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60
남자가 건넨 것은 손가락 크기의 작은 호리병이었다.
“뭐가 들어 있는데요?”
“파리.”
“윽!”
레이시스가 인상을 찡그렸으나 남자는 중대한 사실을 밝히듯 단호하게 말했다.
“반드시 산 채로 삼켜라. 그러면 살 수 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혐오스러웠으나 목숨이 달린 일이었기에 레이시스는 차마 호리병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일화의 술이 시행되었고, 레이시스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호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병 주둥이를 입에 물고 고개를 쳐들자 딱딱한 무언가가 입안을 돌아다녔다. 구토가 밀려들었다.
역한 기분을 참으며 레이시스는 파리를 꿀꺽 삼켰다.
케르고인이 들어와 그녀의 옷을 벗기고 거인의 동상 옆에 세워진 8개의 유리구 중의 하나로 인도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플라즘이 차오르는 동안 레이시스는 겁에 질려 눈조차 뜨지 못하고 기도에 열중했다.
검은 액체가 유리구를 가득 채우고, 그녀의 몸이 낱낱이 풀어져 다른 자들과 뒤섞였다.
수많은 의식이 합쳐진 곳에서 마치 잠에 취한 기분을 느꼈다.
예상했던 죽음과는 달랐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도 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각 구역에서 탄생한 거인들이 한데 모여 요툰하임을 향해 행렬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새로운 동이 틀 무렵, 수많은 거인 중에서 1명이 괴성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거인의 몸은 이내 살과 뼈로 분리되었고 죽처럼 녹아 흘러내렸다.
역한 냄새가 풍기는 자리에 오직 레이시스만이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헉! 헉!”
의식을 되찾은 그녀가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생의 환희였다.
남자의 말이 옳았다.
파리를 먹자 정말로 거인의 몸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됐어! 나는 살았어!’
쿵! 쿵!
키보다 훨씬 높은 거인들이 지면을 울리자 그녀는 기쁨을 잠시 접어 두고 냅다 뛰었다.
전보다 훨씬 가벼웠고, 느낌도 괜찮았다.
다만 목이 말랐다.
그런 생각을 하자, 놀랍게도 수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샘물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감각이 예민해. 혹시 거인의 능력일까?’
뛰고 또 뛰었음에도 숨조차 차지 않았다.
마침내 옹달샘에 도착한 그녀가 해갈을 위해 상체를 구부리는 순간,
“꺄아아아아아악!”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 레이시스의 절망에 차오른 비명 소리가 숲을 수놓았다.
끔찍한 얼굴을 본 충격보다도 잔인한 것은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레이시스는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쳤다.
“안 돼! 내 몸을 돌려줘! 되돌려놓으란 말이야!”
그때 레이시스에게 비술을 알려 준 남자가 숲을 가르고 천천히 다가왔다.
레이시스를 괴물로 만든 장본인.
하지만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는 문득 추억한다.
어쩌면 그 남자야말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인정해 준 유일한 존재였을 것이라고.
“왜, 어째서 나를 이 꼴로 만든 거야! 왜 나에게 이런 짓을 한 거야!”
“살고 싶다고 했으니까. 생물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게 또 뭐가 있지?”
“헛소리 마! 당신이라면, 당신이라면 이런 흉측한 모습으로 살 수 있겠어?”
남자는 비웃음을 지었다.
“무엇이 되었든 너는 너. 형태를 파괴하는 것으로 너는 무한한 형태를 얻게 된 것이다.”
레이시스는 멀어지는 남자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는 끔찍한 사실 속에서 그녀는 유일한 의문을 떠올렸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지?”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작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사탄이라 말했다.
레이시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나마 인간과 비슷한 형태라도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간과 결합했던가.
노르인, 케르고인, 메카인, 심지어는 땅의 나라에서 온 자들의 형질까지 흡수했다.
그것은 레이시스에게 강력한 무력과 방대한 지식을 가져다주었지만 극심한 부작용 또한 낳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몸의 곳곳에서 이상 변화가 일어났고, 또한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시로네. 나의 구원자여.”
시로네의 정신은 모든 특성을 담을 수 있고,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를 섞을 생각이었다.
바로 천사의 육체였다.
***
제2천 라키아. 타락한 천사들의 도시.
고대로부터 직무에 태만하고 자신의 힘에 심취하여 마음대로 율법을 휘두른 천사들이 갇혀 있는 곳.
카리엘은 라키아의 상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방종한 타락천사들이 게으른 자태로 영겁에 가까운 수명을 낭비하는 중이었다.
“흥, 쓸모없는 것들.”
거인 군단장 기르신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한 카리엘은 라키아로 눈길을 돌렸다.
타락천사도 천사이기에 앙케 라의 전언에 따르지 않을 도리는 없으나 1명만큼은 예외일 것이라 자신했다.
욕망의 천사 이카사.
73구역에서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에이미 일행을 포획하여 제불에 바쳤던 타락천사다.
당시 이카사는 숫처녀 3명을 카리엘에게 데려간 공으로 평천사로 복권되기를 원했으나 시로네가 원래의 세상으로 떠나면서 오히려 더욱 중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타락천사들이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와중에도 그녀는 홀로 지하 300미터의 깊은 곳에서 거대한 철구에 묶인 채 무한궤도를 끝없이 돌고 있었다.
“하아. 하아.”
직경 20미터 크기의 철구가 우르릉우르릉 홈을 울리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굴러다녔다.
회전의 잔상 속에서 눈을 가리고 입에 마개를 문 이카사의 애달픈 얼굴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갔다.
카리엘은 철구가 한 바퀴를 돌 때까지 궤적을 감상하더니 되돌아오는 철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성광체가 번쩍하고 고리로 펼쳐지면서 거대한 벽처럼 밀려들던 철구가 쾅 소리를 내며 멈췄다.
“흐으으, 흐으.”
등이 활처럼 휜 상태로 철구에 묶인 이카사가 느침을 흘리며 괴로운 신음 소리를 냈다.
카리엘이 눈을 가린 가죽을 잘라 내자 이카사는 피곤한 듯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곧바로 눈물을 흘렸다.
“하위헤히……. 화휘…….”
드디어 와 주었다.
모두가 외면해도 반드시 알아줄 것이라 믿었던 대천사 카리엘이 온 것이다.
“이카사,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카사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시로네가 돌아왔다. 아마 너에게는 즐거운 일이겠지.”
“흐에이! 흐에에어으!”
이카사의 목에서 증오의 탄성이 터졌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그녀를 구속하는 것들을 해체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이카사가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고개를 쳐들고 예의를 갖추었다.
“부디 저를 사용하시옵소서, 탄생의 대천사시여.”
“시로네를 죽여라. 가급적 괴롭게. 놈의 원통한 얼굴을 내 앞으로 가져오도록. 꼭 보여 줘야 할 천사가 있으니까.”
“그것이야말로 저의 기쁨. 하오나 미천한 저로서는 가증스러운 시로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카리엘은 대법전을 펼쳐 제불의 중앙 연산장치의 상태를 확인했다.
연옥 전체를 나타내는 지도가 붉은 빛으로 잠식당하고 있었다. 면적에 비례해 봤을 때 가히 엄청난 속도였다.
“바벨이 연옥 상공을 탐색 중이다. 대보름의 날 전까지는 모든 좌표를 탐색할 수 있을 터. 그때가 되면 너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다.”
이카사의 눈이 번뜩였다.
그러고 보니 대보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연옥에서 음기의 율법이 가장 강해지는 시기. 또한 타락천사인 그녀가 가장 강력해질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기다려라, 시로네.’
이카사의 눈동자에 복수의 욕망이 휘몰아쳤다.
***
자정이 넘은 무렵, 플루의 방문이 열렸다.
조너인 그녀였기에 굳이 얼굴을 내밀 필요는 없었다.
복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녀는 민첩한 동작으로 문을 닫고 사령부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탐색이 주라면 둘보다는 하나가 낫고 걸렸을 때의 리스크도 줄어든다.
시로네가 반군 통합을 위해 제2사령부 예하 부대로 파견을 나간 지금이 적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지?’
벽을 따라 이동하던 플루는 모퉁이를 돌다 말고 황급히 돌아섰다.
복도 끝에서 2명의 보초병이 대화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었다.
“하아, 졸려. 저것들은 잠도 없나. 이 시간에 무슨 밥을 처먹이라는 거야.”
“크크, 실컷 먹으라고 그래. 어차피 가축이니까.”
음식이 한가득 담긴 식판을 들고 심드렁하게 모퉁이를 돈 보초병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동료가 물었다.
“뭐야, 왜 그래?”
“아니, 저기 뭔가 움직인 것 같아서.”
보초병은 식판을 동료에게 넘기고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걸어갔다.
의심스러울 만한 것은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뭔가 꿈틀했는데.”
“횃불을 착각한 거겠지.”
“아, 그런가?”
천장에서 내려온 플루가 보초병들이 지나간 자리에 착지했다. 이어서 드론이 소리 없이 날아와 어깨에 달라붙었다.
‘휴우, 의외로 조종하기 힘드네. 걸릴 뻔했잖아?’
하지만 덕분에 보초병의 말을 엿들을 수 있었다.
‘이 시간에 음식을 준다고? 누구에게?’
플루는 그들의 뒤를 밟았다.
벽에 도착한 보초병이 횃불 걸개를 만지자 벽이 열리고 비밀 계단이 나왔다.
1분 정도 기다린 플루가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벽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큰 공간이 펼쳐졌다. 사방으로 복도가 연결되어 있고 실험실만도 수십 개였다.
‘보초병들은?’
스피릿 존을 최대한 확장하여 소리를 수집하는 알고리즘을 적용하자 그들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돼지처럼 잘도 먹는군. 하긴, 너희만큼 행복한 인생이 어디 있겠냐? 부럽다.”
“크크, 부러우면 너도 들어가든지.”
잠시 말소리가 끊겼다.
“쩝, 이런 건 찝찝해서 싫다고. 말 그대로 가축이잖아?”
보초병들이 자리를 떠나자 멀리에서 엿보고 있던 플루가 철문으로 다가갔다.
밖에서만 열 수 있는 구조였다.
‘여기에 대체 뭐가 있기에?’
철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소리를 들어 보던 플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문득 안을 확인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결국 그녀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이, 이건……!”
잠금장치가 풀린 철문의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던 플루의 눈동자가 충격에 휩싸였다.
복수의 기회 (8)
“금강무장.”
시로네가 아르망을 수직으로 세우고 중얼거리자 칼날이 순식간에 몸을 뒤덮어 유기질의 로브로 변했다.
노르 대원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현재 시로네는 제2사령부 예하 부대를 순회하며 반군을 통합하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이 일정의 마지막 날이었고, 누군가가 시로네의 검을 보고 의문을 표한 김에 시연까지 하게 되었다.
천국에서 검이란 케르고인의 전유물이었기에 노르족 마법사들이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후우, 이건 무슨 공연하는 것 같네.’
73구역의 빛이라는 이름값은 확실히 대단했다.
적어도 사령부보다는 직접 현장에서 뛰는 자들의 반응이 훨씬 좋았다.
-집중점 형태 변화. 일원화 신호체계 감지.
‘어라?’
시로네는 여태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정보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음성에 집중하자 아르망이 새로운 사실을 전했다.
-사용자 대뇌 검색. 동기화. 단일 정신 체계로 통합 가능성 제시.
‘아, 울티마 시스템.’
시로네의 정신에 특별한 변화가 일어날 경우 아르망 또한 그에 맞춰서 기능이 바뀐다.
아르망의 연산 능력이라는 것도 시로네의 두뇌를 빌려서 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명칭, 울티마 시스템. 단일 정신 체계로 통합할 경우 복제, 양도, 계약 해지 불가.
-사용자 결정 여부 대기 중.
‘해지 불가? 이런 경우도 있나?’
언제든 해지가 가능했던 계약식 오브제에서 귀속식 오브제로 변한다는 뜻이었다.
완벽한 개인화 무기.
어떤 의미에서는 아르망을 완전히 소유하는 것이니 나쁜 일은 아니지만 생각을 깊이 할 필요는 있었다.
‘일단 내 것이 되어 버리면, 팔 수도 없는데.’
시가 40억 골드.
물론 얼마를 줘도 아르망을 팔 것 같지는 않지만 금전 외적으로 양도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은 맛이 나빴다.
‘만약 통합시킨다면?’
-예측 불가.
아르망은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시로네가 모르는 것까지 아르망이 분석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