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17
스크리머는 입을 다물고 표정을 지웠다. 소싯적에 깡패들을 벌벌 떨게 했던 눈빛이 쏘아졌다.
“그 말……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냐?”
시로네는 친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얘들아.”
이루키, 네이드, 에이미가 한 걸음씩 다가와 시로네의 좌우에 나란히 포진했다.
에이미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그래, 해 보자. 아마 최고의 팀을 꾸려서 덤벼야 될 거야. 어차피 박살이 나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황스러운 건 마야였다.
평가를 망쳤고 욕을 먹었다. 평소라면 거기에서 끝나야 할 일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흘러 버렸다.
자신을 위해 나서 주는 시로네 일행이 고마웠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폐를 끼칠 수 없었다.
“잠깐만, 나는 그럴 생각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이드가 마야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얼굴이 빨개진 마야가 무언가 말을 쏟아 내려는 순간, 네이드가 스크리머에게 주먹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한판 붙자아아아아!”
네이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후회는 없다. 오히려 여태까지 졸업반인지 간신반인지 눈치를 보며 쌓였던 앙금이 풀리는 듯했다.
‘그래, 이래야 시로네 파지.’
반면에 마야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렇다고 찬물을 뿌리기에는 시로네 일행의 기세가 너무나 뜨거웠다.
스크리머는 분노를 통제했다.
냉정하게 보자면 승리나 마찬가지다. 저들은 20점을 잃고 자신은 20점을 얻게 될 테니까.
“2주 뒤에 보자.”
스크리머가 훈련장을 떠났다. 학생들은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멍한 얼굴이었다.
페르미 일행도 모자라 이제는 클래스 투에서 제법 인지도가 있는 스크리머까지 건드리다니.
‘아니, 무슨 쌈닭들이야?’
단테의 옆에 있던 사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관심을 안 가지려고 해도 네이드가 얽혔으니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진짜 돌겠네. 쟤들은 왜 저렇게 사고만 치고 다녀? 마야가 끼면 당연히 불리하지. 괜히 네이드만 20점 깎이게 생겼잖아. 시로네라도 말렸어야 하는 거 아냐?”
“몰랐어?”
단테가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시로네가 꼴통 대장이잖아.”
전투준비 태세 (1)
시로네 일행은 오랜만에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에 모여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수련에 더해 가올드의 미션까지 완수해야 하는 시로네는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근래에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머리라도 식힐 겸 친구들을 따라왔다.
휴일에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괜찮았다.
어째서 예전에는 이런 시간이 소중한 줄 모르고 심심하다고 난리를 피웠던 것일까?
시로네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런데 마야 말이야. 평민이었구나. 난 몰랐어.”
네이드가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날 이후로 조사해 봤는데 정확히 말하면 외지인이더라.”
“외지인?”
“신비 부족이라고, 남방에서 올라온 소수민족이야. 200명 정도 토르미아에 정착해서 부족 비전 카푸라를 약용으로 재배했는데 20년 전에 마약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쫄딱 망했다더라고. 그래서 빚은 빚대로 지고 마약 부족이라는 오명까지 써서 사회에 진출도 못 하고, 이래저래 어려운가 봐.”
“그랬구나. 그럼 마야네 집도 사정이 안 좋겠네.”
“그렇겠지. 형제가 7명이나 된다던데. 부족 차원에서 돈을 모아서 마야를 지원해 주고 있나 봐. 마법사가 되면 신비 부족의 평판도 올라갈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마법학교에 들어왔을까? 나도 오젠트 가문이 아니었으면 특별 전형조차 뚫지 못했을 텐데.”
“콜리 선생님이 추천하셨대. 사정까지는 모르지만 어떤 인연이 있었겠지. 너처럼.”
졸업반에서는 냉정한 부장 교사지만 본심은 다정한 사람이니 충분히 마야를 도와줬을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에 수군거리긴 했던 모양이야. 그러다가 성적이 의외로 별 볼 일 없으니까 그냥저냥 묻힌 거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시로네 또한 입학 테스트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크게 미움을 사지 않았을 터였다.
“아무튼 참 안됐어. 부담감이 엄청나겠지. 부족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데 졸업을 못 하니 말이야. 성량 올리겠다고 고기를 물로 넘기는 거 보면 안쓰럽더라.”
시로네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응. 특히나 마야는 여자잖아. 예뻐 보이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어? 실제로 살 빠지면 예쁠 것 같기도 하고. 졸업반에 있는 이상 어쩔 수 없겠지만.”
이루키가 말했다.
“보여 줄까, 마야 예전 모습?”
“응? 어떻게?”
“지금은 끊었지만 당시만 해도 네이드가 엄청 모았지. 기억날 텐데? 그림책 말이야.”
시로네는 퍼뜩 떠올렸다.
“아, 그 여성 인체 연구회에서 간행한다는?”
네이드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맞다! 우리도 이제 졸업반이지. 재수생들이라면 대부분 거기에 그려져 있겠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이드는 책상 아래로 들어갔다.
“이루키, 호수랑 페이지 불러 봐.”
망각을 모르는 이루키가 말했다.
“가장 정확한 건 최신호야. 48호 간행물 8페이지.”
“48호면 작년 거 아냐? 그때도 마야는 살이 쪘을 텐데.”
“보면 알아. 일단 가져와 봐.”
네이드는 금고에 쌓여 있는 그림책을 뒤졌다.
시로네가 들어온 뒤로 관심을 끊었지만 차마 모아 놓은 건 버릴 수 없는 게 남자의 마음이었다.
“어디 보자. 48호, 48호…… 아, 여기 있다.”
네이드가 그림책을 테이블에 올려놓자 시로네와 이루키도 소파에 앉아 얼굴을 들이밀었다.
8페이지에 마야의 예전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우와…….”
여성 인체 연구회의 작품치고는 정숙한 스타일이었고 표현 방식도 성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이 놀란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이게 진짜 마야야? 엄청 예쁘다.”
토르미아의 도회적인 기준과는 다르지만 누구라도 반할 만큼 싱그럽고 밝은 느낌의 소녀였다.
네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난다, 기억나. 예전에 나도 이 그림을 보고 누굴까 하고 생각했었어.”
이루키가 설명했다.
“마야는 졸업반 2년 차부터 살을 찌웠어. 하지만 여성 인체 연구회는 그녀의 예전 모습만 그리는 것 같더군.”
“희한하네. 마야를 좋아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고. 하지만 애정보다는 존중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것 같지 않아?”
시로네는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대체 누구지? 여성 인체 연구회 말이야.”
네이드가 말했다.
“거기까지는 나도 몰라. 이놈들은 걸리면 바로 퇴학이거든. 하지만 졸업반에 있을 거야. 고급반에 있으면서 졸업반을 그릴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으스스했다. 한마디로 날마다 마주치면서 졸업 평가를 치르고 있다는 얘기였다.
네이드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확인해 보자. 작년 기준이니까 지금 졸업반에 있는 여자애들도 분명 있을 거야.”
이루키가 말했다.
“14페이지에 포니, 16페이지에 수아비, 마지막 페이지에 도로시. 이렇게 3명이 현재 졸업반이야.”
시로네는 이루키를 돌아보았다.
“너, 정말로 서번트 때문에 기억하는 거 맞지?”
네이드가 페이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야, 포니다, 포니.”
포니의 외모는 지금의 모습과 똑같았다.
훤칠한 이마를 강조하는 대칭형 가르마에 금사 같은 머리카락이 양쪽 얼굴을 덮으며 내려왔다.
어깨와 쇄골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턱을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 왕족의 기품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오호, 여기 수아비도 있네.”
시냇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수아비는 나신의 몸에 담요를 덮고 있었다.
떠받치듯 양손을 모은 자리에 새가 앉아 있었고, 학교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로시잖아? 이렇게 보니까 되게 색다르다.”
도로시는 검은색 털실 니트의 하단을 끌어 올려 반항적인 입 모양으로 물고 있었다.
잘록한 허리에 물방울 모양의 배꼽이 귀엽게 박혀 있고 하체는 속옷만 입고 있어 기린의 다리처럼 쭉쭉 뻗은 각선미가 돋보였다.
한시도 떼어 놓지 않는 깡통 인형이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게 포인트였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진짜 그림 잘 그린다. 그냥 실물을 박아 놓은 것 같잖아.”
네이드는 그림책을 탁 하고 덮었다.
“에이, 학교에 미녀는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된 게 우리 짝은 하나도 없냐?”
“시로네는 있잖아.”
“아, 아니! 나도 뭐…….”
네이드가 찌릿한 눈초리로 돌아보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너, 에이미랑 둘이 여행 갔다고 했잖아.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거야?”
“응? 아무 일?”
시로네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명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얼굴로 피가 몰리는 것일까?
“뭐야? 진짜 수상한데? 이실직고하는 게 좋을 거야!”
시로네는 좌우로 눈을 굴렸다. 도와줄 사람 하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최후의 방법을 시전했다.
“에이, 몰라! 난 잘 거야! 요즘 피곤해 죽겠어. 1시간 후에 깨워 줘!”
번뇌를 없애는 데에는 역시나 잠이 최고다.
***
잠에서 깬 시로네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친구들은 이미 숙소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으음, 몇 시지?”
테이블에 쪽지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우리 먼저 간다. 요즘 피곤해 보이던데 푹 자고 이따 식당에서 보자. 그리고 테이블 아래 금고에 있는 24호 빨간책은 엄청 끝내주니까 절대로 보면 안 돼.
시로네는 하품을 하며 메모지를 구겨 버리고 일어섰다.
“그래도 오랜만에 낮잠을 잤더니 개운하네.”
시로네는 세면도구를 챙기고 졸업반으로 향했다. 숙소에 갈 필요 없이 학교에서 씻고 식당으로 갈 생각이었다.
양치와 세안을 끝낼 무렵 5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흐아으아음.”
하품으로 졸음의 잔재를 날리고 팔자걸음으로 복도를 지나는데 어딘가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뭐야?”
복도 끝의 음악실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법사가 차용하는 성악곡이 아닌 통속가요였다.
“우와, 엄청 잘하잖아.”
노래 실력이 놀랄 정도로 뛰어났다.
‘설마 가수가 왔나?’
음악실의 문을 열자 창가를 따라 악기들이 배열되어 있는 곳에서 마야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화전민촌을 다닐 때 흥얼거렸던 ‘그대보다 아름다운 건 없어’라는 경쾌한 리듬 앤 블루스였다.
문을 열자마자 현실로 들이닥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시로네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전율을 느끼며 굳었다.
그대보다 아름다운 건 없어
단순히 잘 부르는 게 아니었다. 음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듣는 순간 그런 확신이 들었다.
마야의 노래는 무언가 다르다.
전투준비 태세 (2)
‘이 기분은 뭐지?’
노래가 끝난 뒤에도 시로네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지 못한 채 자리를 지켰다.
“어? 시로네!”
뒤늦게 알아차린 마야가 밝은 미소로 반겼다.
“들어와. 여기는 어쩐 일이야?”
“좀 씻을까 하고. 음악 소리가 들려서 와 봤어.”
시로네는 훔쳐봤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칫솔을 들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야는 피아노 의자에서 엉덩이를 옮겨 자리를 권했다.
“여기 앉아. 의자가 없어서. 아, 혹시 바쁜 일이 있으면…….”
졸업반의 강자들과 사투를 벌이는 시로네였으니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괜찮아. 어차피 딱히 갈 데도 없었어.”
피아노 의자는 작았고 마야는 살집이 좀 있었다. 서로의 팔이 맞닿자 피부를 통해 생소함이 전해져 왔다. 그녀의 살결은 부드러웠고, 조금 차가운 편이었다.
어색한 시로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하하,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데 왜 말을 안 했어? 음악은 잘 모르지만 프로보다 훨씬 잘하는 것 같은데.”
마야의 눈에 슬픔이 감돌자 시로네는 실수를 깨달았다. 이런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프로가 아니라면 사연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 미안. 뭔가 상처가 있었다면…….”
마야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시로네의 진지함에는 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심란했다.
‘처음부터 그랬지.’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의 발표 날, 마야는 옥상에서 연설하고 있는 시로네를 처음 보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한다.
전교생 모두를 설득시켰던 당시의 상황은 그녀에게 충격적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노래…… 불러 줄까?”
“응. 듣고 싶어.”
마야가 건반에 손을 올리고 노래를 시작하자 시로네는 곧바로 그녀의 음악 속으로 빠져들었다.
단지 소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아…… 그렇구나.’
마법학교의 졸업도, 부족의 사정도, 가족의 가난도 잊은 채 오직 듣는 이의 행복을 위해 노래하는 것.
이 순간만큼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마야는 예술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