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75
울티마 시스템, 엘리시온이 발동하면서 인간의 가장 먼 역사에 새겨진 또 하나의 목소리가 시로네에게 도달했다.
-궁극의 끝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시로네는 이렇게 답했다.
“……공(색즉시공 공즉시색).”
쿠쿠쿠쿠쿠쿠!
세상이 흔들리자 슈라는 피라미드를 가동시켰다.
‘보여 다오, 너에게 무엇이 있는지.’
미로 또한 발할라 액션의 등가교환을 가능하게 만든 시로네의 담보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래, 대체 뭐가 있었던 거야?’
세상이 디지털 코드로 변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유의 코드와 넘버들이 빗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은 언더 코더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다.
‘코드가 단순화되고 있어.’
고유의 코드, 즉 무한 진수로 구성되어 있던 것들이 단순화되면서 억 진수를 지나 10진수까지 떨어졌다.
‘5진수. 3진수. 2진수.’
거기까지 분석한 슈라는 머릿속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1진수…….”
하나.
모든 코드가 1로 변환되었다.
2진수까지만 해도 슈라는 태양의 정보와 구름의 정보를 가늠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불가능했다.
태양의 정보가 11이고 구름의 정보가 111이라고 한들, 11111에서 둘을 나눌 방도는 없는 것이다.
‘경계가 없다. 이것이 바로…….’
가이아인의 통찰, 엘리시온이었다.
더 나아가 미로는 깨달았다.
‘가장 단순하기에 궁극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오직 무한의 영역.
엘리시온은 갇힌 상태의 문을 열고 열린 상태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던 것이다.
수호자들의 시체도, 지하인들의 시체도, 거대한 1의 흐름 속에 파묻히자, 정신을 차린 슈라가 박녀에게 몸을 날렸다.
‘공이 밀려든다!’
세상이 끝장나도 싸우고 있는 박녀의 뒷고대를 끌어당긴 그녀가 리안의 검을 회피하며 소리쳤다.
“나가야 돼! 리셋된다!”
“기다려! 아직 승부는……!”
슈라는 시로네의 프로토콜에 맞게끔 자신과 박녀의 육체를 1의 코드로 분해시켰다.
리안은 코드의 폭포에 스며들어 역류하듯 올라가는 1의 집합체를 바라보았다.
착시처럼 잠시나마 경계선이 보였으나, 이내 다른 코드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한편 시로네는 소세계창유의 어두운 공간에서 여전히 궁극의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하여 떠나는가!”
뮤커스 맨이 시로네의 뒤에 나타났다.
디지털 신호로도 시로네와 연결이 되지 않자 직접 인간의 형상을 빌려 쫓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로네를 만질 수 없었다.
불과 1미터도 되지 않는 간격이었으나 라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공의 경계였다.
“이 세상의 가치를 잊었느냐! 수많은 고통을, 생의 얽힘을 보고도 떠날 수 있는가?”
“거짓도 진실도 없어.”
시로네가 돌아서며 말했다.
“모두 없던 것에서 나온 한낱 꿈일 뿐.”
그 말을 끝으로 시로네는 천천히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기다려라, 시로네! 너는 나에게 대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어찌하여……!”
라는 시로네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우주의 끝과 끝보다도 먼 갇힌 상태와 열린 상태의 간극이었다.
“시로네에에!”
아포칼립스 리셋.
시로네 말소(정보계 이탈).
* * *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미로 일행은 코드가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창백한 공간 속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마르샤와 페르미가 주위를 둘러보는 가운데, 힘이 풀린 리안이 털썩 주저앉았다.
오직 미로만이 스폿임을 알고 있었다.
“리안.”
백색의 풍경을 가르고 시로네가 모습을 드러내자 리안이 아픈 몸을 이끌고 벌떡 다가섰다.
“시로네, 너…….”
“그래. 모든 게 떠올랐어. 걱정시켜서 미안해.”
리안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모든 게 떠올랐다는 말은 시로네 자신조차 정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미안해. 하지만 너를 살리려면…….”
“리안, 나는 괜찮아.”
시로네는 진심이었다.
“나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
시로네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미로 씨, 마르샤 누나, 감사했습니다. 페르미, 너도.”
페르미에게 일말의 적개심도 없다는 것은 현재 시로네의 상태가 어떤지를 짐작하게 했다.
“뭐, 나한테까지 그럴 필요는 없고.”
페르미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가오더니 오른손에 감가상각의 거래 계약서를 구현시켰다.
“일단 서명부터 해 주면 좋겠는데.”
시로네는 계약서를 바라보았으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펜을 건네받은 시로네는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제 된 거야?”
페르미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몸을 틀었다.
계약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남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걸어가는 그의 어깨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크크크, 크크크크.’
서명을 현실로 넘겨야 위조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만 페르미의 얼굴은 이미 승리에 도취되어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드디어 따냈다! 1,900억 골드!’
페르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시로네는 허무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현실에서 너무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럼, 모두 안녕.”
“시로네, 잠깐 기다려!”
리안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풍경이 언더 코더의 마지막 출입구가 있던 거울의 방으로 변했다.
“시로네…….”
미로가 다가와 리안의 어깨를 짚었다.
“서운해하지 마. 지금의 시로네에게는 당연한 일이니까. 진짜 문제는 현실의 시로네야.”
“그게 무슨 소리죠?”
“울티마 시스템은 모든 정보를 하나로 통합하지. 따라서 시로네의 엘리시온도 경계가 없어. 말인즉슨, 이모탈 펑션을 극한까지 통제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거야.”
페르미의 인상이 구겨졌다.
천국에 가기 전에도 까다로운 상대였건만 이제는 더욱 골머리를 앓게 생겼다.
“뭔지는 몰라도 시로네가 강해진다는 거죠. 그건 좋은 거 아닌가요?”
미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엘리시온은 양날의 검이야. 궁극의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어. 예상컨대 인간이 버틸 수 있을 만한 허무가 아닐 거야. 그 허무를 앞에 두고 시로네가 현실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을까?”
리안의 얼굴이 멍해졌다.
“하지만 그건…….”
“나도 알아. 아포칼립스의 세계는 인간이 생각하는 한계를 넘지 못하지. 따라서 현실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는 장담 못 해. 하지만 만약 오늘과 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면…….”
잠시 주저하던 미로가 입을 열었다.
“시로네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야.”
코드 분해 (3)
* * *
아포칼립스 리셋.
수많은 기호들이 정보의 종착지를 향해 쌓여 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푸른 빛이 질주하면서 3차원 조감도를 그리고, 모든 풍경이 활기를 되찾았다.
도시의 정보가 재구성되었다.
멸망한 풍경은 시로네가 사라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어느 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세계는 그렇게 재탄생되어 가고, 바다가 말라 버린 광활한 해구를 걸어가던 남자는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뭐지?”
그의 이름은 가올드.
본능에 따라 세계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자였다.
“이미 걸었던 길을 가는 기분이군.”
머리는 산발에 몸은 바싹 말랐고 더러운 넝마만이 맨몸을 가려 주는 전부였다.
“상관없지.”
가올드는 두 손으로 쥐고 있는 지팡이로 땅을 내리찍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신은 어디 있는 거지? 죽여야 하는데…….”
* * *
“시로네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리안은 마음이 무거웠다.
아포칼립스에서 만난 시로네는 정보에 불과하지만, 그 정보는 현실의 시로네와 정확히 일치한다.
만약 이번과 같은 상황이 현실에서도 닥친다면 시로네는 또다시 자신을 희생시킬 터였다.
“하지만 그 끝에 남은 건 궁극의 허무.”
“그래, 열린 상태가 되는 거지. 우리가 아포칼립스를 무의미하게 느끼듯, 현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리안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미로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걱정하지 마.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아포칼립스는 인간의 생각을 재료로 만든 세계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
“시로네가 해낸 것 중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죠.”
정곡을 찌르는 말에 미로는 입맛을 다셨다.
‘이상한 데서 예리한 아이네.’
이모탈 펑션을 무한으로 확장하면 자아가 해체되고, 완벽하게 통제하면 스스로의 의지로 세상을 이탈하게 된다.
후자를 성공시킨 자는 거핀이 유일할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시로네이기에 노파심이 생기는 것이다.
회복 불가능한 분위기를 깨듯 아리우스가 나타났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아포칼립스에서 차단당하는 바람에 언더 코더에서 기다린 그였다.
“뭐, 내가 무사하지 않으면 누가 무사하겠어?”
아리우스가 지당한 말씀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일은 잘 해결되었습니까?”
미로가 고개를 돌리자 페르미가 감가상각의 거래 계약서를 꺼냈다.
“일단 서명은 받았습니다.”
위조된 서명이지만 100퍼센트 복구된 시로네의 정보였기에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리우스는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품에 넣었다.
“이제부터는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도난당한 물품이어야 현실로 가져갈 수 있거든요”
위조된 서명이 현실에서 효과를 드러내려면 드리모의 검열을 피해 오브제로 만들어야 한다.
드리모의 규칙에 의하면 명백한 부정이지만, 도굴꾼 아리우스에게는 전공이었다.
“할 수 있겠어?”
“문제없습니다. 이보다 더한 것도 도굴해서 테라제에게 팔았으니까요.”
“하긴, 그랬지. 그럼 출발할까?”
미로 일행은 언더 코더를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 드리모에 도착했다.
꿈지기에게 부정이 발각되는 순간 영원히 꿈나라에 갇히게 될 수도 있지만 아리우스는 과거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켰다.
“꿈에서 나가고 싶습니다.”
드리모의 출구에서 아리우스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몽인 루버가 안광을 발하며 뚫어지게 일행을 살폈으나 이내 인자한 표정으로 답했다.
“좋은 꿈들 꾸었나? 잘 가시게.”
도적단의 리더인 마르샤조차도 몽인의 곁을 지날 때는 심장이 쿵쾅거릴 지경이었다.
표층 심리로 올라온 일행은 아리우스가 설치한 도어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육체의 감각이 아련하게 멀어지고, 밝은 빛이 공격적으로 그들을 집어삼켰다.
“커억! 커억!”
가장 먼저 꿈에서 깨어난 사람은 리안이었다.
갑자기 치미는 엄청난 고통에 몸을 일으키자 나란히 누워 있던 자들도 하나둘씩 눈을 떴다.
“크으으으!”
“리안, 괜찮아?”
마르샤는 놀란 표정으로 리안의 주위를 살폈다.
자면서 얼마나 많이 피를 토했는지 카펫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하인의 무기에 엄청 맞았으니까. 칼로 베이기도 했고.”
리안은 연거푸 심호흡을 하며 거대한 통증과 맞서 싸웠다.
아포칼립스에서의 감각은 실제였으나 막상 꿈에서 깨어나자 정보의 전달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꿈을 통제한 아리우스가 가부좌를 풀고 다가왔다.
“발작이 심했습니다. 재생 능력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겁니다.”
어쨌거나 죽지는 않을 것이기에 미로는 가장 중요한 일부터 살폈다.
“일단 확인해 보자. 할 수 있겠어?”
리안 또한 고통을 참으며 페르미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