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22
‘확실히 굉장한 실력이다. 하지만…….’
라이컨의 복면 안쪽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너무 구식이야.’
본래라면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일격이지만 19년 전 암살자의 정석이라면 라이컨에게는 철이 들 때부터 배워 왔던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자 루캉의 낫이 뒤통수를 스쳐 지나갔다.
‘이거나 먹어라.’
라이컨의 전류에 반응한 단도들이 모조리 뽑혀 나와 루캉을 향해 쇄도했다.
폭발하는 전격에 창고가 흔들리고,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루캉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같잖은 재주를…….”
이미 라이컨의 모습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제길! 소집 시간에 늦었잖아!”
이미 다른 동료들은 전담 구역을 수색하고 2층에 도착했을 터였다.
하지만 라이컨과의 전투로 유예된 이 15분의 시간이, 결과적으로 그의 목숨을 살렸다는 것을 루캉은 아직 알지 못했다.
시간의 큐브 (1)
시간 : 1시간 57분.
공간 : 이스타스 9번 창고.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내부를 살핀 안찰은 이스타스의 조종 장치에 걸터앉아 초조한 듯 발을 까닥거렸다.
시간이 무한히 순환된다면 기관 장치를 작동시킨 사람 또한 다시 이곳에 온다는 얘기였다.
“이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안찰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을 깨달았다.
현재 이 방의 사건이 이미 이스타스가 옮겨진 시간대에 있다면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을 터였다.
‘이미 사건이 뒤틀린 다음이니까.’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안찰이 출입구로 성큼 걸음을 옮기는데 시로네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로네?”
“안찰!”
시로네는 그녀를 보자마자 뛰어왔다.
“아직까지 여기서 기다린 거야?”
“아니, 이제 도착했어. 어떻게 된 거야?”
시로네는 입술을 깨물며 조종 장치로 걸어갔다.
“실패했어. 사건이 계속 바뀌어서 도저히 막아 낼 수가 없어.”
“무슨 소리야?”
시로네와 헤어지고 곧장 이곳으로 온 안찰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제길! 어떡하면 되지? 대체 어떻게 해야…….”
거침없이 기관 장치를 작동시키는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스타스가 진동하자 안찰이 황급히 말렸다.
“뭐 하는 거야? 사건을 뒤틀면 위험하다고 했잖아.”
“어차피 전부 죽어!”
시로네가 버럭 소리쳤다.
“되돌려야 돼.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해. 나는 아직 아무 사건도 접하지 못했어.”
시로네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실수야. 처음부터 욜가를 미로와 만나게 하는 게 아니었어.”
“뭐?”
여전히 안찰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
“저기예요.”
시로네는 이스타스의 방정식을 참고하여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페르미가 활성화시킨 거핀의 문이 우뚝 서 있었다.
‘미로 씨는 아직 오지 않은 건가?’
“시로네.”
그때 미로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시간 : 1시간 48분.
공간 :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
시로네가 말을 하기 전에 욜가가 나섰다.
“미로야,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너와 나 사이에 싸울 일이 뭐가 있어?”
“얘기는 아까 끝난 것으로 아는데? 다시 한 번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언니라도 손을 쓸 수밖에 없어.”
욜가의 동료들이 코웃음을 쳤다.
“우리는 핫바지로 보여? 고집을 부린다면 죽는 건 너야.”
“허접은 빠져. 욜가와 이야기하는 중이니까.”
미로의 도발에 에드가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기계 팔이 굉음을 내며 실린더를 왕복시켰다.
“지금 해보자는 거지?”
에드가가 튀어 나갔다.
“평소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고! 지금 당장 죽여 주마!”
미로가 관음의 화신을 발산하는 순간 시로네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비켜, 꼬맹아!”
아르망의 로브가 펄럭이면서 촉수가 빠른 속도로 휘둘렸다.
“뭐야!”
카카카카캉!
에드가의 기계 팔이 잔상을 일으키며 방패처럼 몸을 가렸다.
막아 내기는 했지만 2미터의 거구가 서 있던 자리까지 밀린 상황이었다.
“크으으으!”
금속질의 팔을 타고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에드가, 괜찮아?”
무스탕이 시로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저 녀석, 보통내기가 아니야.”
시로네가 촉수를 끌어들이며 말했다.
“욜가, 약속했잖아요.”
“그래요. 약속은 지킬 것입니다.”
미로가 코웃음을 쳤다.
“시로네, 욜가의 말은 듣지 마. 너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테니까.”
미로의 말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은 소멸하고 말 터였다.
“알잖아요,. 이미 결과가 뒤틀린 거. 미로 씨가 욜가 씨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대요.”
그제야 미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욜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녀였으니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도 끼어도 될까요?”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에 시로네가 문을 돌아보자 미로의 옆에서 페르미가 들어왔다.
“너…….”
시로네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욜가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본능적인 이끌림이었고, 페르미의 눈동자도 잠시 흔들렸다.
“장사꾼입니다. 이곳에서 돈 냄새가 심하게 나서요.”
하지만 그는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단지 감상에 젖어 모자 상봉이나 하려고 이스타스의 상층부를 개방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 그리고 미래.
그는 이 공간 이 시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가장 냉철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냉철하게. 냉정하게.’
“반가워요. 욜가라고 해요.”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페르미는 악수를 마치고 어릴 때 삼촌, 이모라 부르며 따랐던 에드가와 나인, 무스탕에게도 눈인사를 했다.
“페르미를 닮았군.”
무스탕의 중얼거림에는 뼈가 있었으나 욜가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잡다한 소리 할 필요 없어.”
미로가 단호하게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어떤 거래도 안 해. 임무를 방해하면 죽인다.”
“미로, 이건 너답지 않아.”
욜가가 다가오자 관음의 화신이 수십 개의 팔을 뻗어 접근을 막았다.
“욜가 언니, 날 이해해야 돼. 이곳에 따라 들어온 건 유감이지만, 그래도 나는 멈출 수 없어.”
“너의 행동은 결국 모두를 파멸로 이끌 거야. 아드리아스 가문도, 아르디노 가문도.”
욜가는 이미 훗날의 일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했잖아. 난 거핀의 뒤를 이어서 장벽을 지킬 거야. 당장은 그거면 돼.”
“어떤 이유도 결과보다 앞설 수는 없어. 내가 책임질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몰라도 내가 해결할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으면 이러지도 않아.”
“그러니 말을 하란 말이야!”
욜가가 소리쳤다.
“그 아이는 뭐야? 거핀은 왜 떠나려는 거야? 어째서 나에게는 말해 주지 않는 거야?”
“미안.”
미로는 욜가에게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냥 죽어 줘.”
천수관음의 화신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면서 욜가를 내리찍었다.
쾅 하고 바닥이 흔들리고, 사방으로 흩어진 욜가의 동료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냈다.
“미로를 공격해!”
“아니, 괜찮아.”
욜가의 목소리에 미로의 눈썹이 꿈틀했다.
반야-성聖 마리아.
욜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로 천수관음의 시공간을 무시한 폭격을 받아 냈다.
‘이것이 어머니의…….’
페르미는 욜가의 위로 드러난 화신을 올려다보았다.
얼굴과 몸통만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 천장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고 피눈물이 흘렀으며 입에는 쇠사슬의 재갈이 묶여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가 세상을 어디까지 아래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짐작이 갔다.
‘짜증 나.’
미로에게도 욜가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적으로 만났을 때는 어떤 충격도 흡수해 버리는 성 마리아의 화신이 세상에서 가장 껄끄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로야.”
욜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부탁할게. 이번 한 번만 내 판단을 믿어 다오.”
욜가가 손을 무릎에 대고 깊숙이 고개를 숙이자 미로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이러니까…….”
관음의 화신이 더욱 거대해졌다.
‘언니는 안 된다는 거야!’
천수관음-격타.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난폭한 공격에 욜가의 몸이 흔들리고 성 마리아의 눈에서 더욱 굵은 피눈물이 흘렀다.
“보자 보자 하니까!”
나인이 검을 꼬나쥐고 미로를 향해 돌진했다.
“흥! 같잖은 게…….”
미로가 반격을 하려는 그때, 시로네가 날아와 나인을 후려쳤다.
4개의 촉수가 연달아 검을 강타하자 나인의 몸이 벽에 처박혔다.
“크윽!”
“약속을 어기는 건 용납 못 해.”
바통을 터치하듯 에드가가 시로네에게 뛰어들었다.
“멍청아! 공격은 미로가 먼저 했어!”
금속 주먹을 맞부딪치며 돌진하는 권사의 스키마는 탁월했고, 시로네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에드가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르망은 찾을 수 있어!’
망막 잔상에 담긴 이미지를 아르망이 전달하고 몸을 뒤트는 그때, 수십 개의 주먹이 동시에 날아드는 잔상이 보였다.
카카카카캉!
로브를 쳤는데 금속성이 터지자 에드가의 눈이 치떠졌다.
“대체 뭐야, 이게!”
링거의 갑피로 몸을 보호한 시로네가 물러서며 포톤 캐논을 압축시켰다.
폭발하듯 부푸는 빛의 구체에 놀랄 겨를도 없이 섬광이 연달이 퍼부어졌다.
“우오오오!”
에드가는 두 팔을 휘둘러 포톤 캐논을 튕겨 냈으나, 충격을 접하는 순간 깨달았다.
‘이런 무식한……!’
빛에 물리력이 있다.
그것도 자신의 두 팔이 박살 날 정도의 위력으로.
콰르르르릉!
벽까지 밀린 에드가의 몸이 섬광의 폭격이 만들어 낸 연무에 가려 사라졌다.
“크으으으!”
다시 모습을 드러낸 에드가는 완전히 몸을 웅크린 채로 팔뚝 뒤에 전신을 감추고 있었다.