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36
앙케 라 말소.
아마도 테라제의 정식 계승자에게만 전해지는, 세상에서 가장 보안 등급이 높은 기밀 중의 하나.
간도가 손을 대기는커녕 시선조차 두기를 어려워하자 우오린이 건네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읽어 보아라. 너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있기 때문이니.”
“네, 그럼…….”
200페이지짜리 서류의 내용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능력은 간도에게 없었다.
“마지막 3페이지 정도만 읽어도 된다.”
고분고분 말에 따른 간도의 눈동자에 글자 하나하나가 충격파처럼 밀려들었다.
침이 꿀꺽 넘어가고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이것이…….”
“그래. 앙케 라가 세상을 리셋하고 스스로를 말소시키려고 했던 사건의 전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라는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부터 변수가 발생한 것이지. 사탄이 제거되지 않는 한 몇 번을 리셋해도 같은 결과만이 반복될 뿐이다. 따라서 앙케 라 말소가 시행되는 시점은 사탄의 소멸 이후가 될 터. 그렇기에 라는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음에도 다시 한 번 세상을 되풀이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우오린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보통의 인간들에게도 리셋의 흔적은 미세하게나마 남는다. 그것이 바로 데자뷔지. 테라제는 미토콘드리아 이브로서 그 데자뷔를 거의 완벽하게 복원시킬 수 있다.”
“밑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래. 그 밑사건을 토대로 분석했을 때, 현재 우리는 두 번째 리셋이 시행된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다. 즉, 모든 과정을 똑같이 되풀이하면서 두 번째 리셋이 시행되었던 시점으로 가는 중간 지점이지.”
간도는 머릿속으로 가상의 시간선을 상정했다.
일단 리셋이 되면 세상은 ‘꺼짐 상태’가 된다.
그런 다음 무언가의 증폭으로 세상이 열리고 리셋을 했던 시점까지 되돌아가면 하나의 사이클이 완성되는 것이다.
‘현재는 그 사이클의 중간 지점. 즉, 앙케 라가 두 번째 리셋을 했던 시점까지는 아직 도착한 게 아니다.’
아마도 그 시점은 최후의 전쟁이 끝나기 직전.
하지만 테라제의 난입으로 미래는 바뀌어 가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최후의 전쟁은 언제 일어나게 되죠?”
“첫 번째 리셋 시기, 그러니까 거핀 말소기에서 최후의 전쟁이 일어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6개월 뒤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카리엘이라는 대천사가 미로의 시공을 파괴하고 미로는 사망하지. 하지만 너도 알고 있겠지만 두 번째 리셋, 앙케 라 말소기는 다르다. 내가 변수를 더했기 때문이지.”
그 변수 중의 하나가 바로 간도였다.
그가 앙케 라 말소기에 미스트라의 배 속에서 만들어진 이유,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의 품을 떠나 토르미아에서 첩자로 길러진 이유는 바로…….
“가올드를 천국으로 보내기 위해. 그를 천국으로 보내는 것으로 거핀 말소기와 다른 미래를 만든 것이군요.”
“그래. 라가 사탄의 소멸을 기대하며 두 번째 리셋을 시도한 이후, 테라제는 수백 년 동안 이것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던 중 내 전신인 미스트라가 거핀 말소기에 있었던 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리게 된 것이지.”
우오린의 머릿속에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미로를 보내지 않기 위해, 율법의 진을 강제로 돌파하면서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가올드의 모습.
그가 내질렀던 괴물과도 같은 비명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때 깨달은 것이다. 바로 이거다! 미로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는 이 남자라면 우리에게 특별한 변수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낸 우오린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녀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었지만.
* * *
끝없이 커져 가는 사탄의 얼굴이 하늘을 뚫었다.
천국에서 가장 높은 산맥조차 그의 어깨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우오오오오오!”
산이 생명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큰 파괴를 감당해야 할까?
사탄은 실로 태산이 된 기분이었다.
눈 아래에 깔린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하찮게 보였다.
쿠르르르릉!
사탄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제불의 구조물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이제 상공 700미터 지점에서 연타를 날리고 있는 에텔라의 존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흐윽! 흐으으윽!”
외중력으로 몸을 띄운 상태로 두 주먹을 빠르게 내지르는 그녀의 눈에서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력감.
온 힘을 다해 파동을 밀어 넣고 있지만 사탄의 육체가 더욱 커져 감에 따라 충격파 또한 허무하게 퍼져 버릴 뿐이었다.
‘포기하지 않아! 아니, 포기할 수 없어!’
아케인에게 패한 이후 더욱 강해진 각오는 두 번 다시 악의 힘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
으지직! 으지직!
수천 번의 주먹질 끝에 뼈가 부서지기 시작했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몸이 부서지는 것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신념이 부서지는 것.
“어째서, 어째서어어어어!”
악은 끝없이 강해지는가?
정말로 이 세상은, 선이 아닌 악이 지배하는 곳인가?
-모두가 선하다면…….
스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혼란은 일어나지 않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그 혼란을 이용해 고요함을 깨려고 한다. 악의 방법은 쉽고, 쾌락적이고, 효율적이니까.”
무릎을 꿇고 경청하던 에텔라가 고개를 들었다.
열네 살의 어린아이.
앳된 외모에 커다란 안경을 쓴 맹꽁이 같은 소녀지만 눈빛은 선의 의지로 성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악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스승님.”
“강해 보이니까.”
예상치 못한 말에 에텔라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래,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것은 네가 진정으로 강하기 때문이다. 강한 사람은 악에 흔들리지 않는다. 약하기에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야. 그러니 반드시 기억해라, 에텔라. 하나의 선이 백의 악을 막는다면 선은 악보다 강하다.”
“이야아아아아!”
천수관음 번뢰격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주먹이 박살 나서 더 이상 쓸 수 없을 지경까지 도달한 순간, 악에 받친 일격이 사탄의 몸을 강타했다.
‘강뢰장!’
쩌어어어어엉!
사탄의 피부가 물결처럼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 파문은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다시 밀려들었고, 펑 하고 충격을 토해 내며 에텔라를 밀어냈다.
“왜……!”
에텔라의 몸이 수백 미터 높이에서 추락했다.
“왜에에에에에에!”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에텔라는 극심한 무력감에 치를 떨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저는 강하지 않아요.’
신념이 붕괴되는 끔찍한 기분 속에서 에텔라의 육체는 지상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가속하고 있었다.
철륜안-이퀄리브리엄.
공기의 저항력이 어마어마하게 커지면서 추락의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쿵 소리를 내며 땅에 처박힌 에텔라의 눈에 스파크가 튀었으나 사지가 뜯어져 나갈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다.
‘어떻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잠시 기다리자 저 멀리에서 세인이 달려와 에텔라를 내려다보았다.
“괜찮나?”
“세인 씨.”
“늦어서 미안하군. 잉그리스에 볼일이 있어서.”
몸을 돌린 에텔라는 팔꿈치로 땅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뒤늦게 주먹에서 고통이 밀려들었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잉그리스라면 아르민 씨가 가기로…….”
“그래. 하지만 우리가 간 이유는 좌표 때문이 아니야.”
“우리?”
에텔라는 그제야 세인의 등 뒤를 넘어 보았다.
붕대로 눈을 감은 아리우스가 개처럼 혀를 빼물고 기어 오고, 그에게 채워진 목줄을 잡고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미로 씨.”
“저게 사탄이야? 진짜 못생겼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린 미로가 마치 동물원에서 동물을 관람하는 듯한 표정으로 사탄을 올려다보았다.
* * *
“어차피 선과 악이란 명칭도 인간이 정의 내린 경계에 지나지 않는다.”
우오린이 창문 앞에서 몸을 돌렸다.
“인간이 그것을 악이라 부르기 전에도 이미 그것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지. 어떤 기운? 혹은 혼돈이라는 개념으로.”
“그 혼돈이 실체화된 것이 사탄이군요.”
“그렇다. 아카식 레코드에서 태어난 생물체가, 아카식 레코드 바깥의 것을 규정한다. 그렇기에 앙케 라는 사탄을 이길 수 없지만 인간은 이길 수 있는 것이야. 단.”
우오린은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악을 정의하는 힘보다 선을 정의하는 힘이 더 강할 경우에 한해서지. 과연 인간은 선과 악 중에서 무엇을 옳음으로 정의할까?”
“악이 승리한다면 리셋은 없을 테고 우리에게도 더 이상의 미래는 없겠죠. 사탄을 소멸시키기 위해 여황님이 계획한 변수가 가올드였던 것입니까?”
우오린은 고개를 저었다.
“천국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연합이란 측면에서 실수를 하긴 했지만, 결국 성전의 전력이 풀가동된 상황에서도 패하고 말았으니까. 물론 가올드는 뛰어난 마법사지. 하지만 대체 불가능한 마법사는 아니다. 가올드는 변수를 만들 수 있는 계기에 불과. 진정으로 천국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변수는 따로 있지.”
간도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아드리아스 미로. 거핀 말소기에는 허무하게 사망하고 말았으나 가올드라면 그녀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 나는 그녀를 통해 미래를 바꾸려고 한 것이야.”
“그녀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지. 그저 믿는 수밖에.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없다면 누구도 할 수 없다. 어쨌거나 미로는…….”
햇살의 후광을 받으며 우오린이 미소 지었다.
“우리 인류가 배출한 최강의 ‘반야’니까.”
* * *
“잉그리스에는 무슨 일로 가신 거죠?”
에텔라의 물음에 세인이 짧게 답했다.
“라의 의지를 알기 위해.”
오늘 새벽 파티원에게 각자의 임무를 부여한 세인은 머릿속의 폭탄을 해체한 미로와 다시 조우했다.
천국에 오기 전, 정확히는 알페아스 마법학교의 이스타스에서 미로의 시공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재회의 기대감을 품고 들어간 곳에서 미로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세인은 기묘한 뒤틀림을 감지했다.
무엇을 선택해도 사실이 아닌 것 같은 찝찝함.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그 감각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지만 미로라면 다를 것이란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미로는 세인의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를 직감했고, 그길로 잉그리스의 아카식 레코드를 조사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이 전쟁의 진짜 의미를, 자신들이 어떤 흐름에 휩쓸리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두 번째 리셋이야. 거핀 말소 이후 또 한 번의 리셋이 일어났고 현재 그 시간선에 우리가 놓여 있는 거지. 이것이 바로 내가 이스타스에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
미로가 덧붙였다.
“세인은 철륜안으로 물리적, 감정적 요인을 조율하지. 그렇기에 이 세계의 미묘한 오차를 남들보다 더욱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던 거야.”
세인이 말을 이었다.
“문제는 첫 번째 리셋의 세상과 현재의 세상이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야. 왜 하필 이스타스였을까? 첫 번째 리셋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이스타스를 방문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야. 즉 전의 세계에서는 없었던 사건이 현재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미로가 말을 받았다.
“어떤 누군가가 가올드를 천국으로 보내는 사건을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거지. 즉, 나를 해방시키기 위해. 대충 짐작은 가. 여기까지 계산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권력, 머리를 지닌 자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테라제군요.”
에텔라 또한 천국에 오기 전 가올드 일행에게 테라제의 비밀을 들은 터였다.
“맞아. 아마도 20인의 심판의 날부터 모든 걸 계획하고 있었던 거겠지. 목적은 단 하나.”
미로는 세상을 파괴하고 있는 사탄을 올려다보았다.
“저 괴물을 쓰러뜨리기 위해. 앙케 라는 리셋을 통해 인간에게 기회를 주었고 테라제는 그 가능성을 만들었어. 그래서, 기분이 아주 나빠.”
미로는 입술을 푸르르하고 풀면서 걸음을 옮겼다.
-미로야, 이제 그만…… 돌아가자.
짧은 순간 한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미로의 눈이 험악하게 치떠졌다.
“이 잡것들이 나를 가지고 놀아?”
남겨진 질문 (1)
“흐윽! 저급한 생물 따위가 감히 나를…… 나를!”
앙케 라의 명을 받고 제불의 곳곳에 은신해 있던 천사들은 가라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퓨직스 머신으로 야맹의 수하들의 형질을 물려받은 가라스와 현재 천사들에게 무자비하게 번식을 시도하고 있는 가라스는 이제 완전히 다른 생물체였다.
가히 대폭발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무지막지한 진화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천국 최상위 생물체인 천사의 몸에 후세를 남기는 것은 종의 유지에 있어 최적의 선택.
가뜩이나 강한 종족 보존의 욕구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고, 그 탓에 천사를 제외한 모든 종에 대한 생식능력이 소멸되었다.
오직 천사만을 갈구하는 가라스의 형태는 거대한 올챙이처럼 변했고 자체 세포분열을 통해 수를 늘려 갔다.
단지 몸에 닿는 것만으로 천사들은 가라스의 씨를 수정했고, 무력으로 제거할 경우마저 자폭을 통해 어떻게든 자신의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이런 수치를 당하느니……!”
천사들은 스스로 소멸을 선택했고 그럴수록 개체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키아아악!”
복도를 가득 채운 한 무리의 가라스들이 빛의 대천사 레이엘에게서 뿜어진 광채에 흔적조차 없이 타 버렸다.
“크락! 크라라락!”
뒤를 맡은 분해의 대천사 사티엘이 마지막 남은 가라스의 몸을 분자 레벨 아래로 분해시켰다.
가라스 따위가 몸에 닿을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날아드는 모습을 봤을 때는 섬뜩할 정도였다.
“역겨운 것들. 감히 천사를 능멸해?”
“괜히 천외 격리종이 아니야. 어쨌거나 상황이 심각하군. 벌써 천사의 전력 절반을 잃었어.”
앙케 라는 사탄이 소멸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상 두 대천사가 해야 할 일은 최대한 많은 천사들을 생존시키는 것.
훗날을 도모하는 문제도 있지만 더 이상 사탄의 힘이 강해지면 리셋조차 하지 못하고 끝장이었다.
“한심하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