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91
“선배님! 문을……!”
플루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하며 피닉스로 괴물들을 후려쳤다.
시로네의 옆에 착지한 그녀는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를 따라 늘어선 사방의 문이 덜컹덜컹 열리며 더욱 포악하고 거대한 괴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유일하게 괴물이 나오지 않는 곳이 있어.”
시로네도 짐작하고 있었다.
더 이상 말을 꺼낼 여유도 없이, 두 사람은 지하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크아아아앙!”
시야를 가로막는 괴물들이 촉수에 의해 산산조각 찢어발겨졌다.
반군 제2사령부에서 함께 싸운 플루조차도 시로네의 강력한 무력 앞에서는 기가 죽을 정도였다.
하지만 작전을 수행하는 데에는 이보다 다행스러운 게 없었다.
‘할 수 있어! 아라보트까지만 가면 되는 거야!’
지하실로 들어가자 저절로 문이 닫히고 벽에 걸린 횃불이 켜졌다.
더 이상 괴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다시는 지상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두운 복도를 따라 끝으로 향했다.
밝은 내부의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거울이 그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곳에 비치는 건 두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흑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요염한 외모의 여성이었다.
규정외식 파라다이스.
-미러링 : 동등한 권리.
거울 내부에서 웃고 있는 여성이 걸음을 내디디며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시로네와 플루는 경계심을 높이며 천천히 물러섰다.
“조심해, 시로네. 규정외식의 복잡함이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다. 엄청나게 강한 요정이야.”
시로네도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제아무리 정신에 특화된 요정이라도 이토록 세부적으로 건물을 구현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어서 오세요. 파라다이스의 지배인 오르가라고 합니다.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시로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또한 규정외식에 걸려든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곧바로 말을 꺼냈다.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저와 한 가지 내기를 해서 이겨야 합니다.”
플루가 물었다.
“어떤 내기지?”
“동등한 권리.”
오르가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검지를 들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행위 가능한 제안’을 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제안을 따르면 되는 것이죠. 단, 무언가를 제안했을 때에는 자신 또한 그것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제안을 수행하지 못하는 쪽이 지게 되는 것이죠.”
시로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아직까지는 어떤 의도인지 정확히 감이 안 오지만 위험하다는 것은 충분히 느껴졌다.
플루가 물었다.
“제안을 수행하는 대상은? 우리는 두 사람이잖아?”
“둘 중의 한 사람만 수행하면 됩니다. 그게 동등한 권리니까요.”
규정외식이 발동한 이상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시로네와 플루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오르가가 첫 번째 제안을 했다.
“상의를 탈의하세요.”
오르가가 먼저 상의를 벗어 바닥에 던졌다.
그렇게 조건을 충족시켰고, 이제는 시로네나 플루 중 한 사람이 상의를 벗을 차례였다.
‘금강무장을 해제시킬 생각이군.’
아르망을 해제하라고 직접적으로 제안하지는 못한다.
동등한 권리에서 제안은 쌍방 모두 가능해야 하고, 아르망이 없는 오르가에게 그것은 ‘수행할 수 없는 제안’이 되기 때문이다.
플루는 자신이 시로네를 보좌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시로네 혼자서 미러링에 당했다면 꼼짝없이 무장해제되고 말았을 테니까.
“내가 하겠어.”
벗지 못하면 패배.
아마도 결과는 죽음 정도가 될 것이다.
플루는 셰하킴의 의복을 벗고 상의까지 탈의했다. 그러다가 오르가가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똑같은 상태로 맞추었다.
정답이었다.
“좋아요. 이제 당신들이 제안을 할 차례군요.”
“제가 할게요.”
시로네가 나섰다.
규정외식자를 상대할 때의 정석은 마르샤가 말했던 대로 룰을 먼저 파악하고 그에 대한 해법을 찾는 것.
그런 의미에서 확인해야 될 사실이 있었다.
물리적인 대미지를 주었을 때, 실제 오르가는 충격을 받는가?
만약 눈앞의 여자가 환영에 불과하다면 자해를 했을 경우 대미지를 입는 건 시로네뿐이다.
‘아니, 그럴 가능성은 적어.’
동등한 권리의 비정상적인 룰은 명백한 등가교환의 원칙에 의거하고 있다.
만약 자신에게 대미지가 가해지지 않을 정도의 능력이라면 상대에게도 대미지를 줄 수 없을 것이다.
‘굉장히 영리한 요정이다. 등가교환의 원칙만 가지고도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 있고, 수많은 변수에도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야.’
그렇기 때문에 기대를 걸어 볼 만한 게 있었다.
‘만약 이게 먹힌다면…….’
시로네는 한 걸음 나서서 제안을 했다.
“왼쪽 검지를 부러뜨려라.”
어차피 켄서의 회복 능력을 이용하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붙을 것이다.
관건은 그녀의 상태였다.
오르가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이 시로네를 주시했다.
상대가 수행할 수 없는 제안을 따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시로네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왼쪽 검지를 붙잡았다.
이를 악물고 힘을 주자 검지의 관절이 바깥쪽으로 우득 꺾였다.
아프지만, 참아야 한다.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오르가는 천천히 손을 내려 검지를 잡았다.
곧이어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시로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오르가의 뒤편에 있는 거울이 일순 흔들리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물리적 대미지가 통한다. 그렇다는 것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오르가가 두 번째 제안을 했다.
“하의를 벗으세요.”
어떻게든 금강무장을 해제시키려는 집요한 집착에 시로네는 혀를 찼다.
파라다이스 홀에서 수많은 괴물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무기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 그렇구나!’
나신의 몸으로 서 있는 오르가의 몸에서 아름다운 장신구들을 발견한 시로네는 깨달았다.
이런 식이라면 결국에는 금강무장을 해제할 수밖에 없다.
전신을 탈의한 플루가 가진 것은 이제 큐브릭 하나.
반면에 오르가는 두 쌍의 귀걸이와 한 쌍의 목걸이, 2개의 반지와 3개의 팔찌가 남아 있다.
결국 플루가 반지마저 버렸을 경우, 조건에 따라서 ‘제안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릴 공간이 크다.
아무리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도 룰에 맞으면 되는 것이 규정외식이라면 결국 코너에 몰리는 것은 자신들이었다.
‘시간이 없어. 다음 제안에서 어떻게든 승부를 내야 해.’
금강무장이 풀리면 파라다이스의 괴물들을 상대할 수 없고, 오르가가 노리는 건 그것이었다.
플루가 하의를 벗기 시작하며 중얼거렸다.
“왜 맨날 나만…….”
그녀의 볼멘소리에, 시로네는 심각한 와중에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죄송해요, 선배님.’
어쨌거나 플루도 같은 판단을 내렸기에 순순히 제안에 응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끝을 내야 할 때였다.
‘할 수 있어. 아니, 유일한 방법이다.’
시로네는 단호한 표정으로 오르가를 노려보았다.
“내 제안은…….”
전쟁 개시 (2)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마지막 기회는 아닐지언정 여기에서 효과가 없다면 결국 패배하는 쪽은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연 통할까?
절반은 도박에 가까운 시도였다.
무엇보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이 규정외식으로 만든 공간이라는 게 문제였다.
눈앞에 있는 오르가와 실제 요정 오르가와의 간극은 얼마나 될까?
충격이 조금만 간접적으로 들어가도 작전은 실패다.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섬세한 규정외식이다.’
건물 한 채를 통째로 구현하여 방마다 수많은 규정외식을 설치해 두었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어떤 인간도 이토록 많은 사물을 왜곡시키지는 못한다.
가능한 경우라면…….
‘의식의 흐름.’
시로네는 드리모를 거쳤던 경험을 떠올렸다.
지금 당장 서 있는 공간만이 실체화되어 있고 다른 방은 무의 상태로만 존재한다.
자신의 집을 머릿속으로 떠올릴 때 전체를 조망하는 게 아니라 마치 실제로 움직이는 듯 생각이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만약 그런 방식이라면 규정외식 속에 또 다른 규정외식을 담는 것도 가능했다.
‘그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지만…….’
따라서 현재 오르가의 의식은 이 방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
여기까지가 시로네가 세운 가정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시로네는 오르가에게 제안했다.
“1분 동안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마라.”
이상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제안을 바꿀 권리는 오르가에게 없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시로네는 오르가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이 행위가 끝나면 다음에는 오르가 차례.
거기에서 승부가 갈릴 것이다.
‘발할라 액션.’
규정외식에 걸린 상황에서는 아마도 룰 이외의 행동이 금지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발할라 액션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원인과 결과의 등가교환은 행동이 금지되어 있다는 원인마저 통째로 받아들여 결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연산 시간.
아타락시아의 집적 시간이 30초 이내로 떨어진 상황에서도 시로네가 1분을 제안한 것은 조금이라도 여유 시간을 벌어 두기 위해서였다.
시로네가 제안을 수행하자 이번에는 오르가가 시로네를 바라보았다.
바라본다는 뜻은 오르가의 정신이 온전히 시로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얘기.
챙!
발할라 액션의 마법진이 머리 위에 탄생했다. 연산은 순식간이었다.
‘된다!’
정확히 57초.
미러링에 걸린 상태에서 아타락시아가 집적되는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이었다.
오르가가 놀란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원인과 결과가 역전되며 눈앞에 오색찬란한 아타락시아가 탄생했다.
“꺄아아아아!”
대천사의, 그것도 천국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이카엘의 마법진 앞에서는 셰하킴의 요정부장이라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토록 강력한 요정이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오르가의 몸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빛이 새어 나왔다.
빛의 인은 점차 부피를 키웠고, 급기야 그녀를 집어삼킨 채로 강렬하게 산화했다.
우르르르르릉!
파라다이스가 무너지면서 비로소 본래의 풍경이 드러났다.
여전히 파라다이스였으나 벽에 두른 석고들이 전부 부서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석고의 파편에는 붉은 물감으로 칠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공간을 설계해 두고 정신으로 통제한 것이군.’
플루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까지 정신으로 구현할 정도의 규정외식을 요정이 부린다면 이번 전쟁에서 인간 쪽에 승산은 없을 테니까.
“크윽!”
오르가는 연약하고 작은 몸을 땅에 누인 채 고통에 신음했다.
갑작스러운 아타락시아 공격은, 정신에 특화되어 있는 요정에게는 칼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는 충격이었다.
“부장님! 괜찮으십니까?”
오르가를 보좌하는 수많은 요정들이 달라붙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시로네 일행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반군의 첩자다! 죽여!”
요정들이 날아들자 플루는 시로네의 앞을 지켰다.
발할라 액션의 대가가 몇 초인지는 모르지만 시로네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자신이 싸워야 한다.
“봉황정!”
불새를 높이 띄운 플루는 도킨스 알고리즘을 열고 요정들을 상대했다.
셰하킴의 요정은 72계급 중에서도 중진에 속하기에 인간 세상의 프로 마법사들과 단체로 싸우는 듯한 중압감이 밀려들었다.
화염이 토해지고 요정들의 각기 다른 개념들이 파라다이스를 뒤흔들었다.
‘오래는 버틸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