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44
“오빠 되게 강하죠? 내가 구해 줬으니까 엄마 괴롭히는 도적들 좀 해치워 주세요.”
“언제는 안 유명하다더니?”
“괜찮아요. 그 도적들도 안 유명해요. 그리고 유명하지 않아도 엄청 센 기사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아저씨도 그런 거죠? 사실은 엄청 센 거죠? 오빠만큼 큰 검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리즈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런 건가…….’
물론 선의의자 호의였겠지만 죽어 가는 리안을 구해 준 데에는 어린아이의 간절한 기대 심리도 깔려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리안은 그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확실하게 알게 된 사실 하나.
검은 살생이고, 살생은 곧 책임.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살생을 선택했을 때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살 수는 없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리즈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런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나쁜 것만도 아니에요.”
‘나쁜 것만은 아니다?’
리안은 오히려 그 말이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실비아는 염증 치료제를 어디서 구했을까?
전쟁터에서 약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하기 마련이다.
또한 타인에게 선뜻 음식을 내줄 만큼 식량도 넉넉하다는 것은, 처음 마을에 왔을 때 느꼈던 살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 자식들…….’
어떤 상황을 직감한 리안이 눈에 바짝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 도적놈들이 아줌마에게…….”
“어이! 실비아!”
그때 문밖에서 술 취한 자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창백해진 리즈가 엄마의 뒤로 숨고, 실비아 또한 낯빛이 어두워진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쾅!
부숴 버릴 듯 문을 찬 남자가 성큼성큼 쳐들어왔다.
키가 컸고, 얼굴에는 콧잔등을 지나는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붉은창 도적단의 부단장 폭스였다.
“어디 있어? 간밤에 여기서 잤다는 그 자식! 설마 숨긴 건……!”
매서운 눈초리로 집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식탁 쪽에서 고개를 멈췄다.
들은 것보다 훨씬 어리고 잘생긴 놈이었다.
“호오? 그랬다 이거지?”
무명의 검사 (2)
폭스의 살기등등한 눈빛 앞에서 리안은 천천히 시선을 피했다.
피할 수 있는 싸움은 피하는 게 좋다는 것이 전쟁터를 전전하며 깨달은 또 한 가지였다.
아니, 사실은 거짓말이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념을 지켰던 수많은 자들을 보아 왔다.
‘대체 뭐가 문제지?’
상처가 나면 아프다거나,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1차원적인 두려움이 아니다.
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다.
매 순간 불확실한 미래에 몸을 던져야 하는 불안감은 때로는 목숨을 포기하는 것보다 두려운 법이었다.
굳어 있는 리안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한 폭스가 무언가를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흔한 일이다.
검 좀 배웠다는 애송이들이 밤톨만 한 무력을 앞세워 일반인들에게 허세를 부리는 일은.
도적단 중에도 그런 부류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폭스는 그들과 실력의 궤가 달랐다.
무엇보다 그는 스키마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일단 대가를 치르는 건 이따가 하기로 하고…….”
그렇게 중얼거린 폭스가 갑자기 고개를 꺾으며 실비아를 노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실비아? 내가 너에게 그토록 잘 대해 줬건만, 딴 놈을 끌어들여? 역시 너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가?”
역겨운 오해에 실비아의 인상이 구겨졌다.
“비열한 인간. 친구의 여자를 탐하는 자에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군요.”
폭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군인이기를 포기하고 도적이 된 순간부터 모든 걸 내려놓은 그였지만, 전우였던 실비아의 남편을 떠올릴 때면 최후의 양심이라는 것이 항상 거슬렸다.
“닥쳐! 녀석은 죽었어!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고!”
폭스는 양심의 가책을 떨칠 마법의 문구를 떠올렸다.
“그리고 난 어릴 때부터 너를 좋아했지. 난 사랑을 하고 싶은 거야.”
“딸을 둔 유부녀에게 관심을 갖는 건 사랑이 아니에요. 더러운 집착이지.”
“더러운 집착?”
폭스의 얼굴이 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차가워졌다.
“그렇게 생각했단 말인가? 난 언제든 널 가질 수 있었어. 그런데 더러운 집착이란 말이지. 좋아,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도 참지 않을 거야.”
폭스가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며 다가오자 리즈가 엄마의 앞을 막아섰다.
“우리 엄마 괴롭히지 말아요! 아빠가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폭스의 차가운 시선이 리즈를 관통했다.
“리즈야, 난 엄마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이 지옥 같은 삶에서 구원해 주려는 거야. 분명 너희 아빠도 나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파렴치한 언사에 실비아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당신, 제정신이 아니야. 미쳤어.”
“크크,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안 미치고 산다고 뭐가 달라지나? 널 가질 수 있다면 난 차라리 미치는 것을 택하겠어.”
어떤 방법으로도 폭스를 설득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실비아가 리즈를 바깥으로 떠밀며 소리쳤다.
“리즈! 도망가!”
그리고 테이블에 있는 수프 냄비를 들어 폭스에게 던졌다.
“흥!”
두꺼운 주먹으로 폭스가 냄비를 후려치는 순간 실비아가 불쑥 눈앞으로 다가와 포크를 복부에 찔렀다.
어깨를 움찔한 폭스는 태연하게 상처를 살폈다.
집에서 쓰는 식기 정도로 강철 같은 근육을 뚫고 들어가기에는 무리였다.
“건방진 게……!”
폭스가 뺨을 후려치자 실비아의 몸이 고꾸라지듯 바닥에 처박혔다.
“엄마! 엄마!”
폭스는 리즈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날 원망하지 마라. 당신이 자초한 일이니까.”
“그만둬.”
폭스가 눈동자를 돌리자 언짢은 표정을 지은 채 의자에서 일어나는 리안이 보였다.
덩치가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서 있는 모습을 보자 밸런스가 상당히 잘 잡힌 몸이었다.
“지금 나한테 한 소리냐?”
“아무리 미쳤어도 아이가 보는 앞에서 험한 짓을 하는 건 아니지.”
“……네 말이 맞아.”
폭스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일단 너부터 죽이는 게 순서겠어. 어때? 자신 있으면 덤벼 보든가.”
도발에 넘어가는 순간 리안의 어깨에는 무게로 환산할 수 없는 막중한 부담이 얹히게 된다.
“…….”
리안은 리즈를 돌아보았다.
잔뜩 기대감이 어려 있는 눈빛은 아이만이 낼 수 있는 이기심일 터였다.
“나가자. 집 안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아.”
리안이 승부를 제안하자 폭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며 올라갔다.
아무래도 리안의 덩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짜식, 허세 떨기는. 좋아, 나가자고. 마을 사람들에게 이 집의 주인이 누군지 확실히 새겨 주도록 하지.”
집을 나서자 소란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폭스의 시선 밖에 숨어서 상황을 훔쳐보고 있었다.
리안은 자신을 에워싼 12명의 도적들을 살폈다.
정정당당이라든가, 머릿수를 맞춰 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12 대 1인가.’
폭스가 장검을 크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어이, 애송이 검사! 빨리 안 덤비고 뭐 해? 설마 누가 종이라도 울려 주기를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선제공격은 어떤 상황에서도 효율적이지만 굳이 목숨을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숫자가 많은 쪽에서 먼저 덤빌 필요는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리안은 대검을 천천히 겨누었다.
보기에도 무거운 철 덩어리가 무게중심을 완전히 이탈한 거리까지 쭉 뻗어 나오자 도적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히 살인적인 완력이었다.
“부단장님, 저 녀석, 사실은 엄청 센 거 아니에요?”
부하가 속삭이는 말에 폭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적을 앞에 두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봤자 사기만 떨어질 뿐이었다.
“닥쳐. 어차피 혼자야. 12명이서 달려들면 누구라도 죽을 수밖에 없어.”
강력한 힘을 선보이기는 했으나 리안의 속마음은 심란할 따름이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에는 그저 죽기 살기로 돌진해 승리를 따내는 것만이 전부였으나 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얼마나 무모하고 미친 짓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여태까지는 요행에 지나지 않았어. 내 검은 완벽하지 않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
전쟁터에서 굴러먹던 베테랑들이 모인 도적단이라고 하나 리안의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베어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끝없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검에 대한 의문들.
확신이 없기에 행동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하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하게 된다.
‘내 검은 과연 옳은가? 정말로…… 이들을 벨 수 있을까?’
점차 창백하게 질려 가는 리안의 얼굴을 지켜보던 도적들이 곧 황당한 표정들이 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저거 뭐야? 완전 겁먹었잖아? 이제 보니 힘만 센 멍청이였군.”
“어이, 어떡할 거냐? 이제 넌 죽을 텐데.”
리안의 기세가 위축되자 부하들이 저절로 간격을 좁히며 다가왔다.
“오빠…….”
리즈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드러났고, 리안이 이기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실비아 또한 낯빛이 창백해졌다.
“얘들아! 죽여 버려!”
도적단이 달려들자 본능적으로 뒤부터 살핀 리안의 눈에 장검이 찌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큭!”
대검으로 틀어막으면서 중심이 뒤로 밀린 리안은 상대의 위치를 확인하지도 않고 크게 검을 휘돌렸다.
‘참으로 유치한 검이다, 리안.’
신적초월은 분노를 원천으로 하는 야차의 기술.
자신의 검에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하나의 행동에 온전히 의지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뭣들 하고 있어! 그냥 가서 찔러!”
몇 개의 검이 리안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어떤 놈들은 찌르기 자세로 복부를 노렸다.
‘피할 수 없어!’
그렇게 확신한 리안은 상체를 뒤틀면서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의 생각과 다르게 방어와 회피가 완벽하게 치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리안은 지금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괴감에 빠질 뿐이었다.
‘운이야. 이건 실력이 아니라고.’
올가미를 던지듯 대검을 돌리다가 후려치자 도적단의 목이 뎅겅 떨어져 나갔다.
‘이 각도가 아니야. 요행일 뿐이다.’
리안이 보고 있는 것을 도적단은 보지 못했다.
스키마를 구사하는 폭스조차도 리안이 선보이는 높은 경지에 감추어진 단순한 진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얻어걸리기는!”
리안이 한쪽 발을 내밀며 사선으로 대검을 휘두르자 2명의 도적이 철썩 소리를 내며 토막으로 변했다.
사람 2명을 뼈째로 끊어 버리는 검격에 도적단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뭐, 뭐야, 이 자식……!”
“비켜, 멍청이들아!”
숫자가 줄어들수록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폭스가 대검을 쳐들고 손수 목을 베기 위해 달려들었다.
대장까지 합세한 도적단의 기세는 리안을 압도했으나, 의외로 전투는 팽팽했다.
‘너무 깊이 들어갔어. 이런 건 검술이 아니야.’
베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지만 도적들의 숫자는 차근차근 줄어들고 있었다.
이기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머릿속의 궤적을 완벽하게 구현하여 후련하게 폭발시키고 싶으나 그것의 실체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는 검술을 펼치고 있는 것인지 망나니처럼 칼춤을 추고 있는 것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챙!
날카로운 철음성이 리안의 정신을 퍼뜩 현실로 되돌렸을 때, 이미 11명이 죽고 남아 있는 자는 폭스뿐이었다.
“제기랄!”
폭풍처럼 몰아치는 리안의 공세에 폭스는 연거푸 밀렸다.
이미 스키마를 통해 육체 능력을 대폭 증강시켰는데도 공격을 피하는 게 전부였다.
전투에서 스키마의 유무는 종간 장벽만큼이나 큰 차이를 발생시킨다.
그 격차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기술적인 격차가 말도 못 하게 크다는 얘기.
‘대체 뭐지, 이 녀석? 보통 검사가 아니야.’
더욱 짜증이 나는 건,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리안의 눈에 조금의 희망도 깃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틀렸어! 이것도, 저것도, 다 틀렸다고!’
폭스가 볼 수 없는 것을 리안은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 검을 내지를 때마다 죽음과 같은 절망이 찾아왔다.
‘아니야.’
최단거리를 찌르는 천재적인 통찰은 그에게 없다.
수백수천 번을 휘두르며 1밀리미터 이하의 레벨에서 오차를 조절해 나가는 과정만이 그가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게 아니야.’
그렇지만 보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상적인 경지.
그 경지가 아른거리기 때문에 모든 기준이 엉클어져 버린 것이다.
“이게 아니란 말이야!”
리안이 울화통을 터뜨리는 순간 처음으로 신적초월이 발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