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21
루캉의 얼굴을 붙잡은 그녀가 진한 키스를 전했다.
그날의 사건 (4)
“흐읍!”
상식 밖의 상황에 루캉의 눈이 부릅떠졌다.
반면에 동료들의 얼굴은 다시 차분하게 변했다.
‘욜가…….’
욜가는 좋은 사람이다.
“원한다면…….”
욜가가 루캉의 손을 가슴으로 이끌었으나 그의 손은 차마 그녀의 몸을 더듬지 못했다.
“무, 무슨 짓이야? 남편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황급히 입술을 뗀 루캉은 욜가의 얼굴을 보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담은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욜가는,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다.
‘인자무적.’
에드가는 경이로운 감정으로 욜가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미로에게 목적을 이루기 위한 탈인간적인 단호함이 있다면 욜가에게는 괴기스러울 정도로 비정상적인 인자함이 있다.
‘우리가 욜가에게 인생을 바친 이유이기도 하지.’
그렇기에 이스타스의 상층부에 기꺼이 함께 들어올 수 있었다.
욜가를 멍하니 쳐다보던 루캉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죄…….”
죽음에 도달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욜가는 감정을 계산하지 않는다.
“괜찮아요. 모든 게 제 탓입니다. 저를 원망하세요.”
그렇기에 모든 추함을 끌어안을 수 있다.
‘절대적인 진심. 일말의 가식도 없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욜가라는 여자였다.
루캉은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으며 숨을 거두었다.
일견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동료들은 그의 눈물의 맛을 알고 있었다.
참회의 눈물도, 욜가에게 침을 뱉은 일을 뉘우쳐서도 아니다.
‘악이 인간의 용기를 넘어서는 것으로 공포를 준다면 극단적인 선 또한 공포다.’
명백히 순수한 선이 전하는 공포에 루캉은 질려 버린 것이었다.
“욜가, 여기.”
그녀의 친구이자 동료인 무스탕이 향수를 뿌린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고마워.”
얼굴의 침을 닦은 욜가는 다시 후드를 절반 정도 눌러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발하자. 미로를 찾아야 돼.”
검사 나인이 말했다.
“미로를 설득하는 것은 조금 전에 실패했잖아. 다시 만난다면 싸울 수밖에 없어.”
“……할 수 없지.”
욜가의 얼굴에 다짐이 새겨졌다.
“하지만 끝까지 설득할 거야. 미로는 내 동생이니까.”
“…….”
동료들이 함구하는 이유는, 욜가만큼이나 미로도 정체성이 뚜렷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서 가자. 시간의 폐곡선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그때 창고 문이 벌컥 열리자 동료들이 동시에 전투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멍해졌고, 그중 무스탕이 날씬한 허리에 손을 턱 올리며 물었다.
“뭐야, 너는?”
정신없이 연구회로 향하던 시로네도 욜가 일행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당신들은…….”
화성이라면 전투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우린 적이 아니에요.”
다행히 욜가가 먼저 적의가 없음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뇌리 저편에서 느껴지는 으스스함이 있었다.
‘착해 보이는데, 뭔가 이상하다.’
여태까지 수많은 선인을 만나 왔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반가워요. 저는 욜가라고 합니다.”
페르미의 어머니였다.
‘이 사람이 욜가구나.’
시로네는 안찰의 말을 떠올렸다.
거핀이 후계자를 준비하고 떠나려는 것에 반대하여, 미로를 막아 내기 위해 출동한 인물.
‘키만 빼면 정말 페르미를 닮았네.’
같은 성향임에도 이토록 극과 극으로 나뉠 수 있는 것일까?
심지어 등골이 오싹한 선한 미소마저 페르미를 연상케 했다.
“당신은 누구시죠?”
“아.”
시로네는 너무 시간을 끌었음을 깨닫고 욜가의 손을 맞잡았다.
“저는 시로네라고 해요.”
처음 듣는 이름에 욜가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의 신체 나이만 놓고 보면 시로네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기에 설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친구는 아니지만 페르미의 어머니가 아니던가.
“그래요, 시로네. 여기에는 어떻게 들어왔죠?”
시로네는 그제야 욜가가 여전히 핵심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워낙에 천진난만하여 지금의 상황조차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 차리자.’
어쨌거나 이제부터는 신중한 문제였다.
헥사가 자신이라는 걸 깨달은 지금 욜가 일행 또한 그의 목숨을 노리는 적이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군요. 괜찮아요. 저에게 말해 주지 않겠어요?”
‘뭐지, 이 사람?’
미로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당신은 나를 알고 있군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몰라요. 어쩌면 미래에서 온 사람일 수도 있겠죠. 시간의 폐곡선이 다시 열렸다면 말이에요.”
아직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욜가는 계속해서 핵심으로 파고들어 갔다.
마치 그녀의 목소리가 드릴이 되어 정신을 파먹으며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괜찮아요. 당신을 해치려고 묻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정말로 미래에서 왔다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처음으로 욜가와 시선을 마주친 시로네는 심장을 관통하는 전율과 함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구나. 이 사람도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어.’
욜가가 물었다.
“저는 이곳에서 죽나요?”
시로네는 얼마나 오랜 시간 입을 다물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그럼에도 영원히 감출 수는 없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네.”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욜가라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분명 제가 사는 미래에 당신은 없어요.”
“그렇군요. 반대로 말하자면 미로가 결국 해낸다는 거네요.”
예상과 달리 욜가는 실망스러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을 알고도 어떻게 이토록 태연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으나 시로네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이대로 멈춰 줄 수 있나요?”
욜가가 생각에서 벗어났다.
“멈춘다는 것은?”
“미로 씨는 훗날 이 세계를 구원해요. 완벽한 승리는 아니지만, 그녀의 판단은 옳았어요.”
헥사의 죽음과 상관없이 시로네는 사실 그대로를 전했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욜가와 달리 무스탕의 얼굴이 붉어졌다.
“흥, 그건 미로의 미래일 뿐이잖아. 욜가라면 천국과의 전쟁을 끝낼 수도 있을 거야.”
에드가와 나인의 눈에도 같은 감정이 담겼다.
‘거핀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설령 떠난다고 해도 구원자는 욜가가 되어야 해.’
욜가라면 분명 인류 대통합을 이루어 내서 전력으로 천국과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의 왕이 될 자질을 가진 재목이 그녀이기 때문이다.
“좋아요, 시로네.”
욜가는 좋은 사람이었기에 시로네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이 세계가 또다시 위험에 처한 건가요?”
정확한 답변은 아니지만 역시나 욜가의 통찰력은 비범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답변해 드릴 수 없어요.”
미래를 깨달은 욜가가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상층부의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이게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죽음은 이미 각오한 일이에요. 대신에 한 가지 부탁을 드릴게요. 저를 미로에게 데려다주세요.”
“미로 씨에게요?”
“네. 그리고 당신이 저와 미로를 비교하는 겁니다. 이 세계를 위해 누가 남아야 하는 것인지.”
“하지만 저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아뇨. 당신은 미래에서 왔어요. 또한 당신의 판단에 미로가 저보다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욜가는 언제나 진심만을 말한다.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욜가! 그게 무슨 말이야!”
동료들이 일제히 소리쳤으나 그녀는 확고했다.
“저 또한 이곳에 오면서 각오를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거핀은 아직 우리에게 필요해요. 그리고 미로는 제가 사랑하는 동생이죠. 미로가 후계자가 되면, 그녀가 사랑하는 모두가 고통받을 거예요.”
미로를 제외한 가문의 모든 일족이 은밀하게 척살당한 사실은 19년 뒤에는 더 이상 비밀도 아니었다.
“어때요? 이 세계를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 줄 수 있나요?”
“저는…….”
시로네는 머뭇거렸다.
헥사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니 거절을 해야 하는 게 맞지만, 욜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생명조차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욜가는 진심이야.’
99.99퍼센트도 아닌, 100퍼센트의 진심에는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알았어요. 제가 판단할게요.”
어쩌면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게 헥사의 미래를 위해서도 훨씬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미로는 어디에 있죠?”
“제가 알아요.”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에 있을 것이다.
사건이 어떻게 뒤틀릴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미로가 그곳에 반드시 오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시간 : 0시 32분.
공간 : 이스타스 71번 창고.
“샅샅이 수색해라! 전부 흩어져!”
화성의 대장 니켈의 지시에 따라 1조부터 4조의 병력이 물이 갈라지듯 나뉘었다.
“제길! 우리가 제일 위험하잖아!”
1조의 조장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최정예라고 띄워 주기는 하지만 결국 1조가 칼받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2층에서 다시 집결한다!”
7명의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루캉도 자신이 전담하기로 되어 있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뭐야?”
동료들과 헤어져 다음 창고로 넘어가는 순간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라이컨이 불쑥 나타났다.
‘적인가?’
루캉이 반사적으로 주 무기인 사슬낫을 휘두르자 파직 소리를 내며 라이컨이 순식간에 측면으로 이동했다.
‘마법사다. 전기 계열. 누구지?’
실력이 제법이었다.
곧바로 정지 자세를 취한 루캉이 사슬을 휘돌리며 낫을 사선으로 세웠다.
“정체를 밝혀라.”
‘젠장,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라이컨은 짜증이 치솟았다.
페르미가 지정한 창고의 금고에 를 넣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스타스의 구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들하고 싸우는 건 수지가 안 맞아.’
화성이라는 부대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지만 페르미의 얘기를 들어 보면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라이컨은 허리춤에 착용한 단도를 꺼냈다.
은색 칼날이 전기를 머금는 것을 본 루캉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암살자다.’
그것도 마법을 구사하는 암살자.
“건방진 놈.”
루캉 또한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재능이라면 남에게 뒤처진 적이 없는 실력자.
각자의 장기가 극명한 두 사람이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등골이 서늘한 공격이 이어졌다.
사슬낫이 자연의 이치를 따라 궤적을 바꾸고, 라이컨의 전격으로 창고가 번쩍거렸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 포화 상태에서 라이컨의 비수가 날아와 벽에 박혔다.
스키마의 감각 기능을 최대로 발동한 루캉이 절묘한 무브먼트로 라이컨의 후미를 잡았다.
‘끝이다.’
규격에 딱 맞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베기가 라이컨의 뒷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