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53
카니스는 남의 물건을 놓고 품평하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스승님의 유물을 팔 생각은 없다. 함구한 이유는 자신의 희생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고대 유물을 공개하면서까지 천국에 가고 싶다는 의지였다.
“음, 엑스마키나라. 그리고 이것은 메타게이트.”
시로네는 중얼거리다 말고 카니스를 돌아보았다.
“어라, 그런데 어떻게 이름을 알고 있어? 아케인은 기억을 지웠다고 했잖아?”
“쪽지에 적혀 있었어. 단어의 나열에 불과했지만. 비밀 장소를 발견하더라도 어떤 내용인지 유추하지 못하게끔 한 거겠지. 스승님다운 치밀함이야.”
“다른 건 뭐가 적혀 있었는데?”
“딱히 대단한 건 아냐. 천국에 대한 설명은 조금도 없었어. 그만큼 밝히고 싶지 않으셨나 봐. 하지만 우리는 탐색할 수 있어. 바로 메타게이트가 있기 때문이지. 어때, 이 정도면 이모탈 펑션에 대한 거래가 될까?”
생각해 볼 여지는 있었다. 공포로만 다가오던 천국이 작은 설렘으로 변했다는 사실만 봐도 그랬다. 카니스와 함께라면 생환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하지만…… 그가 얻는 건 무엇일까?
“어째서 천국에 가려는 거야? 단지 아케인이 갔다는 이유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잖아. 그렇다고 자세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너희가 천국에 가려는 동기를 들어야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함정일 가능성을 끝까지 따져 보는 시로네의 모습에서 카니스는 오히려 신뢰감이 들었다. 위험한 곳으로 떠나야 한다면 덜떨어진 마법사보다는 시로네와 동행하는 게 몇 배는 효율적일 테니까.
2. 거핀의 문 (2)
“스승님이 천국에 갔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8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
“아니, 모르겠는데.”
“천국에 가기 전의 스승님과 천국에서 돌아온 스승님은 마법협회에서 지정한 등급 자체가 달라. 즉, 천국에서 무언가를 깨닫고 대마법사가 된 거야. 마법사라면 누구나 대마법사가 되기를 원하지. 이런 사실을 알고서도 천국에 가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시로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국에서 돌아온 아케인이 3급이 되었다면 그를 각성시킨 무언가가 천국에 존재한다는 얘기였다.
시로네가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자 카니스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일말의 정보까지 털어놓았다.
“스승님의 쪽지에 적힌 건 대부분 단어였지만 마지막에는 유일하게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어.”
“어떤 문장인데?”
“이런 글귀였지. 그곳은 모든 것의 원점. 스키마의 원류와…….”
리안의 눈이 빛났다.
“스키마?”
카니스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망각된 고대 마법…….”
에이미가 되물었다.
“고대 마법?”
“침묵하고 있는 고대 병기들을…….”
테스가 소리쳤다.
“고대 병기!”
카니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희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냐?”
“호호호! 미안. 빨리 말해 봐.”
테스가 너스레를 떠는 게 짜증 났지만 카니스는 결국 문장을 전부 읊었다.
“이 메타게이트에 두고 떠난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
천국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정보에 접근할 수 없게끔 남겨진 메모였다.
아케인의 기억을 물려받은 하비스트조차 대륙을 헤맨 끝에 찾아낸 비밀 장소. 최후까지 연막을 쳤다는 것만 봐도 그가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기록을 남긴 건…… 어쩔 수 없는 악동의 기질이 아닌가 싶었다.
한 줄의 문장에 지나지 않지만 쪽지는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우선 천국에는 스키마와 마법이 있다. 따라서 인간이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고대 유물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터였다.
아케인은 문자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상의 검사와 마법사들이여, 메타게이트 너머에 고대 유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렇다면 고대의 유물이란 과연 무엇인가? 어떤 역사책에도 유물에 대한 기록은 없다.
시로네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감을 잡았다.
“고대 마법. 고대 유물. 모든 것의 원점.”
“그래. 스승님은 알고 계셨던 거야. 인간은 언제부터 스키마를 익히고 마법을 부렸을까? 생물적인 원리라면 동물에게서도 스키마가 발현이 되어야 해. 하지만 아무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도 스키마와 스피릿 존의 탄생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아. 이게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알겠어?”
“인간은 처음부터 깨닫고 있었다. 모순적이긴 하지만 이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바로 그거야. 더 자세히 말하면 인간이 있기 전부터 스키마와 마법은 존재했다. 카둠은 천국을 고향이라고 불렀어. 신화에 불과한 얘기지만, 우리는 이제부터 신화를 나침반 삼아서 나아가야 해.”
역사 이전의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학자도 밝혀내지 못한 인류의 기원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거리를 측정할 수 없는 하늘의 별 어딘가에.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전부 말했어. 결론은 그곳에 가겠다는 거야. 스승님의 유지를 잇는 것은 물론이고 마법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 나와 아린은 여기에 대해 합의를 끝마쳤어. 어떤 일이 벌어져도 원망하는 일은 없을 거야.”
“나, 나도 갈래!”
에이미가 합류 의사를 밝혔다.
마법사에게 마법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었다. 또한 카니스와 아린이 같은 학교의 라이벌이 된다는 사실도 마음을 움직이는 데 일조했다.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는 몰라도 메타게이트가 있지 않은가? 돌아올 방법이 있음에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에이미가 가면 나도 갈래! 시로네, 우리 가자!”
테스가 에이미의 편을 들었다. 주인 없는 고대 병기가 기다리고 있다는데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메타게이트 하나만으로도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고대 병기는 세상에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물건. 거리에 뒹구는 돌멩이 하나만 주워 와도 본전이라는 생각이었다.
“아니. 난 아무도 데려가지 않을 거야. 나도 가지 않을 거고. 너무 위험해. 우리가 천국에 가는 건 옳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아.”
시로네의 말에 모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아까웠다. 세상의 어떤 마법사에게도 찾아오지 않는 기연이었다. 아케인 또한 천국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에 대마법사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던가?
“위험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카니스에게 돌아올 방법이 있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야. 출구가 있고 없고는 상관없어.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너희를 위험에 빠트리게 할 수는 없다는 얘기야.”
카니스는 이를 갈았다.
시로네의 박애 정신은 건널 수 없는 다리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때부터 알았다. 그렇기에 갖은 전략을 짜서 여기까지 상황을 끌고 온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철벽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가지 마. 하지만 우린 거래를 했어. 너는 나와 아린을 천국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줘야 할 거야.”
“아니. 나는 너도 보내지 않을 거야.”
“이 자식아! 이제 와서 배신을 때리는 거냐?”
“그렇게 생각해도 할 수 없어. 하지만 이제는 너도 우리 학교에 입학한 동급생이야. 내가 문을 열어서 너를 사지로 내몬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누가 내 목숨 걱정해 달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리고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잖아!”
언제나 시로네의 의사를 존중하는 에이미지만 이번만큼은 카니스의 편을 들었다.
“그래, 시로네. 좋은 기회잖아. 그리고 처음부터 이 정도 위험은 감수했던 거 아냐? 너는 미로에 대해 알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잖아.”
시로네의 언성이 높아졌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 만약 너라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자고 할 수 있어? 우리를 데리고 조금 전에 봤던 별로 가자고 할 수 있겠어?”
‘아니, 죽어도 못 하지.’
그런 문제였다. 위험과는 별개의 문제.
시로네가 혼자서 왔다면,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갖추어졌다면 당장이라도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언로커로서 친구들의 목숨을 떠안고 들어가는 건 철없는 짓이었다. 시로네는 적어도 이들 중에서는 가장 어른스럽게 판단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에이미가 시로네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얼얼한 이마를 부여잡은 시로네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말했다.
“당연히 나는 천국으로 가자고 할 거야.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기회니까.”
에이미는 거짓말을 했다.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또한 냉철한 판단을 저해하는 요소다. 그렇다면 부담을 덜어 주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로네는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이건 정말로 위험한 일이야. 메타게이트가 있더라도 그곳이 어딘 줄 알고? 갔다가 바로 돌아올 것도 아니잖아. 가고자 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위험도는 높아진다는 걸 왜 모르는 거야?”
“그럼 너는 왜 여기까지 나를 데리고 온 거야?”
“뭐? 그건…….”
“네가 말했잖아, 나라면 안심할 수 있다고. 그래서 집까지 찾아온 거 아냐? 아니면 뭐야, 설마 여자 하나 끼고 관광이나 하려고 그런 거였어?”
에이미는 공격적으로 쏘아붙였다. 효과가 있는지, 시로네의 말문이 막혔다. 하루가 아까운 졸업반을 섬으로 데려왔으니 그에 대한 책임도 있었다.
테스가 가슴을 두드리며 에이미의 의견에 일조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문을 여는 사람이 너라고 해도 따라가고 말고는 전적으로 나의 의지라고. 거기까지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게다가 어차피 갈 거라면 나와 리안도 충분히 전력에 보탬이 될 거야.”
어떤 파티든 검사는 중요하다. 그들에게는 마법사가 가지지 못한 용맹함과 동물적인 감각이 있었다. 그들이 창출해 낸 1초의 기회가 마법사에게는 생과 사를 가르게 되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시로네가 갈등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카니스는 메타게이트를 숨겼다. 하지만 노크의 주인은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문을 열지 않았다.
시로네가 출입을 허락하자 마하투가 들어왔다. 불청객이라면 불청객이었다.
시로네 일행이 멀뚱히 바라보자 마하투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낮에는 죄송했습니다. 정식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괜찮아, 다 잊었으니까.”
물론 에이미는 잊지 않았다. 하지만 마하투가 방문한 이유가 사과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넘어가기로 했다.
예상대로 마하투가 본론을 꺼냈다.
“천국에 가실 겁니까?”
시로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들의 강력한 설득에 흔들리기는 했지만 생각은 여전히 의문부호였다.
“가지 마십시오.”
친구들의 눈살이 구겨졌다.
족장의 말에 의하면 시로네는 케르고 부족의 흥망을 쥐고 있는 열쇠였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하투가 말린다는 건 의외였다.
시로네가 거의 넘어왔다고 생각했던 카니스는 마하투가 초를 치자 언짢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가지 말라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마하투는 두 팔을 교차했다. 숨을 들이마시자 근육이 부풀더니 눈에서 강렬한 기운이 뿜어졌다.
압도적인 프레싱이었다.
시로네 일행은 몸이 뒤로 넘어가는 착각을 느꼈다. 어쩌면 넘어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살기까지 실었다면 숨조차 쉬지 못했을 터였다.
모욕을 줄 생각은 아니었던 마하투는 금세 프레싱을 풀었다. 하지만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죄송합니다. 주제넘게 서투른 실력을 뽐냈습니다.”
마하투의 사과를 진심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강함에 절대적인 건 없지만 고수와 하수의 경계선은 엄연히 있는 법이다. 마하투의 수준이라면 자신의 강함을 스스로 알고 있을 터였다.
“저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성취와 희생의 방에서 실력을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로네는 마하투의 의도를 깨달았다. 자신의 힘을 기준으로 천국의 난이도를 알려 준 것이다.
전사와 마법사를 똑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설득력은 충분했다.
“케르고인도 시험을 보는 거야?”
“물론입니다. 성취와 희생의 방에서 힘을 증명하면 케르고의 전사들에게도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려면…….”
“네. 반드시 언로커가 있어야 하죠. 화산재에 묻힌 천국의 문이 복원되었을 때 수많은 자들이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에 미로 님은 성취와 희생의 방을 만들어 실력을 검증받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언로커는 예외지만 실력으로 통과할 정도가 아니라면 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
돌아온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도 그렇지만 미로의 이름이 마하투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떻게 미로를 알죠? 설마 직접 만난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간부들은 대부분 그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미로에 대해 알기 위해 여기에 온 거예요.”
“과연, 그러셨군요.”
마하투는 시로네가 금화나 여자에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미로와 얽혀 있는 사람이라면 방탕한 언로커들과는 확실히 다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케르고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천사를 따르는 무리와 천사에게 대항하는 무리의 갈등이었죠. 반反천사파가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화산 폭발로 부족은 멸망 직전으로 내몰리고 말았죠. 천사파의 사람들은 화산 폭발을 천사가 내린 재앙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루프가 내란을 일으켰다는 학자들의 견해는 틀렸다. 천사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만으로도 케르고의 수뇌부만이 공유하는 1급 비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250년이 지나서 한 명의 외부인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이름은 맥클라인 거핀. 시로네 님과 같은 언로커였습니다. 그는 화산재에 파묻힌 케르고의 유적을 복원했고 천국으로 가는 문을 열었습니다. 저희는 그 문을 거핀의 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건은 또 다른 분란을 야기했습니다. 250년 전의 분란이 다시금 조장되기 시작한 거죠. 이번에는 천사를 따르는 파벌이 승리했습니다. 정권이 바뀐 거죠. 그게 바로 현재의 케르고입니다.”
2. 거핀의 문 (3)
“그 파벌의 현재 수장이 카둠 족장이군요.”
시로네는 연회에서 느꼈던 두 가지 시선을 떠올렸다. 언로커를 환대하던 장로들은 천사파일 것이고 고깝게 쳐다보던 쪽은 반천사파일 것이다.
그런 분류법으로 따졌을 때 족장의 아버지인 하시드는 반천사파였다. 그리고 마하투도.
“카둠 족장은 케르고를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루프를 밀매하는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우습지만, 신의 사자에게 부족의 운명을 맡기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반천사파의 혈통으로, 원래는 노예가 되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갈리앙트 자치 정부가 저지른 인간 관광에 대해 들으셨을 겁니다. 거기에 희생당한 대부분이 반천사파였죠. 저의 어머니 또한 외지인에게 납치당했습니다.”
에이미는 마하투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앙금을 지우기로 했다. 부모님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외지인에게 적개심을 표출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100년 전 케르고 부족은 문명의 침투로 흔들렸습니다. 갈리앙트 자치 정부가 인간 사냥을 시작하면서 반천사파의 분노가 거세졌죠. 세 번째 내란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였고, 멸망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되돌린 분이 계십니다. 무분별한 천국행을 막기 위해 성취와 희생의 방을 설계하여 내란을 종결시킨 사람. 그분이 바로 미로 님입니다.”
시로네는 미로의 모습을 떠올렸다. 감정의 변화가 심해 보이는 눈동자에서 섬뜩함을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미로의 시공에 들어가기 전의 그녀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사실 지금도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에 비하면 훨씬 낫지요. 미로 님 덕분입니다.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저 또한 일개 노예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로는 지금 어디에 있죠?”
시로네는 그녀가 이스타스의 중간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취와 희생의 방을 설계한 이후, 미로 님은 거핀의 문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자리에 없었지만 듣기로는 거핀을 만나러 간다는 말을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에이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만. 거핀은 250년 전 사람 아닌가요? 어떻게 만날 수가 있죠?”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록에는 분명 그렇게 남겨져 있었습니다.”
시로네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
거핀의 문을 설치했다는 건 스케일 마법을 구사하는 언로커라는 얘기였다. 미로가 공간적인 면이 강하다면 거핀은 시간 쪽이 아니었을까?
영겁의 성찰자 아르민이 떠올랐다. 그 또한 스톱 마법으로 100년 이상을 사색한 이였으니 거핀도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대마법사 아케인조차 생체 능력만으로 150년을 버티지 않았던가.
카니스는 미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설계한 성취와 희생의 방은 천국행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단서였다.
“그렇다면 미로의 시공을 통과한 사람은 어디에서 기다리고 있지? 시로네가 왔으니 그 사람들도 함께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듣고 보니 시로네도 궁금했다.
미로의 시공에서 힘을 증명한 사람들. 그들이 아직도 여기에 머물고 있다면 더 많은 단서를 얻을 수도 있었다.
“동행 여부는 신의 사자가 정할 문제이긴 합니다만 현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 팀이 2년 전에 천국으로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2년 전이라는 것은 충격이었다. 예상보다 잦은 빈도로 사람들이 천국으로 향하고 있다.
카둠이 이 사실을 감춘 이유는 천사파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욱 많은 자들이 천국으로 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에이미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케르고인은 모두 라를 믿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천사에게 대항하는 파벌이 생길 수가 있는 거죠?”
“저도 반천사파이지만 최초의 내란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는 모릅니다. 500년 전 화산 폭발로 대부분의 기록이 소실되었죠. 그것을 잃어버린 기록이라고 부릅니다. 솔직히 화산 폭발이 천사의 능력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죠.”
마하투의 이야기는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설령 돌아올 방법이 있다고 해도 신중해야 하는 문제였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가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아니, 말릴 방도가 없습니다. 하지만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여태까지 미로의 시공을 통과했던 자들은 모두 저보다 강했다는 사실을요.”
마하투는 돌려 말했지만 결국 그들이 시로네 일행보다 강하다는 얘기였다. 그런 자들조차 천국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시로네 일행은 생각에 잠겼다. 마하투는 진심이 전해졌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공물에 흔들리지 않는 시로네 님의 의지를 존중합니다. 흔한 속세의 욕망이 아닌 어떤 뜻을 가지고 오신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저도 사실을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든 관여할 일이 아니나, 모쪼록 신중히 판단해 주십시오.”
“네. 중요한 정보를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마하투가 방을 나가자 정적이 찾아왔다.
천국은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시로네를 설득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시로네의 통찰이 옳았다. 오직 시로네만이 결정할 수 있고, 남은 자들은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어디까지 알고 계셨던 것일까?”
생각의 말미에 떠오른 사람은 알페아스였다. 시로네가 언로커라는 걸 알고 있는 그는 어째서 케르고 유적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 것일까?
“아마도 우리가 아는 사실 정도는 알고 계시지 않을까? 미로는 교장 선생님의 제자였다고 했잖아. 그녀의 행적 정도는 들으셨겠지.”
“그럼에도 허락한 이유는? 만약 우리가 처한 현실이 교장 선생님의 예상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떡하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지?”
“그런 문제도 있네. 어디까지 예상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너라면 천국에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신 게 아닐까? 나라도 그럴 테니까. 결국 문제는…….”
카니스가 메타게이트를 던지며 말했다.
“내가 변수였다는 거로군.”
알페아스는 카니스의 존재를 예상하지 못했다. 설령 예상했더라도 돌아올 수 있는 루트를 찾아냈으리라고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선택뿐이었다.
우선 출구가 있다는 것은 긍정적이었다. 유독가스로 차 있는 세계만 아니라면 가자마자 죽지는 않을 테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바보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가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는 이상 돌아올 기회를 놓치게 되는 최악의 상황도 간과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