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22
“세리엘, 나 갔다 올게.”
세리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론 그런 이야기가 오가기는 했지만, 정말로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에이미, 정말이야?”
세리엘의 눈빛이 이내 걱정스럽게 변했다.
앞으로 보름 후면 졸업 시험이 치러진다. 다른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황이었다.
“괜찮아. 어차피 수업은 끝났고, 기분 전환 겸 해외여행이나 다녀오지 뭐.”
사실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세리엘이 잘 알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걸 던질 수 있는 에이미가 부럽기도 했다.
어차피 가기로 했다면 힘껏 보내 주어야 할 것이다. 돌아보지 않도록. 어떤 미련도 남지 않도록.
세리엘이 에이미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출동해. 이 언니가 허락하마.”
에이미가 황급히 말을 더했다.
“그, 그렇다고 레이나 씨가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건 아냐! 난 그냥 시로네가 걱정돼서…….”
“호호호! 알았어! 누가 뭐라고 하니? 가서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줘!”
세리엘의 응원을 받으며 에이미는 마차로 걸어갔다.
그러자 이제 막 탈 준비를 하고 있던 시로네가 돌아보며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에이미, 파이팅! 꼭 합격해야 돼. 나도 잘하고 올게.”
“비켜 줄래?”
“응?”
시로네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에이미가 귀찮다는 듯 손을 옆으로 휘저으며 말했다.
“비키라고. 레이디 퍼스트, 몰라?”
시로네를 밀치고 마차에 올라타자 레이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미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가는 길에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어디 가니?”
약이 바짝 오른 레이나는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어차피 바뀌는 건 없겠지만 자신의 입으로 이 상황을 인정하기가 싫기 때문이었다.
“네, 아무래도 혼자 보내기 걸려서요. 제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요.”
시로네가 마차의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에이미! 어떻게 된 거야? 정말로 가려고?”
“그러니까 탔지. 빨리 앉아. 시간 없단 말이야.”
레이나의 속이 화로처럼 뜨거워졌다.
카르미스 에이미.
며칠간 지켜본 바로는 매사에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놀리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제 보니 리안과 똑같은 다혈질이었다.
괜한 횃불을 켜 버린 것 같아서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카즈라 왕국 (3)
“정말로 갈 거야? 나는 진짜 괜찮은데.”
시로네는 졸업 시험을 앞두고 에이미가 다른 것에 정신을 파는 게 싫었다.
아무리 졸업 예정자 1순위라고 해도 경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혹시라도 탈락하게 되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셈이다.
물론 에이미는 결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지만, 그녀의 성공을 바라는 입장에서는 뜯어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에게 중요한 일이잖아. 레이나 씨는 왕성 절차를 돌보느라 바쁠 테니까 옆에 붙어서 에스코트할 사람이 필요해. 왜, 내가 가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에이미가 동행해 준다면 시로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었다.
갈리앙트 섬에 갈 때도 그랬지만 능력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아군이었다.
“아니, 당연히 나야 좋지만…….”
“그럼 됐어. 이걸로 끝. 너에게 빚진 것도 있으니 이럴 때라도 갚아야지.”
시로네는 에이미가 어떤 것을 빚졌는지 떠올리지 못했지만 에이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케인의 습격 사건 당시 절벽에서 구해 준 것도 시로네였고 천국에서 카리엘에게 잡혔을 때도 그가 아니었다면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터였다.
에이미가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자 체념의 한숨을 내쉰 레이나가 마부에게 지시를 내렸다.
“출발하세요.”
물론 감정을 배제하고 보면 에이미의 합류는 절대로 손해가 아니었다. 시로네의 곁에서 도움을 주려면 친구가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다만 시작부터 밀리고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레이나는 창밖을 향해 턱을 괴고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에이미의 미소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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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가 향하는 곳은 시로네의 집이 있는 오리진 산맥의 중턱에 위치한 가시광산이었다. 가는 동안 레이나가 대략적인 정세를 알려주었다.
토르미아, 카즈라, 야크마는 하나의 통일국가였다. 하지만 귀족들의 위세가 높아짐에 따라 당파 싸움이 일어났고, 마침내 분리되어 현재는 삼국동맹 체제를 맺고 있다.
“어떤 의미로는 신생국가라고 할 수 있어. 카즈라는 독립한 지 100년도 되지 않았거든. 특히나 야크마 공화국은 근래까지도 카즈라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았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거의 일어날 뻔했지. 그게 바로 18년 전이야. 한마디로 카즈라의 내정이 불안해지자 제1왕자인 시로네를 다른 곳으로 빼돌린 거야.”
최소한 자신이 미워서 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시로네는 조금 위안을 받았다. 왕국의 흥망이 걸린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운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아직은 모든 게 확실치 않기에 피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도 얘기는 들었어요. 거의 내란 직전까지 갔다고 하더라고요. 야크마도 출정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고요. 그런데…….”
에이미는 말을 줄였다. 시로네의 앞에서 차마 할 얘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레이나도 마찬가지였으나, 인솔의 책임자로서 회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카즈라의 왕 오르캄프 4세가 카샨 제국의 여황 테라제와 혼인하면서 모든 내란이 종식되었지.”
시로네도 역사책을 독파했기에 어떤 사건인지는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카샨 제국은 인간계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대륙의 절대 강자였다.
또한 제국의 황제는 대대로 여성이었다.
카샨의 황제인 테라제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어떤 남자도 반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반면에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냉혈한이기도 했다.
그런 여자가 카즈라의 왕인 오르캄프에게 청혼을 제안한 것이었다.
“오르캄프 4세도 별수 없었을 거야.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까. 게다가 테라제를 받아들인다면 대단한 연줄을 잡는 셈이지. 실제로 테라제와 혼인을 하고부터 카즈라의 정치는 급속도로 안정되었고, 재정도 튼튼해졌어.”
역사책에서도 상세하게 소개될 만큼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오르캄프는 이미 아내가 있었고 테라제 또한 남편이 있는 여성이었다.
“왕족이나 귀족의 정략결혼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특이하다고 해야겠지. 테라제는, 아니 카샨의 지배자들은 대대로 여자였고 그들이 세력을 넓히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한 전략이 결혼이야. 오르캄프 4세 말고도 테라제의 남편은 3명이 더 있어. 물론 모두 각국의 왕이지. 테라제는 오르캄프와 결혼하고 가끔씩 카즈라에 들렀는데, 그때마다 아이를 낳아서 현재 아들과 딸을 두고 있어.”
“원래 카즈라의 여왕, 그러니까 오르캄프 엘리자는 시로네 외에는 다른 자식이 없나요?”
“애석하게도 없어. 내란 때 갓 태어난 아이를 타국으로 피신시키자마자 곧바로 테라제가 끼어들었으니까. 아마도 협정이 있었을 거야,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테라제는 자신의 아이가 왕국을 물려받기를 원하니까.”
에이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왕족이라도 인간의 고유한 능력인 수태를 정치에 이용한다는 건 섬뜩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카즈라 여왕의 핏줄은 시로네가 유일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테라제가 낳은 배다른 남매가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이미는 퍼뜩 깨달았다. 출발하기 전부터 느꼈던 불안감의 원인을.
“잠깐만요. 그러면 시로네가 만약 카즈라의 제1왕자가 된다면…….”
레이나도 그것이 핵심이라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테라제의 자식들은 후계자 서열에서 밀리게 되겠지. 반대로 여왕 엘리자의 영향력은 강해질 테고. 일국의 사신이 마법학교에 와서 대대적으로 공표를 한 이유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야.”
에이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면 카즈라의 내정이 안정된 것도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따라서 왕국이 조금만 노력을 기울여도 시로네를 찾는 건 쉬웠을 터였다.
결국 지금에서야 시로네를 찾는 데에는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 있는 게 분명했다.
설령 그들이 친부모라도…… 온전히 시로네를 보고 싶어서 초청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어휴, 정말 뭐가 이렇게 복잡해? 높은 사람들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테라제는 오르캄프의 첩이 되고, 오르캄프는 테라제의 후군이 된다.
족보로도 그릴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각자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마차는 빠르게 달렸고 어느새 가시광산으로 접어들었다.
예전에는 석탄을 캐는 지역이었는데 동굴에 달린 종유석이 날카롭다고 하여 가시광산으로 불렸고 그것이 고유 명칭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현재는 폐광이 되어 막혀 있지만 은근히 코가 매웠다. 하지만 시로네에게는 무엇보다 그리운 고향의 냄새였다.
굳어 있던 시로네의 얼굴이 조금 풀어지는 걸 보며 에이미도 매캐한 공기를 힘껏 빨아들였다.
시로네의 집에 도착한 에이미는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
시로네의 집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이니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물론 실수는 하지 않겠지만 상황이 조금 묘했다.
시로네의 부모님이 평민이니 오히려 어떻게 대해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너무 예의를 갖추면 그들이 어려워할 것 같고, 그렇다고 평소대로 하자니 오만하게 비춰질 여지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에이미와 달리 레이나는 도착과 동시에 문을 열고 나갔다.
빈센트와 올리나가 떠날 채비를 끝낸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다.
부집사 테무란이 마차를 점검하는 동안 레이나는 시로네를 데리고 부모님에게 갔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네, 그럼요. 보살펴 주신 덕분에 저희는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빈센트와 올리나가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레이나는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레 일정으로 넘어갔다.
“마차를 타고 북쪽으로 가서 국경선을 넘을 거예요. 아마도 자정쯤에 도착할 것 같은데 그때까지만 고생을 해 주세요. 거기서부터는 카즈라 왕국의 인솔을 받게 될 테니까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을 거예요.”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괜히 아들 때문에 고생을 시켜 드려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레이나는 안쓰러운 웃음을 흘렸다. 빈센트와 올리나의 얼굴을 보니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게 분명했다.
테무란이 몇 번이고 설명했겠지만 현실로 느낄 만한 사안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구간에 버려졌던 아이를 자식처럼 생각하고 18년을 키웠는데 난데없이 친부모가 나타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도 타국의 왕과 왕비였다.
시로네를 생각하면 잘된 일이지만 그들도 사람인 이상 어찌 서운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왕을 상대로 친자 소송을 할 수도 없으니 꼼짝없이 자식을 빼앗길 판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설령 친부모가 확실하다고 해도 시로네는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오젠트 가문에서도 그랬잖아요.”
속마음을 들킨 빈센트가 당황하여 손을 저었다.
“걱정은요! 당치도 않습니다. 시로네에게 정말로 잘된 일이지요. 그래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순간 마차에서 에이미의 당찬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에이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레이나와 부모님이 담소를 나누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진 탓에 이상한 타이밍에 끼어들고 말았다.
“아가씨는……?”
올리나가 흥미롭게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드러냈다. 시로네가 또래의 여자아이를 데려오는 건 처음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눈에도 거짓이 없는 게, 참한 소녀였다.
“아, 네. 시로네의 친구인 카르미스 에이미라고 합니다. 카즈라까지 동행하게 되었어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에이미는 자신도 모르게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산산조각 부서지고 말았다.
물론 에이미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고, 빈센트와 올리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괜찮은 여학생이라고 소곤거렸다.
시로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솔직히 어떤 얼굴로 부모님을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젠트 가문에서 누군가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은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친부모였다.
게다가 왕족이라 선택권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마치 그들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아들의 심정을 미리 헤아린 빈센트가 다가왔다.
“괜찮니, 시로네? 많이 놀랐겠구나.”
“저는 괜찮아요. 아버지…… 죄송해요.”
“껄껄! 죄송할 일이 뭐가 있어? 왕궁에 가서 실수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테무란 님에게 많이 배워 두기는 했다만, 이게 원체 어려워서 말이지.”
시로네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저도 그래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에이미가 옆에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기회는 이때다 싶은 에이미가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럼요! 제가 모실 테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올리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제야 이름이 기억나네요. 시로네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들었어요.”
에이미는 조금 우쭐해졌다. 긴장이 풀리자 굳어 있던 입술도 뜻에 따라 움직였다.
“저도 시로네에게 많이 도움을 받았어요. 앞으로 편하게 대해 주세요.”
레이나가 박수를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좋은 분위기를 계속 이어 가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정말로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자정이 넘기 전에 국경선에 도착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달려야 했다.
“자, 자. 이제 출발하죠. 부집사는 저택에서 대기해 주세요. 루이스에게 기별이 오는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시로네 일행을 태운 마차가 카즈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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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행군이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6시간이 넘도록 있으면 온몸이 쑤시기 마련이다. 1시간을 달리고 5분을 쉬는 일정으로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달랠 틈조차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국경선이 가까워 올수록 점차 고통은 사라지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로네의 입장에서는 굉장한 모험이었다.
카즈라 왕족의 복잡한 사정을 들은 이상 인솔단이 대기하고 있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테라제 쪽에서 조금만 성급하게 결단을 내린다면 암살대를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즈라 왕국 (4)
시로네는 창문을 열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깊은 숲이었고, 마부석에 꽂힌 횃불만이 눈앞의 길을 비추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나무 그림자들이 가는 방향과 반대로 질주했다. 보름달이 뜬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구름이 몰려와 그마저도 뒤덮어 버렸다.
시로네의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마차가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말의 투레질 소리가 적막한 밤공기를 울렸다.
마부가 문을 열고 속삭이듯 말했다.
“레이나 님, 접선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레이나는 후드 망토를 둘러썼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마차에서 내렸다.
도착한 장소는 지평선이 보이는 광활한 황무지였다. 시로네가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리고 상상해 보니 토르미아 북쪽의 여명의 고원 어디쯤인 듯했다.
확실히 철두철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이 트여 있는 황무지에서는 암살을 시도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땅굴을 팔 수도 있겠으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끝이 없는 법이다.
접선 장소는 도착한 곳에서 300미터 떨어진 곳이었고 멀리서 카즈라 왕국의 인솔대가 실루엣으로 보였다.
오젠트 가문의 집사장 루이스가 수신호를 보냈다.
레이나가 같은 방식으로 암호를 교환하자 비로소 두 패가 중간 지점에서 조우했다.
횃불을 들고 다가온 루이스가 시로네 일행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입성 절차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던데.”
“네. 딱히 불온한 움직임은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일단 타시죠. 가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시로네 일행은 루이스를 따라 이동했다. 알페아스 마법학교에서 보았던 거대한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호위대장 고딘이라는 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제1왕자 후보인 시로네 님을 모시게 될 루젠 고딘이라고 합니다. 사정을 알고 계시니 불안하시겠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왕국에서 최고의 실력자들로 호위대를 꾸렸으니 무사히 왕성에 도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