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ctious Disease Survival RAW novel - Chapter 153
153화 군부대 (6)
진료소 구석의 스테인리스 캐비닛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했다.
저벅- 저벅- 저벅-
딸칵- 기이익-!
족히 2m는 넘어 보이는 철재 캐비닛을 열자, 여러 층의 선반이 눈에 들어왔다.
각 선반에는 증상에 맞는 여러 종류의 약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항생제, 소염제, 진통제, 해열제, 근육이완제 등의 약품이 내복약, 연고, 주사제의 형태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입원실과 의무대 창고가 난장판인 것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광경.
그도 그럴 것이, 감염자를 진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데다가 애당초 처방한 약을 먹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처방한 약을 먹였을 때, 효능이 있었냐?
자신 있게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원룸 건물에 숨어 감염병 발발 초기의 상황을 지켜본 입장에서 의견을 내보자면, 구급 대원들이 감염자에게 여러 종류의 약을 처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있었다는 경우를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대대의 병력이 계엄에 동원되어 갔을 때, 군의관 또한 같이 동원되어 갔을 것이기 때문에 부대에는 약을 처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은 단연 나와 민수였다.
두리번- 두리번-
캐비닛 내부를 아무리 둘러봐도, 뭘 어떻게 챙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의약품에 대한 세부적인 지식이 없었기에 캐비닛에 정리된 약들을 죄다 쓸어 담을 수밖에 없었다.
“민수야, PX에서 비닐봉투 챙겨 온 거 있지? 투명한 건가?”
“네, 당연히 있죠. 근데, 투명하진 않고, 하얀색이에요.”
“그거면 충분하지, 그럼 봉투 좀 줘 봐.”
“넵, 잠시만요. 몇 장 드릴까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여섯 장만 주면 돼.”
“알겠습니다. 일단 한 장 받으세요.”
부시럭- 부시럭- 촤악-!
스윽- 와르륵-
민수에게 비닐 봉투를 받자마자 항생제 칸에 있는 모든 약품을 봉투 안에 쓸어 담았다.
그 뒤로도 용도가 같은 약품들을 봉투 하나에 죄다 쓸어 담는 행동을 반복했다.
부시럭- 부시럭- 촤악-! 스윽- 와르륵-
부시럭- 부시럭- 촤악-! 스윽- 와르륵-
부시럭- 부시럭- 촤악-! 스윽- 와르륵-
.
.
잠시 후, 캐비닛 옆에는 하얀색 봉투가 여섯 묶음이 만들어졌다.
딸칵- 스윽- 스윽- 스윽-
유성펜을 꺼내 캐비닛 선반에 적혀 있던 약품의 효능을 각 봉투 위에 적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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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적 지식이 전혀 없다시피 하지만, 몸이 어떻게 아플 때 어떤 성분을 섭취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적정 복용량을 모를 뿐이지만 말이다.
‘그냥, 병원에서 처방받는 것처럼 소염제 한 알, 진통제 한 알. 이런 식으로 먹으면 되겠지……?’
약품 외에도 군의관 자리에 있는 수술용 도구들도 챙겼다.
라텍스 장갑이 들어 있는 상자, 상처 봉합용 바늘과 실, 소독용 알콜 등.
의무대에는 쓸 줄만 알았다면, 챙겨 갈 만한 것들이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수액을 꽂을 줄도 모르는 데 수액과 바늘을 챙겨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우리의 배낭도 슬슬 공간이 부족해지고 있었기에 더 많은 것들을 챙겨 갈 수는 없었다.
“의무대에서 챙길 것도 다 챙긴 것 같다. 다음 건물로 이동하자.”
“그러시죠.”
철컥- 끼이익-!
의무대 출입문을 열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부대 중앙에 자리한 3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아마도 저곳에 부대 운영에 필요한 행정 시설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두리번- 두리번-
터벅- 터벅- 터벅-
의무대를 빠져나와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이동했다.
적색 벽돌로 지어진 3층 건물은 딱 보기에도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이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에는 총 3개의 출입구가 있었다.
그중 우리가 진입할 곳은 건물 동쪽에 나 있는 출입구였다.
타다닥- 타다닥-!
투욱-! 툭-!
건물 출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최소한의 무장만을 갖춘 채, 메고 있던 가방을 문 안쪽에 내려 두었다.
부대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인 만큼, 빠르게 둘러보기 위해서는 기동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60L가 넘는 배낭을 땅에 내려놓자, 기동력은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샤샤샥- 샤샥-!
민수는 양손에 활과 화살을 든 채 내 뒤를 쫓았고, 나는 한 손에 마체테를 쥔 채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건물 내부는 단순했다.
마치, 일반적인 학교 건물과도 같은 생김새였다.
건물의 끝에서 끝으로 관통하는 복도가 있었고, 중앙과 좌우에 계단이 있는 구조였다.
1층 복도에 들어서자 각 호실의 명칭이 적힌 팻말이 출입문 위에 걸려 있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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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있을지 모르는 만큼, 조심스럽게 복도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살금- 살금- 살금-
동쪽 복도에서 가장 가까운 건, 이었다.
‘간부 휴게실 위치 선정 미쳤네…….’
애당초 지휘통제실과 대대장실 옆에 간부 휴게실을 뒀다는 건, 그냥 쓰지 말라는 얘기나 다를 게 없었다.
1층에 대대장실이 있는 만큼 대대장이 수시로 드나들었을 것이었다.
게다가 중대장이나 행정 부서의 과장급 장교들이 당직 사령을 서는 지휘통제실이 바로 옆에 있는데, 어느 간부가 여기서 쉴 생각을 할까 싶었다.
‘작전 과장이나 주임원사 정도는 되야 들어가서 커피도 한잔 마시고 하겠지…….’
그래도 안에 뭐가 있는지 살펴는 보고 지나가야 했기에 출입문을 열고, 내부를 확인했다.
철컥- 끼이익-!
스윽- 두리번- 두리번-
간부 휴게실의 내부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어디에선가 주워 온 낡은 소파와 탁자, 그리고 구석에 놓여 있는 생수통 정수기.
굳이 들어가서 확인해 볼 필요성도 못 느꼈다.
“민수야, 바로 옆에 있는 통신과로 가자.”
“알겠습니다.”
살금- 살금- 살금-
딸칵- 끼이익-!
부대의 통신을 담당하는 내부에는 이런저런 통신 장비들이 많았다.
유선 통신을 위한 장비와 통신선.
무선 통신을 위한 장비와 거대한 안테나들.
얼룩덜룩한 위장무늬로 덧칠해진 통신 장비들이 통신과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이 중에서 쓸 수 있는 장비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부대에 전기가 끊겼기 때문.
애당초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것도 트럭에 시동이라도 걸어 볼 생각으로 발전기와 연료를 찾아 부대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중이었다.
“전기만 들어왔어도 요새나 강원도에 통신이라도 시도해 보는 건데…….”
“발전기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건 모르겠다. 아직 안 둘러본 곳도 있으니까…….”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슬슬 다른 곳을 둘러보자. 전기가 없는 이상, 통신 장비는 무용지물이야. 거기다가 우리는 짐이 너무 많아서, 무선 통신 장비까지 들고 다닐 여력이 없어.”
육군 무선 통신의 주력 장비인 PRC-999K는 무게만 해도 12kg이 넘었기에 지금 우리가 들고 있는 배낭에 추가로 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휘익- 딸칵- 끼이익-!
두리번- 두리번-
살금- 살금- 살금-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통신과’를 빠져나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지휘통제실이었다.
고요한 복도에는 들릴 듯 말 듯한 발걸음 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만이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철컥- 끼이익-!
.
부대 안팎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며, 지휘를 담당하는 곳.
대대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지휘통제실은 365일 24시간 내내 영관급 이상의 장교들이 상주하며 업무를 보는 공간이었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공간이 지금은 유령함대처럼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부대 주변을 감시할 수 있는 모니터, 외부와 통신을 주고받는 유·무선 통신장비, 부대 인근에 설치된 각종 알람 장치들의 동작이 모두 멈춰져 있었다.
“싸늘하네…….”
“그러게요. 이곳은 사용 안 한 지가 굉장히 오래된 거 같은데요?”
“아마 5달은 됐을 거야. 생존자의 일기를 보면, 부대의 마지막 지휘관이 죽은 게 다섯 달 정도 됐어.”
“그 사람은 도대체 왜 여길 탈출 안 하고, 전역 날짜가 될 때까지 이곳에서 꾸역꾸역 버틴 걸까요?”
“처음엔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섣불리 탈영하지 못한 거 같고, 나중엔 이곳을 떠나면 갈 곳이 없어서 버틴 게 아닐까 싶네.”
“여러모로 안타깝네요. 그 사람은 과연 부대 안에 있을까요? 아니면, 흔적도 안 남긴 채 빠져나간 걸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다. 살아 있는 거라면, 한 번 정도는 마주쳤어야 말이 되는 건데…….”
하지만, 부대 내의 마지막 생존자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휘통제실 내부에서 쓸 만한 것들을 서둘러 찾아봐야 했다.
지도, 통신 장비, 전술 교본, 작전 매뉴얼 등이 있는 지휘통제실에는 딱히 우리가 쓸 만한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뒤져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두리번- 두리번-
뒤적- 뒤적-
“망원경 찾았다!”
책상의 서랍을 뒤지던 중, 제법 성능 좋은 망원경을 찾았다.
그와 동시에 지휘통제실 구석을 살펴보던 민수에게서 더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형, 여기 탄통이 있어요!”
“탄통? 이리 가져 와 봐. 얼른 열어 보자.”
민수가 가져온 탄통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자물쇠 따위는 단번에 끊어 버릴 수 있는 볼트 커터가 있었기에 전혀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스윽- 쫘악-
그그그그극- 뚜둑-!
고경도 탄소강으로 만들어진 볼트 커터의 날이 자물쇠를 엿가락 끊어 내듯 잘라 버렸다.
딸칵- 철커덩-!
탄통의 잠금장치를 푼 뒤 뚜껑을 열어 내부를 확인해 보니, 앞서 두 번째 막사의 행정반에서 구했던 것처럼 5.56mm 탄약이 들어 있었다.
초병을 위한 탄약이었기에 공포탄 1발과 실탄 9발로 구성된 탄창 4개가 들어 있었다.
이로써 K2 소총에 사용할 수 있는 5.56mm 탄약은 실탄이 94발, 공포탄이 6발 생긴 셈이었다.
“오……! 대박!”
“후후, 앞으로 절 ‘불릿 파인더’라고 불러 주세요.”
“아…… 그건 좀…… 민수 씨, 혹시 중2병 걸리셨어요?”
“형, 좀 받아 줘요! 맨날 ‘밀떡’이네 ‘프떡’이네 하면서 TMI 해도 제가 다 받아드리잖아요?”
“아니, ‘밀떡’이 아니라 ‘밀덕’이라고. 밀.리.터.리.덕.후. 그리고, 니가 뭘 받아 줘? 맨날 말 좀 할라치면 끊어 먹기나 하지.”
“그럼, 앞으로 설명 안 잘라먹고 들어드릴 테니까, 저한테도 맞장구 좀 쳐 주세요.”
“그래, 알았다. 불릿 파인더님.”
“후후……. 이제야 제 진가를 알아보시는군요. 아무래도 전 파인더의 기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부터 보물찾기 같은 걸 하면, 기가 막히게 찾아냈거든요.”
‘생각은 단순한데 시력과 집중력이 좋아서 그런거겠지…….’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선뜻 나를 쫓아와 준 고마움 탓에 말을 삼켰다.
“여기서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겼으니까, 다음으로 이동하자.”
“네, 알겠습니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대대장실로 가자.”
부대 내부를 둘러볼수록 무장 수준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었다.
지금은 처음 부대를 돌아다니던 것과는 달리 반쯤은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