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84
‘그거면 됐어.’
진심을 알았기에, 그녀는 웃을 수 있었다.
“괜찮아, 페르미. 네가 하려는 일을 해. 나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 돼.”
“닥쳐. 진짜로 죽일 거야.”
슈라가 세리엘의 목을 조이는 상황에서도 페르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리엘, 에이미는 곧 죽어. 내가 시로네에게 제안했거든. 그녀가 살아서는 안 된다고.’
그렇다면 세리엘은?
“키이!”
슈라가 뱀처럼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세리엘의 목을 부러뜨리려는 순간.
“자.”
페르미는 서류를 내밀었다.
‘도망치지 말자.’
세상 모두에게 비난을 받더라도.
“컥! 컥!”
숨통이 트인 세리엘이 바닥에 쓰러지자 페르미가 표창처럼 서류를 날렸다.
“가져가. 미래의 정보다.”
빠르게 그것을 낚아챈 슈라는 손톱으로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흥.”
그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더니 그 자리에서 공기처럼 증발했다.
“괜찮아?”
페르미가 세리엘의 상태를 살피려고 허리를 숙이는 순간, 곧바로 멱살이 들렸다.
“이 미친 자식아! 그걸 주면 어떻게 해!”
“내가 예언하지. 너는 내 오른쪽 뺨을 때릴 거야. 억!”
복부를 맞은 페르미가 물러섰다.
“네가 말했잖아, 4번이라고. 1, 2, 3번이 아니란 말이야. 너는 슈라에게 그걸 주면 안 돼.”
페르미의 의지가 담긴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너는 죽어.”
“사소한 일이야!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친 거라고! 차라리 날 죽였어야지!”
“죽일 수 없으니까…….”
페르미는 배를 움켜쥔 채 씁쓸하게 웃었다.
“미래인 거야.”
세리엘을 죽인다는 선택지는 페르미의 마음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기에.
“이…… 멍청이.”
감동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그녀는 페르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한 대 맞았으니 12배로 되돌려줘야지.”
세리엘의 고개가 들렸다.
“방법이 있어?”
그녀에게 윙크한 페르미가 엄지손가락으로 1개의 칩을 허공에 날렸다.
“감가상각의 거래.”
베론 문제 (4)
능력명은 이미지 카피.
머릿속으로 암기한 것을 출력해서 뽑아낼 수 있는 마법으로, 규정외식에 속한다.
“이거 상당히 비싼 거라고. 왜냐하면…….”
페르미가 마법을 발동하자, 조금 전 그가 들고 있던 서류가 그대로 복제되었다.
“노동력을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지. 일단 전부 암기하면 계속 찍어 낼 수 있거든.”
시간이 촉박했던 이유였다.
“그래서? 그걸로 어쩌려고?”
“정보 엔트로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느냐에 따라 정보의 가치는 달라지지. 예를 들면…….”
페르미가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 둘만의 취향 말이야. 그건 절대로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거잖아?”
세리엘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죽을래?”
“어쨌든 그런 거야. 현재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 그리고 슈라. 아마도 아이론의 국왕도 알게 될 테고…….”
페르미는 서류를 건넸다.
“자, 하나 가져.”
서류의 가치를 알고 있기에 세리엘은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너, 설마?”
“그래.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는 가치가 없어. 이제부터 나는 성전 12개국 전부에 이 서류를 공문으로 전달할 거야. 한마디로, 이 정보는 똥값이 되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 모두가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통제할 수 없게 될 텐데. 정보를 갱신할 방법이 있다면 모를까.”
“그건 안 돼.”
오메가 999년의 끝에 온 지금, 아포칼립스로 다시 가는 것은 무리일 터였다.
‘간다고 해도 채굴은 불가능할 거야.’
신의 개입이 거의 확실한 상황이었다.
“딱히 갱신할 필요는 없어. 서류에 담긴 건 성전 지도국에 대한 정보니까. 정말로 중요한 건 넣지 않았거든.”
물론 관심도 없겠지만.
“중요한 정보?”
에이미의 사망을 떠올린 페르미가 입을 다물자, 세리엘도 더는 묻지 않았다.
‘미안하다, 시로네.’
영원한 앙숙에게 사과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인 사람이 오직 시로네뿐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알고도 기억을 지우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세리엘을 뒤로하고 창문을 연 그는 델타 바깥의 수많은 사건들을 지켜보았다.
‘종말의 시간.’
세계의 나침반이 핑글핑글 도는 기분을 느끼며 페르미는 손을 들었다.
‘이미지 카피.’
같은 내용의 서류 수십 장을 손에 쥔 페르미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인간이 얼마나 멀리까지 볼 수 있을까?”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욜가의 아들.’
멀리 보는 자.
아니, 최후를 보는 자가 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린 페르미는 창밖을 향해 서류 뭉치를 한꺼번에 뿌렸다.
하얀 종이가 나비처럼 날아다니자 본청 바깥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뭐야, 저건?”
페르미가 세리엘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엔트로피 제로.”
그렇기에…… 미래는 다시 원점이었다.
한편, 페르미에게 정보를 받은 슈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복도를 걸었다.
서류를 빠르게 살피기는 했지만, 세계 지도국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페르미가 던진 화두였다.
‘베론 문제라고 부른다지.’
십로회 서열 1위 베론이 아이론 왕국에 심은 철극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의지는 율법을 넘어 그 시간, 그 공간에 지금도 각인되어 있다.’
세계에 심은 철심.
‘인간은 진실로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
만약 미래를 알고 다른 행동을 취한다고 해도, 그것조차 이미 정해진 미래였다면?
‘베론은 그 문제를 극한까지 끌어가고자 했다. 단지 하나의 철학적 기둥이 아니야. 지금도 철극은 신의 율법을 버티며 그 자리에 박혀 있다.’
신이 그 기둥을 뽑는다면 신의 승리일 테지만, 만약 뽑지 못한다면…….
‘인간은 바꿀 수 있어.’
신의 의지와 전혀 다른 미래를 만들어 낼 것이다.
‘나는 기다린다.’
슈라는 서류를 손에 쥐었다.
아이론 왕국에 철극이 있는 한 그녀는 국왕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것이다.
‘진정한 왕이 돌아올 때까지.’
***
상아탑을 오르는 시로네의 얼굴은 창백했다.
‘끝이 없다.’
마족들은 1군, 2군, 3군으로 나뉘어 각 층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야훼를 죽……!”
미라클 스트림의 섬광에 휩싸인 마족들이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크아아아!”
본래라면 이미 정화되고도 남았어야 하지만 육체의 반이 녹은 게 전부였다.
‘더 강해졌어.’
무엇보다 제1군단장 바알이 전보다 얼마나 더 강해졌을지가 문제였다.
“죽여! 소멸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저항할수록 야훼는 더욱 괴로워할지니!”
마족들은 겁을 상실했다.
‘용맹이 아니야.’
타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행복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아타락시아.’
어쩔 수 없는 마의 본성일까?
“크아아아!”
또다시 증폭된 힘 앞에서, 이번에는 마족들도 형체를 유지하지 못했다.
섬광이 지나간 자리에는 마족들의 발목 한 쌍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아! 하아!”
시로네는 다시 정신력을 회복했다.
‘시간을 끌고 있어.’
시로네를 이곳에 묶어 두는 동안 바알이 태성을 제거하는 전략이었다.
물론 상아탑의 별들도 상층부를 지키고 있기에 쉽게 도달하지는 못할 테지만.
“…….”
이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발목만 남아 있는 마족들의 사이를 지나가며 시로네는 감정이 북받쳤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인간은 없어.”
그저 지금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 외에는 행복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악의 방법론을 따르는 것뿐이야.”
그렇게 믿고 싶다.
시로네 또한 악이 밉고,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변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그저 원인에 따라 선악공애가 정해진다면, 인간은 대체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
샤갈은 절규했다.
“변하지 않아!”
태극의 사슬을 타고 전해지는 에텔라의 고통에 정신이 반쯤 날아간 상태였다.
“너희들이 뭘 알아?”
앞을 가로막는 마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샤갈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모든 과거가 신에 의해 조작된 기억일 뿐이라면.
“나처럼 살아 보지도 않았으면서!”
누구라도 샤갈이 될까?
“나는 악이다! 절대 악이야! 다 죽일 거야! 전부 다 죽여서 나만 남으면……!”
그때는 이 울분도 사라질까?
“으아아아!”
엄청난 고통에 샤갈은 무릎을 꿇었다.
에텔라의 비통한 감정이 샤갈의 분노를 키우고, 그 분노는 다시 에텔라에게로.
그렇게 태극은 한계를 모르고 커져 갔다.
-남은 정화 시간 82해 873경 7,601조…… 하아…….
인포메이터의 한숨이 들렸다.
명백한 방송 사고지만 화공사의 인포메이터 리오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에 4해의 시간이 증발했어.’
그만큼 거대한 업.
물론 알고 있었지만, 처음 이면 세계에 그들이 왔을 때 리오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대체 이 업을 어떻게 정화시킬 것인지.
‘이런 결과라니.’
우주가 끝날 때까지 지옥에 있을 것 같던 두 사람의 결론에, 생각이 깊어졌다.
리안을 담당하는 비비안이 물었다.
“리오나, 뭐 하는 거야? 안내 멘트는 정확히 해야지. 사장님이 알면 어쩌려고?”
“글쎄.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지. 어쩌면 우리도…….”
그들 또한 관리자였기에 알고 있다.
“여기가 마지막인 거겠지.”
신이 세계를 닫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즐거웠잖아, 우리.”
어깨를 짚은 비비안의 손을 어루만진 리오나는 다시 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류 최후의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