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27
시로네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언로커의 절반 이상이 스케일 마법사였다니.
하긴, 따지고 보면 아르민의 마법도 스케일 마법의 일종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니까.
“언로커 중에서 스케일 마법사들이 많은 이유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이모탈 펑션의 성향과 관계가 있다고 짐작할 뿐이죠. 그런 측면에서 시로네 군의 전지는 상당히 독특한 편에 속합니다. 질량을 다루는 능력은 극히 소수거든요. 정말 부럽군요.”
“아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르민이 얼굴을 들이밀면서 말을 끊었다.
“그래도 제가 더 강합니다.”
수준급 마법사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유치한 말이었다. 하지만 아리우스는 개의치 않고 덧붙였다.
“이런 건 확실하게 해 두고 싶어서요.”
“아, 물론이죠.”
시로네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일국의 왕에게 고용된 실력자였으니 마법학교 학생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대선배였다.
그러자 아리우스가 의외란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너무 쉽게 인정하는 거 아닌가요? 겸손도 지나치면 독입니다.”
“네? 아니에요. 저는 그냥 학생일 뿐인데요.”
“물론 마법력은 아직 부족하겠죠. 하지만 아타락시아를 시전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시로네는 깜짝 놀랐다. 아타락시아는 천국의 언어다. 지인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고 학술지에서도 킬라인은 마력증폭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다.
‘이 사람도 천국에 간 적이 있구나.’
아리우스는 시로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동공 안에 살고 있는 작은 요정을 찾으려는 듯이. 키워드가 제대로 각인되었음을 확인한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아타락시아를 어떻게 알고 계세요?”
“하하! 이 바닥에서 좀 놀았다는 마법사는 대부분 알고 있지요. 대천사 이카엘의 장기니까요. 물론 그것을 인간이 터득할 수 있다는 점은 충격이었지만요.”
“그렇다면 천국에 간 적도 있나요?”
아리우스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에 한 번. 하지만 저에게는 딱히 재밌는 곳이 아니더군요. 그래도 정보는 꾸준히 수집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존망이 걸린 일이니까요. 우리 모두 미로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죠. 하긴, 덕분에 그녀도 최고의 마법사가 되었으니 억울하지는 않으려나요?”
미로의 선택에 대해 희생이라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던 시로네는 아리우스의 말이 참신하게 다가왔다.
“미로 씨가 최고의 언로커인가요?”
아리우스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뭐,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실 누가 최고인지 어떻게 알까요? 하지만 그녀는 무려 인류를 구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도전할 수 없는 다른 차원에 머물고 있죠. 이 시대에 태어난 어떤 마법사도 미로의 아성은 넘지 못할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냉정하게 들릴지라도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꿈을 이룰 기회는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로가 희생으로 지킨 이 세계는 이미 죽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미로 씨도 그런 생각으로…….”
“하하! 물론 알고 있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듣지 마세요. 턴 언데드 마법의 창시자인 오베르크가 아니었다면 인류는 네크로맨서들에게 정복당했을 겁니다. 상황에 따라 1인자가 달라지는 게 마법의 생리라는 거겠죠. 게다가 이미 이 세상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고의 마법사가 존재했으니까요.”
“최고의 마법사요? 그게 누구죠?”
시로네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광자화 이론을 정립한 케르고스? 발화 마법 이그나이트의 창시자 이브리스? 어쩌면 스피릿 존의 사방식 체계를 집대성한 글로리아일지도 모른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는…… 맥클라인 거핀입니다.”
시로네는 안타까움에 무릎을 쳤다.
“아! 알고 있었는데!”
케르고 자치 지구에 천국으로 가는 문을 설치한 마법사. 그가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는 이카엘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거핀은 어떤 사람이죠?”
아리우스는 답하기 애매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흐음, 사실 모릅니다. 거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심지어는 그가 정말로 세상에 존재했던 사람인지조차 의견이 분분하죠.”
“어라? 하지만 거핀은…….”
“네. 그의 업적은 세계 곳곳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건 유적들뿐이에요. 실제 거핀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전무합니다. 지금도 고고학자들이 거핀의 흔적을 찾으려고 세계를 떠돌지만 어떤 형태의 기록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설화조차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시로네는 의아했다.
어떤 인간이든 살아온 흔적은 남기 마련이다. 명성 없는 아무개조차도 지인을 통해 기록이 내려오는 마당에 거핀 정도라면 세상 모두가 알아야 정상이었다.
“거핀이 실제 인물인가는 지금도 학계의 논란거리입니다. 어떤 학자는 그가 살아생전에 한 번도 지적 생명체와 접촉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죠. 하지만 현재 가장 각광받는 가설은 따로 있습니다.”
역사상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는 자가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증발했다. 시로네는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굉장한 마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우스가 손가락을 치켜들고 말했다.
“거핀은 세상에 존재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세상이 그를 잊어버린 것이다, 라는 가설입니다.”
그 말을 듣자 저절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천국의 요정 페오페에게 들은 일화였다.
대천사 이카엘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하지만 천국의 신민들은 그것이 무슨 죄인지 알지 못한다.
앙케 라가 기억을 말소시켰기 때문이다.
“거핀은 분명 세상에 존재했지만 현재는 존재 하지 않은 상태로 되어 있는 거죠. 이것을 학계에서는 거핀 말소, 혹은 리셋이라고 부릅니다.”
“리셋이라면…….”
“거핀이 단순히 아카식 레코드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소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세계는 수정이 가해진 전체여야 하죠. 그런데도 거핀의 유적이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요? 리셋설은 거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어느 시점에서 한 번 초기화된 적이 있다는 겁니다.”
아직 지성의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한 시로네에게는 아리우스의 말이 정신이상자의 헛소리로 들렸다. 그럼에도 생각을 돌릴 수 없는 이유는 이런 문제에 저절로 빠져들게 되는 언로커의 성향 때문이었다.
“거핀 말소의 대표적인 증거로 ‘균열장 검증 실험’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전체 시간과 에너지의 총량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는 것이죠.”
아리우스는 열 손가락을 펼쳐 구체를 잡는 시늉을 했다.
“아카식 레코드는 전체로서 완벽합니다. 따라서 이 세계는 완벽성을 잃어버릴 수 없죠. 하지만 균열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균열은 개성이지 부족함이 아니니까요. 학자들은 그 균열에 리셋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시로네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만약 리셋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의 모두가 똑같은 삶을 두 번째 살고 있다는 얘긴가요?”
“그렇게 되겠죠.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인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류가 1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해 보죠. 현재의 사람들이 오늘을 살기 위해 1만 년을 기다렸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1초도 기다리지 않았죠. 태어난 순간부터 시간이 인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리셋의 증거로 데자뷔를 꼽습니다. 전에 겪었던 일을 또다시 경험하는 것 같은 기분. 이것 또한 뇌가 초기화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착각하면서 생기는 인지의 오류라는 것이죠.”
아리우스가 검지를 치켜들고 물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맥클라인 거핀은 어떻게 세상을 초기화시킬 수 있었을까요?”
시로네의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단어가 떠올랐다.
“이모탈 펑션.”
아리우스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정신을 끝없이 확장하면 자아는 해체되죠. 하지만 어떤 현상이든 임계점이라는 게 존재합니다. 만약 이모탈 펑션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무한하면서도 유한한, 그런 모순적인 상태가 됩니다. 즉 자아를 지닌 채 전체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아리우스의 설명은 시로네가 알고 있는 어떤 유사한 개념을 일깨웠다. 자아를 지닌 채로 전체가 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모든 것에 자아가 깃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존재를 신이라고 불렀다.
“그렇군요. 거핀이라는 사람은…….”
시로네는 비로소 깨달았다. 어째서 맥클라인 거핀이 이 세상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고의 마법사인지.
“네. 맥클라인 거핀은…….”
아리우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한의 마법사입니다.”
무한의 마법사라는 말을 듣는 건 아르민 이후로 두 번째였지만 받아들이는 느낌은 훨씬 강렬했다.
당시에는 이모탈 펑션이나 아카식 레코드에 대해서 무지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인간이 신의 위격을 차지할 수 있는지, 그 과정이 어렴풋이나마 그려졌다.
“거핀이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100년 전? 1천 년 전? 어쩌면 인류가 시작되기 전부터일 수도 있죠. 다만 리셋의 시점에 대해서는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 시점을 기준으로 거핀의 업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까요. 공교롭게도, 18년 전은 미로의 시공이 탄생한 해이기도 합니다.”
아리우스는 가능성을 말했지만 시로네는 이카엘의 입을 통해서 미로가 거핀의 후임이라는 얘기를 직접 들었다.
또한 18년 전이라면…… 자신이 태어난 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18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자신 하나뿐이겠는가?
아리우스는 시계를 확인했다. 검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슬슬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1. 적대적 우호 관계 (2)
시로네에게 다가간 그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이만 가 봐야겠군요. 오래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요. 시로네 군도 언로커이니 이런 사항들을 알아 두면 마법 사회의 유니크로서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시로네는 얼른 아리우스의 손을 맞잡았다.
“네.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하하! 감사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당신의 아타락시아를 도굴할 생각이거든요.”
아리우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으나 시로네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이미 잠에 취해 고개를 깊숙이 떨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높은 수준의 수면 마법은 대상의 의식을 칼같이 잘라 내어 정신파의 단절마저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설령 시로네의 의식이 되살아나 끊어졌던 기억에 달라붙는다 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터였다.
“슬슬 시작해 볼까.”
아리우스는 정신 계열을 다루는 스케일 마법사로 인간의 정신에 침투하는 다이브라는 마법을 구사한다.
12단계로 이루어진 인간의 정신 중에 지성의 영역인 12단계 껍질 층을 제외하면 어디든 침투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 속이란 너무나 위험한 환경이라서 함부로 다이빙을 했다가는 목숨이 10개라도 모자랐다.
그래서 대부분의 다이버들은 수면 위에서 그물을 던져 원하는 정보만 끌어내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그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게 키워드였다.
시로네에게 기습적으로 키워드를 주입하여 아타락시아의 인상을 떠올리게 한 아리우스는 다이브 마법을 시전하기 전에 허리를 돌리며 준비 운동을 했다.
지금도 한 해에 수십 명의 다이버들이 목숨을 잃는 곳이 사람의 정신이지만 마도7걸의 마법사답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마법을 시전했다.
“다이브. 아타락시아.”
이탈형 스피릿 존이 극한의 스케일로 줄어들면서 시로네의 머릿속으로 침투했다. 그와 동시에 아리우스의 모습이 대기실에서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5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였고 마치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옷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아리우스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일어섰다. 한참이나 찜찜한 표정으로 시로네를 바라보던 그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밖에서 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로네 님, 잠시 후 공판이 열릴 예정입니다. 입회하여 주십시오.”
아리우스는 쳇 하고 혀를 차며 스케일 마법사의 전매특허인 플리커를 발동해 대기실에서 사라졌다.
“어라?”
시로네는 눈을 깜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에 빠진 시간은 무려 5분이지만 의식이 너무나 깔끔하게 잘려서 존재하지 않은 5분이나 마찬가지였다.
절단되었다가 봉합된 의식 상태로는 아리우스가 악수를 하던 도중에 갑자기 사라졌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정말 신출귀몰하구나. 하긴, 아르민 씨도 그랬으니.’
시간이 지나도 시로네에게서 대답이 없자 관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로네 님, 이제 나오셔야 합니다.”
“아, 죄송해요. 지금 갈게요.”
시로네는 관리를 따라 재판장으로 들어갔다.
카즈라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배심원석에 자리했고 판사석 아래에는 의자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증거물을 보관하는 자리에는 증거물 대신 각종 도구들이 즐비했고 연금술사와 마법사가 그것을 점검하고 있었다.
시로네는 오른쪽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 재판장 바깥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오르캄프 전하께서 행차하십니다!”
귀족들이 일어나서 맞는 가운데 오르캄프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그는 다른 귀족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시로네의 상태를 살폈다. 아리우스가 이미 접촉했을 테지만 아타락시아의 복제에 성공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시작하도록 하지.”
시로네의 옆에 앉은 아리우스가 지시를 내리자 재판관이 검사를 진행했다.
마법사가 주사기로 두 사람의 혈액을 채취했다.
왕의 몸에 바늘이 꽂히는 순간 재판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시로네까지 채혈이 끝나자 연금술사가 옥스타민이라는 물질에 두 종의 혈액을 섞었다. 비커를 흔들자 액체가 진한 보라색에서 투명한 물처럼 변했다.
연금술사가 설명했다.
“옥스타민에 섞인 혈액은 3일 동안 진공상태에서 보관될 것입니다. 양성반응이 나오면 친자, 음성반응이 나오면 불친자입니다.”
연금술사가 혈액을 인계하자 재판관은 캐스피라고 불리는 연금 상자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뚜껑을 닫자 공기가 배출되어 진공상태로 변했다.
조금이라도 공기가 스며들 경우 부서지기 때문에 보안을 요하는 검사에는 제격이었다.
재판관이 캐스피를 들고 공표했다.
“이 캐스피는 금고에 들어가 내성 정원에 배치될 것입니다. 왕성 경비대가 24시간 감시할 것이며 내성 출입 권한이 있는 귀족이라면 언제든 확인이 가능합니다. 다만 접근 한계선을 넘어가는 행위는 엄금합니다. 따로 감시자를 붙일 경우에는 1시간 안에 신상을 등재해야 합니다.”
시로네는 감찰부의 판단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특정 다수에게 금고를 노출시키면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가 되기 때문에 허튼수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이상으로 카즈라 왕국 제1왕자 검증에 관한 검사를 마치겠습니다.”
재판장이 의사봉을 내리치는 것으로 절차가 끝났다.
오르캄프는 마치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시로네에게 수고했다는 말조차 없이 재판장을 빠져나갔다.
오르캄프의 성격을 아는 시로네도 이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어젯밤부터 레이나에게 연락이 없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법정대리인으로서 모든 행정 업무를 결재해야 하니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또한 그렇기에 자신이 한량처럼 한가로이 지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에이미를 데려온 것이 아니던가? 아무리 숙소가 멀어도 기별조차 오지 않은 건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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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했다고?”
오르캄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리우스를 고용한 이후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또한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기도 했다.
비판을 감수하고 블랙 라인의 범죄자를 스카우트한 이유는 오로지 그의 실력을 믿고서였다. 그런데 실패라니?
“죄송합니다. 그물을 던지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복제는 할 수 없었습니다.”
다이버들은 무의식의 심해에 가라앉아 있는 개념을 키워드를 통해서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이 과정을 그물을 던진다고 표현한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키워드만 심으면 무조건 성공이라고 하지 않았나?”
“복제라면 지금도 가능합니다. 다만 그럴 필요가 없을 뿐이죠.”
“그럴 필요가 없다?”
아리우스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타락시아는 캡슐화가 되어있었습니다.”
“캡슐화가 뭐지? 암호인가?”
“아뇨. 암호라는 건 규칙입니다. 1미터 길이의 종이 띠에 100개의 글자를 적습니다. 그것을 특정 두께의 각목에 말아서 한 면에 비친 글자를 읽는 거죠. 문장이 드러난다면 암호입니다. 그렇다면 캡슐화는? 1미터 길이의 종이 띠에 명확한 문장을 적습니다. 그리고 그걸 마구잡이로 구겨 버리는 거죠. 패턴도 없고 풀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본 것은 아타락시아가 아니라 온갖 정보가 실타래처럼 엉킨 정보 구름이었습니다.”
아리우스가 검지를 치켜들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왜 복제할 필요가 없느냐? 키워드는 상대에게 특정 개념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거죠. 사과는 맛있다. 그러면 전하의 머릿속에는 사과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건 전하가 생각하는 사과이지 완벽한 사과는 아닙니다. 완벽한 사과는 언어 이전의 형태로 무의식에 녹아 있습니다. 결국 키워드를 통해서 드러나는 생각은 그림자에 불과해요. 보통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만, 이번처럼 캡슐화가 되어 있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정보 구름을 복제해 봤자 그냥 정보 구름일 뿐이니까요.”
오르캄프는 아리우스를 탓할 수 없었다. 이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를 탓한다면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꼴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우리는 반드시 아타락시아가 필요해.”
“우선 시로네와 얘기를 해 보시죠. 해결법을 찾으려면 제가 직접 아타락시아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정보 체계인지, 발동 원리는 무엇인지. 그런 정보가 수집된 다음에야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언제라도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어는 설치해 두었습니다.”
“아타락시아의 시연이라…….”
오르캄프는 아리우스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로네는 영리한 아이니 단순히 친자 확인 검사를 위해 왕성에 초대된 것이 아님을 짐작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본래의 목적을 꺼내게 된다면 시로네가 받을 상처는 엄청날 것이다.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비열한 아버지라는 오명은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시로네가 협조를 거부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분명 의심할 게야.”
“전하, 제1왕자가 바뀌는 중대사입니다. 테라제 일파 또한 검사 결과가 나오는 3일 안에 승부를 보려고 하겠죠. 시로네와 우선 협상권을 가진 장점을 이용하지 않으면 테라제 쪽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오르캄프는 신중하게 생각에 잠겼다.
시로네를 끝까지 끌어안느냐, 이용하고 내치느냐. 어느 쪽이든 선택은 빠를수록 좋았다.
“기왕 할 것이라면, 거창한 게 좋겠지?”
아리우스는 간사한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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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숙소로 향하던 시로네는 2층 복도에서 걸음을 멈췄다. 지온의 전령인 이름 모를 관리가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 넓은 왕성에서 어떻게 자신을 귀신같이 찾아내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시로네 님, 저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시로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을 끌어당겼다.
분명 즐거운 일로 부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회피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