
“츕츄르……. 저, 이렇게 단거 먹어도 돼요? 츄르츄르… 의원 할아버지가 당분간 단거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요… 츕츕추르…….”
“츄르츄르릅……. 안 먹었다고 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 츕츕추르……. 위를 열어볼 수도 없는데. 츄르츄르……. 이 세상은 너무 정직하게 살면 피곤한 거야. 츕츕추르…….”
“정말요? 츄르릅…….”
“그럼, 아저씨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냐? ……츄르릅.”
소소가 세차게 도리질을 하며 대답했다.
“아뇨! 못 봤어요! 츄릅츄릅…….”
물론 못 봤겠지.
애하고 몇 번이나 대화를 나눴다고.
진무앙이 난향의 거처를 힐끗 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꼬맹아… 츄르릅……. 그래도 루주님한테는 당호로 먹었다고 하면 안 된다. 츕츕츄르……. 루주님 화나면 정말 무섭거든.”
“네, 헤헤헤……. 츄르츄르릅…….”
진무앙은 곁눈질로 당호로를 열심히 빨고 있는 소소를 내려다보았다.
소소는 그새 살도 많이 올랐고, 피부의 윤기도 좋아져서 이제 좀 제 나이로 보였다.
‘꼬맹이가 빨리 건강해져야 암혼 너머를 볼 수 있을 텐데……. 언제까지 여기 머물 수는 없어. 아무래도 난향이 나한테 일을 떠넘기려고 작정한 거 같아. 이러다 은퇴도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어느새 그가 들고 있던 당호로는 꼬치만 남아 있었다.
벌써 다 먹은 것이다.
소소의 손에 든 꼬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이의 옆에는 아직도 종이에 싸인 당호로가 세 개나 더 있었다.
진무앙은 막 다른 당호로를 집으려는 소소에게 말했다.
“꼬맹아.”
손을 멈춘 소소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예, 아저씨.”
“너, 무공을 배운 적 있냐?”
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내가 아는 무공 중에 아픈 몸에 효과가 좋은 게 있는데, 배워볼래?”
소소의 커다란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정말요?”
기대에 찬 눈빛, 열정 가득한 말투.
은근히 부담을 느낀 진무앙이 소소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무공이라기보다는 요상술에 가까운 거다. 이걸 배운다고 손에서 바람이 나오고, 허공을 날고 그럴 수는 없다.”
“아저씨가 가르쳐 주시는 거면 뭐든 좋아요.”
“음…….”
진무앙은 움찔했다.
만난 후로 그렇게 타박을 해댔는데 저렇게 말을 하는 걸 들으니까 어딘가를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천하를 몇 년이나 떠돌아다녔다더니 소소는 정신력이 보통 아이와 많이 달랐다.
“내가 가르쳐 줄 요상술은 생사회혼술이라는 건데, 열두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침, 약, 독… 이런 걸로 고치는 건 네가 알아봐야 도움이 안 되니까 운기요상의 방법만 알려주마. 구결을 말해줄 테니까 일단 외워. 설명은 그 뒤에 해줄 테니.”
“예.”
진무앙은 일천여 자에 달하는 생사회혼술의 운기요상법을 읊었다.
그가 두 번째로 요상법을 암송하려 할 때였다.
“다 외웠어요, 아저씨.”
“응?”
놀란 진무앙이 눈을 크게 떴다.
말이 일천여 자지, 구결은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글자투성이라 어지간히 머리 좋은 사람도 서른 자를 외우기 힘들었다.
당연히 확인이 필요했다.
“외워봐라.”
줄줄줄줄…….
소소는 운기요상법 일천여 자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게 암송했다.
단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진무앙은 그제야 깨달았다.
눈앞의 해맑게 웃고 있는 꼬맹이가 희대의 천재라는 걸.
“꼬맹아, 너 혹시 절대 기억력을 갖고 있는 거냐?”
소소가 눈을 말똥말똥 빛내며 되물었다.
“절대 기억력이요? 그게 뭔데요?”
“눈, 귀, 코, 입, 그리고 촉감에 전해지는 건 뭐든 기억하는 능력.”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가진 것 같아요, 그 능력. 저는 태어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걸 기억하거든요.”
“혹시 잊지도 못하냐?”
소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네…….”
진무앙은 당호로를 하나 집어 소소에게 건넸다.
“먹어.”
소소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무리 똑똑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예.”
진무앙은 멀거니 소소를 보다가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중앙에 한여름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진무앙이 입술만 벙긋거리며 중얼거렸다.
“염병… 천하에 나와 같은 천형을 가진 사람이 또 있긴 있었구나……. 어린애일 뿐인데, 이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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