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1
시이나는 얼음 결정을 손바닥 위로 끌어왔다.
“냉기란 무엇인가요? 무엇이 냉각인가요?”
그러고는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자 허공의 얼음 결정이 산산조각 부서졌다.
“차갑다는 것은 에너지 결핍을 말합니다. 차가운 에너지라는 것은 세상이 없죠. 따라서 온도가 무한히 높아질 수는 있을지언정 무한히 낮아질 수는 없습니다. 에너지 제로의 상태. 그것을 절대영도라고 부릅니다.”
이미 수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시로네는 황급히 노트를 펼쳤다.
“상온에서 에너지를 조금만 빼앗으면 얼음 결정을 만들 수 있습니다. 흔한 얼음이죠. 하지만 그것을 입자 단위로 분해한 다음 대류를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요? 조금 전과 같이 인간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수준의 저온을 만들 수 있습니다.”
사망이라는 말에 첫사랑 얘기를 떠들어 댔던 학생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렇다면 마법사는 어떻게 에너지를 흡수할까요? 아무런 장치나 도구도 없이 마법을 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로네는 필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스피릿 존이라는 영역 안에서 마법사는 세상을 통제하는 컨트롤 타워가 됩니다. 신이라 생각해도 좋고 범신론이라 여겨도 무방합니다. 핵심은, 마법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신에 근접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시이나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전지와 전능. 마법사는 전지전능全知全能을 통해 마법을 시전합니다. 전능은 스피릿 존을 통해 국소적으로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능한 상태라고 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마법은 발동하지 않습니다. 마법사들이 탁월한 감각을 가졌음에도 학자 못지않게 세상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시로네는 여태까지 자신이 마법을 발현시키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전지와 전능.’
여태까지 전능에 대한 수련만 했을 뿐 전지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탓이었다.
“여러분은 앞으로 저와 함께, 그리고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다양한 학문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스피릿 존은 마법의 반쪽에 불과할 뿐, 전지가 없다면 뛰어난 마법사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화학 기초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시이나는 그제야 몸을 돌려 칠판에 필기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수업이었고, 학생들의 집중력은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었다.
‘과연, 예쁘다고 인기 교사가 되는 건 아니구나.’
선생님에 대한 신뢰는 학생들의 성취욕을 높였고, 시로네 또한 수업에 집중했다.
비록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지식의 척추는 완성되었고,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여타 학문을 섭렵할 생각이었다.
‘마법사가 된다.’
***
오후 5시.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숙소로 돌아갔다. 시로네 또한 머리가 묵직해진 기분을 느끼며 기숙사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수업이 끝났어도 일과까지 끝난 건 아니어서, 몇몇 학생들은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도서관으로 향했고, 연구회에 가입한 학생들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연구실로 향하고 있었다.
친구가 없는 시로네는 연구회 대신 도서관을 택했다. 오늘 배운 과목을 차근차근 되짚어 볼 생각이었다.
남보다 늦은 것을 감안하면 하루가 부족했고, 인간이 잠을 자야 하는 것조차 원망스러웠다.
언젠가 수면을 없애는 마법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제2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엇?”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두 발이 떠 있는 상태로 비행 중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뒷고대를 붙잡고 날고 있는 것이었다.
‘뭐, 뭐야?’
평범한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힘과 속도에 시로네는 위기를 깨달았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데려간 곳은 교내 정원의 깊은 숲 한복판이었다.
“윽!”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시로네는 몸을 구르자마자 괴한이 있는 곳을 향했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고 불안한 듯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복면을 끌어 내렸다.
“어?”
시로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괴한의 정체는 카르미스 에이미였다.
“너, 날 기억하고 있는 거지?”
“당연하죠. 어떻게 잊겠어요? 저를 이상한 곳에 팔아 버린다면서 갑자기 옷을…….”
“그만!”
에이미가 손을 내밀었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확실히 기억하고 있네.”
그리고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오해가 있어. 내가 성격이 안 좋기는 하지만 그런 성향은 절대 아니야. 나는 딱히 남자에 대해 궁금하지도 않고, 그런데 내가 그때 그랬던 건, 그러니까…… 여태까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어…… 네.”
얼떨결에 대답하자 에이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 말은, 그 순간이 정말로 이상한 상황이었다는 거야. 나에 대해 어떤 소문을 퍼트려도 상관없지만, 이 사실만은 알아주지 않을래? 아니, 알아줘야 해. 그게 사실이자 진실이니까.”
시로네가 미간을 좁혔다.
“설마 그것 때문에 저를 납치한 거예요?”
“응?”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긴 에이미가 잠시 후 뺨을 긁으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 뭐, 겸사겸사. 어떻게 마법학교에 왔는지도 궁금하고, 앞으로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시로네는 의외의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차가운 소년과 뜨거운 소녀(2)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되잖아요.”
“……뭐?”
“잊고 싶은 기억이라는 건 알겠어요. 성적도 고급반 1등이고 인기도 좋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어요. 사정을 설명하기보다는 사과를 하는 게 더 낫지 않아요? 그게 도리이기도 하고요.”
에이미는 시로네의 의중을 살폈다.
과연 사과를 한다고 비밀을 지켜 줄까? 오히려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이용하려 들면 그때는 답이 없었다.
‘주도권을 빼앗기면 안 돼.’
예전처럼 멍청한 짓을 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인간에 대한 관점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람이라고 해도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이기적이 될 수 있는 게 인간이고, 그런 생각은 학창 시절의 경쟁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모두 칼을 갈고 있지.’
에이미가 유일하게 믿는 친구 1명을 제외하고 학생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유였다.
“일단 말해 봐. 너,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야?”
시로네는 짧게 설명했다.
오젠트 가문의 후원을 받았고 게스트의 자격으로 입학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오젠트 가문?”
에이미의 머리가 또르르 굴러갔다.
‘무가로 유명한 가문인데, 마법사를 후원한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기사 서약에 대해 모르기에 생긴 공백이지만, 알았다고 해도 믿었을지는 미지수였다. 두 사람의 우정을 알려면 당사자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역시 방심할 수 없는 놈이야.’
아군은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라는 말을 상기하며 에이미는 결심을 굳혔다.
“너, 사람들에게 아직 얘기 안 했지?”
“네. 그게 뭐 좋은 기억이라고…….”
“됐고.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게 있어. 너, 클래스 세븐이지? 난 클래스 포거든?”
“알고 있어요, 선배님.”
이런 상황에서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로네는 깍듯이 호칭을 붙였다.
“그래. 너도 알겠지만 이 바닥은 선후배 관계가 정말 중요해. 그러니 내일부터 일과 시간이 끝나면 커피를 사서 나에게 가져오도록 해.”
“네? 제가 왜요?”
“너를 믿을 수 없으니까. 나에게 거짓말은 안 통해. 만약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발설할 시에는, 너도 나랑 똑같이 학교생활 고달파질 거야.”
인맥이 좋지는 않아도 고급반 1위인 에이미의 영향력은 막강할 터였다.
‘당장은 어쩔 수 없나.’
서로 모르는 사이에 신뢰가 생길 리는 없지만 적어도 사과 정도는 받고 싶었다.
시로네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래, 하루 종일 신경 쓰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 정도로 타협하고 깔끔하게 각자 지내자.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신뢰는 쌓일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복면을 다시 쓴 에이미가 몸을 돌렸다.
“판단 정확히 해. 네 미래도 걸린 일이니까.”
스키마의 실력은 여전한지 그녀는 깃털처럼 가볍게 몸을 날려 사라졌다.
시로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부터 난관이네.”
내일부터 날마다 그녀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눈앞이 캄캄해졌다.
***
마지막 교시를 끝내고 강의실을 나서는 시로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오늘도…….’
벌써 열흘째 커피 심부름을 하고 있는 그였다.
커피값이야 다른 걸 아끼면 된다지만 마음은 하루가 지날수록 무거워졌다.
‘그래, 이것도 수련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자. 커피가 흔들리지 않도록 집중하는 거야.’
시로네는 버럭 소리쳤다.
“그럴 리가 있냐고!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비참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로네를 발견한 여학생들이 수군거렸다.
“어머, 저기 간다, 순정남.”
“오늘도 에이미에게 고백하러 가나 봐. 저 정도면 정말 엄청난 열정이네.”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었다.
차라리 대화라도 나누면 좋겠는데, 에이미는 커피를 받고는 시로네의 눈을 2초 정도 뚫어지게 살핀 후 곧바로 도서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벌써부터 학생들 사이에서는 시로네가 에이미를 짝사랑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이 흥행할수록, 에이미는 더욱 매몰차게 몸을 돌려 가 버리는 것이었다.
오늘도 에이미는 친구와 함께 도서관 정문에서 시로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가 계단을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얘! 저기 온다, 너의 왕자님!”
“왕자님은 무슨……. 후배 교육시키는 거지.”
이제는 학교의 명물이 되어, 이 광경을 보기 위해 구경꾼들까지 서 있었다.
지켜보던 여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응원하자 시로네의 얼굴이 빨개졌다.
에이미의 친구가 안쓰럽게 말했다.
“근데 좀 불쌍하다. 이 정도까지 하는데 너도 받아 주는 게 어때? 마음에 아예 없지는 않은 거잖아.”
“뭐어? 무슨 소리야?”
“내숭 떨기는. 솔직히 남자하고는 눈도 안 마주치는 애가 시로네가 사다 주는 커피는 꼬박꼬박 챙겨 가지고 가잖아. 마법학교의 철벽녀에게도 드디어 짝이 생기는가 하고 수군거리는 애들도 있다니까?”
에이미도 소문은 알고 있었으나 그에 반응하여 호사가들을 즐겁게 해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도 없는 일이지.’
“선배님, 여기요.”
시로네가 에이미에게 커피를 내미는 순간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에이미는 시선을 내려 커피를 봤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자 그녀의 눈이 붉게 빛났다.
‘으, 또 이거야.’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붉은 동공은 카르미스 가문 특유의 형질이었다.
시로네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던 에이미가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없어.’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라, 에이미는 상대의 홍채 변화를 통해 심리를 간파할 수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전혀 달라진 게 없어. 심지어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다.’
감정 상태에 일말의 변화도 없다는 것은 시로네가 둘 중 하나일 경우를 뜻했다.
완벽하게 감정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했거나, 완벽하게 진심이거나.
“…….”
두 가지 경우를 계속 고려하던 에이미는 커피를 든 시로네의 손을 때렸다.
“에잇, 짜증 나.”
바닥에 커피가 쏟아지고, 구경꾼들의 눈빛이 더욱 흥미진진하게 변했다.
반면에 에이미는 관심 없다는 듯 시로네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그만 좀 귀찮게 해. 앞으로 이런 거 가져올 필요 없으니까, 그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사람들의 탄식이 터졌다.
“불쌍한 시로네.”
사방에서 동정의 말들이 날아들었으나 막상 시로네의 마음은 뛸 듯이 기뻤다.
‘됐어! 드디어 해방이다!’
물론 소문이 더 커지기 전에 끝내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테지만 적어도 그녀가 자신에 대한 의심을 어느 정도 거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앞으로 서로 조심하자.”
에이미가 매몰차게 돌아서자 몇몇 학생들이 등에 대고 우 하는 소리를 냈다.
친구가 황급히 따라붙었다.
“에이미, 커피까지 내칠 필요는 없었잖아. 안 좋은 소문이 퍼지면 어떡하려고.”
“알 게 뭐야? 진짜 할 일들 더럽게 없나 보네. 소문이고 뭐고 알아서 생각하라고 하셔. 어차피 나는 졸업반으로 진급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저녁 11시.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던 에이미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책을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심란하네.’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소년 같으면서도, 딱히 정의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짜 학교는 어떻게 들어왔지? 정말로 오젠트인가? 아니, 그럴 리가…….’
친구가 물었다.
“책은 왜 덮어? 벌써 들어가게?”
“응. 오늘 집중이 안 되네. 그냥 푹 쉬고 내일 1시간 일찍 일어나지 뭐.”
“같이 갈까?”
“아니야.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 내일 보자.”
“그래, 그럼. 잘 가.”
두 사람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미의 유일한 친구인 그녀의 이름은 포트리스 세리엘.
평소에는 수다쟁이지만 성적은 클래스 포의 6위로, 할 때는 하는 성격이었다.
에이미는 가면을 쓴 우정보다 성숙한 경쟁을 즐길 줄 아는 세리엘이 좋았다.
열람실을 나서자 당직 외에는 모두 퇴근을 해서 통로는 어둡고 적막했다.
학생들이야 학교에 꿈이 있다지만 직원에게는 그저 돈을 버는 직장일 뿐이었다.
“아으, 피곤해.”
하루의 피로를 스트레칭으로 풀며 계단을 내려가던 에이미는 층계참의 중간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