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ctious Disease Survival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백훈과 리아 (3)
백훈은 태경이와 통신을 약속한 채널에서 한참 동안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답신도 돌아오지 않았다.
태경이는 그 누구보다 지금의 상황을 빠르게 눈치채고, 경고를 보내 줬다.
게다가 프레퍼(prepper)와 밀리터리(military) 덕질에 관한 이론만큼은 본인보다 태경이가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지금의 상황에 잘 대처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뭔가 무전을 주고받을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게 분명했다.
태경이 걱정에 노심초사할 선희의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지금은 그저 무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속속 들려오는 뉴스들을 종합해 보자면 전국적으로…… 아니, 전 세계적으로 감염자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국가재난상황’을 선포할 정도라면, 지금의 상황이 빠르게 수습되진 않을 것 같았다.
이곳에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 모르는 상황.
백훈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순간, 리아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다가왔다.
“아빠! 그러고 보니까 옥래 할머니 집에 혼자 계시는데 어떡해? 말순이 할머니랑 갑수 할아버지는?”
“아! 맞다, 어르신들……!”
백훈은 군 퇴역 후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전에 거주하셨던 집을 물려받아 그대로 거주했다.
강원도 정선 산자락의 시골 마을.
물론, 처음부터 이곳에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전 세계에 파병을 다니며, 아내와 리아를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파병 중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하나뿐인 친구를 잃다 보니 직업의 위험성에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 20년의 복무를 마치고, 귀향을 선택했다.
마을 사람들은 푸른 눈동자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리아를 처음 봤을 때 굉장히 낯설고 신기해했다.
남미 인종의 특징과 동양인 특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리아.
이국적인 외모를 이유로 어느 나라에서건 또래 친구들에게 차별을 받아 왔던 리아였다.
그래서 처음 정선에 들어왔을 때는 마을 사람들에게 소극적이고 까칠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편견 없이 살가운 태도로 리아를 대했고, 이웃집 태경이는 리아를 친남매 대하듯 했기에 금방 적응했다.
그렇게 이십여 년을 생활하다 보니, 온 마을이 가족과도 같았다.
리아는 가족과도 같은 이웃 어른들이 무방비하게 마을에 머무는 것이 걱정되어 백훈을 찾은 것이었다.
“아빠! 빨리 가서 모셔 오자. 어차피 폐광 안에는 공간도 넓잖아? 간 김에 이부자리 좀 더 챙겨 오고.”
“그래, 알았다. 아빠가 얼른 가서 모셔 올 테니까, 너는 여기서 선희 아주머니 잘 보살펴 드리고 있어.”
“그래, 알았어. 빨리 갔다 와.”
주섬- 주섬-
후다다닥- 타다닥-
다시 마을에 다녀오기 위해 폐광을 떠나는 백훈의 마음속에는 자책과 뿌듯함이 공존했다.
마을 어른들을 깜박한 자신의 무신경함에 대한 자책.
얼굴도 마음도 이쁘게 잘 자라 준 딸에 대한 뿌듯함.
백훈은 서둘러 트럭에 시동을 건 뒤,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키릭- 부아앙- 부아아아앙-
잠시 후 도착한 마을의 풍경에 백훈은 잔뜩 긴장했다.
어둑한 하늘, 몇 가구 안 되는 마을에는 불을 켜고 있는 집이 없었다.
저벅- 저벅-
두리번- 두리번-
하지만, 마을을 둘러본 백훈은 놀란 마음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집마다 불을 켜 놓진 않았지만, 우렁찬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기 때문.
강원도 정선 산자락에 있는 시골 마을인 만큼, 인적이 드문 위치에 자리해 있었기에 감염자들이 이곳까지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언제까지고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서둘러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폐광으로 가야만 했다.
똑- 똑- 똑-
드르륵-
“어이, 훈이냐? 왔으면 들어오지, 왜 밖에 멀뚱멀뚱 서 있어?”
“갑수 아저씨, 뉴스 보셨어요?”
“그래, 봤지. 요새 뭔 병이 돌아서 난리도 아니래.”
“이게 사람이 미쳐서 사람을 잡아먹는 병이래요.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짐 싸세요. 저랑 산속에 폐광으로 대피하셔야 해요.”
“폐광? 이 더운 여름에 무슨 폐광이야? 무슨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나는 됐다.”
“리아가 갑수 할아버지 모시고 오라고 난리예요. 옥래 할머니랑 말순이 할머니랑 동네 어른들 다 모시고 오라고 성화예요.”
“리아가??”
“네, 갑수 할아버지 위험하니까 마을에 계시게 하지 말고, 당장 모시고 오랍니다.”
“리아가 오라면 가야지. 얼른 준비할 테니까, 얼른 다른 늙은이들한테도 가서 준비하라고 해.”
타다닥- 타다닥-
백훈은 마을에 있는 모든 집을 돌며, 폐광으로 대피할 것을 요구했다.
노인들 대부분은 처음에 갑수 할아버지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가도, 리아를 팔아 얘기하면 마지못해 준비하는 시늉을 했다.
같은 마을에서 이십 년을 넘게 같이 산 리아는 마을 어른들의 친손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백훈의 트럭 앞에는 총 8명의 노인이 모였다.
웅성- 웅성-
하나 같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은 그중 가장 젊다는 사람이 60대 중반이었다.
“자자, 얼른 타세요. 말순 할머니랑 옥래 할머니는 앞에 타시고, 나머지 분들은 좀 불편하시더라도 짐칸에 타세요.”
노인들은 자신들의 몸 이외에도 피난에 필요한 물자들을 잔뜩 챙겼기에 트럭 짐칸이 빽빽하게 가득 찼다.
철컥- 탁-!
“다들 꽉 잡으세요. 출발합니다.”
트럭 좌우를 살핀 백훈은 천천히 트럭을 출발시켰다.
부앙- 부아앙-
마을을 떠난 트럭이 폐광이 있는 산자락에 도착하니, 리아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 조심히 내리세요. 제 손 잡으세요.”
꼬옥- 조심- 조심-
백훈과 리아는 마을에서 모셔 온 어른들을 모시고 폐광으로 향했다.
타박- 타박- 타박-
타박- 타박- 타박-
타박- 타박- 타박-
.
.
노인들의 걸음에 맞춰 올라가다 보니 20분이면 갈 길을 40분이나 걸려서 도착했다.
하지만, 각자 자신이 챙겨 온 짐들을 너끈히 메고 올라왔기에 누구 하나 평범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70, 80 먹은 노인들이 10kg이 넘는 보따리를 매고, 이고 산길을 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생전에 전쟁을 겪었고, 폐광으로 대피해 본 경험이 다들 한 번씩은 있었기에 묵묵하게 따라온 것이다.
한평생을 척박한 강원도 산골에서 살아온 사람들인 만큼, 등산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 * *
이튿날.
폐광에 대피한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대로 대피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백훈이 준비해 둔 세간살이가 있었고, 기본적인 생필품들도 충분했기에 지내는 데 딱히 불편할 일은 없었다.
그저, 폐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정도?
그마저도 다들 크게 불편해하지 않았다.
폐광으로 대피한 인원 중 과반이 마을 어르신들이었다.
어르신들 대부분은 평소에도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볼 때를 제외하면 거의 전기를 소비하지 않았다.
마을 어르신들은 그저 백훈이 틀어 놓는 라디오 하나면 그다지 심심해하지도 않았다.
[치지직- 103.9MHz 영동FM에서 알려드립니다.] [치직- 현재 정선, 영월, 평창 곳곳에서도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시민들께서는 되도록 외출을 삼가시고, 자택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치지직- 다시 한번 안내 말씀드립니다.].
.
.
모든 라디오 채널에서 재난안내 방송만을 송출하는 데도 말이다.
다들 산속 생활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기에 백훈이 따로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없었다.
폐광 내부에는 4명이 1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식량들이 갖추어져 있었고, 어제 오전에 마트에서 챙겨 온 통조림들까지 합치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
식량 대부분은 곡물, 건식품, 염장 식품 같은 형태로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할 걱정도 없었다.
현재 폐광에 머무는 인원이 11명인 만큼, 식량을 아껴서 소비한다고 하면 6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게다가 폐광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강원도 사람인 만큼, 다들 산에서 먹을 것을 채취하는 데 도가 텄다.
벌써 몇몇 할머니들은 소일거리 삼아 폐광 주변을 돌아다니며, 산나물이나 열매 등의 먹을거리를 채집하고 있었다.
그 사이, 백훈은 HAM 통신을 이용해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치직- CQ! CQ! 여기는 Delta Sierra 2△△△. 주파수 체크. 누구 계십니까?] [치지직- Hotel Lina 3▽◇◎ 수신했습니다. 주파수 120에서 수신하겠습니다. 오바-] [치직- CQ! CQ! 여기는 Delta Sierra 2△△△. QTH 강원도 정선입니다. 들리십니까? 오버] [치지직- Hotel Lina 3▽◇◎ 수신 신호 강도는 R5 S9. QTH 강원도 양양. 백 소령, 오랜만이야. 무사히 대피했나? 오버.] [치직- 김 중장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는군요. 저는 잘 대피했습니다. 양양 상황은 어떻습니까? 오버.] [치지직- 여기도 마찬가지지. 그래도 다들 잘 대피한 모양이야. 속속들이 연락을 해 보는 중인데, 모임에 있는 친구들은 다들 무사한 것 같아. 오버-] [치직- 다행입니다. 다들 이런 상황들을 조금씩 염두에 둔 덕이죠. 현재 비상 연락망을 만드시는 중입니까? 오버.] [치지직- 그래, 그리고 각자 대피 중인 캠프 위치도 조사 중이야. 백 소령도 캠프 위치 확인해서 알려 줘. 오버-] [치직-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버.] [치지직- 그래, 무슨 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 주시게. 주변에 지원할 수 있는 인력이 있으면 보내 주도록 하지. 나는 급한 일이 생겨서, 무전은 다음에 또 하기로 하지. 73. 오버-]퇴역 군인의 모임인 ‘그림자 여단’에서 회장직을 맡은 ‘김대호 중장’과의 HAM 통신을 마쳤다.
일평생 북한의 도발과 위협에서 나라를 지킨 사람들, 그리고 국제질서 수호와 국위 선양을 위해 여러 전장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퇴역한 후에 결성한 모임.
모임에 소속된 사람들 대부분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이유로 백훈이 준비해 둔 것과 같은 피난처들을 만들어 두었다.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퇴역 군인 모임은 구성원 대부분이 위험을 함께 극복해 낸 전우였기에 항상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전국 각지의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는 정보원은 만든 셈.
이제는 백훈이 만든 캠프를 오랫동안 운영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만 남았다.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계속되고, 어떻게 변해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백훈에게는 그저 폐광에서 함께 생활하는 10명의 생존이 가장 중요했다.
퇴역 군인 모임의 구성원들끼리 생존을 공조하기 위해서는 김대호 중장을 중심으로 긴밀하게 뭉쳐야만 했다.
스윽- 촤르륵-
백훈은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어디 보자, 위도(Latitude)랑 경도(Longitude)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